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풀을 먹고 진군하면 된다!2019.10.16.
“조선인을…… 만주국의 육군 대신으로 임명하라고? 지금 그렇게 말한 겐가?”
이시와라가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놈의 눈꺼풀이 다 가볍게 떨릴 지경이다. 선우진은 모르는 척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얼마나 멋진가? 만주족 황제, 조선인 육군 대신. 그것이야말로 오족협화의 정신이 아니겠나? 그쯤 하면 열강에서도 우리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지 못할 걸세. 설마…… 그 정도의 결기도 없이 이런 원대한 계책을 세우는 것은 아닐 테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선인은…….”
이시와라는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조선인 육군 대신에게서 지휘를 받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굴욕적이라 느껴지는 듯하다. 놈뿐만 아니라 도조 히데키도, 무타구치 렌야도 입을 꾹 다문 채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선우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천막 내의 공기가 긴장으로 무거워졌을 때,
“푸하하하!”
가만히 듣고 있던 데츠잔이 무릎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참 기가 막힌 농담이군, 사이온지 사장! 이거 못 당하겠는걸! 하하하하!”
데츠잔은 배를 움켜쥔 채 한참을 웃어 댄다. 그제야 나머지 놈들도 굳었던 얼굴을 풀고 함께 실실대기 시작했다.
“조선인 육군대신이라니…… 킥킥킥! 차라리 개를 상관으로 모시는 것이 낫지!”
도조 놈은 안경을 벗고 눈물까지 닦는 시늉을 한다.
“어머! 어쩜 그런 말을……!”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들은 메구미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한마디 쏘아 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선우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진정시켰다. 여기에서 말싸움을 해 봐야 이득이 될 것은 조금도 없다. 이런 놈들은 그저 모함을 통해 단번에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게 상책이다.
“이 계책의 멋진 점을 알아볼 수 있겠나, 사이온지 사장? 만주국! 즉 국가라는 것이 중요한 거야.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법이 닿지 않는, 내각이나 천황 폐하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없는 별개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주축이 돼서!”
데츠잔이 잘난 척하며 선우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역시 이놈은…… 어떻게든 빨리 장성이 되어, 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것만 잘 활용하면 이놈들 목을 날리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겠군.’
선우진은 데츠잔과 도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카모토가 아무리 이놈들을 아낀다고 해도 이런 역모를 방관해 주지는 않을 터.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든, 아니면 사카모토가 직접 일본도로 목을 자르든 어쨌든 야마다의 복수는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 계책, 스기우라 공작의 허가는 받았나?”
선우진이 슬쩍 떠보는 질문을 던지자, 데츠잔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구두로 상세히 보고했지.”
“구두로?”
“이런 일에 서류 기록을 남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사이온지 사장. 그랬다가는 훗날 문제가 불거졌을 때, 발뺌하기가 어려워지니까.”
강박적으로 매사를 기록하고 문서로 남기는 일본인답지 않은 말이었다. 아울러 구린 구석이 많은 인간다운 발상이기도 했다. 이놈들은…… 일본의 법조차 지킬 생각 자체가 없는 망나니들이 맞다.
“그런데도 용케 허가를 받았군.”
선우진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자, 데츠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허가를 할 수밖에. 스기우라 공작은 자신이 바로 그 만주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만 믿고 있다네.”
일단 나라를 세우고 막강한 권력을 얻은 뒤에는 스기우라와 사카모토마저 배신하겠다는 의미다. 선우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그렇게 된 것이군.”
“뭐어, 아직은 멀고 먼 이야기이네만…….”
데츠잔이 게이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거만한 코웃음을 쳤다. 얼굴만 봐서는 이미 드넓은 만주를 모두 손에 놓은 놈이라고 해도 믿길 모양새였다.
‘네 녀석이 아무리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봐야 실은 별 배짱이 없는 놈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기 시작되면 부하들이야 죽든 말든 술술 다 불어 버릴 테지.’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데츠잔을 비웃었다. 작년 인천에서 카가와 중장이 할복을 명했을 때 만약 놈이 조금만 더 배짱이 두둑했더라면, 그래서 스스로의 배에 칼을 들이대는 시늉만 제대로 했더라면…… 카가와의 대처는 꽤나 달라졌을 것이다.
“이거, 이거 자네들에게 잘 보여야겠는걸? 향후 만주의 주인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니 말이야, 후후후.”
선우진이 본심을 감춘 채 놈들을 추켜세우자, 데츠잔이 술잔을 들어올렸다.
“이미 충분히 잘 보였네, 사이온지 사장. 시험도 통과했고.”
“시험이라니? 나는 그런 기억이 없네만?”
“후후후. 자네는 인식하지도 못했을 테지만, 나는 대화 속에서 이미 자네의 진실함을 다 파악했다네. 그러니 이렇게 솔직해질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데츠잔이 뽐내며 지껄였다. 자신을 천재라고 맹신하는 오만한 인간의 오판이다. 한껏 들뜬 도조가 광신도처럼 두 팔을 벌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데츠잔 대좌의 저 매서운 눈은 그 누구도 절대로 속일 수 없어! 몇 번의 취조를 반복하다 보면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고 해도 결국은 실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지! 육군 역사상 최고의 엘리트라는 찬사가 괜히 따라붙은 것이 아니라 이 말이야!”
“그렇겠군. 내가 보기에도 정말로 대단해. 아, 그런데 말일세…….”
마음에도 없는 칭찬으로 장단을 맞춰주던 선우진이 문득 궁금해졌다는 투로 물었다.
“훗날 만주국을 건립할 때, 장제스의 군대가 맹렬하게 저항을 하지는 않을까? 혹은 다른 열강에서 반대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은데.”
“그쯤이야 간단한 해결책이 있지.”
도조 히데키가 안경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도시 하나를 본보기로 삼아, 십만 명이든 이십만 명이든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다 죽여 버리는 것이네. 어린아이, 노인, 여자, 가리지 않고 전부 숨통을 끊어 버리면, 다시는 그 누구도 대일본제국 육군에 저항할 생각을 못할 걸세.”
너무도 황당한 소리에 선우진의 눈이 커졌다. 민간인 수십만을 학살하겠다는 이런 미친놈이 장교복을 입고 버젓이 걸어 다닌다니……, 일본 육군이라는 집단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정작 도조 놈 본인은 신이 나서 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뒤, 우리는 곧바로 소련으로 쳐들어 가는 것이지! 승승장구할 것이 분명해! 젊은 피로 쇄신한 일본제국 육군은 강하니까!”
“시끄럿, 멍청아! 다짜고짜 소련과의 전쟁이라니! 그건 만주국이 안정된 후에 치러도 늦지 않아! 그러려면 적어도 25년은 지난 뒤에…….”
이시와라가 곧바로 반대의견을 낸다. 하지만 도조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무슨 걱정이냐, 이 나약한 새끼야! 어차피 중요한 건 기세와 정신력이다! 정신력만 강하게 무장하면, 소련이든 미국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
“군량을 어떻게 충당하겠다는 거냐? 내각의 지원이 없이는 단 일주일도 버틸 수가 없다고! 주문을 외워서 병량환이 나타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든가!”
이시와라가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하자, 무타구치 렌야가 끼어들었다.
“병사들 식량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이시와라 소좌. 일본인들은 원래 육식을 하지 않던 민족이고, 벌판에는 어디든 풀이 잔뜩 널려 있으니까. 배가 고프면 그 풀을 베어 끓여먹으면서 진군하면 그만이야!”
이쯤 되면 정말 어느 쪽이 더 심하게 미친놈인지 겨루는 정도의 수준 아닌가.
‘이놈들은 단번에 죽여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걸…….’
격한 어조로 말도 안 되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도조와 이시와라, 그리고 무타구치를 보면서, 선우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멍청이들이 육군 장성이 된다면…… 그래서 전장에서 실제로 병사들을 지휘한다면, 어느 전쟁에서든 일본군의 패배확률은 압도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자, 자! 오늘은 이쯤 하세. 분위기가 너무 달아올랐군.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나, 숙녀들 앞에서 나눌 대화는 아닌 듯하이.”
선우진은 놈들을 진정시킨 뒤, 메구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미 놈들에 대한 간파가 어느 정도 다 끝이 난 만큼, 이제는 이간책을 적절히 쓸 차례다.
“벌써 가려고?”
데츠잔이 아쉽다는 듯 물었다. 선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차 더 자주 만나세. 아, 그리고 자동차는 이미 대기시켜 두었네. 약속한 대로 내일까지 각자 한 대씩 편하게들 이용하게나.”
놈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선우진은 메구미와 함께 천막을 나섰다.
“잠시만, 사이온지 사장.”
그가 메구미를 자동차에 태웠을 때, 데츠잔이 다급히 다가와 손짓을 했다. 부하 장교도 게이샤도 동행하지 않은 채 혼자 온 걸 보면, 긴히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걸세.”
선우진이 강가 벚나무 그늘 아래로 데츠잔을 이끌자, 놈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사이온지. 영리한 남자야.”
“적자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해 두세. 그 정도도 못 알아채면 사업을 못 하니까.”
선우진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하며 데츠잔에게 담배를 권했다.
“여전히 잘 모르겠군. 은제 담배 케이스에서 수입 담배를 꺼내 던힐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자네 같은 부자가 왜 변혁을 꿈꾸는 건지……. 자네 같은 계층들은 안정을 원하는 것 아닌가?”
데츠잔이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우진은 작게 코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걸 물으려고 가려던 사람을 붙잡았나?”
선우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도리질을 한 뒤, 데츠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가문의 당주가 일본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싫은 것뿐일세. 그런 늙은이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야. 허나 만약 그래도 한 가닥 의심이 남는다면, 자…….”
선우진은 지갑에서 ‘조선종합투자회사’ 명함을 꺼내 데츠잔에게 건넸다.
“나에 대해 조사를 해 보게나. 그간 내가 어떤 사람들과 교류했는지.”
“후후후후…….”
명함을 받아든 데츠잔은 실소하며 되물었다.
“사이온지 가문 사람의 뒤를 캐고 다니라고? 자네, 내 앞길을 막을 셈인가? 긴모치 공작에게 혹시라도 그 소식이 들어가면 나는 끝이야. 자네 말대로 현재의 일본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노인이니까 말일세. 또 내가 이런 걸 지니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면, 스기우라 공작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데츠잔은 아주 정색을 하고 명함을 돌려주었다. 이 정도 얕은 함정에는 낚이지 않는 놈이다.
“뒷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나는 자네를 믿네, 사이온지 사장. 다만…….”
“다만?”
“메구미라는 저 미녀 아가씨 말이네.”
데츠잔은 턱으로 메구미가 탄 패커드 승용차를 가리켰다.
“저 아가씨. 믿을 만한 사람인가? 혹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른 곳에서 누설하는 건 아닐 테지?”
‘이런 미친…….’
놈들이 <월간밀서>의 다니구치 기자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 있기에, 선우진의 등골에는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겉으로는 조금의 내색도 하지 않고 평온히 응수했다.
“자네가 보기엔 저 숙녀분이 내게 해 될 일을 할 사람 같던가?”
“음……. 아니, 그렇지 않더군. 하지만 나는 뭐든 확실하게 처리하는 편이 좋아서…….”
잠시 고민해 보던 데츠잔이 결국 고개를 저었다. 선우진은 놈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사랑에 빠진 아가씨는 걱정하지 말고 자네 부하들이나 잘 챙기게. 그리고…….”
순식간에 진지하게 표정을 바꾼 선우진이 데츠잔의 안경 너머 눈을 노려보았다.
“변혁을 꿈꾼다고는 하지만, 나 역시 사이온지 나부랭이일세. 누가 내 것을 함부로 건드리면…… 참지 못하는 더러운 성질이 핏속에 흐르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겠나?”
그 차가운 말투에서는 당장이라도 서리가 내려앉을 것만 같다. 꿀꺽-! 선우진의 어마어마한 기세에 순간적으로 짓눌린 데츠잔이 마른 침을 삼킨다. 선우진은 놈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한 번 더 블러핑을 했다.
“알아들었냐고 물었는데!”
“……그래, 알아들었네.”
담배를 쥔 데츠잔의 손가락이 가볍게 떨린다. 역시 이놈은 두뇌에 비해 배짱이 부족하다. 도박사로 나섰다고 해도 큰 승부에서는 이기지 못할 그릇이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선우진은 언제 정색을 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하네, 데츠잔 대좌. 승진을 위한 뇌물이든 뭐든, 돈으로 지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시치헤이를 통해 연락을 주게.”
이것으로 놈과의 서열 정리는 끝이 났다. 놈이 다시 도전해 볼 엄두를 낼 수 있기까지는 앞으로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
“사이온지 님.”
선우진이 자동차에 오르자, 메구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만주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가요?”
다카하시 사장이 만주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해 놓은 이 상황에서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더군다나 메구미는 불과 몇 달 전, 가족과 함께 장쭤린을 방문해 직접적으로 교류를 쌓은 적도 있다. 선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니, 오늘의 만남은 비밀이어야 합니다, 메구미 양.”
“네, 하지만…… 저 장교 분들께서 분명 그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오 년, 혹은 십 년 후의 미래를 위한 가상의 계획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장래의 전망이 그리 밝지 못하니, 제가 다카하시 사장께 진지하게 권유를 하겠습니다. 만주의 사업을 정리하고 철수하시라고.”
선우진의 약속을 들은 메구미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 장교분들은 너무 난폭해서 싫어요. 사이온지 님께서는 사업을 위해 만나셔야 하는 대상일 테지만요.”
“아아, 꽤나 과격하더군요. 메구미 양께서는 그중에서도 누가 가장 거슬리던가요?”
“그…… 제 맞은편에 앉아있던 안경 쓴 분이 제일 싫었습니다. 사람을 몇 만이나 죽이겠다니! 어휴!”
도조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해맑은 소녀다. 선우진은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싱긋 웃었다.
“제 평가와 일치하는군요.”
*** 다음날 오전, 선우진은 구로즈미와 함께 이지용의 집을 찾았다. 명분은 문병이지만 선우진의 진짜 목적은 협박이었다.
“어, 어떻습니까, 사이온지 님? 나름 최선을 다해 골라 본 것입니다만…… 이 정도면 이지용 백작께서 흡족해하실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구로즈미가 이지용을 위해 급하게 준비한 선물을 조심스레 내보인다. 상자 안에는 최신형 금장 시계가 들어 있다.
“좋군요. 분명 백작께서도 기뻐하실 게요.”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구로즈미는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휴우, 다행입니다. 촌부의 안목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사이온지 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됩니다.”
“그리 긴장할 게 다 뭐란 말이외까. 어차피 구로즈미 의원이 중추원 의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 오늘의 인사 역시 그저 이쪽에서 예절을 갖추기 위함일 뿐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그것이…… 아무리 그래도 중추원 고문이라는 신분 때문에, 저로서는 자꾸 긴장이 되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후우……!”
이지용의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구로즈미는 몇 번이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지 그는 계속 손을 비비며 초조함을 달랬다. 혹시라도 뭔가 실수를 해서 일생의 꿈인 중추원 의관 자리가 날아가 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는 표정이다.
“정 그렇게 떨리면 내가 비책을 하나 일러 주겠소이다, 구로즈미 의원.”
자동차에서 내리기 직전, 선우진은 구로즈미에게 몇 마디 귀엣말을 건넸다. 구로즈미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그렇게 말씀드리면 저를 호의적으로 대해 주실까요?”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허튼 소리를 하더이까?”
선우진은 자신감 가득한 어조로 대꾸하고,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말했다.
“이지용 백작을 만나러 왔으니 안내하시게.”
“아, 네!”
선우진을 알아본 문지기는 곧바로 허리를 굽힌 뒤, 저택 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백작께서는 요즘 몸이 좋지 않으셔서 통 그림을 그리지 않으십니다. 손님맞이는 더더욱 않굽쇼.”
몰라보게 한산해진 요정의 내부를 지날 때, 문지기가 묻지도 않은 소리를 웅얼거린다. 그 좋아하던 도박조차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정말 건강이 심각한 상황인 듯하다. 덕분에 나라를 팔아 마련한 대 저택은 이제 조금씩 황폐해져 가고 있다.
“으음…… 오셨소이까, 사이온지 선생. 이…… 제대로 일어나서 인사드리지 못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구려. 예전 매질을 당했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하아, 하아……!”
이지용은 보료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선우진을 맞았다. 예전보다도 더 퀭해진 눈, 움푹 팬 볼. 바짝 마른 팔다리. 이 늙은 매국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야윈 상태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꾸 불안하고 떨려서…… 하아, 하아……!”
이지용은 긴 곰방대를 이용해 아편을 태우며 말을 이었다.
“이것이 없이는, 잠시도 견딜 수가 없소이다.”
방 안은 아편굴처럼 연기로 자욱했다. 지난 몇 달간 사카모토의 망령이 얼마나 그를 괴롭혔는지 잘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선우진은 애잔한 시선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어서 기운을 차리셔야지요, 백작. 그래야 같이 또 포커를 겨룰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좋으련만……. 하아, 그런데…… 저 분은 뉘신지?”
공연히 겁먹은 이지용의 시선이 구로즈미 쪽으로 향한다. 선우진은 정중하게 구로즈미를 소개했다.
“아, 인사하시지요. 이쪽은 구로즈미 의원. 장차 중추원 의관으로 추천을 할까 하는 훌륭한 인재이올시다. 백작께서는 중추원 고문이시니, 미리 인사라도 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하아…… 그렇소이까? ……구로즈미 의원이시라고?”
안도한 이지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로즈미는 재빨리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선우진이 일러 준 비책대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 각하! 구로즈미라고 합니다! 사카모토 중장 각하로부터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