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강동이교.2019.07.17.
“삼국지?”
의외의 질문이었다. 선우진은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글쎄……. 자세히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군. 그저 대강의 얼개와 유명한 대목 몇 개 정도나 알고 있는 수준일세. 예를 들자면 도원결의나 삼고초려, 적벽대전 정도랄까…….”
“적벽대전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네. 필요한 부분이 바로 거기였으니까. 그러면 이야기하기가 훨씬 쉬워지지.”
안경남자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선우진으로서는 그 두 가지가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장제스의 결혼이 왜 대단한 묘수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삼국지를 꺼내 오다니…….
“이 일을 이해하는데 삼국지가 왜 중요한 겐가?”
선우진의 질문을 들은 안경남자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익숙한 과거이기 때문이지!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더욱 익숙한 과거. 지금 장제스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과거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나.”
“과거라? 어째 점점 더 수수께끼처럼만 흐르고 있네그려.”
“아, 그 부분부터 동의를 얻는 편이 낫겠군.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겪을 때 현재의 시각에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네. 오히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인단 말이네.”
안경남자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해.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수많은 단서들을 모두 그때그때 판별해서 가치 판단을 내리려면, 우리의 이 두뇌가 너무 바빠지기 때문일세.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도 벅차. 그보다는 이미 축적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행동을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고 빨라서 생존에도 유리하지. 그러니까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적절한 예를 찾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던 안경남자가 닫혀 있는 문을 가리켰다.
“이렇게 가정을 해 보세. 저 문을 열고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음식찌꺼기가 담긴 바가지가 들려 있다고. 우리는 그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무엇을 원할는지 예측할 수 있네. 과거에 보았던 걸인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지.”
“음……. 그도 그렇겠군.”
선우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안경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는 이미 알아들었다. 도박사들 역시 상대의 몸짓과 표정, 버릇부터 파악하려 노력한다.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어떤 얼굴이 되는지, 블러핑을 할 때 특이한 버릇은 없는지……. 그래야만 상대의 패를 추측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에 유리하다는 말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곡선으로 움직이는 길쭉한 물체를 보고도 그게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을 시작하는 사람과, 혹시 독사인가 싶어 일단 피하고 보는 사람은 생존 확률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할 테니까.
“그렇게 이미 있었던 일로 현재를 판단하는 자세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인간에게는 그런 습성이 있다네. 그냥 그렇게 알고 있는 바에 빗대어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 그것과 같다고 믿는 게야. 서양 철학자 쇼펜하우어라는 이는 이런 행태를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독설을 펼치기도 했지.”
안경남자가 말했다. 선우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뉜지는 모르겠으나 지독한 소리를 했구만. 어쨌든 자네 말은 잘 알아들었네. 그런데 장제스와 삼국지는 대체 어떻게 이어지나?”
“연관성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그가 현재 처한 상황을 좀 짚어 보세나.”
안경남자는 빈 원고지를 한 장 뒤집어 그 뒷면 백지에 중국과 조선의 지도를 간략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간도, 만주, 그리고 이 작은 점이 베이징. 상하이가 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부분이고, 난징은 여기일세. 좀 더 서남쪽이 우한, 이 한참 아래쪽의 항구가 광저우.”
안경남자는 간이지도의 북쪽부터 중요한 지점들을 표시하며 글자를 덧붙여 놓았다. 지도 그리기를 마친 안경남자는 맥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배경이 될 무대를 보여 줬으니 이제 인물을 알릴 차례군.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2년인가 전에 사망한 쑨원일세. 이 혁명가는 삼민주의라고 해서, 민족과 민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사상을 중국인들에게 전파하려 애를 썼지. 공산주의자들의 국민당 입당을 허가하여 외세와 싸우는 국공합작을 주도하기도 했고. 현 국민당의 아버지처럼 추앙받는 인물이야. 쑨원이 없었다면 장제스도 없지.”
“음, 나 역시 그 이름과 업적 정도는 알고 있네.”
선우진이 대꾸했다. 사망 당시 신문에 중국의 큰 인물이 졌다고 대서특필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 쑨원의 최측근으로 후계자를 자처하는 남자가 둘 있네. 왕징웨이와 장제스. 현재의 국민당은 이 두 사람이 지도자인 셈일세. 우한의 왕징웨이는 정치적 기반이 강하고, 난징의 장제스는 군사적 기반이 강하다네.”
안경남자는 쑨원이라는 이름 옆에 또 두 개의 이름을 좌우로 기입하며 말을 이었다.
“왕징웨이와 장제스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밤을 지새워도 부족할 것 같으니, 아주 짧게 정리하세. 이 두 사람은 앙숙이야. 국민당의 패권을 두고 서로를 견제하느라 여념이 없어. 한때 장제스가 아주 우세한 것처럼 기울었던 적도 있으나…….”
안경남자는 지도의 상하이에 동그라미를 겹쳐서 그리고, 4월이라고 썼다.
“지난 4월 상하이에서 일어난 공산당 학살 사건. 일명 4․12 쿠데타 때문에 장제스는 대중적 인기를 잃었다네. 국민당 내에서의 위상도 흔들리게 됐지. 사상과 무관하게 힘을 합쳐 외세와 싸우자던 쑨원의 유지를 저버리고, 같은 중국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으니 말일세.”
“이제 겨우 질문의 원점으로 돌아왔군. 내가 궁금했던 바는, 그런 만행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쑹메이링과의 결혼이 복귀의 묘수가 되는지 하는 점이었네.”
선우진이 물었다. 안경남자는 쑨원이라는 글자 아래쪽에 선을 쭉 그은 후, 또 하나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문제적 인물을 한 명 더 거론할 필요가 있네. 조금 전 내가 왕징웨이와 장제스를 소개할 때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인물들이라고 했네만, 이들은 말 그대로 자처하는 것일 뿐, 실제로 대중의 인식 속에서 쑨원의 모든 정치적 유산은…… 이 사람이 물려받았지. 쑨원이 만든 국민당이라는 왕국의 상왕비인 셈이랄까.”
그가 적은 이름은 ‘쑹칭링’이었다. 쑨원의 부인이자, 쑹메이링의 언니.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선우진이 물었다.
“상왕비라니……, 그건 너무 구식의 개념 아닌가? 쑨원이 존경받은 이유는 민권을 주창했기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안경남자는 선우진의 질문을 다시 질문으로 받았다. 선우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야 조선 사람이지.”
“그렇지. 우리는 조선 사람이야. 지금 종로통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물어본대도 대답은 매한가지일 걸세. 허나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대한제국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걸까? 갑오개혁 이후 분명 국호를 바꿨던 바 있는데 말이지.”
“그야 조선 쪽이 더 익숙하니 그렇지 않겠나.”
“맞네.”
안경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500년 동안 조선 사람들이었으니 그쪽이 더 익숙할 수밖에. 기미년 만세운동과 때를 같이 해서 발표했던 3․1독립선언서에서도 ‘조선’이라 칭하고 있을 정도니, 민초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그래서 내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과거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지도자를 바라보는 심리도 그와 비슷한 걸세.”
“20세기가 도래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 지도자를 대할 때, 왕이라 인식한다는 것인가?”
“음, 아주 단순하게 대답하자면 그렇다네. 수천 년에 걸쳐 그 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야. 민권주의니, 총통이니 하는 사상과 명칭은 쉽게 이해할 수 없어도, ‘영웅’이나 ‘성군’이라는 단어는 한 번에 와 닿아 가슴을 마구 흔들어 버리지. 재벌의 가렴주구와 외세의 탄압을 모두 막아내고 중국인들을 구원해 줄 성군!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긴…….”
선우진은 금세 납득했다. 대중들이 익숙한 제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는, 지금 덴노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자세만 보아도 이해할 수 있다. 엄연히 입헌군주국임을 선포한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내각보다 황실이 더 우위에 선다고 여긴다.
“이 쑹칭링은 쑨원의 부인 겸 비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적극적인 신여성이자 열성적인 혁명가였지. 그래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피력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네.”
안경남자는 쑹칭링의 이름 옆에 줄을 그어 우한과 연결 짓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쑨원의 유지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쑹칭링이, 4․12 쿠데타 이후 난징을 떠나 왕징웨이가 있는 우한 정부로 옮겨가 버렸다네. 당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학살한 장제스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면서.”
“허어, 그래서……!”
선우진은 작게 탄식했다. 그렇다면 장제스로서는 후계자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입게 된 것이고, 반대로 우한 정부는 큰 지원군을 얻는 셈이다. 안경남자는 맥주를 들이켜며 검지를 세워 보였다.
“바로 그렇다네. 쑹칭링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떠난 순간, 장제스의 난징 정부는 괴뢰 정부로 전락한 것이나 다름없어. 적어도 쑨원을 지지하던 당원들의 시선에서는 그렇지. 장제스로서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쑹칭링에게는 동생이 있었다네.”
“쑹메이링…….”
“바로 맞았네. 장제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면, 쑨원과 가족 비슷한 개념으로 얽히게 되는 거야. 손상된 정통성도 회복되지. ……뭐 물론 사망한 쑨원을 기준으로 보면 처제의 남편이니 엄격하게 따지자면 남에 더 가깝지만, 그래도 잠시 눈속임은 되지 않겠나. 다나카 일본 총리에게서 현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한 장제스에게 이건 마지막 기회나 다를 바 없었지. 그래서 사람들이 묘수라 부르는 것이고.”
“그러나 말일세…….”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유심히 듣고 있던 선우진이 의문을 재기했다.
“그렇게 빙빙 멀리 돌아가는 수가 얼마나 먹히겠나? 아무리 쑹칭링의 동생이라고 해도, 쑹메이링 본인은 아무런 정치활동을 해 오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쑹칭링이 동생 부부와 만나지 않으면, 가족이라는 관계는 의미가 없을 것이라 보는데.”
“그 역시 자네의 말이 맞네. 만약 쑹칭링이 가족의 혈연에 기울지 않고 쑨원이 표방했던 정치적 사상을 따른다면, 쑹메이링이라는 인물이 가진 가치는 확연히 줄어들게 될 테지. 그리고 아마 지금까지 보여 왔던 성향에 따르면 쑹칭링은 동생에게 연연하지 않고 우한에 그대로 머물 걸세.”
안경남자가 대답했다. 이 말대로라면 장제스가 던진 비장의 승부수는 결국 실패하는 게 된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직 들려주지 않은 비밀스런 해석의 여지가 남았다는 표정이었다. 선우진은 싱긋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피에르, 자네는 장제스가 결국 이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리라고 보는군, 그렇지 않나?”
“그렇다네. 민초들이 혼동을 일으키게 될 게야. 그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나, 역사의 사건이라는 것이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니까.”
안경남자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진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손을 슬쩍 벌렸다.
“자, 이제 들려주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이 묘수의 비밀을……. 삼국지와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겐가?”
“가장 중요한 변수 하나는 이 도시들의 위치일세.”
안경남자는 지도의 난징과 상하이, 그리고 우한의 절반을 모두 이어서 가로로 선을 그으며 말했다.
“이 세 도시와 저 아래 광저우까지, 여기는 모두 삼국 시대 오나라의 영토였지. 양쯔 강 아래의 동쪽, 소위 강동이라 불리는 곳이니 말일세. 우한은 아래쪽의 반쯤만 속하지만.”
“아, 그런가?”
그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선우진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안경남자가 그린 지도를 다시 바라보았다. 안경남자는 난징에 새로운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음, 난징의 당시 지명은 건업. 손권이 오나라를 세우고 수도로 삼았던 곳이네. 우한은 조금 복잡한데, 당시에는 별개였던 두 도시에 한커우까지 합해서 최근 새로 만들어진 지명일세.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
“말하자면…… 강동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기에 난징은 전통성이 있는 도시이고, 우한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인가?”
“역시 날카롭군!”
선우진의 예리한 통찰력을 칭찬한 안경남자가 우한의 옆에 손견이라는 이름을 한문으로 써 넣었다.
“중국 전체를 놓고 보자면 우한은 아주 요지일세! 새로운 통합이라는 면에서는 뭔가 국민당적인 사상과도 연관이 되지. 하지만…… 강동 사람들에게는 글쎄, 잘 모르겠는 도시인 게야. 게다가…… 오나라의 시조이자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이 전사했던, 조금은 불길한 기억의 지역이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우한에 정부를 차린 왕징웨이는 정서적으로 불리하다네.”
“그럴 듯도 하이. 그러나 아무리 그 지역 사람들이라고 해도, 하필 삼국 시대의 관점으로만 요즘의 세상을 보겠나?”
선우진이 묻자, 안경남자는 손견이라는 이름의 ‘손’ 자를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그렇지는 않을 테지. 하지만 이 ‘손’이라는 이 성씨가 너무도 공교롭지 않나. 사람들로 하여금 익숙한 기억을 자극받도록 만들기에 충분해. 쑨원을 우리 식으로 읽으면 ‘손문’이라네. 손견과 같은 성씨네. 심지어 쑨원 역시 광둥성에서 태어난 강동 출신이니, 강동사람들로서는 무의식적으로 오나라와의 연관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걸세.”
“그럼 자네 생각에는 사람들이 쑨원을 볼 때, 삼국지의 손견을 겹쳐 봤다는 말인가?”
“아닐세. 손견은 훗날 시조로 추존되기는 했으나, 실제로 건국의 대업을 이루지도 못했고, 그리 멋졌다고도 할 수 없어. 쑨원과 겹쳐 보일 만한 멋진 인물은 따로 있다네. 바로 소패왕 손책이지.”
안경남자는 새로운 종이를 꺼내 손책과 쑨원이라 쓴 뒤, 두 인물이 가진 유사성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동 사람, 종씨, 젊은 시절부터 물러서는 법이 없는 용맹함, 황제를 참칭하는 군벌에게 반기를 든 영웅, 그리고 건국의 위업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수명이 다한 비극적 최후……. 어떤가, 이만하면 꽤나 비슷한 점이 많지! 영웅을 기다리던 마음이 슬슬 착시 때문에 흔들릴 법도 하지 않나?”
“허어…….”
선우진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안경남자가 적은 긴 목록을 유심히 살폈다. 듣고 보니 닮은 점이 많기도 하다. 경극과 이야기로 늘 삼국지를 소비하는 중국인들로서는, 특히 해당지역의 강동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분명 이 두 인물에게서 뭔가 기묘한 운명적 유사성을 느끼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삼국지 속 손책과 닮은 점이 강조되고 인구에 회자되어도, 결국 인기가 올라가는 것은 쑨원뿐 아닌가? 그것이 장제스에게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네그려.”
선우진이 물었다. 안경남자는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책이라고 적은 옆에 새로 한 개의 이름을 더 썼다.
“공교롭게도 삼국시대 손책에게는 아주 우애가 깊은 친구가 있었네. 강동 사람들에게는 이 친구 역시 손책에 버금갈 정도로 멋진 호걸이라 인식되고 있을 걸세. 그의 이름은 주유, 적벽대전에서 제갈량과 함께 조조의 80만 대군을 궤멸시켰던 오의 충신이었지.”
“그래. 기억나네! 제갈량과 지혜 다툼을 했던 사람이지 않은가.”
“비록 연의에서는 제갈량을 당해내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 역시도 허물은 되지 않는다네. 철저하게 제갈량의 지혜를 신격화했던 그 소설에서조차 주유는 훌륭한 경쟁자였으니 말일세. 게다가 오나라를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을 알기에, 강동 사람들이라면 주유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돼 있어.”
안경남자는 손책과 주유의 이름 사이에 선을 그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손책과 주유는 10세 무렵부터 교류를 시작한 단짝으로 ‘단금’, 즉 무쇠도 끊을 만큼 뜨겁고 진한 우애를 보였다고 전해지네. 손책은 주유를 진심으로 신뢰했고, 주유 역시 손책을 주군으로 섬기며 충성을 다했지. 심지어 손책이 요절한 뒤에도 주유는 그의 어린 동생 손권을 보필해서 오나라의 세를 키웠네.”
선우진은 그제야 장제스가 원하는 구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자가 되기 어려워졌으니, 적어도 자신이 정부를 세운 난징에서만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삼국지와 유사해 보이는 부분들로 강동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해서…….
“자네의 말은…… 장제스가 난징 일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 주유처럼 인식되기를 원한다는 건가?”
“주유와 겹쳐 보일 수만 있다면 장제스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걸세. 주유 역시 요절한 비극적 영웅이기 때문이지. 배신자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벗어던지고, 숭고함을 가장하게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미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장제스가 그런 평가를 받기는 어려워 보이는 걸? 친구이자 후계자라는 점 외에는 유사성도 없고…….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왕징웨이 쪽이 주유와 비슷한 지위를 얻는 게 아닌지 싶은데 말일세.”
“역시 옳은 평가일세. 권력욕이 강한 장제스는 주유와 닮지 않았어. 그래서 이 결혼이 묘수이고 의미가 있는 거라네. 쑨원과 가족이 되었다는 표면적인 관계보다 더더욱 깊고 큰 의미가……. 자아,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 볼까?”
맥주로 목을 축인 안경남자는, 다시 만년필 뚜껑을 열고 손책과 주유의 이름 사이에 네 글자를 더 적어 넣었다.
“강동이교?”
선우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글씨를 읽는 동안, 안경남자는 ‘강동이교’의 좌우에 각각 ‘대교’와 ‘소교’라는 이름을 추가해서 썼다.
“당시 교공에게는 강동 제일의 미모를 자랑하는 두 딸이 있었네. 사람들은 그 자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언니를 일컬어 ‘대교’라고, 동생을 ‘소교’라고 불렀지. 이중 언니인 대교는 손책과 결혼을 했네. 그리고 동생인 소교는…….”
안경남자는 대교와 손책을 선으로 이은 뒤, 소교 위에 만년필촉을 찍었다. 아직 선을 긋기 전이지만, 선우진은 소교의 남편이 누구였는지 이미 알 수 있었다.
“오호라, 그렇게 닮기로 한 것인가…….”
선우진이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안경남자는 소교와 주유를 연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바로 이것일세,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장제스의 비책은! 그가 쑹칭링의 동생인 쑹메이링과 결혼발표를 한 순간, 난징과 강동 일대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강동이교의 일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혼란스럽던 쑨원의 후계자 구도마저 덩달아 선명해지는 거라네. 소교, 쑹메이링을 아내로 맞은 장제스가…… 주유와 겹쳐 보이기 시작한 걸세. 다른 곳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를 테지만, 여기는 옛 오나라의 수도 건업이었으니까.”
안경 남자는 지도의 난징 위에 진하게 동그라미를 덧칠해 그렸다.
“으음…….”
그 독특한 분석에 매혹된 선우진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지도를 응시했다. 안경 남자의 말이 맞다. 사람들은 이성보다 감성에, 마음이 시키는 방향으로 더 크게 흔들린다. 도박의 수로 보아도 이건…… 최상급이라 평할 만했다. 아무리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고 이용한다고 해도, 삼국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종류의 계책이다. 동시에 역사와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런 역전이 가능하다니…….
“그렇다면 쑹칭링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
선우진이 묻자, 긴 설명을 마치고 담배에 불을 붙이던 안경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한 정부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있다지만, 여전히 그녀에게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네. 이번에는 제대로 한 방 맞았지만 다시 투쟁하지 않을까? 중국 내의 모든 세력이 쑨원의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얻기 위해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말일세.”
“그래…… 어쨌든 장제스는 그리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구만.”
선우진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겨우 하나가 되었던 세력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쪼갠 그의 행태는, 결국 일본이나 영국 같은 제국들을 이롭게 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 중국의 개혁 세력이 산산이 쪼개졌어. 뭐, 그것이 전부 그 한 사람의 책임은 아니지만 어쨌든…….”
안경남자는 절실히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포들도 덩달아 여러모로 힘들게 되었지. 후원을 해 주던 국민당이 좌우로 나뉘어 버렸고, 거기에 공산당은 또 따로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으니…… 안 그래도 미약했던 우리 동포들의 단체들 역시 그 흐름에 휩쓸려 찢기고 서로 반목할 수밖에 없을 걸세.”
그 예측은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아프고 또 아팠다. 거기에 어별교 이일석이 들려주었던 선친의 당부도 선우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 빛을 되찾은 조선이…… 반으로 갈라져서 동포들끼리 서로를 원수처럼 죽이는 전쟁이 올 것이라 하더군요. 백만이 넘는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고 나서도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반세기가 넘도록 서로를 백안시하는 미래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어쩌면 이번 국민당의 분열이 그 끔찍한 비극의 단초가 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선우진의 가슴은 더욱 미어졌다. 담배 연기 속에 잠긴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선우진이 고개를 들고 입을 뗐다.
“혹시 말일세……. 그 어려워진 독립 운동가들이 자네를 찾아와 조선 세력 단합의 묘수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