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제너럴.2019.07.10.
‘역시 이 남자, 대단하군. 운이 좋아서 이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니었어.’
자신에게 하세가와를 부탁하는 사이토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선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퇴역 해군 대장, 전임 조선 총독, 제네바군축회담 전권위임대표. 추밀원 고문에 차기 총리대신 후보, 정2위의 국가서열……. 경력만 들어도 눈이 부시고, 세상 무서울 것이 거의 없는 권력자 중의 권력자가……, 애송이 사업가에게 ‘부탁’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단어를 입에 담는다는 걸 수치스럽다고 느낄는지도 모르겠다. 부탁이라는 것은 상대의 선의에 기대야만 하는 의존적인 행위이니까. 그런데 오늘 그는 오래된 부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낮춘 것이다. 쟁쟁한 사업가나 정치가들을 대할 때에도 거칠 것이 없던 이 호쾌한 남자가……. 물론 지금 사이토는 총리대신으로 임명되기 전까지의 권력 공백 시기에서 최대한 주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기는 하다. 아마 사이온지 긴모치도 이 남자를 불러서 구설에 오를 일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으리라. 그러니 자신의 보좌관을 맘 내키는 대로 일본의 요직에 박아 넣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탁’이라니……. 그건 정말 선우진도 예상치 못했던 파격이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부분은 이 남자가 하세가와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누구와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물었다는 점이다. 정점에 섰던 군인답지 않은 이 자상함이야말로, 유명한 그의 영어 실력 따위보다 훨씬 더 큰 재능이자 자산인 것일까.
‘과연…… 해군의 삼대 수재라 불렸던 것이 허명은 아니었던 게야.’
선우진은 사이토라는 사람의 진짜 크기를 제대로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이 정도라면 그 까다로운 긴모치가 아끼고 중용하는 것도 단번에 납득이 된다.
“부탁이라니요, 각하. 무슨 그런 송구한 말씀을.”
선우진의 예의 바른 대답을 듣고 사이토는 반색을 했다.
“그럼, 받아들여 주는 거냐?”
애당초 고민할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하세가와로부터 비밀리에 금광을 선물 받았을 때부터 이미 선우진은 그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이다. 선우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세가와 비서과장의 능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잠시나마 제가 그 재능을 빌려 쓸 수 있도록 각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영광까지는 아니야! 하세가와가 일을 야무지게 잘하는 건 사실이지만, 전임 총독의 보좌관을 거느린다는 게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저놈이 혹시 사이토 그 늙은이한테 몰래 내 험담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책잡힐 일 같은 것은 제가 하지 않아야겠지요.”
“옳은 말이기는 하다만, 너처럼 대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니까! 그리고 하세가와 녀석이 총독부에서 일하면서 내가 알게 모르게 챙긴 돈이 적지 않을 텐데, 그 정도 수입은 맞춰 주렴.”
사이토의 걱정이 길게 늘어졌다. 그 모든 것이 다 하세가와를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선우진은 진솔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그래. 별안간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떠맡겨서 좀 미안하게는 됐다만…… 어쨌든 네 녀석이 이렇게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니, 내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아, 이제야 좀 술맛이 느껴지는구나!”
기분이 좋아진 사이토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활동사진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 같아서 그게 유키 양에게 미안하군. 몸도 약한 사람이 모처럼 경성까지 여행을 왔을 때는 굉장히 설렜을 텐데…….”
“아닙니다. 총독 각하의 말씀을 듣는 지금도 한없이 기쁘고 설렙니다. 이 순간, 사이온지 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이온지 님께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그 곁에 머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대단한 위로는 되어 드리지 못했겠지만…….”
유키의 얼굴에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번졌다. 전임 총독을 위한 아부가 별로 없는데도, 사이토는 마치 귀여운 아이를 보듯 흐뭇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활동사진 관람을 좋아하는 것은 맞잖아? 그러니 저 애송이 사이온지가 이런 준비를 해 뒀을 테고.”
“아…… 네. 영화는 제가 즐길 수 있는 신식서양여흥이기는 합니다. 그 먼 곳까지 여행을 하지 않아도 서양인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오, 서양 영화를 좋아하는군. 그런데…… 변사가 없어도 괜찮은가, 유키 양?”
“저는 영어를 거의 모릅니다만…… 다행히도 사이온지 님께서 영어를 잘하시는 분이셔서, 도움을 받습니다.”
유키는 자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뿌듯한 시선을 선우진 쪽으로 돌렸다. 사이토의 고개도 덩달아 선우진에게 향한다.
“저 녀석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야?”
“변사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자막을 읽어 주십니다. 아주 상냥하고 자상한 음성으로.”
“오호라, 이거 재미있군! 재미있어!”
장난기가 동한 사이토는 손뼉을 쫙 치며 활짝 웃었다.
“나도 한번 그 사이온지가 변사로 활약하는 영화를 좀 구경해 보고 싶어지는걸. 우리 그럼 같이 볼까?”
“……네?”
방심하고 있었던 선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건…… 포커페이스인 그조차도 당혹스러워지는, 충격적인 제안이다. 두 젊은 연인의 영화감상 데이트 한가운데에 70살이 다 된 전임 총독이 끼어들겠다니……. 이 얼마나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인가.
“뭘 그렇게 놀라, 이 녀석아! 나는 만날 포커밖에 모르는 주정쟁이 늙은이일 거라고 생각했나? 나 역시 가끔은 활동사진을 보고 즐길 줄 아는 문화인이야!”
“그건 또…… 좀 의외로군요. 망중한에는 노를 관람하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국 대사나 영사 관저를 방문하면 가끔 틀어 주더군. 그래서 재미가 들려 버렸지. 최근에도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도 클라크 대사와 함께 브랜디와 시가를 즐기면서 뭔가 하나 보았는데…… 에, 뭐였더라. 바그다드…….”
“……바그다드의 도둑인가요? 그, 괴물들이 잔뜩 나오는!”
자신이 보았던 영화가 나오자, 할리우드소녀 유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 차올랐다. 사이토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볼을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아니야. 괴물은 안 나와. 생각해 보니까 바그다드가 아니고 아라비아였던 것 같군. 아라비아로 가서 두 미국 군인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였는데, 아라비아의…….”
“……두 기사!”
“아, 그래! 맞아! 그런 제목이었다. 유키 양, 아는군.”
“네에, 정말로 재미있었어요!”
유키는 두 손을 턱 밑에 모으고 꿈꾸는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함께 보았던 하워드 휴즈의 에어쇼와, 여배우 빌리 도브, 그리고 선우진과의 달콤한 추억들이 모두 한꺼번에 소환되었나 보다.
“허어, 몰랐는데 유키 양이 영화전문가였군그래. 부지런도 하구만. 클라크 대사 말로는 9월인가 미국에서 처음 상영된 최신 영화라던데, 어떻게 벌써 보았나?”
“지난여름에 그 영화의 제작자인 하워드 휴즈 님께서 직접 필름을 갖고 인천을 방문해서 보여 주셨어요. 친구인 사이온지 님을 위해서.”
“친구? 하워드 휴즈와? 허허, 이 녀석 제법 국제적으로 노는걸!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와는 또 언제 친분을 쌓은 게냐?”
새삼 흐뭇한 시선으로 선우진을 훑어보던 사이토가 와인 잔을 채우며 곧장 명령했다.
“자, 이제 영사를 시작해라! 애송이 사이온지, 언제까지 나와 유키 양을 기다리게 할 셈이냐?”
“아니, 하지만 제 목소리가 신경 쓰이실 겁니다. 각하께서는 통역도 없이 국제회의에 참석하시는 실력자 아니십니까?”
선우진이 쑥스럽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일본 최고의 영어 실력자 중 한 사람인 사이토 마코토 앞에서 변사 역할을 수행해야 하다니, 이건 아주 쑥스러운 영어실력 테스트나 마찬가지다.
“나는 안 들을 테니까, 유키 양에게만 일러 주면 되지 않나. 왜? 설마 입맞춤 장면만 계속 잇달아 나오는 음탕한 활동사진을 준비했던 건 아닐 테지? 그런 이유로 내 앞에서는 차마 못 틀고 있는 건가, 응?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편히 보면 돼, 크하하핫!”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은 사이토가 짓궂은 농담으로 시비를 걸며 채근해 댄다. 선우진은 결국 뒤에 놓아 둔 필름 통을 열었다.
“네 편의 영화를 준비했습니다. 먼저 프란츠 랑이라는 사람이 감독한 <거대도시>, 이건 좀 진지한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거대화된 미래의 도시, 기계인간과…….”
선우진이 필름을 구입할 때 받았던 안내책자를 집어 들고 설명을 해 주자, 사이토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별로인걸? 기계인간이라니! 어느 정도는 말이 되어야 봐 주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다음은 해럴드 로이드 주연의 영화 <신입생>입니다. 미국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의 좌충우돌 사랑과 미식축구…….”
“그 안경잡이 놈 싫더군! 어딘가 얼이 빠진 놈 같아서! 그리고 미식축구 규칙은 유키 양에게 설명하기 어려울 거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더니 까다롭게만 군다. 선우진은 세 번째 필름의 안내문을 읽기 시작했다.
“세 번째 영화는 버스터 키튼의 <장군>이군요. 조지아의 마리에타로 몰려드는…….”
“음!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유키 양은 어떻게 생각하지?”
‘장군’이라는 제목에 흥미를 느낀 사이토가 유키에게 물었다. 유키는 한없이 유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버스터 키튼이 나오는 영화는 전부 다 좋습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표정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사이온지 님과 닮기도 했습니다.”
“그래? 저 애송이 사이온지와 닮은 놈이 있다니, 나도 보고 싶어지는군. 그걸로 하지.”
사이토는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아주 편안하게 영화를 볼 준비를 마쳤다. 유키의 어깨에 자신의 상의를 덮어 준 선우진은 영사기에 필름을 걸고, 연회장의 조명을 껐다. 탁-! 촤르르르륵-! 필름이 회전하며 빛을 타고 날아가 스크린에 투사된다. 어둠 속에서 주연과 제작자의 이름이 길게 펼쳐지자, 두 남자의 사이에 앉은 유키는 옆자리로 팔을 뻗어 선우진의 손을 꼭 잡았다.
“1861년 봄, 웨스턴 아틀란틱 사의 고속기차가 조지아의 마리에타 시를 향해 속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선우진이 첫 번째 자막의 내용을 유키에게 작게 알려 주자, 사이토도 그들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속삭였다.
“마리에타는 남북전쟁에서 아주 큰 전투가 있었던 도시라네, 유키 양. 테네시의 지도자였던 레오니다스 포크 사령관이 바로 저기에서 전사했어. 미국군사학교에서는 저때의 전쟁사를 아주 자세히 교육하고 또 계속 연구하지.”
변사 역할인 선우진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그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하고 싶어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주제의 영화를 고른 모양이다.
“그렇군요……, 비극이 아니면 좋으련만.”
전사했다는 말을 들은 유키가 겁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우진의 손을 꽉 잡은 그녀의 손에는 벌써부터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영화는 ‘장군’이라는 이름의 고속열차를 모는 기관사 버스터 키튼의 이야기였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와 오빠가 자원해서 참전하자, 버스터 역시 시대에 떠밀려 군에 입대를 희망하게 된다.
“아니,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그렇게 모진 말을…….”
여자주인공이 버스터에게 입대하기 전까지는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대목에서, 유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미 영화에 몰입한 사이토가 끼어들어서 의견을 피력했다.
“그게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사회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져. 입대를 피하는 사람은 비겁한 인간으로 취급되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유키 양도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걸? 예전에 사이토 사장도 목숨을 걸고 민간인들을 구해 내지 않았나. 그…… 유키 양의 오빠도 명예롭게 전사했고.”
“저는 절대로 사이온지 님을 위험에 몰아넣지 않을 겁니다. 영웅도 필요 없고, 다른 사람들의 칭송도 원치 않아요. 그저 사이온지 님께서 영원히 제 곁에 있어 주시기만 하면 돼요.”
“다들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면 누가 전쟁에 나가 싸우겠나? 결국은 남편과 자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거야. 물론 그래서 전쟁을 피해야 하지만.”
두 사람이 영화를 보는 것인지 어둠 속에서 토론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스크린 속의 버스터는 이미 활약을 시작했다.
“하하하하! 저놈 저거!”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차 위에서 버스터가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온갖 묘기를 부리며 적을 뿌리치자, 사이토는 특유의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무슨 말을 했던 건지 알겠어. 과연…… 닮았군.”
적군들에 둘러싸여도, 대포가 자신을 겨누고 있어도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치 않는 버스터 키튼을 보면서, 사이토는 납득한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한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사이토와 유키는 선우진이 필름 교체를 위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열심히 대화를 나눴고, 버스터가 기차를 이용해 상상도 못할 재주를 부리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유키 같은 딸을 갖고 싶었던 건가……. 이 사람.’
인자한 얼굴로 흥미롭게 유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이토를 보고 있는 동안, 선우진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친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인 사이토에게 유키라면 정말로 바랄 만한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일 터다.
“저것 봐라, 저런 상황이 벌어진단 말이야. 적군의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 용서할 수 있겠냐고!”
버스터가 북군의 복장으로 여주인공 앞에 서자, 사이토가 스크린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아…….”
유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작게 신음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아주 깊게 고민하고 있을 게 빤하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북군으로 위장하고 있던 버스터가 여주인공을 구해내고 남군에게 적이 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출발했기 때문이다.
“아아, 다행이에요! 모두가 행복해져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남군의 영웅이 된 버스터가 결국 장교가 되고 여주인공과 재회하자, 유키는 벅찬 얼굴로 선우진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하지만 결국 3년 뒤에 마리에타는 함락되고, 남군은 패배하네. 아마 저기 저 군인들은 거의 다 전멸하게 될 걸세. 저놈도 죽겠지. 이건 희극이 아니구만.”
여주인공과 키스를 하는 버스터를 가리키며 사이토가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사이, 영화는 끝이 났다.
“아…… 행복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허망해진 유키가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울먹인다. 선우진은 그녀를 진정시켜 주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저런 남자와 여자라면 마지막 전투가 있기 전에 함께 손을 잡고 멀리 달아났을 겁니다, 유키 양.”
“그럴까요?”
유키가 희망을 품고 고개를 들려할 때, 사이토가 단언했다.
“아니, 아니 어림없어! 허황된 말로 유키 양을 현혹하지 마라, 애송이 사이온지! 전쟁에 휘말린 개인이 그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정도로 만만하면 그건 전쟁이 아니지. 하지만 유키 양…….”
냉혹한 이야기만 늘어놓던 사이토가 유키에게 눈을 찡긋 하며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이라면 애초부터 전장 같은 지저분한 곳에 얽혀들 일이 없을 게야. 워낙에 수완이 좋단 말이지. 이편저편 가리지 않고 다 동지로 만들어 버릴 놈이라고.”
마지막 한마디로 유키를 위로해 준 사이토가 잔을 비운 뒤 일어섰다.
“아, 이제 가 봐야겠다. 귀여운 얼굴도 이만하면 실컷 봤고, 여기에 왔던 소기의 목적은 다 이룬 것 같으니까.”
“같이 저녁 식사를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선우진이 묻자, 사이토는 또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녀석 하여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방해했잖아! 더 있었다가는 두고두고 유키 양의 원망을 듣게 될 거다. 아, 유키 양은 더 배웅 말고 여기에 있게! 밖이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지!”
연회장 문 앞에서 문득 멈춰 선 사이토가 선우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요양병원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조금은 신경 쓰이는구나. 네 녀석이 내게 부탁했던 단 한 가지 사업이었는데 말이야. 내가 한조에게 따로 당부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나을 것 같기에, 아무 소리도 안 했다.”
“각하께서 이미 충분히 배려를 해주신 덕분에 신임 총독의 재가가 필요한 부분도 없습니다. 그러니 잘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어차피 당분간은 하세가와가 실무를 담당할 테니까, 그쪽에 이야기하면 된다. 그럼…….”
사이토는 열린 문을 통해 복도로 나왔다. 에스컬레이터 주변과 아래의 정문에는 여전히 그의 경호 병력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곧바로 내지로 돌아가십니까?”
선우진이 묻자, 사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야겠지.”
“아쉽군요. 며칠 더 계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나 역시 조선에만 너무 오래 있었더니 본토 분위기를 따라잡기가 버겁더군. 만나 봐야 하는 사람도 많고.”
바쁜 일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는 듯, 사이토는 셔츠의 깃을 당겼다.
“피곤하시겠지만, 일본 내각의 정점에 서셔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선우진의 위로를 들은 사이토는 쓴 미소를 지으며 함께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뭐랄까……. 총리대신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동시에 내가 총리대신 후보로 거론되는 정국이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아. 장군 출신만 죽어라 올리고 있는 모양새잖냐? 이제는 슬슬 민간인 총리의 연임이 필요한데도 바뀔 기미는 없고 말이지.”
사이토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째 다이쇼 시대와 함께 자유롭던 사회의 분위기도 슬슬 끝이 나 버린 것 같구나. 내각 전체가 전쟁을 원하고 있어. 그것도 미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