소설리스트

53. 깊은 밤에 찾아온 여인. (53/459)

53. 깊은 밤에 찾아온 여인.2018.06.13.

1655068343069.png‘정말 에이스 플러시라는 말인가?’

당혹감으로 커다래진 레이의 눈동자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16550683430695.png“와아, 이건 크군요! 여기에서 올 인이라니! 사이온지 선생! 그 대담함에는 정말 두 손 들었습니다! 하하하하!”

우라사키가 혈색 좋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떠들어 대고, 시거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사이토 마코토는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165506834307.jpg“저놈은 말이지, 어리지만 진짜 남자야! 저 태연자약한 얼굴을 봐라! 누가 저놈을 보고 막 12만 원을 한 판에 털어 넣은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겠나? 하하하하! 가히 천하를 논할 그릇이로고!”

그는 선우진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이제 사이토 마코토에게는 이 포커의 승패 따위 크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핸슨이 데리고 온 본토의 챔피언이 흔들리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승리했다.

16550683430706.png“그렇군요. 역시 승부를 걸 줄 아는 남자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대일본제국남아의 모범이라 평하는 것이 더 옳은 걸까요? 스스로 자신의 칩을 절반 덜어 내고 참가한 첫 판에서 그것을 모두 레이즈로 던진다니……. 이 기백은 참으로 국사무쌍!”

미우라도 찬양의 대열에 참여하며 넋두리처럼 길게 칭송의 말을 늘어놓았다. 구니토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16550683430711.png“기백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패 계산을 마치고 승리를 확신한 얼굴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만.”

16550683430716.png“아니, 그게…… 사이온지 군은 늘 승리를 확신하기는 합니다. 제가 그래서 사이온지 군을 좋아하지요. 정말로 이기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 문제지만…….”

선우진을 향한 기대가 너무 커지는 것이 도리어 부담스러워진 다카하시가 조심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165506834307.jpg“푸하하하하! 그 무슨 소리인가, 다카하시 사장! 오늘 가장 많은 칩을 딴 사람한테, 하하핫!”

사이토 마코토가 화통하게 웃어 댄다. 방 안을 채우는 그 소란스러운 웃음과 웅성거림은 레이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감각을 차단한 채, 오직 자신의 눈과 뇌만을 활성화시켜 선우진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1655068343069.png‘정말 플러시냐? 아니면 그저 블러핑인 거냐? 드러내 봐라, 일본인!’

선우진의 눈빛과 입매, 손짓과 호흡을 살펴보면서 레이는 그를 읽어 내려고 애썼다. 물론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탐색을 해 봐도 선우진의 표정에 드러나 있는 것은 자신감뿐이다. 선우진의 얼굴은 변함없이 평온하고,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리는 그의 손가락들은 안정적이다.

16550683430728.png‘떨릴 테지. 왜 3만 원이나 먼저 베팅을 한 것인지 후회도 되고 말이야.’

칩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끝을 보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자기 패만 보고 베팅을 하는 하수에게는 절대로 먹히지 않을 블러핑이지만, 상대가 전문 도박사이기에 선우진의 이 한 수는 아프게 파고 들어가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대는 데 성공했다.

16550683430728.png‘체크 후 레이즈 전략을 계속 썼더라면 좀 더 안전했을 것이라 자책하고 있나? 하지만, 이 세상의 누가 6구째에서 이미 플러시를 완성시키고 그냥 체크를 하려 들겠나. 언제 또 그렇게 좋은 패가 만들어질지 모르는데, 한 푼이라도 더 긁어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

1655068343069.png‘……이 판이 플러시 대 플러시의 대결이었던가? 플러시 대 에이스 페어의 대결이 아니고?’

레이는 커뮤니티 카드 네 장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이 판의 베팅 과정을 복기했다. 스페이드의 9, 스페이드의 7, 클로버의 에이스, 그리고 스페이드의 잭. 프리 플롭 두 장을 받았을 때 선 베팅이었던 그녀는 만 삼천 원을 걸었고, 선우진은 콜을 했었다. 그 다음 개봉된 세 장의 카드 중 두 장이 스페이드였을 때, 선우진은 그녀의 체크에 맞서 2만 원을 던져 넣었다.

1655068343069.png‘저 남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스페이드의 에이스와 또 다른 스페이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가설의 가능성이 꽤나 높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655068343069.png‘그래……. 저 일본인은 이미 에이스 페어에 네 장의 스페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 어느 쪽으로도 자신이 질 확률이 거의 없다는 계산이 완성되었던 거지.’

레이는 뒤늦은 후회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턴 카드에서 모습을 보인 잭과 선우진의 올 인 레이즈. 이 모든 것들이 논리적으로 다 들어맞는다.

1655068343069.png‘……당했다. 왜…… 저 남자의 손에 든 에이스의 무늬가 무엇일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 자신의 패가 트리플일 가능성까지 염두에 넣은 저 남자는, 리버 카드로 게임을 끌고 가지 못하도록 6만 원 가까운 돈을 이용해 윽박지른 것이다. 만약 플러시끼리의 맞대결이라면 에이스를 쥐고 있는 쪽이 이기게 되니까, 지금 저 남자에게는 아무런 위험부담도 없다. 하지만…….

1655068343069.png‘정말로 플러시가 맞기는 한 걸까? 나의 플러시 핸드를 향해서 저렇게 올 인을 해 오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스페이드 에이스는 쥐고 있는 것 같지만……. 또 한 장의 손 패 역시 스페이드라고?’

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선우진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자신의 실수를 자인한 뒤에도 이렇게 고통스러운 고뇌를 길게 이어가고 있는 것은, 선우진의 이 올 인이 완전한 블러핑일 가능성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1655068343069.png‘……그냥 받을까? 이미 6만 원이 넘는 액수를 베팅한 판에서 기껏 플러시를 만들어 놓고 내 스스로 패를 꺾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본능적인 욕심이 그녀의 마음을 변덕스럽게 어지럽힌다. 그 역시 일견 타당한 논리이기는 하지만 레이가 섣불리 콜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녀 자신의 위상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언뜻 공평하게 보였던 두 사람의 대결은, 심리적으로 보자면 사실 전혀 공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각자 짊어지고 있는 무게들 간에는 처음부터 아주 큰 차이가 존재했다. 레이는 지금 개인 자격으로 오늘의 게임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전문 도박사이자 뉴욕의 챔피언으로서 미국을 대표하고 있다. 그녀의 패배는 미국 포커의 패배이고, 그런 결과가 나오면 핸슨 영사는 대단히 실망스러워할 것이다. 패배한 도박사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반면에 선우진에게는 아무런 리스크가 없다. 만약 올 인 쇼 다운에서 그가 패배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저 빙긋 웃으며 재미있었다고 손뼉을 친 뒤 일어나 버리면 그만이다. 그는 승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전문 도박사가 아니니까. 포커에서 지더라도 부유한 귀족 젊은이라는 선우진의 신분에는 조금의 흠결도 생기지 않는다. 전문도박사와 격돌하여 박빙으로 겨뤘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평판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리라……. 그 훈장이 조금 더 고고하게 반짝일 수 있도록, 젊은 일본인 귀족은 미리 자신의 칩을 절반으로 줄여서 참가했다.

1655068343069.png‘여우같은 놈…….’

엷은 미소를 지은 채 태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선우진의 얼굴을 보며, 레이는 가볍게 이를 갈았다. 지금의 이 베팅이 리버 카드가 아닌 6구째에 벌어졌다는 점 역시 그녀의 마음을 한층 더 무겁게 압박하는 요소다. 만일 선우진이 스페이드 에이스 한 장만을 쥔 채 블러핑을 한 것이라 해도, 아직 그들에게는 한 장의 공유 카드가 더 남아 있다. 만일 레이가 올 인을 받았다가 7구째인 리버 카드로 아무 스페이드든 한 장이 툭 떨어지면, 그 순간 그녀는 패배하게 된다. 충분히 콜을 할 만한 패였다거나, 패 계산에서는 오히려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거나 하는 변명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포커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게임이고, 패자의 변명 따위에는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1655068343069.png‘일곱 장…….’

딜러가 손에 쥔 카드 덱을 바라보며 레이는 생각했다. 만약 선우진의 에이스 플러시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면, 저 카드 덱 안에는 현재 총 일곱 장의 스페이드 카드가 남아 있다. 번으로 사용된 두 장을 포함해 이미 사용된 카드가 열 장. 그렇다면 남은 42장의 카드 중에 일곱 장이 스페이드라는 의미다. ……6분의 1 확률, 17퍼센트. 상대의 올 인을 블러핑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아직 17퍼센트나 되는 패배의 확률이 여전히 남았다. 그만큼의 우연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방관할 것인가? 그런데 그녀는 서로의 패를 공개하는 쇼 다운에서 아직 한 번도 선우진을 이겨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오직 선우진 스스로 패를 꺾은 판에서만 승리했을 뿐이다. 그것이 그녀를 주저하게 만드는 또 다른 두려움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압도적인 제약이 존재했다. 그 누구에게도 공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은 제약이.

1655068343069.png‘이 판을 포기한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직 6만 원 가까운 돈이 남는다.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면 충분히 역전할 수 있어. 침착함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오래된 나무 인형을 손가락 끝으로 쓸며 고민하던 레이는 결국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물러서는 쪽을 택했다. 포커는 좋은 패를 쥐고도 꺾을 줄 알아야 하는 도박이다. 그것이 그녀가 도박사로 깎이고 다듬어지는 동안 수없이 주입받았던 격언이고, 오늘 그녀는 그 가르침을 따르려 한다.

1655068343069.png“폴드!”

레이는 고통스러운 어조로 패배를 선언하고 카드를 던졌다.

165506834307.jpg“어허! 여기에서 꺾다니! 이 여자 도박사도 보통내기는 아니야, 냉철해! 핸슨 영사!”

사이토 마코토는 호들갑스럽게 패자를 칭찬함으로써 승자인 선우진의 권위를 더욱 높였다. 조금 전부터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든 핸슨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16550683484612.jpg“총독 각하. 지금 그렇게 좋아하시면 이따가 저 젊은 귀족 도박사 분이 패배했을 때, 공연히 더 민망해지실 것 같습니다.”

165506834307.jpg“착각하고 있군, 핸슨! 저놈은 도박사가 아니야!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이 가장 아끼는 조카다!”

사이토 마코토가 또 턱도 없는 소리를 한다. 조카라니……. 포커를 좀 잘 친다고 해서 어느새 일족의 젊은이가 4촌 이내의 관계로 승격되어 버렸다. 사이토 마코토는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06834307.jpg“그리고 어제 막 텍사스 홀덤을 배운 완전한 초보지.”

16550683484612.jpg“설마요! 아…… 총독 각하, 이러지 마십시오. 그런 식의 거짓을 동원한 심리전은 너무 말초적이고 비신사적입니다. 누가 봐도 귀족 도박사이잖습니까, 스기우라 공작과 비슷한 부류의.”

핸슨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그 엄청난 도발을 듣고도 레이는 아무 대꾸 없이 묵묵히 칩을 정리했다. 그녀도 당연히 사이토 총독이 허풍을 치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텍사스 홀덤의 베팅을 이렇게나 정교하고 교묘하게 이용하는데, 이제 겨우 이틀째인 초보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1655068343069.png‘지나간 패배에 집착하지 마. 지금부터 다시 승리하면 돼. 6대 18의 칩 격차 정도는 두 판을 이기면 바로 뒤집을 수 있어.’

레이는 선우진을 쏘아보는 것으로 전의를 불태우며 자신을 다독였다.

16550683430728.png‘현명해. 하지만 승부사의 태도는 아닐세, 레이.’

다시 수북하게 쌓인 자신의 칩 너머로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선우진은 싱긋 웃었다. 100퍼센트의 승리가 아니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그녀의 결기는 꺾였다. 이제부터는 공포가 점점 더 크게 번지면서 그녀의 시야를 가릴 일만 남아 있다.

16550683430728.png‘패배할 확률이 전혀 없이 상대와 마주 레이스를 하는 패가 하룻밤에 몇 번이나 들어오겠는가? 승리의 가능성이 두 배 이상 더 높다면 승부를 걸었어야지.’

스몰 블라인드의 참가비 2천 원을 던지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참가비가 5천 원. 6만 원도 채 온전히 남지 않은 그녀에게는 그 역시 부담이 되는 액수이고, 그래서 이번 판에는 어지간하면 콜을 하고 따라 들어올 수밖에 없다.

16550683484612.jpg“스몰 블라인드인 사이온지 님부터 베팅해 주십시오.”

프리 폴롭 패를 돌린 딜러가 말했다. 선우진은 블라인드 베팅 액 차이인 3천 원에 5천 원을 더 얹어 테이블 중앙으로 던졌다.

16550683430728.png“레이즈 5천 원.”

1655068343069.png“패를 확인하지 않고, 레이즈라고?”

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선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프리 플롭 카드를 두드렸다.

16550683430728.png“이미 흐름이 넘어왔는데, 패 확인이 다 무슨 소용이오? 내 장담하건대 레이 양은 패를 꺾을 겁니다.”

1655068343069.png“흥!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군.”

콧방귀를 뀐 레이는 신중하게 자신의 손 패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곧바로 실망감이 스쳐 갔다. 이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잭 이하의 패 정도가 아닐까.

16550683430728.png‘당연한 거야, 레이. 좋은 손 패가 들어와 줄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 그래서 바로 전 판의 플러시를 놓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고. 자……. 운에 기댈 생각하지 말고, 머리로 승부하시게. 당신의 베팅 기술을 모두 발휘해 보란 말일세.’

자신의 카드를 예의 그 나무 인형으로 눌러 놓은 채 고민에 빠진 레이에게 선우진이 눈빛으로 전언했다.

1655068343069.png‘받아야 하나……. 그렇다면 또 5천 원이 나간다. 상대의 패가 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데……. 가기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플롭 카드가 열린 뒤에 이어질 베팅은 어떻게 받지?’

레이는 손가락 끝으로 초조하게 나무 인형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손 패로는 꺾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저 젊은 귀족 남자의 예언을 실현시켜 주고 싶지 않다.

16550683508827.jpg

1655068343069.png“콜!”

레이는 결국 던지지 말아야 하는 5천 원을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사이온지라는 저 젊은 귀족의 밉살스러운 예측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욕심이 더 컸다.

1655068343069.png“자, 이제 뭐라고 할 건가? 미스터 사이온지. 내가 패를 꺾을 것이라던 당신의 예언은 틀렸어.”

딜러가 플롭 카드를 공개하기 전, 레이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선우진은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읽어 낼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대꾸했다.

16550683430728.png“내 예언은 내가 패를 확인하기 전에 그대가 폴드 할 것이라는 거였소, 레이 양. 프리 플롭 베팅이 끝났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정 그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내가 패를 확인하도록 만들어 보시길.”

1655068343069.png“……뭐라고?”

허점을 찔린 레이가 주춤하는 동안, 딜러는 세 장의 커뮤니티 카드를 오픈한 후 나란히 늘어놓았다. 다이아몬드의 5, 클로버의 킹, 클로버의 퀸. 새로 공개된 플롭 카드들을 바라보며 레이의 얼굴엔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도박사답게 이내 눈을 부릅뜨는 것으로 공포를 감춰 보려고 했지만, 선우진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6550683430728.png“만 오천!”

한 장의 페어조차 갖지 못한 레이를 향해, 선우진의 베팅 공격이 이어졌다. 여기에서 만 오천을 더 콜했다가는…… 이제 베팅할 수 있는 돈이 3만 원밖에 남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칩이 다시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위기를 맞자, 레이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1655068343069.png“후우우……. 내 칩이 적게 남은 걸 이용하려는 것인가?”

레이가 물었다. 그녀의 말속에 치사하다는 원망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83430728.png“칩의 차이를 이용한 베팅은 엄연히 포커의 주요 전략이오, 레이 양.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소? ……게다가 나에게는 예언을 실현시켜야 하는 책임도 있고.”

1655068343069.png“……폴드!”

레이는 이를 빠득 갈며 자신의 패를 딜러에게 던졌다. 이 귀족 남자와 알량한 자존심 놀이를 하느라 소중한 칩을 더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655068343069.png‘아직! 아직이다! 레이, 초조해하지 마! 반드시 한 번의 기회는 온다! 그때까지 기다려! 쓰디쓴 쓸개를 핥는 구천의 심정으로! 그때 승자의 위치에서 저놈을 마음껏 비웃어 주면 돼!’

레이는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계속 승리와 복수의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그녀가 기다리던 그 반전의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고, 세 판이 더 지났을 때 그녀의 칩은 모두 선우진의 앞으로 옮겨가 있었다.

1655068343069.png“즐거운 게임이었습니다…….”

마지막 올 인의 승부마저 선우진의 승리로 끝을 맺자, 레이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이 된 채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16550683430728.png“저도 즐거웠습니다. 오늘은 제가 운이 좋았군요.”

선우진 역시 정중하게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의 그 도발적인 태도는 이미 깨끗이 사라지고, 멋진 귀족 젊은이의 모습만이 남았다.

16550683484612.jpg“멋진 게임이었습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다음번엔 레이 양과 단둘이 맞대결을 해서 정말 공정한 승부를 해 봤으면 좋겠군요. 이렇게 투우처럼 여러 명이 레이 양 한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고 말이죠.”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핸슨은 끝까지 온갖 핑계를 댄 뒤에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1655068343069.png“아…….”

나무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선우진을 바라보는 레이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입술은 뭔가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몇 번이나 조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16550683430728.png‘흐음……. 최면술의 비결이 뭔지에 대해 물어보려 했는데……. 저 태도를 보니 굳이 지금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겠군.’

그녀의 마음을 읽은 선우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몹시 흥분하고, 아주 기분 좋게 취한 사이토 마코토가 그의 등짝을 세게 후려친다.

165506834307.jpg“이 자식! 네놈은 진짜! 여기에서 네놈이 이길 줄은 몰랐다! 하하하하! 어제만 해도 텍사스 홀덤이 뭔지조차 모르던 녀석이 말이지!”

16550683430728.png“……윽! 이 매운 손길이 총독각하께서 약속하셨던 선물입니까? 이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이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선우진이 너스레를 떨자, 사이토 마코토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165506834307.jpg“와하하하하! 이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하는 여유 좀 보라고! 하하하! 아직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어! 아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파티다! 파티를 열자! 미국 영사가 저런 얼굴로 도망 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하하하하!”

제네바 군축 회의에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끌려다녀야 하는 그로서는, 모처럼 공개적으로 미국의 정부인사에게 한 방을 먹인 것이 한없이 시원해서 못 견디겠는 모양이다.

16550683430728.png“허락해 주신다면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총독 각하께서 베푸시는 연회에 이렇게 다 구겨지고 땀에 젖은 옷을 입은 채 참석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선우진은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고, 특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16550683565525.png“어떻게 됐느냐, 조선인 애송이? 이겼나? 총독의 환심을 샀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바바가 그를 보자마자 묻는다. 선우진은 대답 대신에 문을 가리켰다.

16550683430728.png“음, 나중에 이야기해 줄 테니 일단 좀 자리를 피해 다오, 바바. 조금 뒤에 누가 오기로 되어 있다.”

16550683565525.png“누가 온다고? 누굴 말하는 거냐, 다카하시 사장의 딸?”

16550683430728.png“아니, 메구미 양은 아니다.”

16550683565525.png“……설마 또 다른 여자인 거냐? 이 바람둥이 호색한!”

바바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렸을 때,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딱-! 선우진은 손가락을 튕겨 바바에게 문을 열어 주라는 신호를 보냈다.

16550683565525.png“네! 네! 갑니다!”

바바가 떨떠름한 얼굴로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굳은 표정의 레이가 서 있었다. 바바의 어깨 너머로 선우진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가 물었다.

1655068343069.png“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미스터 사이온지?”

16550683590406.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