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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선우진의 중대제안 (182/459)

182. 선우진의 중대제안.2019.09.07.

1655071928129.jpg“또 와 이러네, 동무? 주먹 쥐고 기렇게 눈 부릅뜨디 말라우! 고거이 몹시 보기에 돟디 않아!”

미간을 찌푸린 버스터를 보며, 김동인은 기겁을 했다. 호랑이 같은 그 눈빛은 확실히…… 누가 봐도 겁을 먹을 만하다.

16550719281295.png“돟디 않기는 니 말하는 거이가 더 안 돟디! 이 정신 빠딘 새끼래!”

버스터가 김동인의 멱살을 움켜쥔 채 확 당기며 말했다.

16550719281295.png“내래 원래 약골 새끼들은 안 건드리는데 말이디, 이거이는 아주 딜이 안 돟아. 말하는 것 돔 보라우. 뭐이 어드래? 사람을 듁여개지구 령감을 얻어? 이 돼먹지 않은 호랑말코 같은 새끼!”

1655071928129.jpg“기거이 어디까디나 소설 속의 지어낸 이야기디, 내래 언제 증말 사람을 듁이겠다고 했네? 야 이 무식한 동무래, 엉뚱한 오해 때문에 사람 티갔구나!”

안경이 흔들려 벗겨진 김동인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항변했다. 하지만 버스터는 좀처럼 설득이 되지 않는 표정이다.

16550719281295.png“그딴 썩어빠진 생각이 니 머리통 속에 들어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란!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알루 깔아보고 있으믄 고따위 소리가 주둥이에서 텩텩 튀어나올 수 있는 거이네?”

1655071928129.jpg“아, 기러니까네 고거이 바로 례술뎍 상상력이라는 거이야! 내래 상상력이 워낙 뛰어난 사람이라 기런 거뿐인데, 와 택임을 물으려고 하네? ……이보라우, 길케 멍하니 보고 있디만 말고 동무들도 돔 나서서 말리라우!”

김동인은 사색이 되어 안경 남자와 나타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안경 남자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서 버스터를 만류했다.

16550719281313.png“그래. 그만두게나, 버스터. 지금 주먹질을 한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겠나? 그래 봐야 그저 무가치한 고통과 감정의 소모가 있을 뿐이네.”

16550719281295.png“기러믄 이딴 소리 지껄이는 새끼르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네? 내래 이, 승질이 못돼 먹어서리 기렇게는 못한단!”

버스터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 앞을 막아선 안경 남자가 차분하게 말했다.

16550719281313.png“이 김동인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을 한 악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상일세. 나라를 팔고 동포를 죽인 뒤로도 떵떵거리며 잘만 사는 놈들이 부지기수 아닌가. 그런데 하필이면 이 망상가가 우리의 눈앞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개인적인 징벌을 할 필요는 없네. 이 사람은 시대적 상실감을 이기기 위해서 망상에 빠진 것뿐이고, 현대 사회에서 상상은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 법일세, 버스터.”

16550719281295.png“아, 덴당…… 또 시작이누만, 웅얼웅얼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로 끝도 없이 이어디는 잔소리!”

버스터는 짜증을 부리면서도, 결국 안경 남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김동인의 멱살을 놓아 주었다. 겨우 신체적 자유를 얻은 김동인은 안경을 주워 쓰고 나서, 넥타이를 바로 했다.

1655071928129.jpg“아, 그래도 다행이누만. 저 안경 쓴 동무처럼 생각이 비슷하게 통하는 지적인 친구래 섞여 있어서리.”

16550719281313.png“자네와 나의 생각은 전혀 비슷하지도, 또 통하지도 않네.”

안경 남자가 김동인을 돌아보며 냉정한 투로 대꾸했다. 김동인은 헛웃음을 웃었다.

1655071928129.jpg“기러믄 동무래 이 시대르 사는 됴선인으로서 상실감도 느끼디 않는다는 거이네? 길케 위선 떨디 말라. 내래 다 안단. 고저 생각이 깊고 아는 거이 많을수록 괴로울 수밖에 없는 시대 아이갔서? 그 아픔이라는 거이는 오직 리지적인 인간만이 받는 고통스러운 형벌이디!”

16550719281313.png“스스로 피해자를 자처하며 약한 척하지 마시게나, 금동이. 자네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진 채 태어났다고 스스로의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는가. 굶주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를 물려받았고, 유학하며 책을 읽고 이해할 정도의 지적능력을 가졌다고. 이 시대에 그 정도면 충분히 행운아의 범주에 드네. 그렇다면 그 행운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하시게나.”

1655071928129.jpg“기렇게 하고 있디 않네? 됴선 문학을 몇 단계 끌어올리는 소설 창작을 하믄서 말이디! ……내래 그 누구도 범뎝할 수 없는 이 례술적 재능을 살려서리 됴선 문학에 자연주의 사조를…….”

김동인이 뭔가 변명을 해 보려 들었지만, 안경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16550719281313.png“자네가 야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을 흉내 내어 이런저런 소설을 쓴다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네. 문학으로 자신을 변명하려는 시도도 용납 가능한 범위이고, 그것을 대단한 창작이라 포장해서 아직 해외문화에 낯선 대중들을 기만하려 드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어.”

1655071928129.jpg“뭐이라? 내래 남의 흉내 같은 거이는 내 본 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단!”

16550719281313.png“<라쇼몽>의 분위기를 따서 칠성문이 나오는 <감자>의 도입부를 썼지.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지옥변>의 기괴하고 비극적인 예술가 이야기마저도 자신을 위한 변명으로 차용하려 하는 모양인데, 그마저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네. 유학을 가서 읽어본 그 소설들의 충격이 워낙 강렬했을 테지. 그 재능을 닮고 싶었을 테고 말일세.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생겼을 게야.”

평온한 어조로 조곤조곤 하는 말들이었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너무도 아프게 뼈를 때리는 노골적 비판이다. 차라리 버스터에게 몇 대 맞는 편이 김동인으로서는 더 나을 것 같았다. 김동인의 노한 얼굴이 흙빛으로 질렸는데도 안경남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16550719281313.png“만일 자네가 막대한 유산을 이용해 문필가로서 이름을 얻는다 해도 나는 굳이 그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네. 글로 인쇄된 모든 정보가 곧 사실처럼 인식되는 이 사회에 자네의 글들은 꽤나 큰 폐해를 끼치겠으나, 그 역시도 시대의 아픔에 비하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니 딱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안경 남자는 김동인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16550719281313.png“그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 여기지는 마시게. 다급하거나, 돈이 많거나, 혹은 자네의 말대로 역사적인 천재거나 간에……. 그 어떤 이유라고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할 이유는 되지 못하네. 인간을 경시하고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는 자에게 무슨 예술이 있고, 무슨 지적인 재능이 있단 말인가? 그런 건 그저 20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괴물일 뿐이네.”

그것이 옳은 말이든 아니든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안경 남자의 말들이 김동인을 정말로 화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역시 이 안경 남자에게 외교라는 건 무리다.

1655071928129.jpg“훗!”

마지막 저항처럼 헛웃음을 웃은 김동인이 작게 도리질을 했다.

1655071928129.jpg“기렇게 동포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인도적인 동무인 줄은 또 몰랐구만기래. 고저 던힐 담배를 태우고, 금당 팔뚝 시계르 떡하니 찬 부르주아가 기딴 소리를 디껄이니까네, 아주 설득력이 있단! 암, 기렇고말고! 빈민들이라카믄 고저 다 선하다고만 믿는 멍청이들! 나를 함부로 재단하디 말라우! 나에 대해서리 대체 뭐이를 안다고……!”

16550719281313.png“그러는 자네는 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겐가? 그것도 심지어 도구로 쓸 만큼 무가치한 존재로.”

1655071928129.jpg“끄으응!”

화를 삭이기 위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김동인이 입가를 닦으며 소리쳤다.

1655071928129.jpg“나가라우! 동무들이랑 더 할 이야기 없으니까네, 내 방에서리 당장 나가라우!”

그것으로 김동인과의 짧은 만남은 끝이었다. 물론 나타샤가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선우진도 나타샤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김동인이라는 인물은…… 스스로를 낮추고 타인을 위한 일을 하기에는, 너무도 명예욕과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16550719281295.png“것보라우! 기러니까네 애초에 무슨 령화를 보갔다고 저딴 새끼랑 말을 섞으냔? 딱 봐서리 사람되기 글렀다 싶으믄 고저 몇 대 쥐어박고 말 것이디!”

방으로 돌아온 버스터가 불쾌한 기분을 씻으려는 듯 담배연기를 뻑뻑 뿜어 댔다. 안경 남자는 아쉬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16550719281313.png“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부터 분명 뭔가 우려스러운 면은 느껴졌었네. 어딘가 비뚤어지고 토라진 어린애 같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열성적으로 믿고, 자신이 뭔가 대단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추앙받게 되리라 기대했을 테니, 그 실망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물론 저 정도였을 줄은 몰랐네만…….”

16550719350073.png“김동인에 대한 기대는 접게. 그의 문재가 어느 정도로 뛰어난 수준인 줄은 모르겠으나,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가 순수하지는 않군.”

잠자코 듣고 있던 선우진이 안경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안경 남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16550719281313.png“저 사람이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닐세. 독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수록, 점점 더 많은 지식인들이 저 사람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자신의 삶을 수정하고, 뭔가 핑계를 대려 들 게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살아내기가 버거워지니까 말이지. 안드레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도 저렇게 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다네.”

16550719281295.png“아, 모르겠단! 내래 기딴 어려운 말은 모르갔고, 일단 지금은 술이나 한 사발 마셔야 되갔서! 기래야만 이 더러운 기분이 돔 내려갈 것 같단. 배웠다는 아새끼래 어디서 저 따위 소리를 디껄이고 말이디…….”

버스터가 손사래를 치며 술병을 꺼내 오자, 나타샤도 잔을 내밀었다.

16550719378694.png“저도 한 잔 주세요! 해야 할 일도 많고, 가야 할 길도 멀다는 게 다시 한 번 절감되는 밤이었네요. 저야말로 나름 일월관의 나타샤라고 우쭐했었나 봐요.”

16550719281313.png“나는 김동인에게 호감이 있었다지만, 나타샤 양이 그렇게 속상해하는 이유는 또 뭐요?”

안경 남자가 영문을 몰라 하며 묻자, 나타샤는 자신의 복장을 가리켰다.

16550719378694.png“나름 합리적인 금액 내에서 최고급으로 꾸몄는데,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드레이의 말처럼 왕족으로 보이려면 적어도 취객이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거든요.”

16550719281313.png“그야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소? 술 취한 사람이 어디 외모를 가리겠소이까?”

16550719378694.png“하지만 저 김동인이라는 사람, 안드레이를 보자마자 엄청 놀라서 긴장하던걸요? 아무리 취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라는 것은 느끼게 되어 있어요.”

16550719281313.png“하긴 이 친구는 누가 봐도 정말로 멋지긴 하지……. 이 친구가 왕자라고 하면 누구나 납득할 텐데.”

안경 남자가 아주 동감하는 표정으로 선우진을 돌아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타샤가 굳은 의지를 담아 주먹을 꽉 쥐어 보인다.

16550719378694.png“아뇨,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피에르를 안드레이만큼 멋져 보이게 꾸며 놓도록 할게요.”

16550719281313.png“아…… 그야 물론 영광이오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안경 남자가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 남자는 역시 순수하고 맑다.

16550719350073.png“그런데 자네, 아라키 사다오라는 인물을 아는가? 군인인가 보던데.”

술잔이 몇 순배 돌았을 무렵, 선우진이 안경 남자에게 물었다. 청진에서의 그 폭발 암살 시도 당시, 사카모토가 대뜸 용의자 선상에 올렸던 이름이다. 만약 그가 사카모토와 대립 중인 인물이라면 이용가치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적의 적은, 종종 친구가 되기도 하니까.

16550719281313.png“음, 육군 장성이지. 작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네. 러일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드문 육군 중 한 사람이고, 지금은 육군 참모본부의 1부장일 걸세. 그리고 차기 육군대학의 교장으로 내정되어 있고……. 내가 읽었던 기사 이후로 다른 변동이 없다면 말이지.”

안경 남자는 이번에도 막힘없이 술술 잘도 일러 준다. 선우진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16550719350073.png“자네의 말만 듣자면 꽤나 우수한 군인처럼 들리는군.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16550719281313.png“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젊은 시절의 인재가 바보 우익 인사로 늙은 경우라 할 수 있네. 일본 군인들을 사상에 따라 좌부터 우까지 일렬로 세운다면 아라키는 가장 우측에 설 사람일세. 게다가 그 외에도 문제가 다분한 인간이지. 현재 일본 육군들이 미치광이들의 집합소라고 하면, 그 미치광이들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아라키였다고나 할까?”

안경 남자는 선우진이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대답을 들려주었다. 똑같이 러일전쟁의 주역이었다고 해도, 사이토 총독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군인인 모양이다. 선우진은 가볍게 탄식했다.

16550719350073.png“그 정도인가? 자네 말대로라면 사카모토나 데츠잔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사람처럼 여겨지네그려.”

16550719281313.png“자네가 거론한 그 두 명도 결코 바람직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아라키 사다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걸세. 그만큼 그가 일본 육군이라는 조직에 미친 폐해는 폭 넓고도 깊지. 그는 여러모로 현대의 군인과는 거리가 멀어. 일단 매사 천황과 황제를 찾는다는 점부터가 위험하다네.”

16550719350073.png“황제를 찾는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선우진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되묻자, 안경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 설명을 들려주었다.

16550719281313.png“법적으로 일본군의 공식 명칭은 국군일세. 국가를 위해 싸우는 군대라는 의미네. 그런데 종종 자신들을 황군이라 부르는 놈들이 있어. 황제의 군대, 혹은 황국의 군대라는 뜻으로 말일세. 이건 위험해. 만약 국가의 이익과 황가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황가에 이득이 되는 쪽을 택하겠다고, 자신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16550719350073.png“아라키라는 자는 자신을 황군이라 인식하는 인물이란 말인가?”

16550719281313.png“그보다 더 심하다네. 그 황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인간이 바로 아라키 사다오일세. 그럼으로써 그는 내각과 헌법의 존재가치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

그렇다면 정말로 사카모토에 못지않은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인간임에 틀림없다. 선우진은 혀를 찼다.

16550719350073.png“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일본 육군은 파 볼수록 골치가 아픈 집단이로군.”

16550719281313.png“그렇다네. 그런 자가 장성까지 진급하는 조직은 분명 정상이 아니지. 그런데 그런 인간이 육군대학의 교수로서 젊은 장교들을 가르쳤고, 차기 교장으로 내정되었다니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게다가…….”

안경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16550719281313.png“격이 없다고 해야 할까, 뭐랄까. 하여간 아라키는 부하 장교들에게 반말을 허락한다 들었네. 주변에서 화를 내도 오히려 즐기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 젊은 장교들을 두둔한다더군. 물론 인망을 얻기 위한 전략일 게 빤하지만,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아. 규율이 중시되는 군 내부에서 그렇게 그릇된 언어로 관계를 규정하다 보면, 언젠가는 필시 하극상이 발생하게 될 걸세.”

16550719350073.png“하극상이라…….”

그 어휘가 마음에 들어, 선우진은 작게 한 번 소리 내어 발음을 해 봤다. 젊은 일본군 장교들이 하극상을 원하고 있다면, 선우진은 그저 그 칼날이 사카모토와 스기우라를 우선해서 향하도록 돌려놓기만 하면 된다. *** 하워드 휴즈가 경성으로 찾아왔다. 그의 영화 제작비를 대겠다고 레이에게 말해 준 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그만큼 하워드 휴즈가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의미일 터다. 사실 그 정도는 눈에 띄게 여윈 그의 얼굴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16550719350073.png‘정말 많이 힘들기는 했던 모양이군.’

요정에 들어선 휴즈를 보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16550719435009.jpg“지옥의 천사들 추가 제작비를 모두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들었네, 아이스맨. 진심인가?”

휴즈는 선우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선우진은 술을 권하며 미소를 지었다.

16550719350073.png“일단 한 잔 받고 숨이라도 돌리게, 하워드. 이미 이 먼 곳까지 왔는데, 간만에 만난 친구끼리 술잔 주고받을 여유도 없는 겐가?”

16550719435009.jpg“나는 괜찮지만 말이지. 투자 확정 전보만을 기다리고 있을 우리 영화사 재무담당들은 그런 여유가 없다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을는지도 몰라. 제발 그…… 영화 산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인 귀족이 투자를 약속하게 해 달라고.”

얼핏 농담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선우진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16550719350073.png“정 그렇거든 우선 전보부터 보내고 오게나. 영화 제작이 마무리될 때까지 더 이상 재정적인 문제는 없을 거라고. 바보 부자 하나를 단단히 낚았다고 말일세.”

16550719435009.jpg“정말?”

하워드 휴즈는 새삼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16550719435009.jpg“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이 들어가야 완성이 될는지, 혹은 지금 우리 영화사의 재정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하다못해 이 영화의 대본조차 확인해 보지 않은 상태이면서 대뜸 그런 약속부터 해 주겠다고?”

16550719350073.png“대강의 총액 정도야 짐작하고 있네. 레이가 170만 달러 정도 필요하다고는 일러줬으니까.”

16550719435009.jpg“맞아. 최대한 그쯤이 더 제작비로 쓰이게 될 걸세. 그런데, 음…… 자네 앞이니까 솔직히 이야기를 하겠네. 사실은 아직 그 절반도 마련하지 못했어. 거기에 이자를 감안하면, 제작기간이 길어질수록 비용도 점점 더 늘어나게 될 거란 의미지.”

16550719350073.png“그 170만 달러 모두 내 쪽에서 책임질 테니, 이자가 발생하는 채무는 즉시 변제하도록 하게. 내 쪽의 투자는 이자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사실 그 액수에서 20퍼센트쯤 더 추가비용이 발생한다고 해도 무방하이.”

잔을 비운 선우진이 대답했다. 전쟁발발의 분위기 때문에 최근 들어 무섭게 오르고 있는 미두 시세 차익만으로도, 그 정도 액수는 몇 번이고 지불할 수 있다.

16550719435009.jpg“이, 이자도 받지 않겠다고? 이건 완전히 산타클로스로군. 우와……!”

휴즈는 감격스럽다는 듯 탄성을 내지르면서도,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 세밀한 설명을 붙였다.

16550719435009.jpg“헌데 말이지……. 자네가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그냥 다시 한 번 말하겠네. 이 영화…… 언제 촬영이 마무리될는지 기약이 없어. 물론 이익은 발생할 테지만, 그게 언제 회수될 것인지는 영 부정확하다는 뜻이지. 그래도 괜찮겠나?”

16550719350073.png“괜찮기는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오래 걸려야 하는 것인지는 궁금하군.”

16550719435009.jpg“완성도를 위해서지.”

휴즈가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담아 눈을 빛내며 말했다.

16550719435009.jpg“빠르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투기의 속도와 크기, 그 아슬아슬한 전율을 살리지 못한 필름들은 계속 버리는 중일세. 그런 걸로는 관객들에게 충격을 줄 수 없고, MGM이나 파라마운트 같은 거대영화사들을 이기지도 못할 걸세. 나처럼 막 영화 산업에 뛰어든 신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심어 줄 필요가 있으니까.”

16550719458258.png

16550719350073.png“그런가…….”

선우진은 이해한다는 듯 턱을 괴었다. 휴즈가 거론하는 영화사들이 어떤 곳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의 논리에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이 젊은 백만장자는 세간의 부정적인 평가와 달리, 그저 돈쓰며 잘난 체하는 데 혈안이 된 미치광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치밀한 계산 하에 움직이는 사업가다.

16550719350073.png“어쨌든 재미삼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닐 테니, 언젠가는 개봉을 할 테지. 하워드 자네의 돈도 이미 꽤나 많이 투입되어 있지 않나?”

16550719435009.jpg“뭐…… 120만 달러가 들어갔으니, 그 누구도 적은 액수라고 할 수는 없을 걸세, 아이스맨. 그리고 사실은…… 나는 이 촬영 기간 내내 신형 비행기 개발 역시 등한시할 생각이 조금도 없네. 그 비용 역시 영화 쪽에 보태서 계산하게 될 거야. 현재의 것보다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날 수 있는 비행기가 아니면, 멋진 항공전의 화면은 담기 어려우니까. 그래도 괜찮겠나?”

휴즈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실대로 자세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기존의 것보다 빠르고 안정적인 비행기라면 선우진에게도 반가운 소식이다. 선우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19350073.png“나는 그 역시 반대할 생각이 없네, 하워드. 비행기 개발도 영화 촬영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처럼 자네 소신대로 진행하면 된다네.”

16550719435009.jpg“허……! 이봐, 아이스맨. 이건 너무 후하잖아? 내심 기대를 하고 오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자네…… 대체 뭔가? 내 아버지가 천당에서 보낸 천사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 주는 거지?”

충격 받은 표정의 하워드 휴즈가 물었다. 얼마나 긴장하고 또 놀랐는지, 그는 아직도 첫 술잔을 그대로 꼭 쥔 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선우진은 자신의 잔을 도로 채우며 말했다.

16550719350073.png“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고, 지금 자네에게 일시적으로 부족한 것을 갖고 있다네. 그런 상황에서 친구를 돕는데 딱히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

16550719435009.jpg“아니, 아니. 그러지 말게, 아이스맨. 이건 비즈니스야.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친구를 돕는 사람은 없어. 다들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지. 그러니 자네의 실제 계획을 들려주게. 대체 뭘 노리고 이렇게 큰 액수를 턱하니 내놓는 것이지? 자네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있는 건가?”

엄청나게 솔깃할 조건들만 들려주었는데도, 휴즈는 오히려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하며 냉정한 질문을 던졌다. 선우진은 이 남자의 이런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면이 마음에 든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이익을 남기는 동안에는 얼마든지 함께 사업 관계를 유지할 것이란 기대가 가능하다. 선우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16550719350073.png“물론 내게도 나름의 계획은 있다네. 영화에 투자하는 조건으로 하워드 자네가 나와 함께 어떤 사업을 좀 해 줬으면 하네. 일종의 동업인데 주로 자네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일세.”

선우진의 대답을 들은 휴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719435009.jpg“동업인데 내가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게 어떤 사업인지가 꽤나 중요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설마 이 투자를 미끼로 내게 미국을 배신하는 간첩 행위라도 시키려는 건가, 사이온지? 워싱턴 정가의 정치인들을 매수한다거나?”

16550719350073.png“후후후,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선우진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50719350073.png“나는 그저 자네가 날 위해서 비행사들을 좀 양성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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