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창문을 열어 두었어요.2018.08.01.
“한조 님은 퇴역 육군대장이시지만, 여전히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 육군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시네. 헌병이었다가 경찰이 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고……. 물론 겉으로 드러내 놓고 휘두를 수는 없는 힘이지.”
야마다는 자못 은밀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한조라는 인물은 만세 운동 이후 조선에서 2선으로 물러나야 했던 육군들의 우두머리 격이다. 그러니 야쿠자처럼 음침한 세계와도 잘 어울릴 수밖에…….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 분이 왜 친서를?”
선우진이 묻자, 야마다는 이마를 긁적이며 서류 봉투를 열었다.
“한조 님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시위를 벌이라는 명령을 내리시거든. 뭐, 경찰들과 충돌한다는 게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 뭔가가 생기면 작은 이권이나마 얻어 가질 수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지.”
이 역시 이미 바바로부터 한 차례 들었던 이야기지만, 선우진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묵묵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럼 이번에 내려온 명령은 7월에 시위를 하라는 것입니까?”
“음……. 대강 맞네, 젊은 선생. 7월에만 모두 다섯 번의 시위를 벌이라고 하시는군. 한동안 이런 명령이 없이 잠잠하다 싶었는데…… 좀 바빠지겠어.”
야마다는 서류를 다시 한 번 천천히 넘기면서 훑었다. 날짜와 시간, 장소, 참여인원, 소요의 강도 따위까지도 모두 구체적으로 적시해 둔 꼼꼼한 명령서다.
“경성에서도 이런 시위에 휘말려 옷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인천에서도 또……. 이 야마나시 한조라는 사람은 대체 뭘 바라고 이런 일을 자꾸 벌이는 겁니까?”
야마다와 함께 서류를 살펴보던 선우진이 물었다.
“모르지. 그런 건 내가 알 필요 없는 일일세. 사실 궁금하지도 않아. 물론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기우삼아 말해 두자면, 이 일은 절대적으로 비밀이네! 외부에 발설했다가는 손가락 하나 정도로 사죄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야마다가 야쿠자 두목다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우진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도 조심스러운 사안인데, 왜 나에게 그 서류까지 보여 주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저 후견인이라고만 일러줬어도 무방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확실히 해 두는 게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젊은 선생.”
야마다는 서류를 짚으면서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게 우리 야마다 파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라는 것을 말일세. 나는 당신의 동업자인 동시에 야쿠자야. 그리고 야쿠자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지. 어떤 일은 하기 싫다거나, 그건 좀 곤란하다거나 하는 따위의 어리광은 통하지 않아.”
“거기까지는 알겠소만, 뭘 확실히 하고 싶다는 겁니까?”
“내가 수행하는 임무는 논쟁이나 시비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말일세.”
야마다는 선우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조선인들과 한패를 이뤄서 지나 놈들을 몰아내자는 시위를 하는 것이지만, 다음에 어떤 명령이 내려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어. 당장 내달에 조선인들의 상점을 부수라는 명령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또는 더 심한 내용을 사람들 앞에서 떠들어 대야 할 수도 있지. 그럴 때, 젊은 선생 당신이 끼어들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네. 이건 사적인 애국심이나 감정 같은 것과 무관하고,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야.”
“흐음……. 일이라고요?”
선우진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야마다의 눈을 응시했다. 그저 짧은 몇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많은 것들이 상상되었다. 어쩌면…… 관동대지진 당시 처음 조선인들을 죽이고 다녔던 것들도, 실은 한조의 사주를 받은 도쿄지역의 야쿠자들일는지 모르겠다. 헛소문과 피바람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혼란을 극대화하고, 그 여파로 계엄사령관의 필요성을 대두시킨 뒤 스스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하면……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그렇게 원치 않는 일이라면 이쯤에서 깨끗이 손을 씻는 건 어떻습니까, 야마다 선생? 지금 우리가 벌어들이고 있는 돈 정도면,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장기적으로 생각해도 이제 슬슬 야쿠자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는 것이 좋을 때가 됐다. 도시 개발 같은 커다란 이권사업에 끼어들었다가 가까운 파트너가 야쿠자라는 것이 발각되면, 곧바로 퇴출이다. 공무원들이 가장 싫어하고 꺼려하는 존재가 바로 야쿠자니까. 하지만 야마다는 어림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훗, 손을 씻는다고?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야쿠자의 조직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가족과 같아, 젊은 선생. 위에서 아래를 버리는 일은 있어도, 아래에서 위를 버리는 짓은 용납이 되지 않지. 그러니까 한번 극도의 세계에 발을 담그면, 파문이나 절연을 당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걸세.”
“절연이라, 뭔가 기분 나쁜 말인데요? 음습하군요.”
“실제로 절연을 당하면 기분 나쁜 정도로 끝나지 않지. 인천부 나와바리를 노리는 다른 조직들이 바로 다음날부터 전쟁을 걸어올 테고, 그 전쟁은 나와 우리 형제들이 다 죽어야만 끝나는 거야. 동시에 경찰 쪽에도 우리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증거물들과 함께 전달되겠지.”
“만약 야마다 선생이 인천부를 버리고 다른 도시로 아예 옮겨 간다면?”
선우진이 묻자 야마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로 가든 마찬가질세. 경성에 가면 경성의 야쿠자가, 평양에 가면 또 평양의 야쿠자가 우리를 칠 테지. 개인적인 감정과는 무관하게 아무도 우리 편을 들어줄 수 없다네. 그것이 이 세계의 규칙이야.”
“흐음……. 그 정도라면 절연이 아니라 저주로군요. 그렇다면 야마다 선생, 당신이 한조라는 사람의 조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네. 조선 내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지. 한조 님은 영원히 나의 후견인이신 걸세.”
대답은 그렇게 해도 야마다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다. 지금의 그는 야쿠자였을 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거액을 벌어들이고 있는 합법적인 사업가인 것이다.
“영원히- 라고 까지 못 박을 필요는 없겠지요. 우리에게는 요양소가 지어질 신도시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선우진은 자신의 서류가방을 툭툭 두드렸다.
“비록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일 테지만, 그 신도시 공사만 시작되면 야마다 선생 당신도 새로 정착할 곳을 얻는 겁니다. 그때에도 여전히 야쿠자로 살 것인지 어떨지는 물론 당신의 선택일 테지만요.”
“……젊은 선생, 지금 나를 가르치려는 것인가?”
대화가 민감한 선을 넘자마자 야마다가 위악적인 표정을 지어 보인다. 선우진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모두에게 더 이익이 되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뿐, 가르치고 말고 하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지요.”
“우리 모두…… 라고?”
“당연한 것 아닙니까?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나의 신분은 야마다 선생, 당신이 제공해 준 가짜. 만약 당신이 불법행위로 조사를 받게 되면 그때는 나에게까지도 영향이 미치리라는 게 자명한 사실 아닙니까. 우리는 함께 흥하고 함께 망할 수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이 야마다, 아수라장을 뚫고 힘겹게 여기까지 올라왔다. 허무하게 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야마다는 자신의 가슴을 턱 치며 예의 그 야쿠자다운 대사를 읊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으음, 신도시라……. 7월 말에 허가가 나고, 모금 작업이 끝나서 막상 가을부터 기초공사를 시작한다고 하면…….”
선우진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린 야마다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계산에 빠졌다. 현재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조직원들을 어떻게 그쪽으로 빼돌리고, 자신도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표정이다. 안정적으로 큰 수입만 보장된다면, 확실히 야쿠자보다는 건실한 사업가 쪽이 더 좋다.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은 조금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요…….”
선우진이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야마다는 흠칫 놀랐다.
“어딜 가는 겐가, 젊은 선생? 시간도 늦었겠다, 모처럼 둘이서 오붓하게 술이나 한잔 마실까 했는데. 내가 미두장에서 그간 얼마를 벌어들였는지도 들어야 할 것 아닌가? 구락부에서 돈을 따는 건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되네! 우린 이제 부자야!”
“우리보다 훨씬 더 큰 부자의 미인 딸을 만나러 갑니다.”
선우진은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아무리 아무 때나 놀러 와도 좋다고 했다지만,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사이토 사장의 딸을?”
사이토를 방문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야마다는 반색을 했다. 그가 꿈꾸는 이 사업의 완성은 선우진이 유키와 결혼을 해서, 그 막대한 사업을 물려받는 것이므로. 사이토가 후견인이 되면 한조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그래! 어서 가 보게. 돌이켜 보면 젊은 선생, 당신 너무 무정했어. 언제든 놀러와 달라고 초대를 받고나서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지 않나. 그래, 그 딸에게 줄 선물은 준비했을 테지? 좋은 것이어야 하는데!”
선우진을 배웅하는 야마다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 마치 자신이 청혼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 같다. 그 허둥대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선우진은 빙긋 웃었다.
“야마다 선생, 너무 기뻐하는 것 아닙니까? 부잣집 딸을 만나는 것은 나인데 말입니다.”
“그야, 당신 입으로 조금 전 말하지 않았나? 우린 함께 흥하고 함께 망할 수밖에 없는 사이인 걸세. 젊은 선생, 당신이 이 결혼에 성공하면…….”
오른손으로 선우진의 어깨를 짚은 야마다가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이 야마다도 성공하는 것이지.”
그 말을 하는 야마다의 눈빛이 기대로 빛났다. 진심어린 기대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 선우진을 태운 자동차는 저녁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사이토 사장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거대한 저택의 흰 담은, 밤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길고 높게 느껴졌다. 개인의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작은 성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 정도다. 스으윽-! 고바야시가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자, 다임러의 차체는 부드럽게 멈춰 섰다. 달칵-! 조수석에서 내린 바바가 서둘러 문을 열어 준다. 이제는 녀석도 도련님 수행에 꽤나 익숙해졌다. 중절모를 고쳐 쓰고 선우진이 하차하자,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종자가 한 발짝 다가섰다.
“사이온지 유우야라고 하네.”
선우진이 자기소개를 하자, 종자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사이온지 님. 안내하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이름을 다시 묻거나,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묻지 않는다. 사이토 사장으로부터 사이온지 유우야가 오면 무조건 들이라고 분명하게 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종자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책을 읽고 있는 사이토 사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 사이온지 선생. 오셨습니까? 들어오십시오.”
백발의 사이토는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고 일어섰다. 일전에 초대를 받은 이후, 선우진은 한 번도 이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경성에서 워낙 큰 사업의 기회를 얻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이토로서는 분명 섭섭했을 터다. 아끼는 딸과의 교제를 허락했는데도 선물만 챙긴 뒤 연락조차 없는 남자……. 누구라도 그런 인간은 밉고 야속할 수밖에 없다. 만약 야마다가 그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상대를 잡아다가 일단 손가락 몇 개 정도는 잘라 버린 뒤 문책을 시작했으리라. 하지만 이 자존심 강한 백발의 남자는, 단 한 번도 상심한 내색을 내비치지 않고 구락부에서 만났을 때도 그저 늘 한결같이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선우진은 그런 사이토가 싫지 않았다.
“방해가 된 것은 아닐 테지요, 이렇게 불쑥 찾아뵌 것이?”
미츠코시에서 사온 양갱을 내밀며 선우진이 물었다. 사이토는 고개를 젓는다.
“방해라니요. 사이온지 선생이 찾아 주시니 이 적막한 집에 활기가 도는 것만 같소이다. 그래, 그동안 많이 바쁘셨습니까?”
사이토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다. 정말로 세 번 더 방문할 때까지 반말 같은 것은 쓰지 않을 심산인가 보다. 선우진은 쑥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아아,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뭔가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영 낯설어서…….”
“요양소 말씀이지요. 이야기는 전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사이토가 요양소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몹시 놀랍다. 아직은 외부에 소식이 전해질 만큼 구체적인 안이 세워지지 않았는데……. 확실히 이 남자의 주변에는 사람도 많고, 정보도 넘친다. 그러니 이만한 거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미우라 은행장이 연락을 해 왔더군요.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분과 혹시 친분이 있느냐고. 아마도 같은 인천에 살고 있으니, 서로 교류가 있지 않을까 싶었나 봅니다.”
선우진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려는 듯, 사이토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아주 좋아하는 분이라고 했더니, 잘됐다며 총독 각하와 사이온지 선생이 공동으로 대규모 결핵 요양원을 건립하실 거라고 알려 주더군요. 아직 장소는 미정이지만 제1호 기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한시적이라고 하면서요, 후후후.”
“허어, 그 정도면…… 좋은 일을 할 테니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는 셈인데요?”
“그런 협박은 얼마든지 기쁘게 받을 수 있지요. 사이온지 선생이 조선에서의 첫 사업으로 자선 요양원을 계획하셨다는 것도 뿌듯하고 말입니다. 역시나 큰 인물은 생각의 그릇도 다르구나 싶어서 요 며칠 가슴이 훈훈했습니다.”
사이토는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윗감 하나는 제대로 점찍었구나 하는 표정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공연히 부끄러워집니다. 칭찬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고 난 뒤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그저 가볍게 인사나 드리고, 미녀의 얼굴을 좀 볼 수 있을까 싶어 찾아온 길이어서요.”
“눈이 처진 미녀 말이지요, 허허허.”
사이토는 가벼운 농담으로 선우진의 말을 받은 뒤,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사이온지 선생. 안 그래도 이쪽에서 부디 한 번 들러 주십사 초대를 해야 하는 건가 하고 고민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키가 요즘 영 기운이 없어서, 애비 된 입장으로는 가만히 두고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나도 내가 이런 부탁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막상 하나뿐인 자식이 저리 앓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니 자존심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더군요.”
사이토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을 애써 삼키고 나서 선우진에게 당부했다.
“큰일을 하시느라 바쁘더라도, 가끔은 마음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지요, 사이온지 선생.”
사이토는 정식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하녀들에게 안내를 맡겼다. 유키의 거처는 깊숙한 안채에 있었다.
“사이온지 님!”
선우진이 안채에 발을 들이자마자 유키가 설레는 목소리로 그를 맞는다. 고급스러운 기모노 차림의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선우진은 환하게 웃으며 모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유키 양?”
“아……. 잘 지내지는 못했어요. 좀 앓는 바람에…….”
유키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끓인 물을 부어 차를 휘젓는 유키의 팔은 거짓말처럼 가늘다. 걸치고 있는 여러 겹의 기모노의 무게조차 버거워 보일 만큼 정말로 그녀는 야위어 있었다. 조금 앓은 정도가 아니다.
“감기에 걸리셨나요?”
선우진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눈으로 보기에도 열이 느껴질 정도다.
“네에, 그날 이후로 줄곧……. 부끄럽습니다.”
유키가 두 손으로 공손히 찻잔을 내밀었다. 차의 맛은 일전과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특히나 풍부하게 일어난 거품 때문에 고급 말차의 부드러움이 더욱 분명하게 전해진다. 거품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솔을 저었던 것만으로도 유키의 숨결은 조금 거칠어졌고,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어머니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선우진은 마음이 무거웠다.
“역시 그날 극장에서 너무 떨었던 것이 원인일까요? 노스페라투는 끝까지 보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
선우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자, 유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요, 극장에서는 조금도 춥지 않았어요. 사이온지 님께서 덮어 주신 턱시도가 너무도 따뜻했는걸요.”
“하지만 이렇게 아프시니까…….”
“제가 아픈 건…….”
선우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유키가 곧바로 다시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매일 밤마다 저 창문을 열어 둬서 그런 거예요. 하녀가 닫아 주고 가면 또 몰래 열어 두었어요.”
그녀의 방 창문은 커다랗다. 아무리 초여름이라고 해도, 저렇게 큰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차가운 공기를 쐬었다면 감기에 걸리는 게 이상하지 않다.
“아니,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유키 양? 추우셨을 텐데. 맑은 공기를 쐬고 싶으셨던 겁니까?”
“누군가 올 것 같아서요. 밤에 그리 불쑥 찾아올 리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그래도 혹시 와 주면 어쩌지 하는 마음 때문에 문을 걸어 닫고 잠이 들 수가 없었어요. 애써 찾아와 불러 주셨는데, 제가 못 들으면 안 되니까요.”
유키가 노스페라투의 여주인공 같은 이야기를 한다. 선우진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그 누군가라는 것은……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군요. 유키 양을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다니. 그 사람이 미웠습니까?”
“아니요.”
고개를 젓던 유키가 선우진의 품에 쓰러지듯 안기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찾아와 주셨는걸요, 영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