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이름부터 가짜였습니다.2019.11.20.
“조선 귀족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흉악한 놈을…… 그냥 용서해 주란 말씀입니까? 아무 처벌도 하지 않고?”
이병길은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피 묻은 상처를 가리켰다. 귀가 찢기고 눈에 멍이 든 민영휘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이다.
“아아, 잘 이해하셨소. 그것이 바로 선처라는 단어의 의미지.”
선우진이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병길은 볼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천한 놈에게 봉변을 당한 것이 분해서라도 그런 짓은 절대로……!”
“재미있군.”
선우진은 놈의 말을 끊으며 가볍게 웃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은 조금도 관용을 베풀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다니 말이야. 그런 식으로 살면 어디 가서 손해 볼 일은 없겠어. 이 얼마나 얄팍한 인간이란 말인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슬슬 다시 화가 나려 하는걸?”
“윽! 그, 그것이 아니라…….”
뜨끔해진 이병길이 채 변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약삭빠른 민영휘는 재빨리 선우진에게 동조하는 쪽으로 돌아서서, 놈에게 쓴소리를 던졌다.
“무조건 따르겠다고 하시오, 이 후작! 늙은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미안하지도 않소?”
놈은 끝까지 이병길의 탓을 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의 다리를 두드렸다. 지위의 차이 때문에 함부로 말은 못하지만, 시바타와 김덕기, 노덕술, 그리고 나머지 일본 경찰들도 원망스런 시선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이제 이 지하 창고 내에 놈의 편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 후우……! 용서하겠습니다! 선처를 호소하라시면 하지요! 하지만 저 혼자만 그리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사이온지 선생께서도 보셨듯이 피를 보고 봉변을 당한 조선 귀족들이 부지기수인데, 그 사람들의 불만은 다 어찌 감당을 한단 말씀이신지…….”
이병길은 결국 선우진에게 굴복을 하면서도 또 다시 단서를 붙였다. 선우진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야 당신이 알아서 무마하시오.”
“네? 제가?”
“후작씩이나 되면서 그 정도의 간단한 일조차 처리 못하는 것은 아닐 테지? 설마 친분이나 교류가 아예 없소이까?”
“아니, 왜 제가 다른 귀족들의 원망까지 받아 가면서…… 끄음!”
고집을 피우려던 이병길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미 완전히 기울어 버린 세력 싸움. 여기에서 버텨 봐야 괜히 무릎을 꿇고 있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다른 귀족들의 중지를 모아 그 흉악범의 선처를 호소하는 것으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병길의 눈동자 속에 일순 불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경찰이 처벌하지 않아도, 보복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놈,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못된 꾀를 꾸미는군.’
선우진은 놈의 사악한 음모를 꿰뚫어보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쳤다. 지금은 일단 그 협객이 훈방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급선무다.
“잘 생각했소. 그쯤 하면 후원금 모금 행사의 빛이 바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으리다. 만주에서의 선전을 기원하는 오늘의 모임은 그만큼이나 중요한 의미와 기원을 담고 있는 게요. 처음부터 이리 약게 처신했더라면 내가 굳이 이렇게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쯧!”
잠시 잔소리를 늘어놓던 선우진이 혀를 차며 일어서려 할 때, 이병길은 황급히 그를 불렀다.
“사이온지 선생! 다 따르겠습니다만 하, 한 가지만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또 뭐요?”
선우진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서늘한 태도에 놀라 움찔하면서도 이병길은 끝내 한마디를 토해 냈다.
“다른 부분은 모두 지시하시는 대로 행할 터이니, 부디 제…… 개인적인 치정으로 몰고 가는 것만은 거둬 주십시오. 교토제국대학으로 돌아가면 학우들과 얼굴을 마주해야 할 텐데, 여자문제로 몽둥이질을 당한 놈이라는 손가락질은 정말이지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간청 드립니다!”
“괜찮소이다, 이 후작! 뭘 그런 걸 갖고 난리를 피우시오? 사내가 여자와 얽혀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켜 볼 수도 있는 것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이올시다!”
빨리 이 굴욕적 순간을 마무리 짓고 싶은 민영휘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병길은 발끈해서 놈을 노려보며 악을 썼다.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민 자작 당신의 축첩 문제라고 하시오, 이 정신 나간 늙은이야!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뭐라고? 늙은이? 이런 무례한 인간을 보았나! 내가 지금 당신의 구명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빤히 보고서도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민영휘도 얼굴이 시뻘개져서 곧바로 대거리를 해 댄다. 금방이라도 뒤엉켜 몸싸움을 벌일 것 같은 두 귀족 사이로 시바타가 몸을 날렸다.
“후작 각하! 자작 각하! 좀 진정하십시오! 사이온지 님께서 선처를 베풀어 주시는 이 감사한 자리에서 이게 웬 소란입니까? 가급적 좋게 해결을 보셔야지요!”
“아니, 난 아무리 그래도 치정 문제는…… 받아들이기 어렵소이다. 상대가 귀족도 아니고, 싸구려 양복이나 걸치고 다니는 그 거지같은 놈과 내가 같은 여자를 두고 다퉜다고 하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거외다!”
이병길은 이상한 부분에서 자존심을 세우며 고집을 부렸다.
“……그냥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모임에서 난동을 벌인 사내를 내가 나서서 제압한 후, 너그러이 선처를 호소한 것으로 하게 해 주시오! 그 정도면 총독부에도 큰 부담은 가지 않을 게 아니오, 시바타 비서관! 부탁하오, 하세가와 비서 과장! 사이온지 선생께 같이 좀 부탁 드려 주시구려! 내 체면 좀 살려 주시오!”
이병길은 시바타와 하세가와를 차례로 붙들고 애원을 늘어놓았다.
‘멍청한 놈, 그것이 바로 윤봉길의 뜻을 널리 알리는 기제가 될 것이거늘…….’
선우진은 경멸의 시선으로 놈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놈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하고 드리운 미끼였지만, 그래도 막상 그걸 덥석 무는 꼴을 보니 구역질이 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매국노의 혐의를 받기보다는 치정 문제라 감추려 들 텐데, 이놈은 오히려 정반대다. 과연 이완용의 손자답다고나 할까. 이병길의 성화에 시달리던 하세가와가 곤란한 표정으로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사이온지 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병길은 조선 후작. 그런 높은 신분의 귀족이 이리 애원을 하고 있으니, 관료들로서는 외면을 하기가 쉽지 않다. 선우진은 하세가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나는 상관이 없지만, 그리하면 총독부에 부담이 되지 않겠소?”
“소요의 규모를 축소해서 보도하고 미담으로 끝을 맺으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하세가와 비서과장이 그렇다면 그런 것일 테지. 총독부와 오늘 모인 귀족들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잘 처리하시오. 나 역시 경사스러워야 하는 날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굳이 참는 것이니…….”
선우진이 마지못한 것처럼 승낙을 해줄 때, 시바타가 끼어들어 얼른 한마디를 보탰다.
“다만 기자들의 입을 맞추는 데에는 비용이 좀 들어갈 겁니다.”
하여간 이놈은 돈에 관해서는 치사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다. 선우진은 귀찮다는 듯 돌아서며 이병길을 지목했다.
“그야 이 사람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 정도 푼돈은 가지고 있을 것 아니오.”
“예! 예! 그건 걱정 마십시오, 사이온지 선생! 다음에 꼭 오늘의 실례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병길은 재빨리 일어서서 허리를 숙인 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작 체면에 무릎까지 꿇었는데, 까짓 술값 정도야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다. 민영휘와 더불어 조선인 중 최고의 부호라고 불리는 그였기에, 지금은 그저 자신의 실수가 무사히 수습되었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했다.
“사이온지 님! 이제는 병원으로 가시지요! 용산 철도 병원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세가와가 재빨리 선우진을 뒤따라오며 다급히 강권했다. 물론 병원에 가 보기는 해야 한다. 얕게 베인 가슴의 상처도 치료받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빨리 윤봉길을 뒤따라가서 그가 무사히 회복하는지를 지켜봐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아아, 그러면 신세를 좀 지기로 할까?”
선우진은 못이기는 척 하세가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허……! 이 후작을 말리려다가 늘그막에 이게 뭔 봉변인지…….”
선우진이 바바와 도지마를 거느리고 사라지자, 민영휘는 그제야 무릎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이병길의 탓을 했다. 이병길은 역겨워하는 시선으로 민영휘를 노려보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그만 중얼거리시오, 민 자작. 말리기는 개코가……. 그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평생 비밀이오, 아시겠소? 괜히 술자리에서 주책없이 떠들어 댔다가는, 내 가만있지 않겠소이다!”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 미쳤다고 이런 일을 입에 담겠소? 무덤까지 가지고 갈 일이지. 시바타 비서께서도 약조를 좀 해 주시오. 하세가와 비서 과장을 비롯해서 나머지 일본 경찰들의 입단속도 해 주겠다고.”
민영휘는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시바타에게 당부했다. 시바타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각하들의 뜻은 잘 알겠으니, 일단은 약속하신 탄원서부터 잘 해결해 주십시오. 기자들을 모아 섭섭지 않게 대접하시고 말입니다. 사이온지 님께서 어렵게 베푼 기회를 놓치시면, 그 뒤에는 우리도 더 이상 못 도와드립니다. 세상에, 칼을 들고 화족을 찌르다니……! 그런 짓을 하는 건 의열단 놈들뿐인 줄 알았건만!”
시바타는 우회적으로 이병길과 민영휘을 나무란 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 걱정도 없이 참가했던 모임에서 하마터면 다시는 관직을 달지 못할 만큼 큰 사건을 겪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설쳐 대는 바람에…….
“끄응! 씁니다! 쓰면 될 것 아니외까? 그깟 탄원서 써 준단 말이오!”
이병길은 못마땅한 얼굴로 성질을 부리며 창고를 빠져나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박영효를 비롯한 조선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질문을 퍼부어댔다.
“아니, 이 후작! 왜 이리 오래 걸리셨소? 우리는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소이다.”
“어떻게 되었소? 정말로 그 흉악한 놈의 내장을 뽑아내셨소?”
“시체는 어디에 버렸소?”
그러면서 혹시 피가 묻어 있는지 그의 옷과 손을 살펴본다. 이병길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버럭 내며 그들을 밀쳤다.
“영감들 다들 미쳤소?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법치국가에서 재판도 받지 않고 사람을 죽인단 말이오? 비켜나시오, 사람 지나가는데 앞길을 막지 말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간 이병길은 단상 위에 놓여있던 종이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만년필과 함께 내밀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작작 하고, 여기에 서명들이나 하시오!”
“서, 서명? 뭘 위한 서명이란 말이오? 이게 지금 뭐요?”
조선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한 범인을 죽이겠다던 놈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돌아와서는 갑자기 백지 위임장에 서명을 하란다.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여간 의심들은 많아서……. 탄원서요! 자, 나부터 서명을 할 테니 이 아래로 이름들을 쭉 적으시오! 이게 다 총독부를 위한 일이니까!”
이병길은 글씨가 잔뜩 적혀 있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의 백지에 탄원의 대상과 자신의 작위, 이름 따위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내 연설문에 대체 무슨 짓이오, 이 후작?”
졸지에 연설문 원고를 빼앗긴 이지용이 질색을 했지만, 이병길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깟 연설문 아무도 관심 없소이다, 이 백작! 어차피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기부금을 내놓겠다는 이야기 아니외까? 돈도 돈이지만, 이것이 더 급하니 일단 서명부터 하셔야 하오!”
“그래요, 이 백작! 진정하고 기다리시구려. 서명만 다 끝나면 백작의 원고는 보실 수 있도록 조처해 드릴 테니…….”
민영휘도 이지용을 가로막은 채, 이병길을 두둔했다.
“자! 이제 여기에 쭉 서명들을 하시면 됩니다! 빨리빨리 쓰시오! 이미 행사가 많이 지연되었으니, 더 시간을 끌면 총독부에 누를 끼치게 될 게요!”
자신의 이름을 다 적은 이병길이 민영휘에게 종이를 넘겼다. 서둘러 이름을 적는 민영휘를 보면서 조선 귀족들은 점점 더 미궁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탄원서? 대체 뭘 탄원하겠다는 말이시오?”
“뭐겠소? 그 폭도 놈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지! 자꾸 토 달지 말라니까, 그 노인네들 참! ……어이, 사회자! 장내에 공지 사항을 전달해라! 오늘 참석하신 기자 분들을 모시고 성대한 회식을 열고자 하니 부디 모두 참석해 주시길 바란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한 이병길은 사회자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남겨진 민영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다른 조선 귀족 놈들을 달랬다.
“자, 자! 소상한 이야기는 추후에 충분히 일러드릴 터이니, 일단 이름부터들 적어 주시오. 내가 언제 당신들에게 손해될 일을 합디까? 이게 다 우리에게 득이 될 일이외다! 어허, 이지용 백작! 그렇게 부들부들 떨지만 말고 빨리 여기에 이름을 쓰시래도요!”
“아니, 그런 불령선인을 처벌하는 것이 왜 총독부에 누가 된단 말씀이시오?”
“그냥 하시라니까 참!”
설득하는 매국노들과 항의하는 매국노들의 목소리가 한데 얽혀, 강단 위는 극심한 소음 속에 잠겨 버렸다. 거기에 사회자가 마이크를 켠 채 기자들을 위한 연회를 알리기 시작하자, 반도애일회의 첫 공식 모임은 완전히 개판이 되어 버렸다. 만주 육군을 위한다는 취지는 사라지고 고성과 몸싸움만이 남았다. 윤봉길이 이겼다는 의미다. ***
“워낙 건강한 분이시라 흉터가 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향후 며칠 동안은 무리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선우진의 상처를 치료해 준 철도 병원 의사가, 예의바른 인사를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저 간호원, 붕대를 감다가 도련님에게 반한 것 같은데…….”
문을 닫기 전 간호원이 한 번 더 병실 안쪽을 힐끔 돌아보자, 바바가 선우진의 귓가에 대고 작게 중얼거린다. 선우진은 녀석의 불룩한 배를 툭 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바바.”
“도련님. 여기 있습니다.”
도지마가 조선종합투자회사에서 가져온 새 셔츠와 양복,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구두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선우진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바바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 그런데 아까 그 남자 일은 대체 뭐였냐요? 딱히 아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놈들을 상대로 그렇게 난리를 쳐 가며 구한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의 모습 때문에 선우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찍도 묻는구나.”
“아니, 아까는 물어볼 시간이 없었지 않습니까. 워낙에 바쁘고 급박해서.”
바바가 순진한 얼굴을 한 채 대답했다. 선우진은 지갑과 수표책, 담배 따위를 갈아입은 새 양복 주머니에 옮겨 넣으며 짓궂게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경찰들을 그리 곤죽으로 만들었던 게냐? 만약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거면 그때는 어쩌려고?”
“그야 도련님은 나에게 이런 걸 선물해 준 사람이니까…….”
바바는 셔츠 안쪽에 숨겨 두었던 목걸이를 꺼냈다. 끈을 꼬아 만든 목걸이 끝에는 굵직한 금반지가 걸려 있다. 일전에 선우진이 오다카를 죽였다는 징표로 녀석에게 건넸던 반지다. 잠시 그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바는 한없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로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따르는 수밖에 없지. 도련님이 실수를 한 거였다고 해도 원망 같은 건 절대 안 해.”
“저 역시 바바 형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도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경찰들과 맞섰을 때, 이 녀석 역시 조금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제 몫을 다했다.
“그 남자도 너희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거다.”
선우진이 말했다. 지금 이 녀석들에게 조선인들이 식민지 피지배자들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과, 그 부당함에 대해 모두 상세히 일러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녀석들이 충성스럽다고 해도, 조선인들의 아픔을 모두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예시를 들어 주는 편이 낫다.
“너희들이 지난 해 여름에 타츠오카 마치의 창고에 숨어들어 육군을 습격하고자 했던 그 마음 말이다. 주인을 해친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 비록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해도 자신의 할 바를 다해야겠다는 그런 뜨거운 신념이지. 이 남자의 경우는 그 주인이 조선이라는 나라이지만.”
“아!”
그날의 비장한 기억을 떠올린, 바바가 입을 벌리고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이제야 알겠다! 인의를 지키는 남자로군!”
“그래. 그런 남자를 살리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느냐.”
선우진은 오늘 수고했다는 의미의 격려를 담아, 바바의 어깨를 다독였다. 윤봉길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낀 바바가 입가를 감싸 쥔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 조선인은 이제 어찌 되는 것이지? 아무리 도련님이 머리를 써서 훈방하라고 시켰다지만, 단순히 풀려난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닌데…….”
경찰들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알고 있기에 바바 녀석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팼다. 미행을 당하기 시작하면 주변에 사람이 끊기고, 결국에는 삶 자체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그 부분은 이제부터 내가 해결해 봐야지.”
선우진이 새 넥타이를 집어 들었을 때, 복도 저 멀리에서 일군의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경호 인력을 거느리고 찾아온 하세가와였다.
“치료는 무사히 끝나셨습니까, 사이온지 님? 기분은 어떠신지요?”
잠시 후,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하세가와가 정중히 물었다. 선우진은 대범한 얼굴로 대꾸했다.
“음, 솜씨가 좋은 의사이더군. 애초에 그리 깊은 상처도 아니었고.”
그러면서도 아직 완전히 단추를 채우지 않은 셔츠를 펄럭여, 칭칭 감은 붕대를 드러내 보이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부담을 느낀 하세가와는 굳은 표정으로 사죄의 말을 건넸다.
“귀한 분이 이런 봉변을 겪게 해 드린 점, 참으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비록 내가 피를 흘렸으나, 총독부의 애국 행사가 무사히 끝나게 되어 다행스럽다고 생각 중이었소. 이런 날 흉흉한 기사가 뜨는 것은 곤란한 일이니까.”
“일한융합의 가치를 중시하시는 사이온지 님의 크신 마음과 넓은 혜안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역시 애초부터 그릇의 크기가 다른 분이십니다! 저 역시 많이 배우고 또 반성했습니다.”
하세가와는 진심으로 탄복해서 거듭 허리를 숙였다.
“하세가와 비서 과장이야 무슨 허물이 있겠소이까만, 조선 귀족들에게는 품위라는 것을 일러줄 필요가 있어 보이더군. 그나저나 그 남자는 의식을 찾았소이까?”
“그 괴한 말씀이십니까?”
하세가와는 선우진의 질문을 듣자마자 왼팔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뒤적여 자료를 꺼냈다.
“가벼운 출혈에 경미한 것을 포함하여 골절이 모두 네 군데였으나 지금은 처치가 끝났고, 상처도 무사히 봉합되었습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제가 잠시 들러 간단한 취조를 해 보았는데, 마취제에 취해 긴 대화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조사를 벌써 하신 모양이군. 잘 하셨소. 그래, 알아보니 위험한 인물이던가?”
선우진은 거울과 마주 선 채 타이를 바로 잡으며 크게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하세가와가 자료를 넘기며 대답했다.
“경찰 쪽에 별도로 자료가 보관중이지 않은 것을 보면 불온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놈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구린 곳이 많아 보이는 녀석이기는 했습니다.”
“……구리다? 재미있군. 어떤 면이 그렇소?”
“일단 이름부터가 놈이 주장하던 바와 달랐습니다. 오늘 사건 현장에서 녀석이 밝혔던 자신의 성명은 윤봉길. 이건 다수의 조선 귀족 각하들과 조선인 경찰들에 의해 확인된 사실이므로 오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서류들에는…….”
하세가와는 총독부에서 임시 출입증을 발급했던 기록을 꺼내 놓으며 말을 이었다.
“본명이 윤우의라고 되어 있더군요. 메이지 41년생, 충남 예산 거주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