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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시험을 통과해 보시오. (84/459)

84. 시험을 통과해 보시오.2018.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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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92322009.jpg“으허!”

세 불청객의 입에서 동시에 당황한 비명이 터졌다. 털썩-! 가장 많이 놀란 인력거꾼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이 동지와 김성옥 역시 다리에 힘이 풀리기는 마찬가지여서, 비틀거리며 곁의 나뭇가지를 짚었다. 푸드득-! 와사삭-! 여름의 기운과 물기를 흠뻑 먹은 나뭇가지들이어서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잎사귀들이 뜯기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비오는 밤이 아니라면, 별채에까지 닿을 법한 큰 소리였다.

16550692322015.png“조, 조선말! 지, 지, 지금 조선말을 들은 게…… 나 혼자만은 아니지요?”

인력거꾼의 물음에 나머지 두 사람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모두 일본군경과의 총격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배짱의 소유자들이지만, 방금 전에 들은 한마디는 심장을 콱 쥐어짜는 것처럼 큰 충격이었다.

16550692322019.png“나도…… 분명히 들었네. 저, 저 사람이 분명히 조선말로 잠깐, 이라고 했어. 하아……, 하아……. 조선인이 맞아. 그래……. 저 사람은 조선인일세.”

숨까지 헐떡이며 식은땀과 빗물을 훔쳐 낸 이 동지는 새삼스런 시선으로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16550692322019.png“세상에…… 이렇게 감쪽같이 숨길 수가……. 어, 어떻게 사람이 저리도 뻔뻔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16550692322028.jpg“제, 제가…… 일본인이라고 부르며 머리에 총을 겨눴을 때도, 계속 일본말만 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자기는 조선인이라고……, 살려 달라고 해야 하는 게 사람 마음 아닙니까?”

김성옥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도리질을 했다. 아직도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있는 인력거꾼은 눈을 껌뻑이며 자신의 동지들을 바라보았다.

16550692322015.png“우리끼리 조선말로 웅얼거리는 걸 다 들으면서도, 줄곧 태연하게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는 것입니까? 아니, 사람이 어찌 그리…….”

16550692322019.png“……거짓말을 잘 하고, 사람을 잘 속이느냐고?”

이 동지가 그의 질문을 대신 해 주자, 인력거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92322015.png“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16550692322019.png“그러니까 영락없는 것이지. 저 사람이……, 바로 선우희도 총감의 후사인 게야. 그분 역시 사람의 마음을 오죽 잘 희롱했는가. 그러니 이제는 더 의심할 것도 없네. 참으로 다행이야! 이렇게 만나서!”

감격한 이 동지의 목소리에 조금씩 울음기가 묻어났다. 아직도 온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력거꾼이 선우진에게 말했다.

16550692322015.png“이보시오. 지금……, 지금 조선말을 한 것이 맞소이까? 정말로 그런 거라면 뭐라고 한마디만 더 해 보시오. 혹여 내가 미련 때문에 헛것을 들은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16550692322028.jpg“그, 그러시오! 아무 말이라도 한마디만! 이왕이면 받침이 여러 개 있는 말이 더 좋고!”

김성옥도 적극적으로 고개를 주억댔다. 다들 과도한 흥분으로 자신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목소리나 몸짓도 굉장히 커져서, 슬슬 자제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아무리 빗소리가 비밀을 지켜 주고 있다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너무도 조심스러운 일이니까.

16550692348884.png“소란은 그쯤 피우고 들어오시오.”

선우진은 지금까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 뒤 거실 안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16550692348884.png“같이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합시다.”

16550692322019.png“이번에는 제대로 들었네. 세상에……! 고마우이!”

감정에 북받친 이 동지가 가장 먼저 대답을 하고, 인력거꾼을 잡아 일으킨다. 선우진은 세 불청객이 거실로 들어올 때까지 잠자코 서서 기다렸다.

16550692322009.jpg“신발을……. 어떻게 해야 하지?”

댓돌 위에 선 세 사람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마루를 보며 일순 망설였다. 독립투쟁가의 행동양식대로라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안으로 신발을 갖고 들어가는 게 맞다. 하지만 저 깨끗하게 닦인 마루에 빗물과 흙을 뚝뚝 떨어뜨릴 생각을 하니,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그들이 들어가려는 장소는 20년 만에 처음 보는 총감의 아들집이 아닌가. 그러니 예의에 관해서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16550692322019.png“이 저택에 있는 이들은 다 믿을 만한 동지들이요? 돌연 경찰이 들이닥치거나 할 일은 없소?”

고민하던 이 동지가 선우진을 보며 얼토당토하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고 하면 신발을 벗어 두고 올라오려는 모양이다.

16550692348884.png‘믿을 만한 동지들이냐고? 아니, 야쿠자 부하들밖에 없는데.’

선우진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16550692348884.png“경찰은 올 일이 없지만, 아무도 믿을 생각 말고 그냥 신을 갖고 들어오시오. 어차피 그 젖은 옷들도 온통 흙물투성이니까.”

16550692322009.jpg“그, 그런가?”

세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의 옷차림을 살폈다. 오랜 시간 비를 맞아 가며 풀밭에서 구른 탓에 정말로 지저분하고, 또 흠뻑 젖어 있다. 탁-! 세 사람이 엉거주춤 거실로 들어선 뒤, 선우진은 미닫이문을 닫아걸었다. 막 경성에서 돌아온 날이라 휴식을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바바 녀석에게 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 뚝-! 뚜뚝-! 뚝-! 세 사람에게서는 계속 물이 뚝뚝 떨어져서, 서 있는 곳마다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이대로 뒀다가는 이들이 잠시라도 머물렀던 모든 장소가 흙탕물로 덮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독한 땀 냄새. 꾸리-! 세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그들의 몸에서 나는 꼬질꼬질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밀항을 통해 여기까지 온 이후 변변히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줄곧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16550692348884.png“따라오시오. 아무래도 옷부터 먼저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소이다.”

옷장을 향해 걸어가며 선우진이 말했다. 지난봄까지만 해도 그 역시 땀 냄새와 친숙한 삶을 살았으니, 냄새는 아무 문제없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집 전체에 냄새가 배 버린다면 당장 내일 청소를 하러 올 사이토 사장의 하인들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터다. 드르륵-! 거실 구석의 벽장을 연 선우진은 짙은 색의 양복과 셔츠를 세 벌씩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장이 길어서 접어 입어야 할 테지만, 저 낡고 젖은 옷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좀 우스워도, 다들 워낙 야위어서 품이 작을 걱정은 없어 보인다.

16550692322015.png“이, 이걸 우리더러 입으라고? 한 벌 가격만 해도 족히 100원은 넘어 보이는데?”

세 사람은 고급스런 새 옷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선뜻 그것을 집어 들지 못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92348884.png“그렇소이다. 옷은 많으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16550692322015.png“아니. 사양이라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이런 상태여서…….”

인력거꾼이 빗물에 불어 있던 자신의 손목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새까만 땟물이 팔을 타고 흘렀다. 그는 ‘이제 알겠지?’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16550692322015.png“옷을 준다면 받을 수는 있지만, 차후에 목욕부터 하고 입겠네. 지금은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옷을 걸친다 해도, 금세 또 새까맣게 변해 버릴 뿐이야.”

16550692348884.png“그럼 그때 새 옷을 사시더라도 일단은 갈아입으시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당신들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선우진은 딱 잘라 말하고, 먼저 성큼성큼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저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일단 시원한 맥주 한 잔부터 대접하고 싶었다. 안주로 내놓을 것이라고는 감씨과자뿐이지만, 일단 선우진은 과자의 종이봉투를 열어 두었다. 잠시 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세 사람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포커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16550692322019.png“……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이거 공들여 만든 옷에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은데.”

둥둥 걷어올린 소매를 바라보며 이 동지가 쑥스러워한다. 그저 멀쩡한 새 옷을 걸친 것만으로도, 다들 인물이 훤해졌다.

16550692348884.png“자, 다들 앉아서 목부터 좀 축이고 계시오.”

인력거꾼의 품에서 낡은 옷 뭉치를 빼앗아 든 선우진이 의자를 권했다. 그런 뒤 거실 밖으로 나가, 간장 졸이는 냄새가 풀풀 나는 그들의 옷을 마루 아래에 숨겨놓았다. 그렇게 하고 나니 그제야 좀 집안의 악취가 옅어진다.

16550692322015.png“크허-! 차가워! 이, 이 맥주……. 엄청나게 차가워!”

꿀꺽꿀꺽 순식간에 맥주병을 반쯤 비운 인력거꾼은 믿기지 않는 듯 탄성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홀린 듯이 곧바로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엄청나게 목이 말랐으리라. 이 동지도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92322019.png“크아! 그렇구만, 정말 얼음장 같아……. 이 시간에 불쑥 들이닥쳤는데도 이런 맥주를 내다니. 이 집은 요정도 아니면서 항상 냉장창고에 얼음을 채워 두나? 이런 것이 부자들의 삶인가?”

16550692348884.png“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선우진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 동지가 격하게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16550692322019.png“그, 그렇지. 나는 그저 이 호화로움이 낯설어서……. 그러면 물어보겠소. 대체 당신의 사연은 어떤 것이오? 어째서…… 선우희도 총감의 아들이 일본 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요? 역시 어머니가 당시 조선에 와 있었던 것인가? 아니, 그런 거라면 대체 조선말은 어디에서 배운 것인지…….”

마음이 급한 이 동지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수많은 질문을 한 번에 쏟아 냈다. 선우진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16550692348884.png“선생, 잠시만 기다리시오.”

16550692322019.png“응? 왜 그러나?”

16550692348884.png“나는 이미 당신들의 가장 큰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당신들이 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먼저요.”

선우진의 말에 납득된 이 동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92322019.png“음, 그 말도 맞지. 자네도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 뭐든 물어보게나. 아는 한도 내에서는 전부 답해 줌세. 어차피 서로를 알려면 긴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니, 조급해하지 않겠네.”

16550692322015.png“아니, 아니! 잠시만요, 이 동지.”

급하게 끼어든 인력거꾼이 선우진을 힐끔 돌아본 뒤, 이 동지에게 말했다.

16550692322015.png“……그런데 아직 이 사람이 선우총감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못 본 것 아닙니까?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조직에 대해 전부 털어놓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16550692322019.png“아니, 박 동지. 이 얼굴을 보고, 또 이 엄청난 기만술을 보고나서도 그런 의심이 드는가? 내가 말했잖나, 영락없어! 그러니 김성옥 동지도 총감의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인 줄 깜빡 속았던 것이 아닌가?”

16550692322015.png“우리뿐이라면 저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자칫 다른 동지들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다 보니 조심스럽습니다.”

바로 면전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선우진은 변명도 항의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들의 신중함이 마음에 든다. 함부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6550692322019.png“으음, 뭐 그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대체 무엇으로 확인을…….”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 동지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

16550692322019.png“아, 그래!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있었어!”

새 바지 주머니에서 1전짜리 동전 세 개를 꺼낸 이 동지는 그걸 꼭 쥐고 흔들었다.

16550692322019.png“자, 내가 이걸 하늘에 던졌다가 받을 테니 그림인지 숫자인지 맞춰 보시오.”

휙-! 탓-! 이 동지는 선우진이 동의하기도 전에 재빨리 동전들을 튕겨 올렸다가 손등으로 받으며 덮었다.

16550692322019.png“자! 어서! 맞추라니까!”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며 채근하는 이 동지에게 선우진이 물었다.

16550692348884.png“그 정도로 대체 뭐가 확인이 된단 말이오. 그냥 당신들 총감이라는 분의 이야기부터 해 보시오.”

16550692322019.png“맞추지 못하면 의심할 수밖에 없네. 총감께서는 장차 세상에 나올 아들이 당신보다 몇 배나 뛰어난 운을 타고 날 것이라 하셨단 말일세. 그러니 일단 아무 대답이라도 해 보게. 그분의 후사가 맞는다면, 자네가 느끼는 것이 바로 정답일 테니.”

이 동지는 한없이 진지하지만, ‘뛰어난 운’이라는 그의 말이 어처구니없어서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유복자로 태어나 지극한 가난 속에 살다가 열다섯에 병약한 어머니를 잃은 것이 뛰어난 운이라면, 행운의 신이야말로 진정한 악마다. 하지만 어쨌든 이 흥분한 사람들을 조금 안정시킬 필요는 있어 보였다.

16550692348884.png“소지 쪽부터 숫자, 글자, 글자요. 쇼와 2년, 다이쇼 10년, 12년에 발행된 것들이고, 맨 마지막 다이쇼 12년 동전은 2자가 짓뭉개져 있소. 자, 원하던 대로 일러 줬으니 이제 당신들이 답을 할 차례요.”

선우진은 빠르게 대답한 뒤,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 맥주병을 기울였다. 덮고 있던 손을 들어 동전들을 확인해 본 이 동지와 그의 일행들은, 눈동자가 커지며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새나왔다.

16550692322019.png“오오, 이럴 수가……. 정말이야. 다 맞았어. 심지어 이건 뒷면이 위로 올라와 있었는데도…….”

엄지 쪽의 동전을 뒤집어 보며 이 동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우진의 말대로 발행연도는 다이쇼 12년. 날카로운 것에 찍힌 것처럼 2자의 가운데가 폭 패였다.

16550692322019.png“이걸…… 이게 이렇게 찌그러졌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내가 손으로 덮고, 심지어 손등에 닿아 있었는데.”

16550692348884.png“행운의 신이 알려 줍디다.”

16550692322019.png“오! 정말로 그런 것이 가능한가?”

16550692348884.png“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당연히 농담이오. 그저 허공에 떠 있을 때 슬쩍 보았던 것뿐. 자, 이제 충분히 시험하지 않았소이까? 하아…….”

이 동지에게 대답하던 선우진은 새삼 귀찮아진 듯 한숨을 내쉬며 인력거꾼 쪽을 흘끗 돌아보고 말을 보탰다.

16550692348884.png“동전 꺼내서 당신이 또 다시 나를 시험하려 할 필요 없소. 당신의 주머니 안에 든 동전은 1전짜리 여섯 개, 5전짜리 두 개. 10전짜리 세 개. 그리고 돈 비슷한 이물질도 하나 섞여 있군.”

동전 개수로 홀짝을 하는 노름은 학창시절 이후 처음 해 보는 것이지만, 틀릴 리는 없다.

16550692322015.png“허! 어떻게 알았지? 내가 던지고 맞춰 보라고 하려던 참인데…….”

짤랑거리며 막 주머니 밖으로 동전을 꺼내려던 인력거꾼은 주먹을 펼쳐 본다. 정말로 선우진이 말한 것과 똑같은 개수대로 들어 있다. 선우진이 이물질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위안스카이의 얼굴이 새겨진 중화민국 동전인 모양이다.

16550692322015.png“정말 맞췄어! 바지 안에 들어있던 동전 개수를! 그것도 액면대로 나눠서!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인력거꾼이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얼굴로 탄성을 연발하는 동안, 선우진은 이 동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16550692348884.png“당신들 소개부터 먼저 들어봅시다. 저기 구면인 사람은 의열단의 김성옥이라고 했고…….”

16550692322019.png“아…… 그래. 나는 어별교의 이일석이라고 하네. 저기 저…… 동전 헤아리고 있는 의심 많은 친구는 박기홍이고.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정말로 기쁘네. 구천에 계신 총감께서도 흐뭇해하실 걸세. 아……. 막상 대면을 하고 있으니,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 양해해 주게. 워낙에 오래 전 이야기인 데다가,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기다려 왔던 꿈같은 사건이라서…… .”

긴장과 기대로 목이 타는지, 이일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맥주병의 주둥이를 연신 홀짝거렸다. 선우진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세 병을 더 꺼내와 그들의 앞에 놓고, 새 담뱃갑까지 뜯어 주며 조금 자상한 목소리를 냈다.

16550692348884.png“여유를 갖고 시작하지요. 어별교의 총감은 어떤 분이었고, 어떤 일을 하는 조직이었는지부터 말하면 될 것 같소이다.”

16550692322019.png“그, 그럴까……. 그래, 그러겠네.”

새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켠 이일석은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16550692322019.png“어별교는…… 삼국유사의 주몽일화에서 따온 이름이네. 위기에 빠진 주몽이 물고기와 자라가 만들어 준 다리를 밟고 강을 건너가 고구려를 건국했지. 나라의 위기를 구해 낼 진정한 주인은 물고기와 자라 같은 민초들이란 의미네. 우리는 밝지 못한 고종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그 조정에서 만들어 낸 법 따위도 따를 생각이 없었네. 우리가 처음 결사를 했던 것이 광무 9년이었으니, 서력으로 따지자면…… 그래, 1906년이었군. 이듬해에 순종이 즉위했고, 곧이어 국채보상운동이 일었던 때라 시기는 분명하게 기억이 나네.”

16550692348884.png“국채보상운동에 동참이라도 하셨소이까?”

선우진의 질문에 이일석은 고개를 저었다.

16550692322019.png“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어리석은 황제와 간신들이 일본의 부추김을 받아 만들어낸 악법 따위 지킬 생각이 없었네. 나라의 빚을 갚는다고 해서 일본이 순순히 물러나리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그런 것보다 훨씬 더 큰 싸움을 벌일 계획을 품고 있었지.”

16550692348884.png“싸움이라, 어떻게 싸운다는 것이오?”

16550692322019.png“그야 당연히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이지.”

16550692348884.png“한 줌의 조선인들이 비밀리에 모여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생각했단 말이오?”

선우진은 조금 황당해하며 물었다. 광무 9년이라면 이미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고도 10년 이상이 지난 뒤다. 당시 조선의 국력을 전부 동원했더라도 서구식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양국 간의 무력차라는 것은 아주 압도적인 수준이었으므로. 하물며 소수의 비밀결사라니……. 그야말로 모닥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과 같은 무모함이다.

16550692322019.png“아니, 자네의 선고장이신 우리 총감께서 그리 막무가내인 분은 아니었네. 그분의 원대한 계획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쟁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지. 전쟁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니까.”

16550692348884.png“다르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16550692322019.png“우리는 군대를 조직하고 고가의 무기를 사들이기는 했네. 언제라도 싸움이 벌어지면 승리할 수 있도록 훈련도 치열하게 받았고. 하지만 그것은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위한 준비는 아니었다네. 꼭 죽여야 하는 놈들을 척살할 때도 있었지만, 주목적은 만주와 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었지. 가난을 견디지 못한 조선인들이 엄청나게 그곳으로 밀려들던 시기였어.”

이일석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아련한 시선으로 자신의 젊었던 시절을 회고했다. 그래도 선우진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16550692348884.png“그래 봐야 어차피 적은 수의 방어병력. 그 정도로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면전이 시작되면 한나절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16550692322019.png“무장병력으로는 마적이나 소수병력을 방비하면서,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총감의 1차적인 계획이었다네. 향후 10년 정도는 그렇게 버텨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알려 주셨지. 어차피 당시 청은 그 정도를 신경 쓸 만한 여력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16550692348884.png“그 긴 세월 동안 무슨 수로 전면전을 막는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16550692322019.png“현대의 국가정책은 국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중책을 부여받은 인간이 결정한다, 는 것이 총감의 지론이었네. 요컨대 결정권을 쥔 놈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지.”

이일석이 말했다. 선우진 역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론이었다. 당장 조선의 경우만 보아도,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의 갑작스런 변덕 하나 때문에 일본의 장기계획에는 없었던 거대요양소가 지어질 형국이다. 이일석은 또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설명을 계속했다.

16550692322019.png“그래서 총감께서는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관료나 고위 장교들과 비밀리에 도박을 벌여 그들이 빚을 지도록 만들었네. 개인의 자산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액수의 빚을 말일세. 그렇게 빚더미에 올려놓은 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을 하려고 했지. 조금이라도 조선침탈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향을 찾아서.”

16550692348884.png‘지금 내가 안도 부회장에게 하려고 마음먹은 일이지 않은가!’

선우진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과 아버지를 연결하고 있는 강력한 동질성의 고리를 재확인했다. 도박 실력과 외모뿐 아니라, 사고하는 방식마저도 꽤나 닮아 있는 것이다.

16550692348884.png“그런데 왜 실패하신 게요?”

선우진이 물었다. 아버지가 어떤 꿈을 꿨었는지는 이제 대강 짐작이 간다. 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 자신과 어머니를 냉혹한 현실에 내동댕이쳐 둔 것인지, 그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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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92322019.png“실패한 게 아닐세. 여기까지도 다 총감이 예상했던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다네.”

긴 한숨을 내쉬며 도리질을 한 이일석이 선우진을 지목했다.

16550692322019.png“그 증거가 바로 자네인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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