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 눈에는 눈, 목숨에는 목숨. (143/459)

143. 눈에는 눈, 목숨에는 목숨.2019.04.24.

난데없이 이 시점에 웬 선물을? 하도 급작스런 변화여서 선우진조차도 조금 놀랐다. 펄펄 뛰다가 갑자기 선물이라니…… 이건 영 모양새가 이상하다. 그는 정중하게 손을 들어 사양의 의사를 밝혔다.

16550707671805.png“아니. 이제 됐습니다, 선물은. 제가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그렇게 선물을 주시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16550707671811.jpg“그냥 받아! 감히 내 마음에 빚을 지게 만들 셈이냐?”

카가와는 호통을 치면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이 상황이 이치에 맞고 안 맞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식의 태도다.

16550707671805.png‘뭐지, 이 사람……?’

어처구니가 없어진 선우진은 카가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화를 냈던 것이 미안해서 선물로 보상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선물을 줄 핑계를 만들려고 화를 냈던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사이토 사장조차도 그와 한패인지,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연신 고개만 끄덕여댔다.

16550707671811.jpg“중국 내 군벌의 싸움에서 장쭤린은 열세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국공합작으로 아주 큰 세력을 만들었고, 지난 4월에 상하이에서 공산당을 배신하면서 단번에 최고의 군벌이 되었지. 네놈도 알겠지만 이제는 장쭤린을 치기 위해 언제 북벌 길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아.”

카가와가 대뜸 중국 정세의 이야기를 꺼냈다. 선우진은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16550707671805.png“지금 이건 한담입니까, 아니면 선물입니까?”

16550707671811.jpg“한담이면서 선물이다.”

16550707671805.png“선물은 이미 충분히 받았다니까요, 카가와 중장. 오늘만 해도…….”

16550707671811.jpg“시끄럿! 고집 피우지 마라, 화족 애송이! 네놈이 내 고집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버럭 소리를 질러 선우진의 입을 다물게 한 뒤, 카가와는 다시 태평하게 말을 이어갔다.

16550707671811.jpg“……에, 장제스의 국민당군 본거지가 여기 난징. 그리고 장쭤린의 영향력이 닫는 남방 한계는 여기 이 위의 쉬저우. 두 도시의 거리가 불과 200킬로미터 정도야. 천천히 걸어서 전진을 한다고 해도 일주일 내로는 반드시 닿을 만큼 가깝지.”

카가와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지도를 그려 가며 설명을 계속했다. 더 이상 말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선우진은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16550707671811.jpg“이 둘은 싸우게 될 수밖에 없어, 장제스 쪽에서 원하는 싸움이야.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장쭤린을 더 이용해야 하니까 그를 지켜야 해. 그래서…….”

카가와는 대뜸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다.

16550707671811.jpg“내년 4월에 육군은 2차 출병을 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때는 훨씬 더 대규모 병력이 장기 체류를 하게 될 거야. 우리 쪽에서 산둥성을 점령해 두고 둘 사이를 갈라 놓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니 말이지. 교전도 감안한 출병이다.”

16550707671805.png“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는 건가요.”

중국의 지명도 잘 모르겠고 정세도 환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선우진은 다 알겠다는 듯 진지하게 대꾸했다. 카가와도 근엄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07671811.jpg“음, 결국은 시기의 문제였다고 보아야 하겠지. 덕분에 지원을 해 줘야 하는 우리 해군 역시 내년 여름까지는 발이 딱 묶여 버렸다. 대규모 해상 훈련조차 마음대로 하지 말고 대기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 뭐, 육군이 5천 명이나 파견되는 것이니 내각에서는 신경이 바짝 곤두설 만도 하지만.”

술잔을 내려놓은 카가와가 선우진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16550707671811.jpg“이 극비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주는 새 선물이다. 알아들었을 테지?”

물론 알아들었다. 내년 4월에 파병이 현실화된다면, 소문을 타고 그 두어 달여 전부터 미두 시장과 주식 시장이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전쟁의 공포가 만들어 내는 여파이니까. 운용할 수 있는 자금만 갖춰진 상태라면, 이 정보 하나만으로 짧은 기간 동안 수천의 이익을 넘볼 수 있다.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그러니 카가와가 들려준 이 내년 4월의 계획은 실로 어마어마한 투자 조언이다. 불과 한 달 전에 긴급하게 일러주는 마츠이의 정보와는 급 자체가 다르다.

16550707671805.png“쌀값이 천정부지로 뛰겠군요. 가뜩이나 불황이 심각하다고들 하는데…….”

선우진이 진지하게 중얼거리자, 카가와는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16550707671811.jpg“그렇게 되겠지, 주가는 하락할 테고. 다분히 장기전이 될 게다. 적어도 2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중국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일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16550707671805.png“음.”

그때까지 소매에 손을 넣은 채 잠자코 듣던 사이토 사장도 끼어들어 한마디를 보탰다.

16550707696299.jpg“만약 중국의 군벌이 통일된다면, 그 다음 총구가 돌아올 방향은 우리 일본 쪽이 되겠지. 비록 지금은 다들 이쪽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차츰 가면을 벗고 달려들게야. 아마 만주횡단 철도가 가장 먼저 공격받지 않을까?”

사이토의 중국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의심과 적의가 가득하다. 그들에게 외아들을 잃은 이 남자로서는 당연한 일이리라.

16550707671805.png‘그랬군. 6개월 뒤에는 또 출정을 해야 해서…….’

선우진은 이제야 카가와가 왜 굳이 화내는 연기까지 해 가면서 또 선물을 해 주려던 건지 알게 되었다. 말로는 아무 걱정 없다고 하지만, 이 남자 역시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6550707671805.png“그렇다면 카가와 중장께서도 또다시 긴 원정에 오르셔야 하는 겁니까?”

선우진이 묻자, 카가와는 마시던 술을 뿜을 만큼 유쾌하게 웃었다.

16550707671811.jpg“헛! 이 녀석! 내 걱정을 해 주는 건가? 큭, 나는 아무 사고 없이 무사귀환할 테니까, 어떻게 돈을 굴려서 얼마나 벌지 그 계획이나 짜 둬라. 그리고 좀…… 기뻐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말이야! 금세 투자액을 몇 배로 불릴 수 있는 정보를 들은 놈이 어떻게 그리도 무덤덤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

카가와는 다시 봐도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16550707671805.png“그런 계산은 이미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불행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16550707671811.jpg“흥! 네놈이 나서지 않더라도 어차피 누군가는 전쟁으로 배를 불리게 되어 있어. 이왕이면 나와 가까운 녀석이 차지하는 편이 나로서는 훨씬 낫지. 그러니 이럴 때에는 단호하게 그저 벌어들이는 것에만 집중해. 그래야 선물을 준 나도 보람이 있지. 아, 그리고…….”

카가와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16550707671811.jpg“아까 그 나진 건은 네놈이 귀여워서 그냥 한번 놀려 본 거였다. 굳이 아까운 시간 낭비해 가며 그 먼 곳까지 오가지 말고, 그냥 올랐다 싶을 때 한 번에 넘겨 버려.”

16550707671805.png“아니, 그렇게까지 뻔뻔해질 수는…….”

선우진이 손사래를 쳐 봤지만, 이번에도 카가와는 막무가내다.

16550707671811.jpg“아니, 아니! 사이토가 했던 말이 맞아. 해안이 아니라도 나진은 넓다. 그 뒤로 이어진 만주와 중국 땅은 더더욱 넓지. 2차 출병이 정해진 시점에 이미, 만주철도의 이익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어. 내가 선물을 주던 때와는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그놈들 아마 내년부터는 더더욱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일 거다. 그러니 네 놈도 시간을 아끼고 이익은 챙겨라.”

16550707671805.png“그렇습니까. 정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선우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뗐다.

16550707671805.png“그 3만 원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모두 조국을 위해 쓰도록 하겠습니다.”

16550707696299.jpg“훗, 역시 유우야 군일세.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보았나, 카가와? 실로 배포가 다른 남자 아니냐?”

사이토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랑을 하려 할 때, 카가와가 얼른 끼어들어 선우진에게 소리를 질렀다.

16550707671811.jpg“뭔 소리야! 조국이니 뭐니 거창한 이야기하기 전에, 여기에 한 번이라도 더 들러서 사이토와 바둑이라도 두란 말이다! 이 불쌍한 노인네가 늘그막에 겨우 마음에 쏙 드는 놈을 하나 만났는데…….”

16550707696299.jpg“카가와! 누굴 불쌍한 노인이라고 부르는 건가?”

사이토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카가와의 말을 끊었다. 조선 최고의 부호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선우진에게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카가와는 당당한 표정으로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16550707671811.jpg“네가 차마 못하는 이야기를 내가 나서서 거들어 줄 때는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다, 사이토!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나? 부녀가 모두 이놈에게 홀딱 빠져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으면서! 그리고 이 정도 선물을 줬는데, 이만한 요구도 못한단 말인가? 당장 혼례를 올리고, 들어와서 살아 달라는 것도 아니잖나!”

16550707696299.jpg“허! 너야말로 그게 무슨 무례한 소리냐, 카가와! 선물에 대가를 바란다면 그건 거래라고 하는 게다!”

사이토는 따끔하게 카가와를 나무란 뒤, 선우진을 돌아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16550707696299.jpg“이 친구 이야기는 신경 쓸 것 없네, 유우야 군. 부담가질 이유도 없고.”

16550707671805.png“부담이라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두 분이 이렇게 아껴 주시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제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도 잘 알고 있고요. 다만 아직은 하고 싶은 일이 있기에 언행을 삼가는 중입니다.”

선우진이 겸손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카가와도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비웠다.

16550707671811.jpg“확실히…… 네놈은 그릇 자체가 다르구나. 처음 사이토가 네 칭찬을 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나도 네놈이 마음에 들어 버렸다.”

16550707671805.png“그렇습니까?”

16550707671811.jpg“음, 실은 내가 말이지. 오늘 분위기를 좀 몰고 가 봤던 거다. 사내놈이라면 누구나 얼이 빠져서 실실거리도록. 돈, 권력, 미인! 남자들이 바랄 것이 더 뭐가 있겠나? 그러니 보통은 이 정도에서 은근 슬쩍 유키와의 혼담을 굳히려고 엉겨 붙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네놈은 아첨하는 기미조차 없어.”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카가와가 물었다.

16550707671811.jpg“그래서 더 멋지기는 하지만, 슬슬 궁금해지는군. 대체 뭘 더 어떻게 해 보고 싶기에…… 이렇게 지극한 행복이 바로 손닿을 곳에 있는데, 자꾸 더 멀리 가 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말이야. 네놈의 꿈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냐?”

16550707671805.png“그렇다고 믿습니다.”

선우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할 때 빛나는 그의 눈빛만으로도, 사이토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그날 새벽 사이토 저택의 연회가 끝난 뒤, 선우진은 야마다 상점을 찾았다. 사방은 고요했고, 가로등은 깨져 있었다. 아마도 야마다 파의 조직원들이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망가뜨려 둔 것이리라.

16550707757878.png“여러모로…… 끔찍하다, 도련님. 보기에…… 좋지는 않을 거야. 이런 걸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특히…….”

다임러의 문을 열어 준 바바가 만감이 교차하는 어조로 말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07671805.png“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들어가자.”

숨이 끊긴 사람의 육신은,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고, 며칠 전 나진에서도 선장이 처참하게 죽는 광경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봤다. 물론 참수된 야마다의 시신은 그 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겠지만.

16550707757878.png“네! 후우우…….”

바바는 침울한 한숨을 삼킨 뒤, 결심하듯 상점 문을 밀고 들어갔다. 상점 내부에 도열해 있던 야마다 파의 조직원들이 선우진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운신의 자유를 주고, 오야붕의 시신을 되찾을 수 있게 해 준 남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후우욱-! 상점 진열대를 지나 내실 안으로 들어서자, 며칠간 쌓여 왔던 시취가 강하게 풍겨 왔다. 냄새가 빠져나갈 것을 우려해 창문까지 꽁꽁 닫아 놓았던 터라, 피비린내 섞인 그 악취는 대단했다.

16550707671805.png“……음!”

선우진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고 내실의 문을 닫았다. 촛불만으로 밝혀 둔 어두운 조명 아래인데도, 내실의 풍경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사방이 핏자국이다. 야마다가 묶인 채 고문을 당했던 의자 아래에도, 그의 목이 잘릴 때 피가 솟구쳐 튀었던 천장에도, 모두 검게 말라붙은 피가 점철되어 있다.

16550707671805.png“인사를 하겠다.”

선우진이 양복 깃을 바로하고 말하자, 고바야시가 테이블을 덮어 두었던 흰 천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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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윽-! 천이 걷히자, 핏기가 걷힌 야마다의 얼굴이 드러났다. 뒤쪽에 부목까지 대고 천으로 묶어 몸에 고정해 둔 목이 눈길을 끈다. 아무리 부하들이 정성들여 닦고, 온전하게 만들려고 애를 써 봐도 그 정도가 한계였던 모양이다.

16550707671805.png‘젠장……!’

시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감회가 선우진의 마음 속에서 휘몰아쳤다. 지금 군데군데 변색이 되어버린 이 남자가 목숨을 잃은 것은…… 선우진의 신분을 완벽하게 보호하고자 했던 욕망에서 비롯된 일일 터다. 그러기 위해서 야마다는 여덟 명을 살해했고, 이제는 그 자신조차 목이 잘린 채 두 코붕의 시체와 나란히 여기에 누워 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비록 선우진이 요청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는 이 참사에 대해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야마다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에 무턱대고 극락왕생을 기원할 수는 없었지만, 이승을 떠난 그에게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약속을 해 주고 싶었다.

16550707671805.png“……야마다 선생.”

선우진은 차갑게 식은 야마다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16550707671805.png“선생의 부하들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그것은 야마다라는 한 인간이 남긴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르는 유산으로서 당연히 맡아야 할 책무였다. 스윽-! 말을 마친 선우진은 흰 천을 도로 덮어 주고 두 코붕의 시체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자신들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죽음에 이르렀을 두 젊은이의 얼굴을…….

16550707671805.png“이 둘의 가족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아나?”

선우진이 묻자, 고바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07791708.png“음!”

16550707671805.png“그래……. 이제부터 매달 이들의 명의로 가족에게 우편송금환을 보내겠다. 남은 사람들이 더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얼굴을 쓸어내리며 돌아선 선우진의 시야에, 활짝 열린 금고와 어수선하게 쏟아져 있는 서류들이 들어왔다.

16550707757878.png“그 새끼들…… 돈을 싹 다 훔쳐 갔어. 서류도 좀 손을 댄 것 같고. 미두거래증서가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거지같은 도둑놈들!”

바바가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선우진은 녀석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16550707671805.png“상점에 있던 서류는 아예 손도 대지 마라. 미두증서든, 통장이든, 뭐든 다 태워 버릴 거다. 놈들이 어떤 걸 보고 갔는지 모르니 깨끗이 포기하는 편이 좋아. 그 정도가 없어도 사업에는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다.”

바바를 진정시킨 선우진은 고바야시와 다른 조직원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16550707671805.png“너희들의 마음은 잘 알지만, 내일은 천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오래 머물수록 너희가 노출될 확률이 높아지니까. 나는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다. 이제 인천은 버려라. 야쿠자 생활을 하지 않아도 예전보다 천 배는 더 윤택하게 살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내가 돌봐 주마.”

16550707757878.png“이제 도련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걸 잘 알지만…… 우리가 다 가 버리면 오야붕의 장례식은 어떻게…….”

바바가 물었다. 선우진은 냉철한 태도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16550707671805.png“야마다 선생과 식구들의 장례는 천안의 사찰로 옮겨가 조용히 진행할 거다. 여기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마라. 대외적으로는 야마다 사장이 종적을 감춘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는 오늘 밤 야마다 상점에 불을 질러, 이 사건의 모든 증거들을 모두 말소할 계획이다. 심지어 이곳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사실까지도……. 육군과 그 끄나풀들의 추적을 끊어 내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6550707757878.png“오야붕 가시는 길이 초라한 건 싫다, 도련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는 할 기회를 줘야지.”

바바가 미련이 가득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하지만 선우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50707671805.png“아끼던 식구들이 다 여기 있는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라는 게 누굴 말하는 거냐? 후견인으로 모시던 야마나시 한조? 아니면 귀빈처럼 떠받들던 오다카라는 놈? 그런 놈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면 대번에 상주를 찾을 테고, 그러면 그 상주는 또 육군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지게 되는 거다. 나는 그런 꼴은 못 본다.”

선우진은 내실 안의 모든 조직원들을 하나, 하나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16550707671805.png“성대한 장례식은 원수들의 장례식이 다 끝난 뒤에 치러도 늦지 않아. 그것이 너희를 지키는 길이라면 야마다 선생은 얼마든지 기다려 줄 게다. 그건 내가 단언할 수 있어. 그러니 너희는 그때까지 분한 마음을 갈고 닦으면 된다. 복수의 기회는 약속했던 대로 내가 반드시 만들어 줄 테니까.”

16550707757878.png“하지만…… 오다카는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단 말이다, 도련님. 아무리 위조 신분증을 쓴대도 나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이렇게 눈에 띄는 덩치로는 더 이상 도련님을 모시고 다닐 수도 없다고…….”

바바가 조금은 체념한 듯한 투로 한탄을 늘어놓았다. 선우진은 녀석을 달랬다.

16550707671805.png“바바, 너 역시 당분간 조직원들과 함께 천안의 금광에 머물면 된다. 그곳에 대해서 아는 놈들은 없으니 말이야. 답답하겠지만 오다카는 내가 곧 처리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라.”

16550707757878.png“처리? 처리라는 게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도련님? 설마……?”

16550707671805.png“당연히 뿌린 대로 거두게 할 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선우진은 야마다의 시신을 덮은 흰 천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16550707671805.png“……목숨에는 목숨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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