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 버스터의 방과 후 특별활동. (171/459)

171. 버스터의 방과 후 특별활동.2019.07.31.

16550716057676.png“설마…… 거처라는 게 여기를 말했던 겐가?”

프린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잔뜩 위축된 안경 남자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리석 바닥과 화강암 벽, 그리고 호화로운 대형 샹들리에에 고가의 장식품들까지……. 호텔 내부는 가난한 식민지 청년을 기죽일 만한 것들로 온통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오늘은 서양 사업가들과 외교관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잔뜩 몰려든 상태다. 그 화려하게 차려입은 부자들 사이에서 이 남자가 기가 죽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안경 남자는 앞으로 한동안,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꽤나 긴 시간 동안, 화려함과 사치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새로운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질 터다.

16550716057682.png“그렇다네. 마음에 드는가?”

선우진이 물었다.

16550716057676.png“마음에 들고 뭐고, 여…… 여기는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데…….”

눈을 깜빡이던 안경 남자가 두려운 얼굴로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16550716057676.png“……이런 데는 대체 하룻밤 숙박료가 얼마나 하나?”

16550716057682.png“조선 호텔의 8할 정도 가격이라네.”

선우진이 다정하게 알려 주었다. 물론 조선 호텔 쪽이 좀 더 화려하고 고급이지만, 오늘 그쪽으로는 가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곳에는 선우진의 얼굴을 아는 직원들도 너무 많고, 유력 인사들이 모여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으니까.

16550716057682.png“예서 잠시만 기다려 주게.”

선우진은 안락의자에 안경 남자를 앉혀 두고 접수계 데스크로 걸어갔다.

16550716057703.jpg“아, 고객님!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선우진의 고급스런 코트와 양복을 알아본 지배인이, 벨을 울리기도 전에 달려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프린스 호텔에서는 부자 아닌 고객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지만, 이 남자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선우진은 번쩍이는 던힐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16550716057682.png“예약을 하지는 않았네만, 오늘부터 특실을 사용했으면 하네.”

선우진의 말을 들은 지배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서양인들의 예약이 잔뜩 잡혀 있는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불쑥 나타나 특실을 내놓으라니……. 이건 무례하기까지 한 부탁이다. 그러나 무시해 버리기에는 저 값비싸 보이는 양복과 고가의 라이터, 그리고 한없이 자신만만한 태도가 맘에 걸린다. 소매에 달려 있는 커프스 버튼만 해도 호텔 지배인의 연봉은 훌쩍 넘길 게 분명하다.

16550716057703.jpg“오늘부터……라고 하심은…… 얼마나 이용하실 예정이신지요?”

지배인이 선우진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피며 물었다. 물론 방은 있다. 갑자기 일본에서 찾아올지도 모르는 거물급 귀빈을 위해 특실 한두 개쯤은 언제나 비워 두는 것이 특급 호텔 경영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루 이틀 머물다가 가 버릴 뜨내기에게 그걸 내줄 용의는 없지만.

16550716057682.png“그야 이 호텔의 서비스가 조선 호텔에 비해 미진하다고 느껴질 때까지일 테지.”

오만한 부자의 연기를 하며 담배연기를 내뿜은 선우진은 가방에서 100원 지폐 다발을 꺼냈다. 현금 만 원을 본 지배인의 눈이 커다래진다. 선우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중 절반을 뚝 떼어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16550716057682.png“길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지금 너무 고단하군. 일단은 이 정도만 지불하고 시험 삼아 두어 달 사용하기로 해 볼까…….”

16550716057703.jpg“아!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고객님! 실례지만 성함을……!”

지배인은 혹여 대형고객의 마음이 바뀔세라 재빨리 지폐다발을 당겨 뒤쪽의 여직원에게 넘기고, 숙박부를 열었다. 단방에 5,000원. 일본에서 화족이 와도 두어 달 동안이나 특실을 사용해 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마음에만 들면 더 연장하겠다는 의사까지도 밝혔다. 이런 초대형 손님을 놓치면 반 년 장사를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우진은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했다.

16550716057682.png“아사쿠사 미두 중개소에서 귀빈들을 접대하기 위해 사용할 예정이니 그 정도만 알아 두면 되네.”

물론 그건 야마다가 확보하고 있던 가짜 신분증을 이용하여 설립한 회사다. 여기에서의 신분 노출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16550716057703.jpg“아사쿠사…… 중개소…….”

부지런히 만년필을 놀려 숙박부의 빈칸을 채워 넣고 있는 지배인에게 선우진이 말했다.

16550716057682.png“우리 중개소의 귀빈들을 모신다는 걸 잊으면 곤란하네, 지배인. 혹여 그분들께서 불편을 느끼신다면 내 마음도 불편해질 것이고, 내 마음이 불편해지면 자네의 일상도 아주 불편하게 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말을 마친 선우진은 지배인의 양복 윗주머니에 100원 지폐 한 장을 접어서 꽂아 주었다.

16550716057703.jpg“넵! 명심, 또 명심하고 필생의 노력으로 봉사하겠습니다! 그 점만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객님! 아……!”

연달아 허리를 굽히던 지배인이 문득 기억났다는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16550716057703.jpg“그, 그것이……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만…….”

16550716057682.png“뭔가?”

선우진은 뒤쪽의 안경 남자를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안경 남자는 드레스 차림의 서양 여자 둘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6550716057703.jpg“그……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없사오나, 내년 초 나흘 정도…… 고객님께서 사용하실 특실 바로 맞은 편 객실에 평양의 김 상이라는 젊은 조선인 고객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같은 층에 조선인이 묵는 것이 불편하시진 않을는지요. 여러 번 모셔서 신원은 확실하지만, 기생들과 함께 파티를 즐기는 조금 소란스러운 분이어서…….”

16550716057682.png“평양에서 온 김 씨인데 기생들을 부른다라…….”

선우진이 잠시 말꼬리를 늘이자, 지배인은 서둘러 한마디를 보탰다.

16550716057703.jpg“물론 아사쿠사 중개소의 귀빈을 위해서라면 예약을 취소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역시 취소하는 것이 좋을까요?”

16550716057682.png“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네. 우리 고객들 중에도 조선인이 많이 있으니까.”

사람 좋은 얼굴로 대답하던 선우진이 돌연 눈을 매섭게 뜨며 말했다.

16550716057682.png“물론 그분들 역시 아주 소중한 귀빈들일세. 돈에는 국적이 없는 법이지.”

16550716057703.jpg“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지배인은 황망하게 태도를 바꾸고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혹시라도 이 녀석 때문에 안경 남자나 버스터가 차별대우를 받을 일은 없으리라.

16550716057682.png“조금 전 그 서양여인들은 뭔가? 자네에게 말을 걸던데. 벌써부터 사랑고백이라도 받은 겐가? 빠른걸.”

301호 특실의 열쇠를 받아 돌아온 선우진이 안경 남자에게 농담처럼 물었다. 안경 남자는 쑥스럽다는 듯 이마를 긁적였다.

16550716057676.png“아…… 가방을 옮겨 달라고 하더군. 연회가 열리는 3층으로 가야 하는데, 짐 가방이 많다나……. 아마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서 직원이 아니라고 했네. 그런 뒤에 미안하다는 사과를 들은 정도일세.”

16550716057682.png“……그랬군.”

선우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안경 남자가 상류사회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좀 더 고급스런 외양을 갖출 필요가 있다. 옷차림도 지금 입고 있는 것 같은 대충 지은 허름한 양복이 아니라, 미츠코시 백화점 1층의 최고급 제품이어야만 한다.

16550716057682.png“그나저나 자네, 영어를 하는군.”

선우진이 물었다. 이건 좋은 소식이다. 앞으로 안경 남자는 아주 많은 외국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될 터이므로.

16550716057676.png“뭐, 그냥…… 단어나 문법은 알고 있으니 책을 읽는 것은 쉽네만, 막상 서양인들의 발음을 접하니 당황스럽더군. 그저 혼자서 책으로 배운 언어인 까닭에 일상에서 익힌 일본어만큼 편치는 않으이.”

16550716057682.png“그 역시 금세 익숙해지지 않겠는가. 자, 올라가세.”

선우진은 안경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16550716057676.png“오호! 이렇게 조종을 하는 게로군!”

엘리베이터 보이가 레버에 달린 긴 손잡이를 이용해서 엘리베이터를 출발시키고 또 멈추는 걸 보면서 안경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반응을 보였다. 조종간에 달린 바늘이 정확히 3층을 가리키는 순간, 엘리베이터 보이는 레버를 멈추고 접이식 창살문을 당겨 열었다.

16550716057703.jpg“3층입니다, 고객님!”

16550716057682.png“앞으로 자주 부탁하게 되겠네.”

선우진은 10원 지폐를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쥐여 주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의 양탄자도, 객실의 장식도 확실히 조선 호텔에 비하면 약간씩 떨어지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안경 남자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16550716057676.png“이보게! 이 옆에…… 방이 또 있네! 이렇게 다른 방과 이어져 있으면, 아무래도 좀 불편하지 않을까?”

널찍한 301호의 객실을 둘러보던 안경 남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박카스로 전화를 걸던 선우진은 수화기를 든 채 대꾸했다.

16550716057682.png“그 방들 역시 다 자네가 쓰는 것일세. 정확히 말하자면 자네와 버스터가 함께 쓰는 것이지만……. 어쨌든 침실도 세 개나 되니, 딱히 불편하지는 않을 걸세.”

16550716141598.png- 말하시라요. 박카스입네다!

전화가 연결되고, 퉁명스런 버스터의 인사가 들려왔다. 접대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우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16550716057682.png“버스터 자네 들어왔나?”

16550716141598.png- 음, 학교 아새끼들 다 집까지 들여보내고 오니까 영 늦누만. 그런데 어케 된 검메? 피에르 하숙집에르 간단 사람이 어드러케 던화를 다 거는 거이네.

16550716057682.png“그렇게 됐네. 나타샤 양은?”

16550716141598.png- 려성 동무래 코가 쭉 빠져서리 집에 갈 준비 하고 있단. 모처럼 서양명절인데 그 삐에르 새끼래 못 보게 된 거이, 어디간히 속상한 모냥이누만.

16550716057682.png“잘되었군. 우리도 여기에서 모처럼 파티를 계획 중이니 그럼 두 사람, 인력거를 타고 프린스 호텔로 오시게.”

잠시의 침묵 뒤에 버스터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16550716141598.png- 프, 뭐이?

아직 영어는 어렵고 낯선가 보다. 선우진은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글자씩 강조해서 천천히 다시 말했다.

16550716057682.png“아, 프, 린, 스 호텔일세.”

16550716141598.png- 호텔이라는 데는…… 출입해 본 력사리 없는데…….

이번에는 영어를 들었을 때보다 더 두려움이 커졌다.

16550716057682.png“엘리베이터를 타고 특실 301호로 가겠다고 하면 알아서 모실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게나.”

선우진은 버스터를 안심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와 함께 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716057703.jpg“룸서비스입니다!”

문을 열어주자 두 명의 보이가 음식과 술이 가득 담긴 카트를 밀고 들어선다.

16550716057703.jpg“지배인이 환영의 인사를 담아 보낸 룸서비스입니다. 모쪼록 앞으로 오랫동안 모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16550716057682.png“음, 후의에 감사한다고 전해 주게.”

보이들에게까지 두둑하게 팁을 주어 돌려보낸 뒤, 선우진은 손뼉을 한 차례 쫙 치며 미소를 지었다.

16550716057682.png“마침 파티를 위한 음식도 도착했군. 자, 아직 친구들이 오기 전이지만 미리부터 건배하세. 이렇게 멋진 크리스마스에 축하주 정도는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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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진이 고급스런 잔에 와인을 채워 건네자, 안경 남자는 두려운 얼굴로 말했다.

16550716057676.png“여보게, 친구…….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이렇게 사치스러운 곳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16550716057682.png“처음엔 그럴 테지만 몇 달 정도 지내다 보면 점점 더 익숙해질 거라 생각하네.”

16550716057676.png“몇 달?”

안경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50716057676.png“그저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고 두려운데, 여기에서 몇 달을 머물라고? 안될 말이네. 이 어마어마한 비용은 내게 계속 빚이 되는 걸세. 나는…… 갚지도 못할 빚을 지고 싶지 않아.”

16550716057682.png“이보게, 현이.”

선우진은 안경 남자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16550716057682.png“오해하지 말게나. 자네가 내게 빚을 지는 것이 아닐세. 내가 자네를 이용하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것뿐이지. 나는 투자한 돈의 몇천, 몇만 배에 달하는 이익을 남길 자신이 있다네. 이건 엄청나게 남는 장사야. 그러니 부디 부담 갖지 말게나.”

이미 갖고 있는 돈의 일부를 이용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일. 당연히 엄청나게 남는 장사다. 여기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머리가 없거나,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16550716057676.png“설마…… 오늘 나타샤 양이나 버스터에게 내 비밀을 모두 밝히려는 건가? 그건 싫네!”

와인을 마신 안경 남자가 여전히 두려운 어조를 띤 채 물었다. 선우진은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16550716057682.png“그럴 리가! 내가 그리도 입이 가벼운 사람이겠나. 안심하게나.”

정말로 오늘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모든 것이 확실하다고 호언할 수 없는 상태이니까.

16550716057676.png“자네가……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네. 내가 실망시키게 될까 걱정도 되고…….”

16550716057682.png“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네, 친구. 일단은 그냥 좀 쉬게. 이 호사는…… 나라를 잃은 뒤에도 아직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믿는 부자가, 조선의 황태자였어야 할 친구에게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수준의 대접일세.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으이.”

선우진은 안경 남자의 어깨를 도닥여 주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16550716141598.png“메리 크리스마스! 동무들!”

잠시 후 나타샤와 함께 301호를 찾은 버스터는, 활짝 웃는 얼굴로 성탄절 인사부터 건넸다. 그리고 안경 남자와 선우진에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종이 공작물을 내밀었다.

16550716141598.png“열어 보라우! 내 마음이니까네 부담 갖디 말고 편안하게! ……야, 여기래 기가 막히게 꾸며 놓았구만기래. 이거이 돈 깨나 들었갔는데? 이야! 더 밖에 야경 좀 보라우! 고저 번떡번떡 하누만!”

넓은 발코니 앞에 선 버스터는 전기조명이 밝혀진 남촌의 야경을 굽어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16550716057682.png“마음에 들면 며칠 더 묵게나. 사정이 있어서 어차피 공짜일세.”

선우진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제법 그럴 듯하게 꾸며 댔다.

16550716057676.png“이건…… 뭔가?”

안경 남자가 종이 공작물을 살펴보며 묻자, 버스터는 뒤를 돌아보고 웃었다.

16550716141598.png“큭! 세상만사 모르는 거이 없는 둘 알았더니만, 동무래 기건 몰랐구만! 고거이 카드라 카는 물건이야! 크리스마스카드! 고저 멀리 서양에서는 말이디, 매년 이맘 때 친구들끼리 기렇게 덕담을 주고받는 력사적 전통이 있단.”

  <동무들, 깁쁜 성탄절 보내라우야.> 조잡하게 장식된 카드 봉투를 열어 보니, 버스터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크리스마스 인사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학교 공작 시간에 만들었으리라.

16550716230675.png“이렇게 멋진 파티를 준비해 주셨는데, 선물도 없이 와서 어쩌죠? 찾아와 주실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와인 잔을 받은 나타샤가 미안하다는 듯 입을 가린다. 선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0716057682.png“선물은 이미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선우진은 안경 남자를 돌아보았다. 지금의 그에게 이보다 더 크고 기쁜 크리스마스 선물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16550716057682.png“버스터.”

네 친구들만의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쯤, 선우진이 버스터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비밀스레 말했다.

16550716057682.png“자네, 모레 학교 파하거든 나와 함께 잠시 어디 좀 다녀오세.”

  *** 이틀 뒤 늦은 저녁, 두 사람은 돈화문 부근의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에 숨어들었다.

16550716057682.png“자, 이걸로 얼굴부터 가리게. 장갑도 끼고.”

선우진이 검은 천과 가죽 장갑을 내밀자, 버스터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도리질을 했다.

16550716141598.png“야…… 이거, 이 아새끼래…… 덜대로 나쁜 일 안 시킨다, 기렇게 호언장담을 하더니 몇 달 밥 잘 맥여 놓고서리 종내 강도짓거리를 시키누만……. 기런 고급 호텔에다 박아 둘 때부터 리상하다고 알아챘어야 하는 거인데.”

그러면서도 순순히 천을 받아드는 걸 보면, 정말로 나쁜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16550716141598.png“뭐이를 어드러케 하라는 거이네?”

얼굴을 검은 천으로 대강 둘러 감으며 버스터가 물었다. 역시 복면을 한 선우진이 그늘 너머의 창덕궁 담을 가리켰다.

16550716057682.png“저기엘 좀 들어갔다가 오려고 하네.”

16550716141598.png“궁궐에를 말이네? 다 망해 자빠진 왕족들 모여 사는 데는 뭐하러?”

16550716057682.png“긴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네.”

선우진이 간략하게 대답하자, 버스터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16550716141598.png“사람을 만나? 궁궐나인한테리 련정이라도 품은 거이네? 훗, 그나저나 동무래 고저 방귀 좀 뀌는 것 같았는데 말이디, 이렇게 월담해서리 몰래 기어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음메?”

16550716057682.png“낮에 얼굴을 보며 나눌 만한 이야기가 아닐세.”

선우진은 품 안에서 간이 지도를 꺼내 버스터에게 보여 주었다. 어제 도서관에 들러서 베껴 그린 창덕궁 내부의 위치도다.

16550716057682.png“지금 우리 위치는 여기일세. 창덕궁의 남쪽이고 종묘에서 보자면 북쪽이지. 가야할 곳은 여기, 낙선재라는 곳이네.”

어둠 속에서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어 가며 설명을 하자, 버스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16141598.png“뭐…… 기렇게 멀다고 할 수는 없갔구만기래. 뉘기를 만나겠다고 오밤중에 이 난리를 티는디는 모르갔디만, 날래 가서리 후딱 해치우고 오자우.”

16550716057682.png“그러면 좋겠는데, 문제는 저기 저 보초병들일세.”

선우진은 장갑 낀 손으로 전기 조명이 밝혀진 방향을 가리켰다. 거기엔 총을 메고 칼까지 찬 일본육군들이 손전등으로 이쪽저쪽을 비춰 가며 순찰을 도는 중이었다.

16550716057682.png“저렇게 4인 1조로 구성된 병력들이 쉬지 않고 오가면서 경비를 서고 있네.”

16550716141598.png“기까이꺼야 뭐 문제리 되간?”

버스터는 가죽장갑을 더 꽉 손에 맞게 끼워 넣고서 자신의 목을 천천히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득-! 그의 단단한 근육과 골격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선우진은 설명을 이었다.

16550716057682.png“충돌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좋네, 버스터. 무장한 네 명의 군인 자체도 결코 만만하지 않은 전력이지만, 문제는 저들이 갖고 있는 총과 호각의 소음일세. 만약 총소리가 나거나 호각이 울리면 그 즉시 주변의 병력들이 몰려들 것이고, 궐내에서 대기 중인 수비대도 뭔가 준비를 갖출 테지.”

16550716141598.png“하…… 말도 참 렬정적으로도 많구만기래. 내래 듣다가 지치갔서. 기래서 하고 싶은 말이래 뭐이네? 무서우니까니 들가디 말자고 하는 거네?”

16550716057682.png“그게 아니라 여기서 틈을 보며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하는 걸세, 버스터. 어제 내가 지켜본 바로는 저놈들이 잠시 순찰을 멈추고 저기 보이는 천막으로 들어가 추위로 언 몸을 녹이는 시간이 있었네. 우리는 바로 그 틈을 노려서 몰래 담을 넘어 아무 소란피우지 않고 궁궐 내로 잠입을 해야 하네. 주의할 것은 어쩌면 저 담장 안쪽에도 순찰대가 또 있을는지 모른다는…….”

타앗-! 선우진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버스터는 벌써 날렵하게 땅을 박차고 창덕궁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일본군순찰대의 손전등 불빛이 막 그들이 숨은 나무 옆을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곧바로 담장 위를 내달렸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가볍고 신속한지, 전력 질주를 하는 데도 담장 위에 장식된 기왓장에서는 작은 소리조차 울리지 않는다. 물론 떨어져 깨지는 기왓장도 없다. 사사삿-! 자세를 낮춘 채 고양이처럼 담 위를 달려가던 버스터는 일본군 순찰대의 머리 위로 몸을 날렸다. 그때까지도 놈들은 전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먼 곳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빠박-! 지면에 닿기 전 교차하며 내지른 버스터의 발차기가 뒤쪽 두 놈의 머리통을 강타한다. 털썩-! 놈들은 비명은커녕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통나무처럼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16550716057703.jpg“읏!”

동료가 갑자기 거품을 문 채 나자빠지는 것을 보고 놀란 일본군들이 뭐라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버스터의 오른 주먹이 왼쪽 놈의 턱을 돌렸다. 덜컥-! 고개가 완전히 돌아간 왼쪽 놈이 무릎을 꿇으며 허물어지는 동안, 버스터의 왼쪽 주먹은 벌써 오른쪽 놈의 복부에 꽂혀 들어갔다.

16550716057703.jpg“흐어……!”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고통에 오른쪽 놈의 몸은 공벌레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그렇게 수그러지며 무방비로 열린 놈의 턱에 버스터의 팔꿈치 돌려치기가 섬광처럼 박혔다. 털썩-! 한 바퀴 수평으로 핑그르르 돈 오른쪽 놈이, 눈을 홉뜬 채 동료들의 몸뚱이 위로 쓰러진다. 그렇게 실로 순식간에, 네 명의 무장한 일본군순찰대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주인을 잃은 손전등 불빛들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굴러다닐 뿐, 움직이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버스터가 담장에서 뛰어내린 때로부터 채 2초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다. 게다가…… 버스터는 놈들이 담장 바로 아래 그늘에 고꾸라지도록, 쓰러지는 방향까지 조정해 가며 해치웠다. 어깨에 총을 멘 병사들을 상대로…….

16550716141598.png“오라우, 동무!”

마지막으로 쓰러진 놈을 한 바퀴 굴려서 그늘 아래 숨긴 버스터가, 선우진이 숨어 있는 나무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런 뒤 아무렇지도 않게 담장을 훌떡 뛰어넘어 먼저 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16550716057682.png“이런……!”

선우진은 난감해하며 전력으로 담장을 향해 달렸다. 어둑하게 그늘진 담장 바로 밑에는, 일본군들이 여전히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다.

16550716057682.png“세상에…… 번개 같군.”

선우진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네 명이나 되는 상대를 눈 깜짝할 사이에 기절시킨 그 무력도 놀랍지만, 설명을 다 듣지도 않고 튀어나간 저 급한 성미 역시 참으로 어지간하다.

16550716057682.png“다른 방향에서 보이지는 않을 테지? 가만…… 이 손전등은 끄고 가는 게 나으려나? 아니지…… 갑자기 불이 꺼지면 그게 더 수상해 보일 테니까…….”

선우진이 적당한 위치에 가도록 손전등들을 여기저기 재배열하고 있을 때, 담장 위로 버스터의 얼굴이 쑥 올라왔다.

16550716141598.png“아니 오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이네? 날 추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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