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억울해하지 마라.2019.05.08.
그날 밤 아홉 시가 넘었을 무렵, 선우진의 조선 호텔 특실에는 예정대로 구로즈미와 시치헤이 일행이 방문했다.
“어이쿠, 사이온지 님! 이렇게 경성에서 뵈오니 더욱 영광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구로즈미는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조아렸다. 선우진은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아아, 다들 오셨군요. 기차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그저 평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다만 이…… 가슴이 계속 뛰어서 좀 애를 먹는 중이랄까요, 며칠만 있으면 총독 대행 각하와 대면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아서…….”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다시 호흡이 벅차오르는지 구로즈미는 잠시 가슴을 누르고 숨을 가다듬었다. 검도 대회에서 총독과 근거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만큼 흥분할 수 있다니…… 세상에 이 남자보다 더 명예에 목마른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성싶다.
“음, 구로즈미 의원의 그 충성스런 마음은 잘 알겠소. 하지만 이번 방문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시치헤이 소좌여야 할 테지요.”
선우진은 구로즈미의 뒤에 서 있는 시치헤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좋아 보이는구려, 시치헤이 소좌. 검도 대회까지 이제 나흘 정도 남았나?”
“닷새입니다, 사이온지 님.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매순간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려 마음먹고 있습니다.”
시치헤이가 고개를 숙였다. 말은 겸손하게 해도, 그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하다. 제복 위에서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단련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몸 전체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좋소, 바로 그런 기합일 테지. 나뿐 아니라 총독 대행 각하께서도 기대가 크다오.”
선우진이 대견하다는 듯 격려의 말을 건네자, 시치헤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총독 대행 각하께, 저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다뿐이겠소? 이번 조선검도 대회의 우승은 맡아 둔 것과 진배없다고 칭찬을 잔뜩 해 두었지. 바로 조금 전에도 미츠코시 백화점의 옥상에서 열린 연회에서 그분을 뵙고 그대들의 이야기를 하고 온 참이오. 이제 시치헤이 소좌는 무조건 이기는 수밖에 없소이다. 우가키 대행 각하도 눈여겨보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이지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시치헤이는 한동안 감동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가키 육군 대장 각하께서 저 같은 것을…… 네! 사이온지 님,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현대의 무기로는 절대 대신할 수 없는 일본 육군의 기합과 정신무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드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럴 것이라 믿고 있소. 자, 자…… 거기 그렇게 서 계시지들 말고 안으로 드시오.”
“총독 대행 각하와 함께 하셨던 연회는 어땠습니까, 사이온지 님?”
선우진의 뒤를 따라 걸으며 구로즈미가 부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우진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뭐 늘 비슷하지요. 경성의 유력자들이 향후 경제전망에 관해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각하께 청탁을 드릴 일이 있으면 아뢰고…….”
“저도 중추원 의관 자리에 오르면 그런 자리에 자주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될까요? 지금으로서는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서…….”
구로즈미는 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수행해서 따라온 대전의 야쿠자 두목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를 가지고 꿈이라 하면 곤란합니다, 구로즈미 의원. 장차 국정을 논하는 여러 회의에서도 함께하시게 될 거요. 검으로는 시치헤이 소좌가 조선 제일, 그 후원자인 구로즈미 의원이 충심으로는 조선 제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요? 그야말로 미담이지…….”
테이블에 모두를 둘러앉히고 잠시 술잔을 기울인 뒤, 선우진은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구로즈미에게 건넸다.
“자, 이것이 검도대회의 공식 초대장이오. 열어 보시오.”
“어이쿠!”
봉투에 찍힌 총독부의 직인을 확인하자마자 구로즈미는 엉덩이를 들고 반쯤 일어섰다. 그가 두 손으로 공손히 봉투를 열자, 역시 직인이 찍힌 귀빈용 초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것을 받게 되다니……! 사이온지 님께 갚아야 하는 은혜가 오늘도 또 커져만 갑니다.”
“구로즈미 의원에게 배정된 곳에서 세 자리 우측이 총독 대행 각하의 좌석입니다. 총독 대행 각하, 조선군 사령관인 가나야 중장. 초청 심판장 자격의 사카모토 중장, 그리고 바로 그 다음이 구로즈미 의원의 좌석이지요. 원래는 중추원 고문인 이지용 대감에게 할당되었어야 하는 자리이니만큼, 각별히 예의에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선우진이 꼼꼼하게 참석자들의 면면을 일러 주자, 구로즈미의 흥분은 더욱 배가됐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초대장을 꽉 쥔 채 숨을 헐떡였다.
“주, 중추원 고문의 자리! 세상에…… 이리 귀한 것을 어떻게 손에 넣으신 겝니까? 사이온지 님이 아니셨다면, 그저 2등석 먼발치에서나 구경을 했을 텐데…….”
현금 천만 원이 넘는 가치의 금광과 그 드넓은 땅을 모두 내놓은 대가로 고작 검도 대회 관람권을 한 장 받았을 뿐이건만, 구로즈미는 눈물까지 글썽일 만큼 감동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선우진이라도 조금은 미안할 지경이다.
“내가 이지용 백작으로부터 양도를 받았소. 우리 구로즈미 의원에게 그 정도는 해 드려야지.”
“이런 감사할 일이 또 있단 말입니까……. 이지용 고문께서도 정말로 참석하고 싶으셨을 텐데…….”
“그만큼 구로즈미 의원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겠지요.”
선우진은 아주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지난 번 겁을 줘 놓은 이래 아예 바깥출입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이지용이, 사카모토의 바로 곁에 앉아야 하는 검도 대회에 참석할 리는 만무하다. 이지용의 적극적인 양보와 하세가와의 협조, 이 두 가지가 더해진 덕에 선우진은 귀빈석의 최상위 의전 서열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잘 하겠습니다! 누구보다 잘하겠습니다! 아, 이 모습을 대전의 다른 사업가들이 보면 저를 얼마나 부러워들 할까요! 그날 반드시 사진사를 불러서 총독 대행 각하의 곁에 앉은 모습을 길이길이 남겨야 할 것 같은데…….”
감격한 구로즈미는 초대장을 꼭 쥔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곁에 앉은 대전의 야쿠자 두목까지 덩달아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구로즈미 의원! 진심으로 경하 드립니다! 이제 공식 직함을 받으실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저 역시 전력으로 보필하겠습니다!”
“말을 삼가야지! 아직 내가 총독부를 위해서 해 드린 것이 부족하거늘, 어찌 그런 불충하고 오만한 소리를 입에 담는단 말이냐?”
구로즈미가 가식에 찬 대답으로 대전 야쿠자 두목을 나무란다. 흥분한 두 놈이 바보 소리 대결을 하는 동안, 선우진은 시치헤이를 돌아보았다.
“대회까지 닷새나 남았으면 그간에도 연습을 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장소는 구했소?”
“네, 사이온지 님. 용산의 육군 검도장에서 임시 수련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저…… 그보다…….”
시치헤이가 하고 싶은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눈치다. 그가 뭘 원하는지 선우진은 잘 안다. 만약 조선검도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사카모토와 겨룰 수 있는지, 그 부분을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그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선우진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며 웃었다.
“아하, 그렇군! 시치헤이 소좌는 원하는 것이 따로 있었지! 내 이 정신 좀 보라지. 반가운 마음이 앞서 정작 해 줘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
“부끄럽습니다.”
“아니, 아니. 부끄럽기는……. 오히려 그 패기를 칭찬하고 싶소. 수천의 내외귀빈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일본제일검이라 불리는 사카모토 중장에게 도전장을 내민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것도 막 대회에서 우승한 직후에 더더욱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 테지. ……으음, 방에 두었던가?”
가방을 찾는 시늉을 하던 선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치헤이에게 손짓을 했다.
“따라오시오.”
“아, 네! 사이온지 님!”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역할까? 선우진이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시치헤이는 곧바로 벌떡 일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이미 그는 오랜 후원자인 구로즈미보다, 권력자 선우진을 훨씬 더 의지하고 있다. 그만큼 선우진은 최근 그에게 꾸준히 공을 들여 왔다. 턱-! 방문을 닫은 시치헤이가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기다린다. 선우진은 그에게 작은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자, 이것은 미리 주는 우승 축하상금이오.”
“저는…… 이런 것을 바라고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사이온지 님. 그저…….”
당황하는 시치헤이에게 선우진은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부분은 이미 총독부 주최 측과 이야기가 되어 있소. 사카모토 중장이 우승 상패와 부상 3천 원을 수여하면서 축하의 말을 건넬 때, 사회자가 우승자에게 질문을 던질 거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그러면…… 그때 대결을 부탁드립니까?”
“중장과 소좌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것은 너무 무례한 태도겠지. 일단 이쪽에서 뭔가 하나 크게 양보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오, 시치헤이 소좌.”
“어떤 것을 양보하라는 말씀이신지요…….”
“부상으로 주어지는 우승 상금 3천 원이지.”
선우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사회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거든, 귀관이 받은 우승 상금 3천 원을 육군 발전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하시오. 아마 객석에서 곧바로 탄성이 터질 게요.”
물론 지금의 선우진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액수가 되어 버렸지만, 3천 원은 정말 큰돈이다. 보통의 사람이 수십 년간 아껴 가며 모아야 하는 돈을 군 발전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면, 제 아무리 도도한 사카모토라고 해도 대견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끝날 때쯤, 돈보다도 사카모토 중장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면 영광이겠다고 하시오. 그때는 두말 않고 상대해 줄 거요.”
“아하! 그렇게……! 이제야 사이온지 님의 깊고도 신묘한 뜻을 알았습니다!”
시치헤이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진은 그의 얼굴을 굽어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을 상대로 하는 거라면 내가 직접 주선을 해 보겠지만, 사카모토 중장은 스기우라 가문의 사람이기에 이렇게 번거로운 수를 써야 하오. 사이온지 가문과 스기우라 가문의 관계는 결코 우호적이라 할 수 없으니 말이오. 향후에도 나라는 존재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 사카모토 중장과 친분을 쌓는 데 도움이 될 거요.”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상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이온지 님.”
“아아, 그것은 우승 상금을 포기하는 대신이라고 생각하시오. 물론 시치헤이 소좌를 위한 내 성원도 포함되어 있지. 구로즈미 의원이 몰라도 무방한 성원이라고나 할까.”
“물론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돈이라면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시치헤이가 말했다. 대전에서 토호들과 포커를 할 때마다 그에게 밀어주었던 돈을 말하는 것이다. 선우진은 시치헤이가 내미는 돈 봉투를 받아 다시 그의 제복 주머니에 넣어 줬다.
“충분하지 않소. 한번 그대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인 이상, 나는 계속 더 많이 포상을 할 거요. 그것이 시치헤이 소좌와 같은 인재를 대하는 예의일 테지. 앞으로 더 많이 주변에 베풀고 인망을 쌓으시오. 그런 것보다 사카모토 중장과 겨루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선우진은 짐짓 진지하게 어조를 바꾸고 말을 이었다.
“사카모토 중장은 검술의 달인, 그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도 없소. 그러니 상대의 나이나 계급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우라고 권하겠소. 또는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어설프게 내지르는 공격도 곤란하오. 그런 예절을 갖춘 채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것이 사카모토 중장도 실망시키지 않는 길이기도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겨루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죽이겠다는 각오로 찌르지 않으면 안 될 거요.”
선우진은 다시 한 번 철저하게 당부했다. 기껏 이 모든 귀찮은 일들을 꾸몄는데, 시치헤이가 바보같이 굴어서 그 소중한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다.
“죽이겠다는 각오……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시치헤이가 입술을 꽉 깨물고 의지를 다졌다.
“좋소, 그런 마음가짐이외다.”
선우진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 후 덕담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를 한 시간여. 때르르릉-! 때르르릉-!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실례하겠소이다.”
선우진은 구로즈미와 시치헤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 나일세, 사이온지 군.
수화기 너머에서 우가키 총독 대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엇! 총독 대행 각하!”
이미 전화가 걸려올 줄 알고 있었지만, 선우진은 조금 놀라는 시늉을 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총독 대행 각하께서 직접 전화를……?”
정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구로즈미 일행이 서로를 둘러보며 작게 웅성거렸다. 이렇게 총독과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구로즈미는 아마도 남은 수명에서 10년 정도쯤은 기꺼이 포기하고도 남을 터다.
- 바쁜가?
우가키가 물어왔다. 혀가 잘 돌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술이 덜 깬 모양이다. 조선의 총독이 전화를 걸어 대뜸 바쁘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 카가와 중장 정도뿐이 아닐까.
“그렇지 않습니다.”
- 후후후! 사람을 보냈네. 그 차를 타고 오게.
그 말만 남기고 우가키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선우진이 수화기를 다시 고리에 걸자, 구로즈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사이온지 님. 무슨 일이신지요? 혹시 제가 너무 좋은 좌석을 배정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총독 대행께서 노하신 것은 아닙니까? 촌뜨기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설쳐 댄다거나…….”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어서 선우진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의 모든 사고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권력과 의전, 명예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구로즈미 의원의 좌석은 총독부에서 이미 인가가 난 것이니 마음 편히 앉아서 대회를 즐기면 되는 거요.”
선우진의 대답을 들은 구로즈미가 작게 도리질을 했다.
“그렇다면 총독 대행 각하께서 왜 이런 시간에 직접 전화를…….”
“아아, 적적하시거나 할 때 종종 이렇게 전화를 주신다오. 뭐, 자동차를 보내신다니 가볍게 바둑이나 한 판 두고 돌아오게 되지 않겠소?”
선우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하자, 구로즈미의 눈은 화등잔만큼 커졌다.
“정말이십니까? 총독 대행 각하와 단둘이 바둑을? 그것도 종종?”
“박빙의 승부를 벌이다가 아슬아슬하게 져 드리는 것을 아주 좋아하신다오.”
선우진은 양복 웃옷을 걸치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차피 권력 앞에서는 새가슴인 구로즈미가 이런 질문을 직접 우가키에게 던져서 진위를 확인해 볼 가능성은 제로다.
“어떻게……. 서두르면 한 시간 정도 후에는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여기에서 계속 마시면서 기다리시겠소이까? 필요한 것이 있거든 내 종자에게 말하면 됩니다.”
문가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도지마를 가리키며 선우진이 묻자, 구로즈미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도리질을 했다.
“무슨 그런 황송한 말씀을! 오늘은 이만 물러갈 테니 저희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마시고, 부디 총독 대행 각하와 즐거운 대국을 하시길 바랍니다!”
구로즈미의 태도에서는 이제 마치 총독을 대하는 것 같은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그들이 서둘러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쿵쿵쿵-! 묵직한 노크와 함께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이온지 선생, 모시러 왔습니다.”
도지마가 재빨리 문을 열어 주자, 중좌 계급장을 단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야나기라고 합니다. 가시죠.”
야나기는 벌떡 일어나서 경례를 붙이는 시치헤이를 본 척 만 척하며 말했다.
“그럼, 여러분 내일 뵙는 것으로 합시다.”
선우진은 구로즈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야나기의 뒤를 따라나섰다.
“오늘 보시게 될 일은 철저히 비밀로 취급해 주셔야 합니다. 사이온지 선생은 아무 것도 못 보신 거고, 들은 이야기도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 주실 테지요?”
밤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야나기가 제법 무게를 잡으며 물어왔다. 이 일을 비밀로 하는 것은 오히려 선우진 쪽에서 부탁하고 싶은 바다. 선우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총독 대행 각하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터. 그런데 이 밤중에 갑작스런 초대라니, 대체 무슨 일인지…….”
빤히 다 알고 있지만, 선우진은 짐짓 당황하는 투로 물었다. 야나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곧 아시게 됩니다.”
잠시 후, 그들을 태운 자동차는 한강 유역의 커다란 외딴 집 앞에 멈춰 섰다. 주변은 깜깜하고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를 정도라는 표현이 딱 맞을 그런 장소였다.
“들어가시지요, 사이온지 선생.”
자동차의 문을 열어 준 야나기가 정중하게 대문 안쪽을 가리켰다. 보초병들이 지키는 넓은 마당을 지나 대청 위로 올라서자, 안락의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우가키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오오, 왔나? 사이온지 군! 잘 왔네, 잘 왔어. 들어오시게! 끄윽!”
트림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만취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만큼, 우가키는 흐트러져 있었다.
“아까 연회에서 자네가 말했던 그…… 이야기 기억나나? 그 오다카라는 놈을 쥐어 패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했던 거 말일세.”
우가키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물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총독 대행 각하.”
“자네처럼 착한 사람이 그런 일로 한이 남으면 안 되지. 지금 후딱 해치우게. 몇 대든 때려도 좋아. 주먹이 아플 것 같으면 몽둥이를 써도 되고……. 그냥, 끄윽! 죽이지만 말게.”
그는 술잔을 채우며 구석진 방을 지목했다. 드르륵-! 선우진이 조심스레 미닫이문을 열자, 피투성이가 된 채 테이블에 두 손이 묶여 있는 초로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단 한 번 야마다의 사무실 앞에서 스쳤던 바로 그 오다카다. 매질로 퉁퉁 부은 얼굴이었지만, 놈이라는 것쯤은 알아볼 정도였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후우! 이렇게 빕니다, 제발 풀어 주십시오. 저는 근래 요정 같은 곳은 가 본 적도 없습니다. 왜 이런 오해를 받는 건지…….”
이가 부러지고 빠져서 바람이 줄줄 새는 발음으로 오다카가 애원을 했다. 아마도 그는 저 비슷한 말을 지난 몇 시간 동안 계속 반복했으리라.
“단둘이 있고 싶은데…….”
선우진이 방구석에서 몽둥이를 집어 들고 나직하게 부탁을 하자, 오다카를 지키고 서 있던 군인이 우가키의 의중을 살핀다.
“뭐든지 들어줘. 저 친구는 내가 조선에서 만난 몇 안 되는 호인 중에서도 으뜸인 남자다! 앞으로 평생 믿을 만한 사람이야. 가문도, 인품도 말이지. 나와!”
우가키는 빨리 나오라고 군인을 향해 손짓까지 했다. 턱-! 군인이 나가고 문을 닫자, 선우진은 천천히 오다카의 앞으로 걸어갔다.
“……정말입니다! 오해입니다요! 후우, 후우……! 억울합니다!”
오다카는 기계처럼 같은 변명을 쉼 없이 늘어놓았다. 새로 등장한 이 젊은 남자가 뭔가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놈의 뒤쪽으로 걸어간 선우진은 오다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 억울해할 것 없다, 이건 야마다 사장의 복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