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혁명과 형제의 이야기.2019.12.04.
“……거짓말?”
되묻는 홍명희의 얼굴이 긴장으로 다소 경직되었다.
“거짓말이라는 게 무슨 의미요?”
“단어의 의미 그대로 내가 선생을 속였소이다. 오늘 그 요정에서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소.”
선우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을 고백하는 사람의 얼굴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자신만만하고, 아무런 죄의식도 엿보이지 않는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세 마리의 말들이 그들 앞을 힘차게 지나쳐 달리며 요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광경이었지만 홍명희의 놀란 시선은 선우진에게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받은 충격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요? 선생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 아닙니까? 그저 장난삼아 이 모든 일을 벌였다고 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울 것만 같은데.”
한참 동안 멍하니 선우진을 바라보던 홍명희가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선우진은 명료하게 대답했다.
“욕심이 나서 그랬소이다.”
“욕심?”
“홍 선생의 소설을, 그 빛나는 보석을 그 신문사에 넘기고 싶지 않았소.”
“선생은…… 내 소설을 읽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황당해진 홍명희가 테이블로 걸어와 자신의 원고를 봉투에서 꺼내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조선어로 쓰였단 말이오! 선생이 읽을 수 있는 것은 겨우 한자로 적힌 이 제목 세 글자 정도뿐일 거외다. 그나마도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안 될 텐데 어찌 보석이니 하는 과찬을 입에 담으시는 게요?”
“읽지는 못해도 들을 수는 있는 법.”
선우진은 여전히 차분함을 잃지 않으며 새로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일전에 우연히 술자리에서 선생의 새 소설 이야기를 들었소. 내 바로 옆에 앉은 조선일보의 관계자들이 미츠코시 백화점의 지점장에게 광고를 요청하며 자부하더군요. 그간 자신들이 유력 소설가를 앞세운 동아일보에 밀려 온 것은 사실이나, 벽초 홍명희와 힘을 합치기로 한 이상 단박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동아일보의 그 유력 소설가가 이름이 뭐라고 하더라. 이…….”
선우진이 성밖에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홍명희가 대신 일러준다.
“……이광수를 말하는 게로군요.”
“이…… 관수우? 그랬던가?”
선우진은 낯설고 서툰 조선어를 말하는 일본인의 억양을 흉내 내어 어설프게 발음했다. 물론 아무리 소소한 세상사와 관심을 끊은 채 살아왔던 그라고 해도 춘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안다.
“일본인들이야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작금 조선에서는 제일로 쳐 주는 소설가올시다. 얼마 전까지 동아일보에서 <마의태자>라는 소설을 연재했지요. 그전에는 <재생>. 덕분에 동아일보의 판매도 호조를 이루었고요.”
설명을 하는 동안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홍명희는 원고를 도로 내려놓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광수가 쓴 역사소설의 반응이 워낙 좋아서 올 겨울부터는 <단종애사>라는 소설을 새로 쓴다더군요. 그래서 조선일보에서는 내 소설로 맞불을 놓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도쿄삼재끼리의 맞대결이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나 뭐라나 하면서…….”
홍명희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결승선을 통과한 마필관리사들이 천천히 말을 몰고 되돌아와 큰 소리로 물었다.
“사이온지 님! 한 차례 더 달릴깝쇼?”
“아, 일단은 출발선에서 대기해 주겠나?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손수건을 흔들어 출발신호를 보내겠네.”
선우진은 관리사들을 물린 뒤 홍명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광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홍 선생을 내세우는 조선일보 관계자들의 자신감만은 이 나의 뇌리에 분명히 각인되었지요. 그날 마음속에 막연히 욕심을 품었고, 오늘 이지용 백작의 요정에서 선생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이거야말로 인연이다 싶었소이다. 그래서 할 줄도 모르는 거짓말까지 동원해 가며 선생을 빼낸 것입니다.”
“내 글을 읽어 본 적도 없는 분이 욕심을 내신다니, 이거야 원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후후후.”
이마를 짚은 홍명희가 엷게 웃었다.
“어쨌거나 이 연재 취소 소동이 선생의 장난이어서 다행이기는 하군요. 아까 그 거짓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앞으로 생활을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잠시 난감했는데……. 내일 조선일보에 다시 들러 이 원고를 전해야 하겠군.”
홍명희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선우진이 다가가 그의 원고봉투를 짚었다.
“아니, 홍 선생은 조선일보에 이 원고를 건네지 않을 겁니다. 그전에 나와 계약을 할 테니까요.”
“그게 무슨? 계약이라니……. 사이온지 선생께서 농에 능하시다는 것은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놀리는 건 그만두시구려. 한 번 크게 속은 걸로 족하외다.”
홍명희가 질색을 했지만, 선우진은 여전히 한없이 진지하다.
“돈이 오가는 일에는 우스갯소리를 할 수 없지요. 지금부터 연재 계약에 관한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물론 조선일보가 제시했던 조건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허! 진심이신 모양이군. 설마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신문사도 운영 중이시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조선어로 적힌 소설이어서 일본어 신문에 연재는 못합니다. 설사 일본어로 고쳐 써서 싣는대도 일본 독자들은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게요. 여기엔 조선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오.”
홍명희는 원고를 짚은 채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선우진은 홍명희의 잔에 맥주를 채워주며 차분히 대꾸했다.
“신문은 아니오. 일본어로 옮겨 쓰실 필요는 더더욱 없고.”
“그렇다면 어떤 지면에 연재를 하시겠단 말씀인지?”
“홍 선생께서는 라디오에 대해 아시오?”
선우진이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야…….”
홍명희가 당연하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외딴 산골에서 농사짓는 촌부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있겠소이까? 당장 정동에만 나가 보아도 멀끔한 신축 건물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붉은 색 전파 탑이 우뚝 솟아 있는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마 6월부터는 전파 송신을 시작한다지요. 그 소식을 들으면서 참으로 대단한 현대문물이라 생각했소.”
“……잘 아시는군. 다행이오, 이야기가 빨라져서.”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담배 케이스를 내밀었다.
“바로 그 대단한 현대문물에서 홍 선생의 소설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조선인들을 상대로.”
“라디오에서 소설 연재를 하신다고?”
홍명희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라디오라는 건 그저 뉴스나 읽어 주고, 노래를 틀어 주는 매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을 연재한다니, 이건 정말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파격이다.
“그렇소이다. 남녀 변사들이 잔뜩 모여 신극공연을 하듯 소리를 내보내면, 글로 읽는 것과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훨씬 더 흥미진진할 게요.”
선우진은 여러 사람이 모인 모양을 허공에 손짓으로 그려 보였다. 일순 그 발상에 흥미를 보이면서도 홍명희의 반응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사이온지 선생, 라디오 방송국은 총독부의 소유로 알고 있소이다. 무엇을 방송할지, 선생이 임의로 정할 수는 없는 문제일 게요.”
“후후, 그런 부차적인 문제는 내가 걱정하면 되는 일. 선생은 소설을 주기로 마음만 정하시면 됩니다.”
선우진은 이번에도 자신만만하게 그의 우려를 차단했다. 그제야 홍명희도 이 상황이 그저 충동적으로 벌이는 허튼 장난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쪽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이렇게 젊은 분이 어찌 그런 힘을 갖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소이다. 화족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런 권세를 누리는 것은 아닐진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던 홍명희가 마침내 선우진의 은제 담배 케이스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우우…….”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뿜은 홍명희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은 가라앉은 어투였다.
“선생께서는 아마도 그날 내 이름을 처음 들으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런 제안을 열정적으로 해 주셨을 테지요.”
“홍 선생의 이름을 두 번 들으면 생각이 달라진다고들 합니까?”
선우진이 가볍게 농담처럼 받자, 홍명희는 쓸쓸한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옥살이를 한 바 있는, 말하자면 특별고등경찰의 요주의 대상 인물이올시다. 그뿐 아니라 좌익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혐의로 몇 차례나 경찰 조사를 받았고, 최근에는 신간회라는 조선인 단체에서도 발기인을 맡게 되었지요. 이건 모두 경찰 자료에 있는 이야기들일 테니 특별한 비밀도 아닙니다.”
국내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나름 대단한 유명인사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군요.”
선우진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홍명희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반응이 그게 전부입니까?”
“뭘 어떻게 더 말해야 만족스러우셨겠소?”
“아니……. 지금 선생과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 나라는 사람은 특별고등경찰의 요주의 대상 인물인 데다, 조선인 민족주의자란 말씀이오. 함부로 얽혔다가는 자칫 큰일 나겠다는 걱정이 들지 않소이까? 일본인 부르주아인 사이온지 선생과 조선인 좌파인 나는, 말하자면…… 가장 먼 대척점에 위치한 두 사람이라 표현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은 상황인 거요.”
홍명희는 자신이 총독부 관련사업과 얽힐 수 없는 이유들을 장황하게 이어 갔다. 가만히 홍명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우진이 단번에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가 상업적 거래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됩니까? 선생께서는 모든 일본인들을 그저 적이라 인식하고 계십니까?”
“으음…….”
작게 탄식하며 뻑뻑 담배를 피워 대던 홍명희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요.”
일본인과의 거래가 무조건 잘못이라면 총독부가 관리하는 쌀도, 일본에서 수입된 서양식 약도 사먹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건 그저 극렬한 원리주의자들의 치우친 주장에 다름 아니다. 홍명희는 일본제국주의를 혐오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선우진은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떳떳한 거래라면 당연히 해야지요.”
“같은 민족이 운영하는 조선일보와의 약속을 깨고 일본인인 사이온지 선생과 거래하는 편이 나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말씀이시오?”
어딘가 궤변이라 느낀 홍명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선우진의 논리는 이미 도도한 강물의 흐름처럼 거침이 없다.
“그야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명약관화한 일. 일단 홍 선생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생이 소설로 알리고픈 바를 전하실 수 있소.”
“그렇겠구려.”
홍명희는 단번에 선우진의 말뜻을 알아듣고 턱을 쓸었다. 신문은 읽는 사람 혼자만 정보를 습득하는 매체. 설령 여럿이서 신문을 돌려본다고 해도, 라디오 앞에 모여 서서 동시에 들으며 감정을 교류하는 수십 수백 명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맛깔 나는 변사의 음성 연기는 이야기에 생생한 생명력까지 불어넣어 주리라. 그리고……, 라디오로 소설이 흘러나오게 되면, 글씨를 모르는 문맹이라 해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가난한 계층과 아녀자들이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조선 사회에서 그 장점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강력하다. 그렇게 홍명희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선우진은 한 번 더 강력한 유혹을 날렸다.
“금전적인 면을 고려해도 마찬가지외다. 나는 선생의 고료로 매달 오백 원을 드릴 터이니.”
“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원고료에, 홍명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월 500원! 신문기자 여덟 사람분의 월급도 욕심이 나지만, 이건 단순히 개인의 생활이 윤택해지는 데 그치지 않는 거액. 그만큼의 수입이 수년간 이어진다면…… 그가 몸담고 있는 신간회의 운영도 한결 숨통이 트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홍명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온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엄청난 호의가 베풀어질 때에는 뭔가 수상한 배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식민지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회유를 당하고 있는 겁니까, 사이온지 선생?”
홍명희가 당혹스런 말투로 물었다. 선우진은 무슨 소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회유라니……. 내가 어떤 목적을 위해 선생을 회유한다는 게요?”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의 이 모든 엄청난 후의와 파격적인 조건들을 어찌 이해하면 좋단 말이외까? 나는…… 심지어 이광수처럼 문명이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니올시다. 그런데 대뜸 이렇게 고액의 고료를 제시하시니 의구심이 드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잘못 짚으셨소. 사이온지 선생께서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고 해도 나는 이광수나 육당처럼 변절하지 않을 거요.”
홍명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유혹에 저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선우진은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후후후……. 하하하하!”
이마에 손을 대고 웃어 대던 선우진이 문득 홍명희를 응시했다.
“육당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재미있군요. 홍 선생은 스스로에 대해 그리 자신이 없소이까? 겨우 이 정도의 대접을 받고서 자칫 마음의 중심이 흔들릴까 봐 두려워할 만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원래 유혹이란 서서히 뻗어 오기 마련이지요. 이광수도 한때는 만세운동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었소.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라오. 옛말에도 먹을 가까이하는 자는 검어지기 마련이라고들 하니…….”
“그 역시 그저 마음 약한 범부들의 겁먹은 염불일 뿐, 나는 믿지 않소. 그 논리대로라면 선생과 교류를 하면서 나 역시 점점 조선인들을 두둔하게 될 터인데…… 어째서 일방적인 회유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시는 게요?”
“으음……!”
홍명희는 앓는 소리를 흘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살아온 날이 결코 짧지 않고 그간 무수히 많은 부류를 만났다고 자부해 왔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사람만큼 자유분방하고 자신만만한 이는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논리에 허점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이 남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정말로 특별하다.
“이 거래는 아주 간단합니다, 홍 선생.”
선우진은 맥주로 입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내 사업의 흥행을 위해 오랫동안 인기를 끌 만한 소설이 필요했을 따름이오. 마침 선생이 최고라는 정보를 엿듣게 되었고, 그래서 최고에 걸맞은 대우를 해 드리며 모셔 오려는 게지요. 오늘처럼 이렇게 술잔을 마주 기울이면서 서로 친분을 쌓거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들에 지나지 않소.”
그제야 홍명희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고 마음을 열었다.
“알아들었소. 내 가치를 그리 높이 쳐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외다, 사이온지 선생.”
먼저 감사의 말로 운을 뗀 홍명희가 조심스레 이 거래의 위험성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소. 우리끼리의 계약이 성사가 되더라도 논란이 클 겁니다. 일단 총독부에서 내가 그들의 사업에 관여하는 걸 원치 않을 것이고, 경찰에서도 곧바로 검열을…….”
“그 부분은 아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도 홍 선생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리리다.”
시바타라는 놈을 잘 알기에 선우진은 호언장담을 할 수 있었다. 그놈은 받은 만큼 역할을 수행하고, 돈이 안 되는 일에는 아예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리고……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모르실 테지만, 이 소설은 조선 중기 천민이 혁명을 하는 이야기요. 그러니 내용에 관해서도 결국 우리는 마찰을 빚게 될 겝니다. 서로 처지가 다른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큰 차이가 있을 테니까 말이오.”
일견 타당한 주장이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선우진이 원하던 바다. 풀죽은 조선인들의 가슴 속에 혁명의 불씨를 되살려 줄 이야기. 선우진은 이번에도 손을 저었다.
“그 역시 조금도 우려하실 필요 없소이다. 나는 사업가일 뿐, 소설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외다. 홍 선생께서 이름을 걸고 집필하는 소설을 어떻게 전개하든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이 흐르고 붓이 가는 대로 힘차게 써 주시오.”
“소설의 전개에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오? 미리 원고를 받아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미명하에 강제적으로 퇴고를 요청한다거나 하지도 않고?”
“그렇습니다. 다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선우진이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흥행상의 이유로 형제의 이야기는 들어 있었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무릇 가슴 저릿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법이니까요.”
“형제의 이야기가 들어 있기를 바라신다? 그 조건이 희한하군요. 어떤 형태의 형제를 말씀하시는 겐지 듣고 싶소이다, 사이온지 선생.”
홍명희가 호기심을 보인다. 지금껏 단 하나의 조건도 내세우지 않던 상대가 처음으로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니,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다. 선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반목하는 형제의 이야기올시다. 한 몸처럼 사이좋게 유년을 보내던 형과 아우가, 사소한 이유로 사이가 틀어져 죽일 듯 증오하는 관계로 오랜 세월을 보내는 것이지요. 그렇게 모질고 긴 풍파를 겪으며, 서로에게 무수한 상처를 입힌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겝니다, 자신들이 떼려도 뗄 수 없는 피붙이였음을.”
이 설정을 소설 속에 담아 널리 퍼뜨리는 것은, 나라를 되찾은 후 민족이 반으로 갈라지게 될 것이라는 불행한 예언을 비껴 나가기 위해 그가 만들어 낸 계책이었다. 홍명희 정도의 솜씨 좋은 작가에게 맡긴다면, 이천만 조선인들의 가슴에 두고두고 깊은 울림으로 남을 터다.
“그건……, 정말로 아픈 이야기군요. 그저 짧은 구상을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 가슴이 저려 옵니다그려.”
문인답게 이내 몰입한 홍명희는 진심으로 아련하다는 듯 입 주변을 감싸 쥐었다. 어쩌면 선우진의 제안을 들으면서 그는, 이리저리 찢겨 버린 조선독립운동단체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해 보십시다.”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먹먹한 가슴을 달래던 홍명희가, 자세를 바로하며 분명하게 거래 의사를 밝혔다.
“선생이 들려주신 형제의 이야기를 넣어 보지요. 나 역시 그 소재가 마음에 들고, 라디오라는 매체에 흥미가 동합니다. 물론 500원이라는 거액의 원고료도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지만, 가장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것은 사이온지 선생의 태도였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홍명희는 선우진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혹은 내가 흔들릴까 두려워서…… 내 가치를 이리도 높이 사 주시는 분과 함께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 조선일보와 구두로 원고에 관해 약조를 맺었던 일이 조금 걸리기는 하나, 내가 잘 무마해 보리다. 편집국장들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큰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을 게요. 걱정하지 마시구려.”
물론 선우진은 그 부분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계약 문제로 갈등이 커질 경우, 까짓 신문사 한두 개쯤이야 그냥 사 버리면 된다.
“좋습니다. 자, 이제 말들이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 본격적으로 축배를 드십시다.”
선우진은 만족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출발선을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오랫동안 신호를 기다리던 말들이 장밋빛 노을을 배경으로 힘차게 달려온다. 선우진은 홍명희와 나란히 선 채 벅찬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디오 사업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조선인들의 가슴을 흔들 소설은 구했으니, 이제는 자긍심을 지켜 줄 가수를 만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