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현장 부재 증명.2018.12.12.
‘그래, 지금 돌이켜 보면 처음 야마다가 색안경을 쓰고 나타났을 때부터 너무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굳이 그 방향을 보려 하지 않았던 것뿐이야.’
선우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그 큼직한 색안경을 쓴 야마다가 그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새삼 귓가를 울려 댔다.
‘……당신이 깊이 알 만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나. 사실 모르는 편이 더 좋지. 암, 이런 일은 모르는 것이 좋고말고! ……사실 이게 다 책임지는 것과 관련이 있네. 그 정도까지만 이야기해 주지, 젊은 선생.’
하필이면 바바와 고바야시를 동행으로 데려간 이유도 이제야 분명해졌다. 그 녀석들의 주먹이 필요할 터이므로. 납치, 협박, 폭행, 살인, 사체유기……. 끔찍한 단어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평범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외면할 발상들이고, 그래서 선우진도 잠시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누가, 여행을 가겠다는 사람을 보고서 살인부터 연상하겠는가. 하지만 동업자에게 끝까지 알리고 싶지 않은 야쿠자의 일이란, 결국 끔찍한 불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야마다는 오늘 몰래 다른 곳으로 가서 사람을 죽일 작정인 것이다. 그것도 꽤나 여러 명을…….
‘사이온지의 신분을 훔쳤던 일과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리려는 겐가? 혹시 모를 후환을 미연에 방지하고, 내 입지를 더욱 안전하게 굳히기 위해서……. 이 멍청이! 그런 게 무슨 책임을 지는 일이냔 말이다!’
걸핏하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하고, 사람을 죽여 입을 막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인간이지만 설마 정말로 그런 일을 결행하리라고는 애써 믿지 않았다. 이건 너무도 큰 범죄다. 아무리 상대 역시 야쿠자들이라고 해도, 한 손으로는 다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연쇄 살인의 여파가 커지면 곧바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될 것이 자명하다. 우유부단한 우가키가 그동안 눌러 왔던 화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히 크고 선정적인 사건이니까. 그 말은 즉 이번 야마다의 미친 행동 때문에, 조직원 전체는 물론 선우진 자신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안 돼……. 사이온지라는 가면을 쓰고 벌이는 이 연극을 여기에서 끝내 버릴 수는 없다. 이제 이건 더 이상 여흥이나 내 일신의 문제만이 아니야.’
18년을 기다렸다던 이일석과 박기홍의 초췌한 얼굴이 눈앞에 둥실 떠올랐다. 만약 선우진이 이번에 야마다가 저지를 사건과 얽혀 끌려가게 된다면, 어별교 사람들의 희망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보았다던 동족상잔의 미래 역시 고칠 수 없게 되리라…….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든 해봐야 해.’
선우진은 이를 꽉 깨문 채,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건 나진의 땅을 사는 것보다도 더 시급하고 위중한 일이다. 그 어떤 도박을 할 때보다도 더 많은 경우의 수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가 순식간에 다시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야마다가 어디까지를 제거의 범위로 잡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감안해야 할 변수들이 너무도 많았다.
“아이스 맨, 내 말이 그렇게 이상한가?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싶다는 마음이 이해가 안 돼?”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선우진을 향해 휴즈가 질문을 던졌다. 선우진은 얼른 고개를 젓고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아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네. 다만 당신이 느꼈을 압박에 대해 생각하니 조금 가슴이 먹먹해지는군. 나 같이 게으르고 야심이 없는 사람은 평생 느끼지 못할 종류의 고민이니까.”
다급하고 다급한 상황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욱 평온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을 그나마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니, 그날 사이온지 님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던 것도 같군요…….’ 따위의 증언이 나오면 끝장이다. 다행히도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내가 솔직해진 만큼 당신도 나에게 솔직해지면 안 되나, 아이스 맨?”
휴즈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발톱을 숨긴 사자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고. 나와 비견될 만큼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도 알지. 그 정도 능력도 야심도 없는 인간을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내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을 걸세. 사실 나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를 싫어하지. 뭔가 더럽고 찜찜하다고 느껴서.”
선우진이 한발 앞서 그가 할 말을 대신해 주자, 휴즈는 빙긋 웃었다.
“그것 봐, 역시 알고 있잖아. 당신은 정말 대단해. 숨겨 봐야 다 알아챈다고. 그래. 아직 빌리나 내 아내에게도 고백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말이지…… 감염에 대한 강박증이 있네. 이상하게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뭔가 나쁜 세균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아서 말일세. 매번 손을 비누로 씻어도 별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그런 일을 나에게는 용케 이야기해 주는군.”
“음…… 나도 지금 내가 이렇게 솔직해질 수 있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만큼 당신이 좋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당신은 저 신경 거슬리는 언론에 내 약점을 떠들어 댈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
“그 둘 다 맞는 거라고 하세나. 또는 한 개의 이유로 줄일 수도 있겠군. 바로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이지.”
선우진은 휴즈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차 사이온지 유우야로서 더 살아갈 때, 이 젊은 미국인 사업가와는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는 대단한 장점이 많다.
“상하이 사업에 투자도 하지 않는다면서, 친구라고 할 수 있나?”
장난기가 발동한 휴즈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선우진은 가방에서 어음책을 꺼내 오만 원이라는 금액을 적은 뒤, 휴즈에게 내밀었다.
“사업과 우정은 다르네, 휴즈. 당신을 좋아하지만, 나는 가 보지 않은 도시에 투자하는 사람은 아닐세. 대신 우선 이걸 줄 테니, 다음에 만날 때까지 최대한 불려 와 보게. 미국 돈으로는 삼만 달러 정도 되겠군. 내가 만족할 만큼 이득을 낸 후 그 사연을 들려주면, 그때는 정말로 큰 액수를 투자하지.”
어음을 바라보던 휴즈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괜찮게 들리는군. 공평해. 어이, 친구. 이 약속은 지켜야 하네. 머지않아 내가 깜짝 놀라게 해 주지!”
휴즈는 밝게 웃으며 선우진의 가슴을 툭 치고서 다시 공사관 직원들 쪽으로 걸어갔다.
“비행 잘하게. 응원하겠네.”
선우진은 손을 흔들어 준 뒤,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언제 다시 만날 거라는 기약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 동안에는 레이가 계속 다리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에에, 역시 도련님은 대단하시네요! 괜히 저희가 모시게 된 게 아니었어요. 저런 서양인들 말은 또 언제 그렇게 배우셨답니까?”
운전대를 잡은 도지마가 몹시 신기하다는 듯 감탄하며 물어 왔다. 야마다가 살인으로 사이온지의 이전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사실은 이 녀석에게조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의 수를 늘려 봐야 장차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뿐이다. 하지만 일단 용의자로 지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야마다가 돌아올 때까지 이 녀석들의 일정을 관리해야 할 필요는 존재한다. 그리고……. 야마다가 대체 어디까지를 죽여 없애려고 하는지, 그 부분을 먼저 파악해야만 했다. 선우진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날 송도 출장 도박소에 왔던 친구들은 지금 다들 뭘 하고 있나? 월미도로 나들이 온 사람들을 보니, 왠지 마음이 쓰이는군. 그 친구들도 다들 덥고 입맛도 없을 텐데.”
“뭐, 그냥저냥 한 집에 모여 살면서 무위도식합니다. 그나마 요즘은 지나 놈들 물러가라는 시위를 할 수 있어서 조금 밥값을 한다고나 할까요.”
도지마가 산 쪽으로 이어진 순환도로로 방향을 틀며 대답했다.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그래도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자기 조직원들에게까지 손을 댄 건 아니었구나.’
선우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언젠가부터 도박사가 보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답을 들었다면, 그때는 정말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안전이 확인되었으니, 이제는 앞으로 사나흘 동안의 행적만 보장될 수 있으면 된다. 야마다 구미의 조직원들 문제는 한결 간단해졌다. 남은 과제는 선우진 자신과 야마다, 그리고 바바와 고바야시가 인천에 있었다는 증명을 만드는 작업이다. 맨 앞의 것은 쉽다. 그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어슬렁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의 행적은…… 정말로 미친 듯이 머리를 써야만 남들이 신뢰할 만한 자료를 꾸며 낼 수 있다. 부르르릉-! 그러는 동안에도 도지마가 모는 다임러는 완만한 고갯길을 순조롭게 내달렸다. 도로의 양옆으로는 원래 이곳에서 살던 조선인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조성한 공원이 길게 펼쳐져 일본인들을 기다린다. 벚나무와 소나무가 빼곡하게 덮인 산속의 순환도로를 질주하여 사슴공원과 동물원을 다 지나자, 해안과 멀지 않은 곳에 문지기가 지키고 선 샛길이 나타났다. 다카하시 사장의 별장으로 이어진 개인용 도로다.
“사이온지 님! 와 주셨군요!”
선우진의 자동차가 별장 정원에 멈춰 서기도 전에, 메구미는 힘차게 두 팔을 흔들며 달려 나왔다. 별장 계단에서부터 뛰어오는 모습을 보니, 넓은 소매가 달린 얇은 비단 가운 안에는 해수욕복밖에 입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만, 메구미는 역시나…… 화끈한 아가씨다.
“어쿠!”
정작 메구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도지마가 공연히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선우진은 그렇게 유난을 떠는 녀석의 등짝을 가볍게 때렸다.
“뭘 그렇게 내외하느냐? 저런 옷차림을 처음 본 사람처럼. 월미도 해변 전체가 해수욕복 입은 여자들로 가득하건만.”
“아니……. 그렇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도련님. 조금 다릅니다요. 부잣집 아가씨가 저렇게 입고 있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것이기도 하고, 도련님의 여자니까 함부로 쳐다보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해서……. 하여간 부럽습니다.”
도지마는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리고 마치 더 훔쳐보는 것이 죄라도 된다는 듯 황급하게 자동차 뒤쪽으로 돌아가서 묵묵히 선우진의 짐을 꺼냈다.
“사이온지 님!”
넓은 정원을 단숨에 내달려온 메구미는 선우진의 팔을 꼭 껴안으며 물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도쿄 미츠코시에서 배달시킨 최신식 해수욕복이랍니다. 벌써 보름도 전에 받아 놓고 오늘만을 기다렸답니다!”
메구미는 자신의 집 가솔들이나 도지마의 시선 따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운의 깃을 열고 빙글빙글 돌며 자신의 새 해수욕복을 선보였다. 몸에 꼭 달라붙는 지극히 짧은 하얀색 원피스가 아찔하다. 남색의 줄무늬가 들어갔는데도, 그녀의 건강한 몸매는 고스란히 강조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조차 이만큼 과감한 해수욕복은 구경해 본 적이 없다.
“아아,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메구미 양.”
선우진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자, 메구미는 코끝을 찡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십니까? 정말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것이기는 하지만, 만약 사이온지 님께서 보시기에 그리 예쁘지 않다면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치마가 너풀거리는 붉은색 해수욕복도 있고, 위쪽이 더 깊게 파인 분홍색의 것도 있답니다! 또 이것 말고 다른 흰색 해수욕복은, 보석장식이 되어 있고요…….”
신이 난 메구미는 다양한 해수욕복의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작은 새처럼 종알종알 늘어놓았다. 선우진은 손을 들어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 어느 것을 입으셔도 다 아름답고 매력적일 테지만, 천천히 차차 보는 것으로 하지요. 여름은 길고, 지금 그 메구미 양의 모습은 충분히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니까요.”
진심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녀가 고른 신식 디자인의 해수욕복은 충분히 파격적이고, 댄스로 단련된 희고 곧은 다리는 태양 아래서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큭! 또 같이 이곳에 놀러와 주시겠다고요? 그럼 오늘 낮에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메구미는 그제야 비로소 부끄럽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특유의 웃음소리를 냈다. 그 해맑고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 때문에, 선우진은 도리어 조금 미안해졌다.
‘메구미 양. 그대는 나와의 오늘 만남을 위해 이만큼이나 열심히 준비를 했는데, 나는 그대에게만 집중하기가 어렵군요.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바로 눈앞에서 고혹적인 차림의 미녀가 밝게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데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계산들에 여념이 없다. 지금 야마다는 누구를 죽이기 위해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가 살해현장에 없었다는 가짜 증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대체 몇 명이나 죽어야만 야마다의 여행이 마무리되는 것인가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소름이 뙤약볕 아래에서도 오싹해질 지경이다.
“사이온지 님, 혹시 배가 고프신가요? 나가시 소면을 언제든지 드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었답니다!”
한동안 선우진에게 바짝 달라붙어 마냥 행복해하던 메구미가 그의 팔을 잡고 정원 안쪽의 그늘 아래로 당겼다. 연못 부근의 야외 식탁에는 대나무를 새로 깎아 만든 긴 국수용 이동로가 설치되어 있다. 위쪽에서 맑은 물과 함께 소면을 조금씩 흘려보내면, 식탁에서 그것을 젓가락으로 집어 장국에 담가 먹는 풍류 음식이다. 졸졸졸…… 대나무 통을 타고 흘러내린 차갑고 맑은 샘물이 테이블 끝 쪽에서 잔디 위로 떨어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기분은 들지만, 샘물까지 끌어올 정도면 나름 대단히 공을 들여 공사를 했음이 틀림없다.
“이 역시 저를 위해서 준비하신 겁니까?”
선우진이 의자에 앉으며 묻자, 메구미는 그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당연하지요. 제가 오늘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그리고 이 장국!”
메구미는 국수를 찍어 먹는 간장 장국 그릇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찡긋했다.
“여기에도 제 솜씨가 조금은 들어가 있답니다!”
“일전에 기차에서 맛보았던 그 진미 샌드위치처럼?”
짐짓 놀란 시늉을 하는 선우진을 보며, 메구미는 또 귀엽게 코끝을 찡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렇답니다, 사이온지 님! 이번에도 한번 맞춰 보세요. 과연 제가 뭘 했을까요?”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다카하시 집안의 가솔들은 얼음물에 담가 둔 국수를 잔뜩 가져와 대나무 통 위에 올릴 채비를 마쳤다. 선우진은 젓가락을 집으려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자동차 쪽을 돌아보았다. 도지마는 여전히 다임러의 옆에 서서 묵묵히 기다리는 중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메구미 양. 아무래도 날씨가 워낙 덥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군요. 바바가 몸살이 나서 대신 데려온 녀석인데, 첫날부터 너무 고생을 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어머! 바바 군이 왜…… 감기에! 그렇게나 건강해 보였는데.”
메구미가 조금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린다. 선우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병원에 보냈다가 쉬게 했으니 내일이면 나을 테지요. 하지만 이상하더군요.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메구미에게 양해를 구한 선우진은 자동차로 걸어가 도지마를 불렀다.
“어이, 도지마.”
“에? 옛? 저는 쳐다보지 않았습니다요, 도련님! 아예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귀만 열어 두고 있었는뎁쇼?”
도지마가 야쿠자답게 엉뚱한 걱정을 하며 미리부터 몸을 사린다. 선우진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걸 타박하려던 게 아니다. 이 더운 날 나 혼자 풍류를 즐기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서 온 것이지.”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런 마음은 알지만, 어쨌든 여름이잖나. 며칠쯤 풍류를 즐기며 보양을 해도 좋을 테지. 자, 이것을 줄 테니 야마다 파 사람들을 다 모아서 지금 바로 시키시마로 가서 마음껏 마셔라. 내일 저녁까지는 딱히 네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없다.”
선우진은 지갑에서 한 뭉치의 지폐를 꺼내 녀석에게 건넸다. 야마다 구미의 조직원들이 전부 다 해서 몇 명이나 되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 정도면 일주일 이상이라도 시키시마의 유곽에서 아예 살다시피 할 수 있을 만큼의 액수다.
“아, 아니……. 도, 도련님! 이, 이만큼을 수, 술값으로 쓴다는 건……, 제가 무슨 금광 주인도 아니고……. 오, 오야붕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요!”
한눈에도 천 원은 훌쩍 넘을 돈을 받아 쥔 도지마는 얼떨떨해져서 말을 잘 잇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커다란 유혹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녀석의 이성이 잠시 마비된 틈을 타서, 선우진은 빠르게 밀어붙였다.
“아무 문제도 안 된다. 내가 보냈다고 하면 되니까. 내가 하도 성질을 부리고 억지로 등을 떠밀어서 할 수 없이 갔다고 하려무나. 자, 어서! 간만에 실컷 놀고 오너라. 아, 돌아갈 때는 그 다임러를 타고 가도 좋다.”
“다임러를…… 저 혼자 몰고 가라굽쇼? 도, 도련님은요?”
너무도 뜻밖의 제안을 받은 도지마가 점점 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선우진은 턱으로 작게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야, 여기에서 자고 메구미 양과 함께 내일 패커드를 타고 돌아가면 되지. 집으로 가면 또 캐딜락이 기다리고 있고 말이다.”
“아아…… 여기에서 주무십니까?”
도지마는 마른 침을 꼴딱 삼키며 정원 안쪽의 메구미 쪽을 슬며시 돌아봤다. 이놈, 지금 꽤나 야한 상상을 했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우진은 무조건 긍정했다. 지금은 이 녀석에게 조직원들의 행적을 맡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 어째 그렇게 될 것 같구나.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느냐?”
“에…… 야마다 구미 사람들 전부 다 모아서…… 시키시마로 가서 진탕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도지마가 대답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에게 다시 한 번 분명히 못을 박았다.
“그래. 맞다. 게이샤들도 전부 다 불러서 진탕 놀려무나. 내일 내가 시키시마로 찾아갈 테니 그때까지 푹 쉬어라. 한 녀석이라도 빠졌다가는 실망할 거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도지마는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서 재빨리 다임러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
“휴우…….”
한 가지 숙제를 겨우 마친 선우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이제부터 그 자신과 문제의 나머지 세 말썽꾸러기들을 위한 거짓 증명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들이 살인사건과 전혀 무관한 곳에 존재했다는 증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