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 스테이크 나이프. (162/459)

162. 스테이크 나이프.2019.06.29.

16550713110611.png“이, 이, 이렇게 좋은 날! 모처럼 다 모여서 함께 포커를 치고 있었는데, 이걸 이렇게 끝낸대서야 아니 될 말이지요! 얼른 돌아오셔서 조금만 더 같이 하십시다!”

안도가 울부짖듯이 선우진에게 간청을 했다. 40만 원의 부채를 만회하려면, 당사자인 이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만 원이나 2만 원을 잃고 나면 훌훌 털고 일어나 버릴 텐데, 그래서는 원금 회수조차 불분명하다. 선우진은 불쾌하다는 듯 안도를 응시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13110616.png“안도 선생, 이러다가는 총독 대행 각하께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겠소. 그 불경함을 어찌 감당하려고 이리 붙잡으시는 게요?”

16550713110611.png“하지만 아쉬우니까! 너무 아쉬워서 그러지요! 내지에서 여기까지 힘들게 온 저를 봐서라도 좀!”

억지를 부리는 안도의 태도는 필사적이다. 선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16550713110616.png“나도 아쉽지만, 다른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1655071311063.png“아니, 아니. 사이온지 선생. 저희도 이쯤에서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아무리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총독 대행 각하라지만, 배웅은 해 드려야지요.”

이미 기분이 상해 있던 구니토미가 선우진을 따라 일어서자, 미우라도 주섬주섬 돈을 챙긴다.

16550713110635.png“맞습니다. 또 뵐지 어떨지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이쪽의 도리는 다하는 것이 옳아요. 두 분, 칩은 이 딜러에게서 현금으로 바꾸시면 됩니다.”

경마 협회 일로 얽히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하라야마 같은 놈과 함께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총독 대행에게 인사를 한다는 것은 자리를 파하기 위한 최고의 핑계였다. 아무리 무례하고 경우가 없는 인간이라도 해도, 조선 최고의 권력자보다 포커가 중요하다고 설칠 수는 없는 일이다.

16550713110641.png“허허, 아쉽지만 이렇게 끝이 났네요. 못 다한 승부는 다음에 또 이어서 하는 것으로 하고, 아쉬움을 달랩시다.”

우라사키마저 시가를 비벼 끄고 웨이트리스에게 겉옷을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무례한 도발로만 일관하던 도박 전략이 드디어 한계를 맞으려는 순간이다. 다급해진 하라야마가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물었다.

16550713110645.png“다, 다음이요? 그, 그게 언제입니까?”

16550713110641.png“그야 차차 정해 봐야지요.”

16550713110645.png“그, 그러면 내일은 어떠십니까? 내일 저녁에 다시 이곳에서 모이는 것으로!”

16550713110641.png“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야 참으로 좋겠지만, 가능하겠습니까? 여기 모였던 분들 면면을 좀 보십시오. 하라야마 선생께서도 물론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시겠지만, 이분들은 다들 정말로 바쁘시지요. 이렇게 시간을 맞춰 모이는 것은 아마도 내달이나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소만.”

우라사키는 하라야마의 못된 말을 고스란히 인용해 소소한 보복을 하면서 겉옷을 걸쳤다. 미우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13110635.png“음, 12월에는 모임이 있기는 하지요. 신임 총독께서 부임하시면 연회를 개최하실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처럼 포커를 또 즐길 여유가 있을는지는…….”

16550713110645.png“12월…….”

하라야마는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껌뻑였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원금 회수를 못하면 죽게 될 그에게, 이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16550713110645.png“……점잖은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더니…… 따고 나서 이런 식으로 야비하게 배짱을 부리는 겁니까? 예에? 돈 좀 들어갔다고 이렇게 헐레벌떡 일어서는 거냔 말입니다! 대답을 좀 해 보시오!”

궁지에 몰려 본색이 드러난 하라야마는 시정의 싸구려 도박사처럼 소란을 피워 댔다. 이미 질릴 대로 질려 있던 터라 더 실망할 여지도 없었기에, 미우라는 그저 작게 도리질만 할 따름이다.

16550713110635.png“그러기에 아까부터 사이온지 선생이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분수에 맞는 베팅을 하시라고. 계속해서 호기를 부리시더니 결국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군요.”

16550713110645.png“이게 꼴사나우면 다시 한 번 붙읍시다! 정식으로 붙어서 내 밑천을 다 따 가버리면 나도 더 이상 못 떠들 것 아니오?”

하라야마는 그래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피가 모여서, 놈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시뻘게졌다.

16550713110635.png“하아아…….”

한숨을 내쉬고 양복단추를 채운 미우라가 안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16550713110635.png“안도 선생, 다음에 뵐 때는 저분은 함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함께 경마 사업을 도모하는 사이라고는 해도,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소이까?”

16550713110611.png“아이고, 예……!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안도는 허리를 굽실거리면서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외투를 걸치는 동안, 그는 막 포커 룸을 나선 선우진의 뒤를 쫓아나가 소매 끝을 붙잡고 울먹였다.

16550713110611.png“사이온지 선생, 어떻게…… 다른 분들을 설득해서 배웅을 한 후에 몇 판만 더 하시지요. 제가 데려온 사람이 많이 잃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제 얼굴을 봐서라도…….”

16550713110616.png“다들 가신다고 하시는데 이제 와서 어쩌겠소이까?”

선우진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안도가 손끝을 바들바들 떨며 포커 룸 쪽을 돌아보았다.

16550713110611.png“이 연회의 주최자이신 사이온지 선생께서 말씀하시면 듣지 않겠습니까? 인망이 높으시니까! 저 사람들에게 부탁 한마디만 좀 해 주십시오!”

16550713110616.png“안도 선생, 저분들이 나를 좋아하시는 이유는…….”

걸음을 멈춘 선우진이 차가운 시선으로 안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16550713110616.png“그런 류의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기 때문이오. 무슨 이야기인 줄 아시겠소?”

무가치한 일 때문에 자신의 평판을 깎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안도 역시 바보는 아니었기에 단번에 알아듣고 전략을 바꿨다.

16550713110611.png“그러면 최소한…… 사이온지 선생 혼자서라도 상대를 좀 해 주십시오. 예전에 저와 함께 밤을 새고 어울려 주셨던 것처럼.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안도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면서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남들은 그저 오늘의 무례를 사과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터다. 하라야마에 따르면 어차피 호구는 이놈이므로, 이놈과 단 세 명이 판을 벌이게 되면 더 좋다. 선우진은 질린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소매를 잡아 뺐다.

16550713110616.png“정말 집요한 분이시로군. 알았으니 예서 기다리시오.”

16550713110611.png“예?”

예상치 못하게 선선히 수락을 얻어낸 안도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재차 확인을 했다.

16550713110616.png“총독 대행 각하를 관저까지 배웅하고 와야 하니 기다리시란 말씀이외다.”

16550713110611.png“정말이십니까, 사이온지 선생?”

16550713110616.png“나는 허언을 입에 담는 법이 없소.”

선우진은 짧게 한마디를 던지고 다시 걸음을 뗐다. 그의 등을 향해 안도는 몇 번이나 깊게 조아렸다.

16550713110611.png“감사합니다, 사이온지 선생! 감사합니다!”

선우진은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놈들은 아주 길고 힘들면서도 지루한 기다림을 맛보게 될 예정이다. 하지만 적어도 작은 보험 정도는 들어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가벼이 넘기기에는 저 안도와 하라야마의 필사적인 태도가 너무도 극단적인 까닭이다.

16550713195772.png“오오, 도련님! 저 지금 아주 인기가 폭발 중입니다요!”

마네킹 걸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바바가 달려와 선우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부호 화족을 만난 마네킹 걸들도 덩달아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와 그들의 주위를 감쌌다. 선우진은 녀석의 투실투실한 볼을 도닥여 주며 미소를 건넸다.

16550713110616.png“그래, 보기 좋구나. 그런데…… 많이 취했느냐?”

바바는 빠르게 도리질을 했다.

16550713195772.png“음, 기분이 좀 나아졌냐고 묻는 거라면 그렇기는 하지만 뭐…… 만취로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다요, 도련님. 저는 좀처럼 그렇게 취하는 법이 없습니다요!”

바바는 스모 선수의 몸짓을 흉내 내서 한쪽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며 자신이 아직 멀쩡하다는 걸 과시했다. 중심을 잘 잡고 비틀대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운동능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하다.

16550713110616.png“좋아, 그 정도면 됐다.”

선우진은 녀석의 배를 툭 치면서 작게 속삭였다.

16550713110616.png“오늘새벽, 내가 돌아오거든 내게서 눈을 떼지 마라.”

16550713195772.png“음? 무슨 일이 있을 것인데? 위험한 일이냐요, 도련님?”

흠칫 놀란 바바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다. 선우진은 눈을 찡긋했다.

16550713110616.png“위험하지는 않다. 다만 네 힘이 있으면 더 편할 뿐이야.”

16550713195772.png“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맡겨만 둬라, 도련님! 힘이라면 바로 나지!”

바바는 두 팔의 알통을 과시하며 큰소리를 쳤다. 이 녀석은, 아니키를 위해 언제든 제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진심으로.

16550713110616.png“그래. 한참 걸릴 터이니 그때까지는 재미있게 놀고 있으려무나.”

선우진은 녀석을 마네킹 걸들 사이에 남겨 두고 우가키가 기다리고 있는 룰렛 테이블 쪽으로 이동했다. 우가키는 아주 기분 좋게 취해서 비틀대며 외투소매에 팔을 꿰는 중이었다.

16550713224166.jpg“오오, 유우야 군! 배웅해 주러 오는 겐가? 경성 최고의 인기인이, 쫓겨나는 이 못난 나를 위해서?”

선우진을 알아본 우가키가 팔을 높이 들며 반갑게 맞이했다. 선우진은 한없이 겸손한 표정을 지은 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16550713110616.png“무슨 그런 말씀을. 총독 대행 각하께서 얼마나 큰 분인지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16550713224166.jpg“이것 봐! 이것 좀 보라고! 이 친구는 정말 충성스러워! 안 그러냐?”

우가키가 주변의 마네킹 걸들을 돌아보고 물었다. 마네킹 걸들이 동의를 하며 까르르 웃어 주자, 그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한 움큼의 지폐를 그녀들에게 안겼다.

16550713224166.jpg“옳지! 너희들도 예쁘다! 그래! 받아라! 많이 딴 내가 써야지! 암, 써야 하고말고!”

백 원 지폐 수십 장이 선물되고 나니, 마네킹 걸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설화 속의 기노쿠니야 분자에몬처럼 돈을 마구 흩뿌리며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던 우가키가 선우진의 어깨에 척-! 팔을 걸친다.

16550713224166.jpg“유우야 군! 자넨 진짜 좋은 사람이야! 오늘만 해도 자네 덕분에 정말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네! 내가 얼마를 땄는지 아마 자네는 상상도 못할걸?”

16550713110616.png“그렇군요.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16550713224166.jpg“놀라지 말게. 자, 그, 마, 치…… 만 팔천 원인가를 땄네. 하룻밤에 만 팔천 원! 상상이 가나?”

우가키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털어 놓는 것처럼 과장된 손짓을 동원하여 자신이 딴 금액을 자랑했다. 선우진이 안도를 가지고 놀며 그보다 두 배를 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기절초풍하리라.

16550713224166.jpg“……그 뒤에 몇 판인가 더 하긴 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질세. 그 다음엔 이…… 취기가 너무 돌아서 계산이 잘 안 되더군.”

16550713110616.png“역시 각하께서는 도박의 운도 강한 분이십니다.”

선우진이 치켜세워 주자, 우가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16550713224166.jpg“뭐, 이런 풍파 속에서 여기까지 헤쳐 오고 있으니 운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 어쨌든 고맙네. 덕분에 이런 재미도 느껴 보고, 또 귀염둥이들과 오랜만에 한참 웃었어. 이제…… 마누라에게 돌아가야지. 나를 배웅해 주겠나? ……여어!”

우라사키와 미우라 일행이 뒤늦게 쫓아와 공손히 인사를 건넸지만, 우가키는 그저 건성으로 손만 흔들어 주고 선우진에게 몸을 기댔다.

16550713224166.jpg“솔직히 이 직을 맡아서 불명예만 쌓은 셈이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선우진과 나란히 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는 동안, 우가키가 작게 속삭였다.

16550713110616.png“총독 대행 각하께서는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선우진이 입에 발린 칭찬을 해주었지만, 우가키는 손사래를 쳤다.

16550713224166.jpg“아니,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다 망쳤지!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사카모토 놈과 한조 선배 때문에! 그래도 괜찮아! 자네라는 충성스런 친구를 만났으니까. 사이온지 군!”

우가키가 불콰해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16550713224166.jpg“내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약조함세! 자네가 충성을 보인 만큼, 나는 자네를 후원해 주겠네! 두고 보게! 내가 내뱉은 말을 지키는 인간인지 아닌지! 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 절대로!”

16550713110616.png“감사합니다.”

선우진이 감사의 뜻을 표하자, 우가키는 뒤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손짓을 해서 가방 속의 돈을 한 뭉치 건넸다.

16550713224166.jpg“자, 이걸로 오늘 술 한잔 거하게 하게나! 이건 내가 자네의 낙성식에 전하는 축하 금일봉일세!”

선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돈을 받으면서도, 역시 이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봉투도 없이 돈을 전달한다는 것은 논외라 치더라도, 이 건물에서 딴 돈으로 이 건물의 주인에게 인심을 쓰다니…….

16550713224166.jpg“자네도 나에 대해서 잘 말씀드려야 하네! 긴모치 공작과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말일세! 알지? 우리는 공동 운명체라는 걸 잊으면 곤란하이!”

총독 전용 자동차에 오른 뒤에도, 우가키는 계속 얕은 소리를 지껄여 대며 손을 흔들었다.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욕심 하나만은 전혀 우유부단하지 않다.

16550713110616.png“도지마, 차를 준비시켜라. 저 차들을 따라 나갈 수 있도록.”

우가키와 그 호위 병력들을 모두 떠나 보낸 뒤, 선우진이 뒤를 돌아보고 명령했다. 그를 수행하던 도지마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16550713242855.png“총독 대행 각하의 관저로 함께 가시는 겁니까, 도련님?”

16550713110616.png“아니, 조선 호텔로 가서 잠시 쉬고 오려 한다. 지금이 열 시 반이니까…….”

작게 하품을 하며 회중시계를 꺼내 본 선우진이 말했다.

16550713110616.png“새벽 두 시쯤 깨서 돌아오면 딱 좋을 듯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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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호텔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던 선우진이 새벽 두 시 반에 다시 돌아왔을 때, 안도와 하라야마는 퀭한 눈으로 불안에 떨며 텅 빈 포커 룸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사라진 연회는 이미 한참 전에 끝을 맺었기에, 그 시각까지 건물에 남아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 몇 명조차도 거의 다 만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16550713110616.png“아아, 늦었소이다. 많이들 기다리셨소?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총독 대행 각하께서 자꾸 술을 권하시는 바람에.”

인사를 건네는 선우진의 얼굴에서는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다. 조선 호텔 특실의 편안한 침대에서 세 시간 가량의 기분 좋은 숙면 후 막 돌아오는 길이니 당연한 일이다.

16550713110611.png“아니…… 뭐, 총독 대행께서 붙잡으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안도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얼굴을 훑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13110645.png“안 오는 줄 알았소……. 젠장.”

하라야마도 지칠 대로 지쳐서 화를 내고 따질 기운조차 없었다. 지난 네 시간 동안 그들은…… 선우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계속 싸우며 술로 두려움을 달래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 가며 졸음을 쫓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이미 체력적으로 바닥이 난 상태다. 일본에서부터 배를 타고 와서, 곧바로 다시 기차로 상경한 터라 이 밤이 더 길고 괴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이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선우진을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16550713110616.png“아직도 포커를 하시고 싶소이까? 그냥 요정으로 옮겨서 게이샤들과 술이나 한잔 하신 뒤 푹 주무시는 편이…….”

선우진이 새로운 제안을 꺼내려하자, 두 사람은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16550713110611.png“아니! 아닙니다! 우리는 게이샤 그리 좋아하지도 않소이다! 술은 여기에도 잔뜩 있는데 무슨!”

16550713110616.png“그러면…… 시작해 볼까요?”

선우진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옆자리에 놓아둔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만 원 단위로 묶인 지폐다발이 열 개 가량 테이블 위에 쌓이자, 그렇게 지친 와중에도 하라야마의 눈이 번뜩인다.

16550713110645.png“……십만 원입니까?”

16550713110616.png“두 분께서 큰 판을 원하시는 것 같기에 맞춰 드리려 준비했소이다. 물론 이 안에는 더 들었고. 그런대 두 분, 뭘 좀 드시겠습니까?”

선우진이 묻자, 두 놈 다 도리질을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지금은 입 안에 뭘 넣고 우적거리며 씹을 기분이 아니다. 내일 아침이 밝기 전에 저 돈을 모두 따지 못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국인데, 산해진미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6550713110616.png“……음, 그러면 안주로 삼을 스테이크를 몇 장 준비해 주고 그대들은 퇴근해도 좋네. 도지마가 태워다 줄 걸세. 술은 우리가 꺼내 마셔도 되는 것이니까.”

선우진은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웨이트리스들과 요리사에게 주문을 한 뒤 넉넉하게 팁을 쥐여 주었다.

16550713110616.png“어떤 종목으로 할까요?”

선우진이 카드 덱을 건네며 묻자, 하라야마는 야심찬 표정을 지었다.

16550713110645.png“지금까지처럼 텍사스 홀덤으로 합시다. 천, 삼천에 풀 베팅 방식이 좋겠군요. 스몰 블라인드가 딜러를 하는 것으로.”

16550713110616.png“이만큼이나 기다리셨으니, 원하는 대로 해 드려야지. 아…… 단, 이번에는 종료시간을 정해 둡시다. 음…… 일곱 시면 만족하시겠소?”

호인처럼 조건을 수용해 주던 선우진이 시계를 꺼내 옆에 내려놓았다. 한 시간이라도 더 벌고 싶은 안도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사정을 했다.

16550713110611.png“여, 여덟 시 반으로 하지요. 어차피 그때까지는 은행문도 열지 않으니 업무에 딱히 지장은 없지 않습니까?”

16550713110616.png“……흠, 그럽시다. 이왕 벌인 일이니 아쉬움이 없도록 해 드리는 게 맞겠지요.”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하라야마는 정성들여 셔플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처음으로 카드를 자신의 손에 넣었으니 마음껏 기술을 발휘해 보겠다는 자세다. 촤라라락-! 촤락-! 촤라락-! 에이스를 위쪽으로 올려 보내느라 불규칙해진 셔플소리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선우진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16550713110645.png“자, 얼른 포켓 패 확인하시고 베팅 하시오!”

손 패를 돌리며 하라야마가 기세 좋게 외쳤다. 빨리 저 십만 원의 현금을 다 따고 더 많은 액수를 가방 안에서 끌어내겠다는 의욕이, 놈의 핏발선 두 눈에 가득하다. 그러나……, 에이스 몇 장을 확보하기 위해 지저분한 손기술을 써야 하는 사람과 카드 덱 전체를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의 대결은…… 애초부터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한 시간 반도 지나지 않아, 안도와 하라야마 앞에는 겨우 몇백 원씩밖에 남지 않았다. 압도당했다는 말로도 부족한 처참한 승부였다.

16550713110616.png“……두 분, 돈이 다 떨어지신 모양인데…… 더 진행합니까?”

이십만 원이나 되는 현금을 앞에 쌓아 둔 선우진이 포도주를 들이키며 물었다. 충격에 빠진 두 사람이 침묵에 휩싸여있는 동안, 선우진은 차갑게 식은 스테이크를 작게 잘라 안주 삼아 씹었다.

16550713110616.png“그러면 이쯤에서 일어서는 것으로 합시다. 재미있었소이다. 이제 함께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다 보면 슬슬 동이 트겠군요. 이 시간에 갈 만한 요정이 있으려나…….”

충분히 시간을 준 뒤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선우진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일어섰다.

16550713110611.png“저…… 사이온지 선생.”

실성한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안도가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16550713110611.png“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 10만 원 정도만 차용을 하게 해 주시면…….”

16550713110616.png“안도 선생.”

선우진은 서리가 내려앉을 것처럼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16550713110616.png“이미 내게 부채가 있는 분께서 그런 부탁을 하신다면, 내가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소이까?”

뼈아픈 말이었지만, 이미 안도는 더 추락할 바닥도 없다. 그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16550713110611.png“그…… 내일 은행 문이 열리는 대로 일전의 40만 원까지 한꺼번에 전부 다 갚을 테니 이 밤 동안만 조금 더 포커를…….”

16550713110616.png“안될 말씀!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 품위를 잃지 마시오.”

선우진은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뒤로 돌아서서 셔츠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16550713110645.png“……렇게 죽을 수는 없어……. 나는 이렇게 죽을 수는…….”

주먹을 꽉 쥔 채 광인처럼 웅얼거리던 하라야마가 고개를 들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는 오늘밤의 승부에서 졌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완패였다. 고용된 도박사가 패배하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응징뿐이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안도는…… 분명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그 응징을 하리라. 도망을 쳐야 하나? 지금이라도 저 문을 박차고 나가서…… 어딘가로 숨으면……. 현실을 도피하려던 하라야마는 이내 그 계획을 폐기했다. 자신이 도망치면, 마누라와 애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돌아가는 길에 이 안도라는 늙은이를 없애 버리고…….

16550713110645.png‘응?’

그렇게 극도로 내몰려 있던 하라야마의 눈에 엄청난 액수의 현금다발이 들어왔다. 그리고 무방비로 뒤돌아서 있는 선우진의 등과, 스테이크 접시 옆에 올려진 나이프가 차례로 그의 시야를 꽉 채운다. 마치 운명의 신이 길을 일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16550713110645.png‘마침 이 방 안에는 우리뿐이다! 우리 셋밖에 없다고!’

도지마라는 종자가 종업원들을 태워다 주기 위해 자리를 비운 이 상황! 광기에 사로잡힌 하라야마에게 그것은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스테이크 육즙이 묻은 칼로 저 꼴 보기 싫은 화족애송이놈의 목을 따고…… 돈을 반으로 나누면, 남은 두 사람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안도는 채무자가 사라지고, 자신은 십만 원이라는 거금이 생기는 것이니까! 자신이 살해범으로 수배된다고 해도, 십만 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멀리 도피해서 호화로운 여생을 보낼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 아니면 남지나해의 어느 따뜻한 나라에서! 타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하라야마는 재빨리 테이블 위로 몸을 날려 나이프를 거머쥐었다. 반쯤 얼이 나간 안도가 뭐라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16550713110645.png“죽어라앗!”

선우진을 바닥에 쓰러뜨린 하라야마가 칼을 높이 들어 올렸을 때,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포커 룸으로 뛰어든 남자가 있었다. 선우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새벽 내내 문틈으로 방 안을 엿보던 바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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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13195772.png“이 새끼! 우리 도련님에게 무슨 짓이냣!”

바바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하라야마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엄청난 따귀 한 방에 날아간 하라야마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고꾸라졌다. 의도적으로 저항을 하지 않았던 선우진은 찢긴 양복을 털며 일어섰다.

16550713110616.png“안도 고문…….”

선우진은 이를 빠득 갈며 안도를 노려보았다.

16550713110616.png“당신이 데려온 차장이란 자가…… 이런 짓까지 벌였겠다.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소. 일본 경마 협회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 주지. 당신의 무례함과 이자의 무도함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16550713110611.png“아니…… 아니…… 저는…….”

순식간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안도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애초에 하라야마는 직원도 아닌 도박사였다고…… 고백을 하는 게, 이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걸 모르겠다.

16550713110611.png“……살려 주십시오, 사이온지 선생! 이 일이 알려지면…… 저는 죽습니다! 제발!”

변명을 하는 것조차 포기한 안도는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이 사람에게 애걸복걸하는 것 외에 그 어떤 해결방안도 없다. 종이 되라고 하면 종노릇이라도 해야만 한다.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16550713110616.png“……죽다니? 누가 안도 선생에게 해코지라도 한단 말이오?”

사정을 빤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선우진은 태연하게 물었다. 안도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16550713110611.png“흐으윽! 제가 그만 잠시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습니다! 공금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그 빚을 갚아 보려고…… 흐으윽! 사이온지 선생, 제발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일평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놈의 오열이 한동안 이어진 뒤에야, 선우진은 자애로운 손길로 놈을 일으켜 세웠다.

16550713110616.png“자, 자. 그렇게 울지만 말고 좀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보시오, 안도 고문. 그래야 내가 도울 수 있지 않겠소? 모든 문제라는 것은 다 해결할 길이 있는 법이외다.”

해결방안은 있다. 예를 들자면 조선 경마 협회의 모든 이권을 싹 다 넘긴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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