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어별교 2대 총감. (87/459)

87. 어별교 2대 총감.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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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93078081.png“그렇다면! 선대 총감의 유지를 이어가 주겠다는 것인가?”

흥분한 박기홍이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를 낸다.

16550693078085.png“쉿-!”

선우진은 검지를 세워 입술 앞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16550693078085.png“조선말이 너무 큽니다.”

16550693078081.png“아…… 그래. 그렇군.”

박기홍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목소리를 줄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16550693078081.png“어쨌든 어별교의 총감 자리를 받아들여 준다는 의미인 것이지? 우리와 함께 싸우겠다는 뜻인 게야.”

16550693078085.png“예. 나는 선생들과 뜻을 같이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지고, 누군가는 20년을 기다려 왔다는데, 그런 일들을 모르는 척 넘어갈 수야 없지요.”

선우진은 언제나처럼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결연한 의지를 전하고 있다.

1655069307811.png“다시…… 꿈을 꾼다고…….”

이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 전 선우진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그 한마디로 이미 그의 얼굴은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벌겋게 상기되었다.

16550693078085.png“맞소이다.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일단은 마음속에 꿈부터 품는 것이 순서일 테지요. 그리고 우선 처리할 일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나갑시다.”

고개를 끄덕이며 안락의자 쪽으로 걸어가는 선우진을 향해 이일석이 묻는다.

1655069307811.png“……그 우선해야 하는 일이란 어떤 것인가? 자네는 이미 미래를 대비할 방법에 대해 큰 그림을 다 그려 놓았다는 의미는 아닐 테지?”

16550693078085.png“설마 그렇기야 하겠소이까?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선생들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선우진이 벽에 걸린 액자를 치우자, 벽장 형태의 철제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라키가 이 집을 완공하기 전부터 이미 설치해 두었던 것으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무게는 어마어마하다. 끼릭- 끼릭- 선우진은 둥근 다이얼을 돌려서 잠금장치를 해제한 뒤, 양쪽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철컹-! 육중하고 두툼한 철체 문이 열렸다. 금고 내부에는 혹시라도 이곳에서 도박이 벌어질 경우 사용하기 위해 준비해 둔 비상금이 들어 있었다. 선우진은 그중 100장 묶음 돈다발 세 개를 꺼낸 뒤, 금고 문을 닫았다.

16550693078085.png“모든 것이 막연하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처리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자, 받으시오.”

포커 테이블로 돌아온 선우진이 돈다발들을 이일석의 앞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엄청난 거금을 마주한 세 독립운동가의 얼굴은 이내 경악으로 굳어 버렸다.

16550693078081.png“이, 이게 다 얼마인가!”

16550693078085.png“삼만 원이올시다.”

16550693078081.png“삼만 원? 이것이 모두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진짜 돈이 맞는가?”

박기홍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빳빳한 지폐다발의 모서리를 손으로 훑어보았다. 물론 당연히 진짜 돈이다. 이일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1655069307811.png“이렇게나 큰 공작금을 들여서…… 처리해야 하는 제일 급한 일이라는 게 뭔지 알려 주게.”

16550693078085.png“일단 다들 목욕과 이발부터 하고, 멋들어진 새 옷과 구두를 맞추시오. 최고급품으로. 여러 벌씩.”

선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황당한 명령을 내렸다. 물론 세 독립 운동가는 그 의미를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1655069307811.png“……새 옷과 새 구두라니……. 왜지? 총독부에 잠입이라도 시켜 주려는 것인가?”

16550693078085.png“아니, 앞으로 한동안은 잠입이건 뭐건 하지 않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띄거나 위험한 행동은 일절 금하는 바요.”

1655069307811.png“그럼 대체 새 옷은 뭘 위해서?”

16550693078085.png“저기 거울을 좀 보시오.”

선우진은 벽에 걸린 대형 거울을 가리켰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세 사람의 모습이 거기에 비친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바짝 마른 얼굴들에는 고생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우진의 고급 양복을 빌려 입었어도 그 곤궁함은 온전히 감춰지지 않은 상태다.

16550693078081.png“후우…….”

박기홍이 까치집처럼 엉킨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새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693078081.png“우리 어머니께서 이 꼴을 보셨으면, 아들이 각설이가 됐다고 통곡을 하셨겠소이다…….”

1655069307811.png“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는데, 자네와 함께 서 있으니 이건 무슨…….”

이일석도 새삼스런 시선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며 뒷말을 삼켰다. 귀티가 흐르는 선우진과 비교해 보니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16550693078085.png“맞습니다. 다들 삶에 지쳐 보이지요.”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16550693078085.png“그런 남루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 희망을 가져도 좋다고 말을 전한댔자, 어느 누구에게도 전혀 믿기지 않을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일단 절반은 차지하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옛 동지들을 만나기 전에 일단 외모부터 멋지게 꾸미시오. 누가 봐도 행복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16550693138834.jpg“우리 단장인 약산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었지…….”

김성옥은 아련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처음 의열단을 결성할 무렵만 해도, 단장인 김원봉 이하 많은 단원들이 신식 양복을 갖춰 입었다.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불쌍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내 현실의 냉혹한 벽이 부딪쳐 왔고, 그들은 더 비싼 권총과 새 양복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형권총 쪽을 택했다. 그것이 오늘날 김성옥의 외모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서 돈은 너무나 중요하다. 어쩌면 피 끓는 애국심 다음으로 중요한 자산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아무리 뜻이 있고 마음이 뜨거워도, 돈이 없으면 제대로 된 싸움은 수행할 수 없다. 김원봉도 군자금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더라면, 의열단의 주류와 함께 중국의 황푸군관학교에 몸을 의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1655069307811.png“그래. 새 옷을 사 입고, 그 다음은?”

이일석이 물었다. 3만 원이라는 거금에서 여러 벌의 고급 양복 값을 제한 뒤, 옛 동지들을 만나고 다닌다 하더라도 여전히 2만 9천 원은 족히 남는다. 2만 9천 원이라니……. 정말이지, 엄청난 거금이다. 어별교의 세력이 위축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16550693078085.png“남은 돈으로는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사 드시면서 느긋하게 기다리시오. 경성이나 평양 어딘가에 번듯한 가게를 하나 내 놓고 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해도 좋을 테지요. 단, 섣불리 동지들을 모아서 세를 불리지는 마시오.”

선우진은 자신의 맥주병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가볍게 대답했다.

1655069307811.png“느긋하게 기다리라니……. 물론 우리는 기다리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는 사람들이긴 하네만, 무엇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지 모르겠네.”

16550693078085.png“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의미올시다.”

1655069307811.png“그 말인즉, 그냥 호강을 하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으란 의미인가? 매일 새 옷을 갈아입고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이일석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캐물었다. 그런데 선우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16550693078085.png“바로 맞추셨소이다. 먼저 체력을 기르는 게 우선이오. 선생들의 강건한 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지금처럼 야윈 채로는 긴 싸움을 버티기 어려울 겝니다. 선생들의 상태로 미루어 보건대, 다른 어별교의 단원들 역시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할 테지요. 그분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주시자면 그리 큰돈도 아닙니다.”

1655069307811.png“물론 우리 동지들에게 이 돈을 공작금으로 지급한다면, 당장은 가뭄의 단비 같을 걸세. 그러나…… 그렇게 한들 무슨 투쟁이 되겠는가?”

16550693078085.png“지금 바로 싸우자는 것이 아니올시다. 모든 것은 때와 순리라는 것이 있는 법. 그러니 일단은 나를 믿고 기다리시오.”

선우진은 단호하게 잘라 말한 뒤,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의 이일석과 박기홍에게 물었다.

16550693078085.png“설마 신임 총감의 첫 번째 명령을 거역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요?”

16550693078081.png“아, 아니 물론 그런 것은 아니네만……. 그래도 내가 마음이 작은 소인이어서 그런지, 뭔가 기약이 있으면 하는데 말이지. 대체 얼마 동안이나 기다려야 하는지 정도는 알려 주시게나.”

박기홍은 급하게 손사래를 친다.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던 선우진이 대답했다.

16550693078085.png“내년 봄이 지나기 전까지는 연락을 드릴 것입니다. 일단은 그 정도만 알고 계시오.”

16550693078081.png“기일을 그 즈음으로 맞춘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16550693078085.png“물론이오. 내가 하는 일 중에 이유 없이 벌이는 것은 없습니다.”

선우진은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확언을 해 주었다. 그래도 이일석과 박기홍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저으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655069307811.png“……명령이라고 하니 따르기는 하겠네만, 그렇게까지 오래 걸려야 하는 까닭을 모르겠군. 해를 넘겨야 한다니.”

16550693078085.png‘그야…… 그토록 오랫동안 구원자를 기다렸던 사람들을 빈손으로 만날 수는 없으니까요.’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대꾸했다. 몇만 원 정도로는, 어차피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어렵다. 어지럽게 산재해 있는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모두 규합하고 그들의 운영자금을 대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적어도 백만 단위, 장기적으로는 천만 단위의 돈이 필요하다. 지금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카가와 중장이 일러준 나진 땅이었다. 연말까지 그것을 되팔아서 천 배의 이익을 거두면, 그때는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비로소 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때까지 그 자신은 부족한 지식을 공부해 두어야 한다.

1655069307811.png“그래……. 어쨌거나 이렇게 만났으니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네. 해를 넘긴다고 해도 이제 겨우 반년도 남지 않았고. 그러면 우리들은 그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면서 자네를 경호하겠네.”

맥주병을 마저 비운 이일석은 결심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선우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16550693078085.png“아니, 그렇게 눈에 띌 짓은 아예 생각도 마시오. 절대로 아니 될 말이올시다.”

1655069307811.png“눈에 띌 것이 뭐가 있나? 보아하니 이사를 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어차피 고용인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우리들, 청소도 하고 허드렛일도 열심히 함세. 여기 이 박 동지는 가구 수리나 집 수리도 곧잘 한다네. 쓸모가 많지.”

이일석이 박기홍의 어깨를 짚자, 박기홍은 바짝 마른 두 팔에 근육을 드러내 보였다.

16550693078081.png“자랑은 아니지만 말일세, 19년 동안이나 쫓겨 다니면서 안 해 본 일이 없다네. 뭐든지 맡겨만 주게.”

16550693138834.jpg“나, 나도 정원사 노릇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요. 이런 돈은 받지 않아도 좋으니, 먹여 주고 재워만 주시오. 일본경찰들에게 얼굴을 보이긴 했어도, 수염만 밀면 알아보기는 힘들 거외다.”

분위기에 휘말린 의열단원 김성옥까지도 한마디 거들 정도로 세 사람은 필사적인 모습이다.

16550693078085.png“선생은 의열단원이 아니시오? 이렇게 어별교와 함께 움직여도 되는 것입니까?”

선우진이 묻자, 김성옥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16550693138834.jpg“다 동포를 위한 한마음인데,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조선인들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내 목숨도 언제든지 가져다 쓰시게. 그런 끔찍한 일은 일찍이 자유시에서 있었던 참변만으로도 족해.”

16550693078085.png“하아…….”

선우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왜 3만 원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모두 마다하고, 굳이 이 저택에서 잡일을 하며 머물겠다고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이들은 19년의 간절한 기다림 끝에 만난 선우희도의 후대가, 갑자기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16550693078085.png“선생들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그건 곤란합니다. 나는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인들에게 고개를 조아려 가며 허드렛일 하는 걸 평안하게 지켜보고 있을 만큼 속이 좋은 사람이 못 됩니다.”

1655069307811.png“괜찮네! 전혀 개의치 마시게나. 나라의 독립과 안녕을 위한 큰 사업에 귀천은 없지 않나. 백범 같은 분도 상하이 정부의 문지기를 해도 좋다고 하셨거늘, 우리 따위가 뭐라고!”

이일석이 한 번 더 고집을 부려 보지만, 선우진의 의지는 확고했다.

16550693078085.png“필요 없는 일에까지 고개를 숙이며 살 필요는 없소이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사라지지도,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마시고 연말까지는 훌쩍 떠나 마음 편히 지내고 계시오.”

1655069307811.png“……아직 물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네. 대체 자네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 왔던 것인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이토록 호화롭게 일본인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인 화족 어머니를 둔 것도 아닌 듯한데…….”

이일석은 아쉬운 마음을 차마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궁금한 질문들을 쏟아 놓았다.

16550693078081.png“그, 그래! 우리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네.”

박기홍과 김성옥의 눈빛도 호기심으로 빛났다. 하지만 지금 이들에게 시시콜콜 세부적인 일들까지 다 털어놓는다는 것은 별 소득이 없는 일이다. 야쿠자와 얽힌 민족운동지도자라는 것부터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니까. 선우진은 냉정하게 대화를 종결했다.

16550693078085.png“때로는 모르고 있는 편이 더 좋을 때도 있소이다. 궁금한 마음은 잘 알지만, 지금은 그저 나를 믿고 그냥 지나가 주시오. 이 부근을 더 배회하지도 말고, 나에 대해 더 캐묻고 다녀서도 안 됩니다. 내년 초,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할 때까지는 그저 체력을 기르며 기다리시오. 다른 어별교 사람들에게 내 신분과 위치를 알리는 것도, 또 선생들의 위치를 내게 알리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16550693078081.png“하지만 동지들이 모두 궁금해…….”

박기홍이 뭔가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선우진은 재빨리 그의 말을 끊고 딱 잘라 선언했다.

16550693078085.png“이유를 불문하고 이 시간 이후에 나와 또 마주치는 어별교 사람이 있다면, 나는 총감으로서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 여기겠소. 그리고 그 순간 나와 어별교의 인연은 끝이오. 알겠소이까?”

16550693078081.png“아…… 알겠네. 알아들었네.”

선우진의 단호한 태도에 세 독립 운동가는 더 이상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그 밤의 비밀집회는 끝이 났다.

16550693078085.png“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들 가시오. 나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미 밤도 깊었고, 선생들의 흔적을 지우려면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선우진은 삼베수건을 꺼내며 그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이들의 새까만 발자국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일만 해도 한참이나 걸레질을 해야 할 참이다.

16550693078081.png“……저기, 미안하네만 한 가지만 더 물어봐야 하겠네.”

낡은 옷 보따리와 지폐다발을 챙겨 나가려던 박기홍이 문득 멈춰 서서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16550693078081.png“우리의 거처도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내년에는 대체 어떻게 연락을 해 오겠다는 것인가?”

16550693078085.png“신문을 눈여겨보시오. 거기에 암호가 실릴 거요.”

선우진은 미리 준비해 뒀던 답을 들려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16550693078081.png“신문? 어떤 신문을 말하는 것인가?”

16550693078085.png“조선에서 발행되는 것이라면 아무 신문이라도 무방합니다. 내가 보내는 신호를 분명히 읽어내실 수 있을 겁니다.”

16550693078081.png“아니 그건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 줄 수는 없나?”

박기홍이 여전히 불안을 떨치지 못한 얼굴로 묻는다. 선우진은 그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16550693078085.png“여유를 갖고 어떤 신호일까를 상상하면서 기다리시지요. 그 두근두근하는 작은 즐거움마저 없다면, 이런 세상에서 매일을 무슨 재미로 살아가시겠소이까?”

16550693078081.png“혹여나 신호를 놓치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16550693078085.png“절대로 놓칠 일은 없습니다. 분명히 약조하지요.”

선우진은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차례로 세 사람을 꼭 끌어안았다. 바짝 마른 몸 안에 감춰진 단단한 근육이, 그들을 안은 손끝에 느껴졌다. 마치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단호히 뭉친 것 같은 그런 몸들이다. 그럼에도 정말로 지쳐 있다.

16550693078085.png“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호가 갈 때까지 멋지게 입고 맛있는 것을 드시오. 이건 명령입니다.”

진심을 담은 포옹 후에 선우진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비에 젖은 채 감개한 시선으로 선우진을 보고 있던 이일석이 물었다.

1655069307811.png“명심하겠네. 그런데……, 우리가 충성을 맹세한다는 서약 같은 것은 필요 없나?”

선우진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0693078085.png“정말로 약속을 지킬 사람들은 맹세 따위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법. 나는 선생들이 두 마음을 먹지 않을 분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소이다.”

1655069307811.png“크흑!”

그리 대단하지 않은 칭양이었음에도, 이일석은 별안간 뜨거운 숨을 삼키며 눈가를 훔쳐냈다. 그 곁에 서 있던 박기홍도 마찬가지다.

16550693138834.jpg“아니……. 대체 왜 갑자기 눈물까지 흘리시는 겝니까?”

당황한 김성옥이 묻자, 이일석이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1655069307811.png“역시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게 너무 확 와 닿아서 그랬소이다. 돌아가신 선대 총감께서도 딱 저렇게 말씀하셨는데……. 저 눈빛으로 해 주는 저 다정한 말을……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쏴아아아-! 깜깜한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여름비가 쏟아진다. 세 명의 독립 운동가는 어별교의 제2대 총감까지도 그 빗속에서 흠뻑 젖게 만든 뒤에야 힘겹게 아쉬운 이별을 받아들였다.

16550693078085.png“이런 걸 준비해 두고서 기다렸던 것인가?”

그들을 떠나보내고 거실로 돌아온 선우진은 운명의 신에게 물었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동포들을 구해 내는 것조차 눈앞이 캄캄할 만큼 큰일인데, 거기에 더해서 장차 다가올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으라니……. 이건 정말로 극한의 임무라고밖에는 평할 수 없다. 새롭고 거대한 도박과 마주하게 된 탓에 가슴은 두근거려도, 머리는 도리어 맑아져왔다. 피잉-! 박기홍이 두고 간 중화민국 동전을 하늘에 튕겨 올린 선우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16550693078085.png“재미있구나, 운명의 신. 이 베팅 받아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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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그르르르-! 테이블 위에 떨어진 동전이 요란하게 모서리를 흔들기도 전에, 선우진은 이미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번은 앞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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