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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토호를 길들이는 방법. (117/459)

117. 토호를 길들이는 방법.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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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00542625.png“아이쿠! 사이온지 님! 참으로 격조했습니다!”

선우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구로즈미는 그리운 십년지기를 만난 사람처럼 격하게 반가움을 표현했다.

16550700542631.png“아아, 구로즈미 중추원 의관 후보. 그동안 안녕하셨소이까?”

선우진은 초장부터 구로즈미의 욕망에 불을 지르며 손을 내밀었다. 구로즈미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깊숙이 조아린 채 두 팔을 뻗어 선우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16550700542625.png“의관 후보라니, 황송한 말씀! 저야 그저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부하는 구로즈미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린다. 중추원 의관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이는 모양이다.

1655070054264.png“음!”

선우진의 뒤쪽에 서 있던 바바는, 요정에 가득 차 있는 분 냄새를 맡으며 흐뭇한 탄성을 흘렸다. 또다시 대전의 게이샤들과 진탕 술을 마실 생각에 이 녀석도 구로즈미 못지않게 흥분한 모양새다.

16550700542625.png“안으로 드시지요. 제 딴에는 전심전력을 다해 준비를 해 보았습니다.”

구로즈미는 술상이 차려진 2층의 특실로 선우진을 안내했다. 곱게 단장한 채 줄지어 무릎을 꿇고 기다리던 게이샤들이 그에게 절을 올린다.

16550700542648.jpg“어서 오십시오, 사이온지 님.”

애교 가득한 낭랑한 목소리가 좁은 복도를 타고 작게 메아리쳤다. 향기로운 분 냄새와 야릇한 조명, 고급스런 실내 장식, 그리고 눈을 어지럽히는 형형색색의 기모노까지. 어지간한 사내라면 누구라도 혼이 빠질 만한 상황이다.

16550700542625.png“대전에서 이름을 좀 날린다는 게이샤들은 오늘을 위해 다 끌어모았습니다.”

선우진을 상석으로 모신 구로즈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게이샤들을 가리켰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그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알 수 있다. 오늘의 이 연회는 전통적인 강호라 할 인천의 최고급 요정에 못지않을 만큼 화려하고 호사스럽다.

1655070054264.png“저, 정말입니다. 다 예뻐! 전부 다!”

말석에 앉아 게이샤들을 바라보던 바바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잠시 후 들어온 술상의 안주 역시 참으로 대단하다. 바다와는 거리가 먼 이곳에서 커다란 도미와 이세새우 요리라니, 선우진은 술잔을 잡고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16550700542631.png“한창 사업에 바쁠 구로즈미 의원에게 공연한 폐를 끼친 것만 같소이다. 천안의 옥답을 넘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16550700542625.png“무슨 그런 말씀을! 과거지사를 자꾸 언급하시면 공연히 저만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구로즈미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16550700542625.png“대전의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는지라 제 사업에 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이온지 님. 매일매일 이렇게 모시라고 하신대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은근히 재력을 과시하는 구로즈미의 표정은 밝고 기쁨으로 가득 차 보인다. 철도 물류 중심지인 대전의 토지를 일찌감치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말로 요즘 꽤나 큰돈을 벌어들이는 중이리라. 선우진도 금광에서 어느 정도의 이익이 발생하면, 그 돈으로 대전에 투자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다.

16550700542631.png“다행이오, 구로즈미 의원. 앞으로 총독부를 위해 많은 기여와 큰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니, 지금 미리 재정적인 기반을 다져 두는 일은 중요하지요.”

16550700542625.png“하! 참으로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 이 가슴 속에 새겨 두고 한층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선우진의 칭찬을 받은 구로즈미가 탁자에 닿을 듯 고개를 수그렸다. 천만 원 가치의 금광까지 딸린 350정보의 땅을 공짜로 넘긴 사람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선우진이라고 해도 가슴 한쪽이 조금은 뜨끔해 왔다. 이제부터 작은 보상으로 이 토호를 미리 달래 놓아야 한다.

16550700542631.png“안 그래도 일전에 총독부에 들렀을 때 그곳의 고위 관료들과 구로즈미 의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소이다.”

술잔을 비운 선우진이 넌지시 운을 떼자, 구로즈미의 눈은 일순 욕심으로 번뜩였다.

16550700542625.png“초, 총독부에서 제 이야기를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어, 어떤…….”

16550700542631.png“그야 뭐 워낙 총독부에 대한 충심이 뜨거운 분이시니, 당연히 덕담이 주를 이룰 밖에. 물론 내가 그런 분위기로 몰고 가기는 했지만…….”

잠시 말꼬리를 늘이던 선우진이 눈을 찡긋하며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했다.

16550700542631.png“어쨌든 이야기가 잘 되었으니, 가을이 지나기 전에 총독부에서 공로패 수여를 위해 연락이 올 겝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인 셈이지요.”

16550700542625.png“오오! 감사합니다, 사이온지 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공로패라니…….”

조아리는 구로즈미의 머리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간다. 지주회 평의원으로서 유공장은 이미 몇 번이나 받아 본 적이 있지만, 공로패는 또 처음이다. 단독으로 총독의 집무실에 초청받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16550700542625.png“저기, 그런데 본격적인 시작이라 하심은…….”

구로즈미는 뛰는 가슴을 손으로 짚어 겨우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선우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16550700542631.png“그야 물론 중추원 의관 자리에 오르기 위한 계획이 아니겠소이까, 구로즈미 의원. 이제 총독부에서 귀 의원을 인식하게 되었으니, 남아 있는 여섯 개의 공석 중 한 자리에 구로즈미 이타로라는 이름을 넣어 봅시다. 지금처럼 서두른다면 1년까지 걸리지도 않을 테지.”

16550700542625.png“그, 그럼 시기가 더욱 당겨지는 겁니까? 참으로 분에 넘치는 영광! 이 구로즈미, 사이온지 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구로즈미는 감격한 표정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렇게 천안과 진천 땅 거래는 완전히 마무리가 지어졌다. 비록 대행 체제이기는 하지만 총독이 직접 수여하는 공로패까지 받고 나면,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고 해도 차후에 그 땅에 대해서는 더 말을 꺼낼 수 없을 터다. 선우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구로즈미의 부푼 가슴에 한 번 더 회오리바람을 불어 넣었다.

16550700542631.png“그리고…… 중추원의 고문인 이지용 백작과도 만나 구로즈미 의원을 후보로 소개해 두었소. 이지용 백작도 알아듣는 눈치였소이다.”

16550700542625.png“어느새 이지용 백작까지! 미천한 저 같은 사람을 위해 그리도 바삐 움직여 주셨습니까? 아아, 다행입니다! 사이온지 님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선생께서는 마치 메마른 제 인생에 내리는 단비와 같습니다. ……그,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 아니……. 그보다도 제가 선물을 좀 준비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흥분과 불안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진 구로즈미의 말이 많아지고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16550700542631.png“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소.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지용 백작과는 비록 연령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막역한 사이니까. 내가 다 알아듣도록 말씀드렸고, 백작께서도 아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조하셨소이다.”

선우진은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16550700542631.png“이지용 백작도 구로즈미 의원을 한 번쯤 직접 만나고 싶어 하시는 눈치였으나, 아무래도 연세가 연세다 보니 요즘 통 몸이 좋지 않으셔서……. 아쉽지만 회합은 후일을 기약해야 할 모양입니다.”

물론 이지용과의 만남에서 구로즈미 이야기를 꺼낼 여유 따위는 없었지만, 선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허풍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선우진 자신이 다리를 놓지 않으면 그 매국노와 이 토호가 만날 일은 없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두문불출하고 있는 이지용은, 당분간 낯선 일본인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피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6550700542625.png“허어! 그렇게 안타까운 일이……. 앞으로 신사에 들를 때마다 반드시 이지용 백작의 쾌유를 빌겠습니다.”

선우진의 말을 들은 구로즈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가슴 아픈 표정을 연기했다. 사실 중추원에 가입하는 문제만 아니라면 그깟 조선인 늙은이 하나쯤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6550700542631.png“그렇게 모든 것이 착착 순서를 밟아 나가고 있으니, 구로즈미 의원은 마음 푹 놓고 그저 성실히 준비만 하고 계시면 됩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사이토 총독 각하와 한 포커 테이블에 앉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지요. 잊지 마시오, 그때가 정말 잘해야 하는 승부처라는 것을.”

선우진이 미리 축배를 드는 것처럼 술잔을 들어 올려 보이자, 구로즈미는 몹시 멋쩍어하며 입을 뗐다.

16550700542625.png“저어, 그것이……. 아뢰기 부끄럽지만, 일전에 사이온지 님께서 일러주신 뒤로 저 역시 포커에 관하여 조금은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사이온지 님께 가르침을 받기 전에 최소한의 기본 정도는 알아 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확실히 성공한 악인답게 부지런하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 굽힐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선우진은 천천히 손뼉을 치며 짐짓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00542631.png“오오! 좋은 자세요! 그래, 미리 공부를 해 보니 포커라는 것이 어떻습디까?”

16550700542625.png“주변에서는 다들 제게 소질이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 입문의 단계여서…….”

구로즈미는 말을 아끼며 방구석을 슬쩍 돌아본다. 거기에는 자개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굳이 열어 보지 않더라도 그 안에 포커와 관련한 물품들이 들어 있으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16550700542631.png“어디 얼마나 소질이 있는지 내가 한번 봅시다! 카드를 가져오라 이르시오.”

선우진이 술병과 안주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테이블을 두드리자, 구로즈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얼른 나무 상자를 열었다.

16550700542625.png“괜찮으시겠습니까, 사이온지 님? 먼 길을 와 주신 귀빈께 아직 술도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한 터라, 이렇게 번거로운 부탁을 드리는 것이…….”

두 손으로 공손히 트럼프 카드를 건네며 구로즈미가 물었다. 선우진은 손사래를 치고 화려한 셔플을 선보였다.

16550700542631.png“번거롭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 사이에! ……그리고 말이오, 구로즈미 의원…….”

능숙하게 트럼프 카드들을 섞던 선우진이 몸을 살짝 기울여 게이샤의 품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16550700542631.png“포커라는 것은 이처럼 아리따운 여인들과 향기로운 술이 있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즐길 수 있는 놀이라오. 아니, 어쩌면 이런 때에 더욱 재미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면에서 삭막하기만 한 구식 도박과는 다르다고 할까. ……안 그런가?”

선우진이 옆자리의 게이샤와 시선을 마주치며 싱긋 웃자,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소매로 입을 가린다.

1655070062233.jpg“소첩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만, 나으리께서 그러시다고 하면 그런 것일 테지요.”

16550700542631.png“후후후, 대답도 예쁘게 하는구나.”

선우진은 게이샤의 볼을 살짝 쓰다듬은 뒤, 구로즈미의 앞으로 카드를 밀어 놓았다.

16550700542631.png“자! 구로즈미 사장, 돈부터 꺼내 놓고 한번 공부하신 대로 카드를 돌려 보시오. 포커는 테이블에 올려 둔 돈으로 하는 놀이니까.”

16550700542625.png“아! 아아……. 그 판돈이라 할지, 준비금을…… 얼마나 올려야 할까요? 경성의 명사 분들이 어느 정도 규모에서 즐기시는지도 전혀 모르는지라.”

나무 상자 안의 현금 뭉치를 꼭 쥔 구로즈미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선우진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16550700542631.png“좋은 질문이오!”

16550700542625.png“조, 좋은 질문입니까?”

16550700542631.png“그렇소! 도박의 밑천이라는 것은 언제나 넉넉하면 넉넉할수록 좋은 것이지만, 주변과 너무 큰 차이를 보인다면 그 또한 풍류에서 벗어난 모습일 테지. 인천이나 경성의 명사들은 보통 3천 원에서 1만 원 사이의 밑천으로 포커를 합니다. 구로즈미 의원께서도 그 언저리를 생각하시면 될 게요.”

16550700542625.png“……꽤나 크군요!”

하룻밤 한 사람당 만 원의 판돈이 오간다는 말에, 구로즈미는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그만한 규모의 친선도박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이권거래가 있으리라는 계산을 이미 마친 것이다.

16550700542631.png“으음……. 작은 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돈 자체보다는 그 승부를 즐겨야 하오. 사이토 총독께서는 포커 테이블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시는 분이니 말이외다. 물론 실력이 너무 형편없으면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서 아예 논외로 분류되어 버리겠지만.”

선우진이 고등보통의 선생이 수업을 할 때처럼 진지한 투로 일러주자, 구로즈미는 긴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16550700542625.png“너무 못해도 안 되고, 또 너무 이기려고 욕심만 내서도 안 된다니…… 어렵군요.”

16550700542631.png“말로 하자면 까다롭지만, 다음의 세 가지만 명심한다면 사이토 총독 각하께 밉보일 일은 없을 것이오. 첫째, 상황 판단!”

선우진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16550700542631.png“포커는 내 손안에 들어온 패만 가지고 하는 도박이 아니올시다. 상대의 패가 무엇일지 예측하고 거기에 맞춰 돈을 거는 것이 어쩌면 더욱 중요하지요. 그러니 술잔을 기울이고 대화를 나누면서 쉼 없이 상대들을 떠봐야 하는 게요. 그렇게만 하면 큰 실패는 피할 수 있소. 둘째는…….”

선우진은 검지에 이어 중지까지 세우고 말을 이었다.

16550700542631.png“돈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 총독 각하께서는 돈을 많이 따는 인간보다, 큰 승부 앞에서 얼마나 대범하게 자신을 던질 수 있는지를 보시는 분이시오. 물론 그 던지는 이유 또한 논리적이어야 하겠지요.”

16550700542625.png“논리적으로 대범하게 던진다……. 알 것도 같습니다.”

구로즈미는 정 자세를 취한 채 눈을 껌뻑거리면서 열심히 경청한다. 선우진이 허락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만년필을 꺼내 수첩에 적어 둘 기세다. 선우진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서 근엄하게 세 번째 손가락도 마저 펴 보였다.

16550700542631.png“세 번째는 예와 풍류! 지금껏 까다롭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지만, 어차피 포커는 놀이! 승부에 몰두하는 바람에 예의를 잃거나 풍류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실격이오. 아무리 머리를 써서 돈을 따더라도 소인배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을 테지.”

16550700542625.png“끄으음……. 어쩌면 그것이 가장 까다로운 조건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워낙 촌구석을 전전하던 미욱한 인간이어서…….”

16550700542631.png“그게 무슨 말씀이오, 구로즈미 의원! 그대가 얼마나 노력하고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둬왔는지, 이 내가 잘 알고 있거늘! 구로즈미 의원은 중추원 의관 후보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재목이오! 부족한 것은 단지 약간의 세련미랄까. 그 부분은 지금부터 나와 함께 차차 가꿔 나갑시다.”

16550700542625.png“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각각 5천 원씩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구로즈미는 선우진의 앞에 먼저 100원 지폐 한 다발을 턱 올려놓고, 자신의 앞에도 한 뭉치를 두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 가르쳐 주는 자리이니만큼 선우진의 판돈까지 자신이 대겠다는 태도다.

16550700542631.png“아니, 아니. 도박을 남의 돈으로 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되질 않소. 그래서야 진검승부의 날카로움이 사라져 버리지.”

선우진은 곧바로 구로즈미의 돈을 되돌려 준 뒤, 서류 가방에서 자신의 돈 만원을 꺼냈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구로즈미는 또 호들갑스럽게 감탄했다.

16550700542625.png“아하! 벌써 하나 또 배웠습니다, 사이온지 님!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돌려 보겠습니다.”

16550700542631.png“그러시오. 아직 익숙지 않다고 했으니 작게 시작합시다. 참가비 100원에 풀 배팅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소?”

선우진이 지폐 한 장을 중앙으로 밀어 넣으며 묻자, 구로즈미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50700542625.png“네! 네! 100원을 먼저 태우고, 그 뒤에는 여기 깔린 만큼 돈을 걸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16550700542631.png“오오, 훌륭하군! 미리 공부한 보람이 있소이다!”

선우진은 어린아이를 다루듯 구로즈미를 추어올렸다.

16550700542625.png“하, 하하! 부끄럽습니다, 사이온지 님!”

구로즈미는 쑥스럽게 웃으며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선우진의 몫으로 돌아온 카드는 세 장. 당연히 7카드 스터드 방식이다. 텍사스 홀덤은 어디까지나 사이토 총독과 친밀한 일부 유력인사들 사이에서만 성행 중이므로. 슥-! 구로즈미는 세 장의 카드 중 클로버의 3을 오픈했다.

16550700542631.png‘8페어를 감춰 두고 3을 오픈하는 것을 보면, 나름 배우고 연습했다는 것이 헛말은 아니었나 보군. 기본은 알고 있어.’

여전히 긴장으로 가볍게 떨리는 구로즈미의 손끝을 보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선우진의 패 세 장은 킹과 7, 그리고 4. 선우진은 다음 패를 만들어 가기 위해 7을 공개했다.

16550700542625.png“사이온지 님이 우세하시군요. 그럼 그쪽으로 먼저 돌리겠습니다.”

구로즈미는 포커의 규칙을 설명하는 딜러처럼 일일이 설명을 붙여 가며 자신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를 드러내려 애썼다. 슥-! 슥-! 선우진의 앞에 하트의 8이, 구로즈미의 앞에는 잭이 떨어진다. 7의 옆에 붙은 8을 보자마자 구로즈미의 눈빛에는 놓친 트리플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16550700542625.png‘아뿔싸! 내가 8을 냈더라면 저 8도 고스란히 내 것이 되는 판이었는데…….’

비록 소리 내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흔들리는 눈동자만 보아도 구로즈미의 아쉬움은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도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고, 설령 전문 도박사라고 해도 판이 커졌을 때면 종종 저지르는 잘못이다. 선우진은 막 자신의 앞에 떨어진 하트 8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웃었다.

16550700542631.png“이것이 필요한 모양이구려, 구로즈미 의원. 왜 그렇지? 8이라도 한 장 더 숨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7과 9? 그것도 아니면 하트 두 장을 감추고 있소?”

16550700542625.png“헉! 그, 그것을 어찌…….”

구로즈미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우진은 천천히 도리질을 한 뒤 담배를 피워 물었다.

16550700542631.png“미인의 뒤태를 훔쳐보듯 아쉬운 눈빛으로 남의 패를 노려보고 있으니, 당연히 읽힐 밖에!”

16550700542625.png“보였습니까? 제 눈빛이?”

16550700542631.png“누구라도 읽을 수밖에 없을 거외다. 그러니 일단 판이 시작되면 마음을 비우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시오. 이렇게! 스스로를 가부키의 배우라고 생각하면서!”

선우진은 과장된 손짓을 곁들여 깊이 숨을 들이켜는 시늉을 해 보였다.

16550700542625.png“흐으음-!”

구로즈미는 시키는 대로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켜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16550700542625.png“어쨌든 판이 시작되었으니, 200원을 더 걸겠습니다.”

16550700542631.png“아니, 아니! 그렇게 조공 바치듯이 돈을 거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포커는 어디까지나 도박! 도박판에서는 누구나 대등하게 싸우는 게요. 예의를 갖춰 대화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지!”

선우진이 곧바로 또 잔소리를 하자, 구로즈미의 이마에는 이내 식은땀이 맺혔다.

16550700542625.png“제게 포커를 가르쳐 준 아우 놈들은 전부 이렇게 하던데…….”

그야 야쿠자들이나 그 밑에서 일하는 도박사들에게서 배웠으니, 폭군인 당신 앞에서 기가 죽어 그랬을 테지……. 선우진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16550700542631.png“총독 각하가 아니라 황가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경우라고 해도 포커에서 베팅을 할 때에는 그냥 돈을 중앙으로 툭 던지면 됩니다, 구로즈미 의원. 접었던 팔꿈치를 펴면서 손목을 이용해 이런 식으로, 이렇게! 자, 다시 해 보시오!”

선우진은 능숙하게 두 장의 100원 지폐를 중앙에 던져 넣으며 시범을 보여 주었다. 긴장하고 기가 죽어 있던 상황 속에서도 그 모습만은 멋지게 여겨졌는지, 구로즈미는 헤죽 웃으며 선우진의 행동을 따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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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00542625.png“오오, 멋지십니다! 사이온지 님! 관록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이, 이렇게 말씀이십니까?”

16550700542631.png“좀 더 과감하게! 게이샤들에게 팁을 뿌리듯이! 다만 상대방의 밑천과 섞이면 안 되니까 각도를 조금 낮추어서!”

그 후에도 한 시간 이상을 선우진은 군대의 조교보다도 엄격하게 구로즈미를 휘어잡고 연습을 시켰다. 구로즈미는 오로지 중추원 의관이라는 일념 하나에 눈이 멀어서 그 타박을 잘도 견뎌낸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 대던 선우진이 문득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6550700542631.png“자아, 이 정도면 기본은 되었는데……. 헌데 이런 식으로 해서는 자꾸 맥이 끊겨 안 될 것 같소, 구로즈미 의원.”

16550700542625.png“아!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이온지 님! 부족한 머리지만 최선을 다해서 배우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구로즈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면서 일단 고개를 숙이고 애원부터 하기 시작했다. 선우진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면서 웃었다.

16550700542631.png“포기라니!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거였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요. 다만 좀 더 많은 인원들과 얽혀 실전에서 진검승부를 통해 배워야 그나마 속도가 날 것 같다는 말이었소. 어디…… 대전에 그럴 만한 사람들이 있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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