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조선의 미래를 구할 남자. (58/459)

58. 조선의 미래를 구할 남자.2018.06.30.

사이온지 유우야, 이 남자가 죽어야 한다니……. 사진을 들고 바라보는 김성옥의 눈앞에 그의 얼굴이 떠올라 스쳐 지나간다. 비록 이 낡은 사진 속의 인물은 콧수염을 길렀지만, 콧수염 정도야 언제든 깎을 수도 있고 또 기를 수도 있다. 이 멀끔한 외모, 양복을 갖춰 입은 훤칠한 모습, 그가 틀림없다. 하긴……. 일본의 막후 긴모치와 같은 사이온지 가문의 젊은이라고 했으니, 척살 대상에 올랐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쩌면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리한 두뇌를 이용해서 조선 착취의 선봉에 서 있는 자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 빚을 갚지 못한 김성옥으로서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져 왔다.

16550684622823.jpg‘아니…….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감정과는 무관한 일이다.’

김성옥은 이내 납득하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지금 조선과 일본은 전쟁 중이다. 개인들 간의 은원 같은 것은 전쟁의 커다란 조류 앞에서 작은 티끌에 불과하다. 그런데…….

1655068462283.png“후후후! 아니, 아닙니다. 그 사람은 우리 어별교의 총감이었소.”

이일석이 쓴 웃음을 지으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김성옥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일석도 박기홍도 모두 진지하다.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다.

16550684622823.jpg“……일본인 화족이 어별교의 총감이라고……?”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웅얼거리던 김성옥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설마…… 이 친절한 동지들이 일본군의 앞잡이들이었던 말인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또 이들을 향해 총격전을 벌여야 하는 건가?

1655068462283.png“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구려, 일본인 화족이라니. 그런 실례의 말씀은 자제해 주시오.”

이일석이 그의 손에서 사진 액자를 빼앗으며 단호하게 일침을 놓는다. 김성옥은 고개를 저었다.

16550684622823.jpg“동지들, 정말로 모르는 거요? 그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는 사이온지 유우야. 일본의 화족이고, 인천부에서는 사교계의 거물인 모양이더군요. 나는 불과 이십여 일 전에 그 사람을 조선에서 직접 만났소.”

16550684622847.png“킁, 킁! 아까 이 사람한테 고량주를 먹이기도 했소?”

박기홍은 김성옥의 입가에 코를 가져다 댄 채 냄새를 맡아보며, 이일석에게 물었다. 이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1655068462283.png“아니, 그냥 몸에 부었을 뿐이네. 모르지, 얼굴을 닦을 때 조금 입에 들어갔는지도. 그도 아니면 수수밭 근처만 지나가도 취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16550684622823.jpg“이것들 보십시오! 저는 술에 취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맨정신이라고요!”

돌연 주정뱅이 취급을 당한 김성옥은 얼굴이 빨개져서 도리질을 했다. 하지만 박기홍은 그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눈치다.

16550684622847.png“멀쩡한 맨정신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면 더 문제가 크구만요. 이 사람을 두고 사이온지…… 뭐라고 하셨소?”

16550684622823.jpg“사이온지 유우야…… 라고 일본 해군 장교들이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겉보기로는 어린 나이 같았지만 엄청난 거부인 모양이더군요.”

김성옥이 마지못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이일석은 또 쓴웃음을 지었다.

1655068462283.png“어린 나이라고 하니 우습구려. 이 사진은 찍은 지 이미 이십 년이 훌쩍 지난 거요.”

16550684622823.jpg“……이십 년이라고요?”

김성옥은 깜짝 놀라 사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액자 속에 들어 있는 데다 침침한 등불 아래에서 보는 것이니,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확실히 사진에서 세월의 흔적이랄까 연륜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일석이나 박기홍의 태도에는 전혀 장난기가 없다. 하지만 이 얼굴은 분명 사이온지 유우야다. 이 길고 서늘한 눈매, 이 짙은 눈썹, 이 입술, 이 오뚝한 코와 날렵한 턱 선까지……. 모든 것이 완전히 똑같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할 수 없다.

16550684622823.jpg“그렇다면 이, 이분은 지금 어디에……?”

김성옥이 물었다. 이렇게나 똑같이 생긴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에 둘이나 존재한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쏙 닮은 아들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조선인이 어떻게 일본인 귀족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

1655068462283.png“소천하셨소.”

이일석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을 때, 박기홍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684622847.png“그렇게 가 버리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분이었지요. 그 재주와 기백이…….”

16550684622823.jpg“돌아가셨다고요? 그게…… 언제 일이었습니까? 아니, 그 전에…… 이분의 함자를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 이분은 혹시 일본에서 생활하셨던 적이 있는지요?”

김성옥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1655068462283.png“……아!”

그제야 뭔가 깨달은 얼굴로 탄성을 터뜨린 이일석이 박기홍을 돌아본다.

1655068462283.png“설마…… 김성옥 동지가 말하는 것이 그 아이인가?”

16550684622847.png“그 아이라니?”

박기홍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일석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1655068462283.png“부총감이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 아이 말일세!”

16550684622847.png“에에…… 설마! 그런 괴력난신의 이야기를 믿는 것인가? 그것은 그저 현실이 너무 괴로워 부총감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네.”

1655068462283.png“하지만, 시기가 너무도 공교로워. 이 사진과 닮았다면 이제 이십 대 초반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이일석의 목소리가 기대로 떨렸다. 김성옥으로서는 여전히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16550684622823.jpg“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고 있는 겁니까? 이게 무슨 조화인지, 저는 그저 도깨비에 홀린 것만 같습니다.”

김성옥이 묻자, 이일석이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1655068462283.png“일단 조금 진정하시오, 김성옥 동지. 한 대 피우면서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 가 봅시다.”

치익-!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여 준 이일석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068462283.png“이 사진 속 남자와 꼭 닮은 사람을 보셨다고 하셨습니까?”

16550684622823.jpg“네에, 그렇소이다…….”

김성옥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눈빛에 호기심이 담긴 이일석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1655068462283.png“혹시 대화도 나눠 보셨소이까?”

16550684622823.jpg“그…… 그렇습니다.”

1655068462283.png“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6550684622823.jpg“아…… 그것이…… 일본인이었는데.”

김성옥의 말에, 이일석은 손사래를 쳤다.

1655068462283.png“아니, 국적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이의 됨됨이에 대해서 알고 싶소.”

16550684622823.jpg“됨됨이?”

1655068462283.png“그러니까 영리하다거나, 혹은 멍청하다거나…… 또는 약삭빠르다거나, 야비하다거나 하는 특징 말입니다.”

16550684622823.jpg“으음…… 그렇게 말씀하시면…….”

김성옥은 얼굴 가득 배어난 땀을 훔쳐 냈다. 어디까지 사실대로 털어놓아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아진다. 이일석이 그에게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1655068462283.png“그저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은 것이니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오, 동지. 우리들에게는 꽤나 중요한 문제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16550684622823.jpg“크으으!”

술병을 들고 한 모금을 들이켠 김성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수가 높은 술이 지치고 바짝 마른 식도를 타고 흐르자, 찌릿찌릿한 전기가 몸 안에 퍼지는 것만 같다.

16550684622823.jpg“솔직히 털어놓지요. 그는 저보다 훨씬 배짱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인을 칭찬하는 것이 어떻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으니까요.”

16550684622847.png“하하, 일당백의 기세로 인천부를 헤집었던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김성옥 동지나 다른 의열단 분들처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요.”

박기홍의 말을 들은 김성옥은 조금 놀랐다.

16550684622823.jpg“제가…… 인천부에 갔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16550684622847.png“양복 안쪽에 가게의 이름과 주소가 수놓아져 있더군요. 그리고 얼마 전, 인천부 청사를 폭파하려던 계획이 실패했다는 기사는 이미 읽은 바 있고 말입니다. 그 의열단원은 옆구리에 총을 맞은 상태로도 지붕을 타고 도주하면서 겹겹이 쌓여 있던 경찰의 포위망을 끝내 뚫어 냈다고 했으니까.”

박기홍이 양복에서 잘라 낸 천 조각을 내보이며, 김성옥의 옆구리에 시선을 던졌다. 그 긴박하고 짧은 시간에 참으로 꼼꼼하게도 일을 했구나 싶어 김성옥은 조금 감탄스러웠다.

16550684622823.jpg“물론…… 우리 의열단의 공약에도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는 약조가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약조를 가슴에 새긴 채 단의에 매진하는 것이,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배짱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그 남자 사이온지 유우야는…… 그것과도 또 차원이 달랐습니다.”

김성옥은 다시 한 모금의 고량주를 더 마신 후 말을 이었다.

16550684622823.jpg“제가 그의 뒤통수에 뜨거운 총구를 겨누고 인질을 삼으려 할 때조차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것이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냐고 물었지요. 그러고는 곧바로 더 좋은 수를 내더군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말을 더듬지도 않고 손끝 하나 떠는 일도 없었습니다. 내심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일본인이니까요.”

1655068462283.png“그렇군요…… 그럼 그 외에 다른 특징은?”

16550684622823.jpg“머리가 비상했습니다. 제게 남은 총알이 몇 발인지 눈치로 파악을 했고, 말도 상당히 달변이어서 이야기에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지요. 뭐…… 일본인에게 동정을 사서 살아남은 주제에,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해도 저로서는 딱히 변명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만.”

김성옥은 괴로운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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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의열단의 동료들이 지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면, 그는 상당한 비판에 내몰렸을 것이다. 단재가 말했듯 특권계급과 경제적 약탈자는 그 존재 자체로서 ‘파괴’의 대상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1655068462283.png“흐음…… 들으면 들을수록 비슷하군. 그렇지 않은가?”

팔짱을 낀 채 유심히 듣고 있던 이일석이 박기홍을 돌아본다. 박기홍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16550684622847.png“아아, 잘 모르겠소이다……. 똑같은 외모에 약관의 나이, 명석한 두뇌와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배짱, 거기에 달변가라니……. 그래, 거기까지만 들으면 그건 그냥 이십 년 전 총감의 환생이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선뜻 믿기지가 않네. 더군다나 김 동지의 말로는 일본인이라고 하지 않나? 그것도 그냥 평범한 신분도 아니라 화족이라는데…….”

1655068462283.png“그래도 부총감께 알릴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겨지네. 이런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말일세. 부총감께서는 총감의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만 했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는 말한 적이 없었네.”

16550684622847.png“아니, 설마…… 총감이 화족의 마누라를 꾀어서 자식을 낳기라도 했겠…… 아아!”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젓던 박기홍은 돌연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바꾸었다.

16550684622847.png“생시의 총감 외모와 말재주를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기도 하구려……. 귀족이든 황족이든 그저 홀려 버렸을 테지. 어쨌든 부총감이 계신 곳은 간도인데, 거기까지 이 소식을 알리러 가자고? 아이고 그러지 맙시다, 이 동지.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한 것도 아니지 않소?”

1655068462283.png“딴에는 옳은 말이군, 그러면 일단 우리가 직접 맞닥뜨려 보고 나서 판단을 하지.”

16550684622847.png“으응? 인천까지 가잔 말이오? 후우…… 가뜩이나 힘든 일도 많은데……. 오가는 배편을 또 어떻게 구하자는 건지 모르겠구려.”

박기홍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뭔가, 믿고 싶어 하는 눈치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저 아직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16550684622847.png“이보시오, 김성옥 동지. 그…… 사이온지라는 사람 말인데…….”

초조하게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박기홍이 힘들게 입을 뗀다.

16550684622847.png“줄곧 인천에 머물고 있는 것은 확실하오? 혹시 동지께서 만난 이후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거나, 조선의 다른 도시로 옮겨 갔다거나 하는 소문은 듣지 못하셨습니까?”

16550684622823.jpg“……글쎄요, 저 역시 그런 귀족들과 한데 어울려 살던 사람이 아닌 데다가, 그날 이후로는 계속 숨어 지냈기에 뭐라 장담을 하기는 어렵군요…….”

김성옥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들이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이쪽에서 먼저 캐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이 생명의 은인들에게 정보를 모두 털어놓지 않는 것처럼,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투쟁가들은 각자 비밀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일본군이라는 거대하고 잔혹한 적과 싸워야 하는 그들에게 기밀의 유지는 곧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655068462283.png“고맙습니다. 저희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김성옥 동지.”

두 사람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 후,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1655068462283.png“저분을 장제스 쪽과 연결시켜 드린 후에 우리도 곧바로 가 보세. 응? 배를 타고 하루면 닿을 거리 아닌가?”

1층에 내려온 이일석이 조용히 속삭인다.

16550684622847.png“아이고, 이 동지……. 좀 진정하시오.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고 싶겠소. 마음으로야 나도 얼마든지 가 보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조선말도 실컷 듣고, 조국의 흙도 밟아 보고 싶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만 공작금이 부족하니 망설이는 것 아닙니까. 우리 둘이 거기까지 밀항을 하고 며칠 머물다 돌아오려면 적어도 4, 50원은 들 텐데. 그걸 써 버리고 나면, 앞으로 우리 살림은 어떻게 합니까?”

박기홍이 안타깝다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이일석은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1655068462283.png“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고도 남는 일일세! 그가 총감의 아들이 맞다면, 그는 조선의 미래를 구할 사람이야!”

16550684622847.png“부총감의 말이 맞는다면 그럴 테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온전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요!”

박기홍은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인천까지의 뱃삯과 숙식 비용을 제외하면, 향후 몇 달이나 배를 주린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계산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에게도 역시 희망이 필요했다. ***

16550684762652.png“조선 총독이…… 당신 사업을, 그러니까 그 요양소인지 뭔지를 밀어주기로 했다고? 그게 정말인가, 젊은 선생?”

인천으로 돌아와 경성에서 겪은 일들을 들려주자, 야마다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재차 확인을 했다. 미츠코시 백화점 사장을 만난다고 갔던 사람이 갑자기 총독이라니…… 이건 일대 사건이다. 그것도 너무나 커다란 초대형 사건! 선우진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1655068476266.png“그렇습니다. 부지를 확정하면 역까지 새로 지어 준다고 하더군요.”

16550684762652.png“역을 신설해 준다고?”

야마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땅을 사 둔 곳에 역을 신설해 준다면 그 주변의 개발권을 통째로 독점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의미고, 일개 소규모 야쿠자 두목인 그로서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거대한 사업이다. 미츠코시 백화점의 상가 하나를 분양받아 물건을 파는 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16550684762652.png“그 정도의 특혜를 베풀어 주겠다니, 슬슬 무서워지는걸? 대체 초기 투자액을 얼마나 내라는 말인가? 100만 원? 아니면 200만 원?”

야마다는 입가를 쓸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아마도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의 총액을 암산으로 헤아리는가 보다. 선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1655068476266.png“우리 쪽에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은 이미 조선은행 신탁계좌에 입금을 마치고 왔습니다. 원래는 40만 원 가량을 넣으려고 했는데, 그 절반이면 충분하다고 하더군요. 나머지는 모금으로 충당할 거라고 하면서.”

16550684762652.png“얼마라고? 40만 원?”

1655068476266.png“아니, 그 절반이라니까요. 그러니 20만 원이지요.”

16550684762652.png“40이든, 20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잖나? 그만한 돈이 어디서 났다는 말인가, 젊은 선생?”

야마다로서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다카하시가 판돈을 댄다는 것은 알았고, 혹시 몰라 거금 3만 원을 쥐여 보내기는 했지만, 40만 원이라니……. 불과 이틀 만에 자산이 열 배가 넘게 불었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1655068476266.png“아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요. 내가 포커 판에서 땄습니다.”

선우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의 말투만 듣자면, 그저 만 원돈이나 딴 사람처럼 느껴진다. 야마다는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 내며 물었다.

16550684762652.png“자, 잠깐만……. 젊은 선생. 그…… 총독과 조선은행장, 미츠코시 백화점 사장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그 사람들 돈을 사정없이 땄다고? 그것도…… 겨우 이틀 동안 자그마치 30만 원을 훌쩍 넘겨서? 당신 미쳤나?”

이 이야기만 들으면 당장 사기도박꾼으로 몰려서 감옥에 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상대는 조선에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총독이다. 선우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1655068476266.png“아니, 첫날은 잃어줬다니까요. 그날은 다카하시 사장이 원하는 대로 우라사키 사장에게 다 잃어 줬습니다.”

16550684762652.png“그, 그럼…… 하루만에 35만 원을 넘게 땄단 말인가? 그런 강도 비슷한 짓을 했는데도…… 조선 총독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고?”

야마다가 묻자, 그때까지 곁을 지키고 서 있던 바바가 끼어들었다.

16550684790525.png“오야붕, 제가 가까이서 접견을 해 보니 총독각하는 돈 따위에 별로 신경 쓰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호방한 기세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하고, 그 당당한 체구는 말 그대로 바다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술을 드실 때에도 잔을 이렇게 잡으신 뒤 단번에…….”

16550684762652.png“……바바.”

야마다가 눈도 돌리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16550684762652.png“네놈의 평가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나는 지금 젊은 선생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 빠져 있어라.”

16550684790525.png“아! 아…… 네!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야붕!”

들뜬 마음으로 자랑을 해 보려던 바바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한다. 선우진은 바바를 가리키며 술잔을 기울였다.

1655068476266.png“저 녀석의 말이 맞습니다, 야마다 선생. 총독에게는 그 정도 액수가 그리 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들은 그저 그날 찾아온 외국인을 이기기만을 원했고, 나는 우연을 가장해서 그들의 바람을 이뤄 주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지요, 바바.”

선우진이 턱으로 야마다의 앞쪽을 가리키자, 바바가 돈 가방을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았다.

1655068476266.png“야마다 선생에게서 받아 갔던 3만 원을 포함해서 모두 16만 원이 들었습니다.”

16550684762652.png“……16만 원.”

총독의 큰 선물에 이어 거금까지 돌려받게 된 야마다의 입이 귀 끝에 걸렸다. 바바가 허리를 숙인 채 작게 한마디 덧붙였다.

16550684790525.png“원래는 17만 원이 넘는 돈이었는데, 도련…… 조선인 애송이가 미츠코시에서 다카하시 사장의 딸내미에게 선물을 사 준답시고 물 쓰듯 써 버렸습니다, 오야붕.”

16550684762652.png“그딴 건…… 상관없어.”

야마다는 돈 가방의 손잡이를 꽉 쥔 채 중얼거렸다. 불과 한 달 전쯤에 만 원을 잃었다고 도박사를 개 패듯이 팬 뒤 선우진을 잡아오라고 바바를 보냈던 그였지만, 이제 그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푼돈이 되어 버렸다.

16550684762652.png“너무 일이 커지는 것 아닌가? 총독이라니…….”

야마다가 묻자, 선우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1655068476266.png“커지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야마다 선생. 이제 겨우 시작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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