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지금이다! 눌러!2019.12.28.
“내 딸? 메구미? 메구미는 왜 궁금해하시는 겐가?”
다카하시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이 늑대 같은 인간의 입에서 메구미가 거론되는 걸 들으니, 등에 소름이 다 끼친다. 다카하시의 질문을 들은 통역관이 장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중국말을 주고받았다.
“웃는 모습이 귀엽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이야기가 진행되면 장차 사돈을 맺어도 좋다고. 장쉐량 장군과도 대화가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십니다.”
통역관이 그 말을 전하는 동안 장쭤린은 다카하시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쳤군. 내가 왜 우리 소중한 메구미를 만주 마적 따위의 아들과 결혼시켜?’
너무 황당한 소리여서 다카하시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물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꽤나 인물도 좋고 날카로운 구석이 느껴지는 인재이기는 했다. 일본유학 덕분에 일본어도 능통한 데다 수만의 정병을 호령하는 멋진 호걸이지만, 그래도 금쪽같은 딸의 배우자라고 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가 점찍어 놓은 다른 사윗감이 훨씬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사이온지 유우야. 그를 비교대상으로 놓으면 이 세상의 모든 미혼 남성이 시시하게만 여겨진다. 그는 유능하고 냉철한 사업가이고, 연회를 사로잡는 인기남인 데다, 미남인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화족이다. 그 이름의 바로 옆에 다카하시 메구미의 이름을 적어 넣고 혼인서류를 작성하는 상상만으로도, 다카하시 사장은 종종 행복을 느끼곤 했다. 전략도 다 짜 놓았다. 큰마음 먹고 3천만 원쯤 턱 지참금으로 내놓겠다고 하면, 결국 사이온지 유우야도 그 청혼을 받아들이게 될 거다. 메구미라는 젊고 건강한 미녀에 거액의 지참금까지 따라붙는데, 그런 횡재결혼을 거절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다카하시 사장의 계산은 그렇다. 물론 전 재산의 8할 이상을 뚝 떼어내는 건 아프지만, 그래도 사이온지 군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를 차지한다는 건 사이토 사장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기도 하니까.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멋진 화족 사위를 두는 기분은. 내 외손자도 화족이 되는 거란 말이야……. 다카하시 사장은 장쭤린과 통역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 결혼만 성사되면 저 고상한 척하기 좋아하는 사이토 사장의 코가 아주 납작해지리라. 매일매일 구락부에 들러서 큰 소리로 사위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이다, 사이토 사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그 둘을 성혼시키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재촉하는 통역관의 목소리가 다카하시의 달콤한 상상을 깨 버린다. 다카하시는 서둘러 거절할 만한 핑계를 찾았다.
“그, 그야 물론 영광스러운 말씀이나…… 장쉐량 장군께서는 이미 혼인을 하신 몸이 아닌가?”
“위펑즈와는 이혼을 하면 된다고 하시는군요. 어차피 어린 시절 언약에 따라 결혼한 것일 뿐, 깊은 애정이 없는 사이여서 그녀도 다 이해할 것이라고.”
통역관이 말하는 동안, 장쭤린은 끊임없이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 결혼 제안은…… 정말로 진심인 것 같다. 다카하시는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하, 하하! 아직 어린애라고만 여겼는데 어느새 그런 영광스런 제안을 다 듣게 되는군. 이런 일에는 본인의 의사가 중요한 법이니, 조선으로 돌아가면 직접 물어보겠다고 말씀드리게나. 그리고 말이지……. 그런 논의가 오가려면 최소한 내가 큰 손해는 면한 뒤여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내 돈 400만 원은 물어내라는 의미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장쭤린이 조금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통역관에게 뭔가 물었다.
“바로 그 부분이 우려되실까 봐, 장쉐량 장군께서 추가 계약서를 보냈을 텐데요. 받지 못하셨습니까?”
통역관이 그 질문을 다시 일본어로 옮긴다.
“헤이룽 강 유역의 농지 사용권과 그 금광 독점 개발권 말인가? 받았네. 그래, 분명히 받기는 했네만…….”
다카하시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 전 인천으로 날아온 서류, 거기에는 장쉐량과 장쭤린이 서명한 독점 개발권이 기재되어 있었다. 금광 채굴을 비롯해서 일대의 드넓은 땅을 모두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것인데, 말 자체는 참 그럴 듯하다. 허나……, 이 세상에 아직 파 보지 않은 금광만큼 믿음직하지 못한 것이 또 있을까? 금이 나오지 않으면 그건 그냥 아무 가치 없는 허허벌판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 유역에서 농사를 지어 400만 원의 손해를 만회하려면 백 년이 걸려도 부족하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입지요.”
장쭤린의 설명을 들은 통역관은 객차 한쪽 벽에 걸린 지도로 걸어가 중국과 소련의 접경지대에 작은 빨간색 깃발을 찔러 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장쭤린은 과장된 어조로 호의적인 손동작까지 동원해 가며 열심히 떠들어 댔다.
“이곳은 모든 열강들이 욕심낼 만한 땅이지만, 친구에게는 아깝지 않다고 하십니다. 미리 지참금을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 주시면 더 고맙겠지만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다른 일본인들에게 소문을 내시면 안 된답니다. 특히 일본 내각에게는요. 옥수수와 수수가 잘 자라는 지대여서…….”
“농지야 뭐,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땅이고 금광 이야기를 해 보세. 그곳이 정말로 천육백만 위안 이상의 가치가 있는 금광이기는 한가? 나는 눈으로 보지 못한지라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모르겠네…….”
다카하시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사업을 하다 보면 금맥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매장량이 10톤은 될 거라는 둥, 20톤이 넘는다는 둥 내세우는 미사여구도 거창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런 말을 지껄이는 인간들 중 열에 아홉은 사기꾼이다.
“천육백만 위안? 으음!”
다카하시의 질문을 알아들은 장쭤린이 어림없다는 듯 손사래를 친 뒤, 두 개의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이억 위안!”
“에에?”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액수를 들은 다카하시는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2억 위안이면 조선 화폐로 환산했을 때, 자그마치 5천만 원 가까이나 되는 돈이다.
“금 100그램 기준가격이 180원 정도니까……, 5천만 원을 180으로 나누면…….”
암산을 해 보던 다카하시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곳의 매장량이 40톤이나 될 거라고?”
“아무리 적어도 그 정도는 된다고 하십니다. 사금의 양만 해도 엄청나서, 인근의 강 하류에 모피를 널어 두면 며칠 만에 금색 털가죽이 된다는군요. 강물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 금가루가 털 사이에 끼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상류의 금광은 정말로 대단할 거랍니다.”
장쭤린의 의견을 물어본 통역관이 대답을 옮겼다. 장쭤린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면서도 다카하시는 여전히 그의 말을 선뜻 믿기 어려웠다. 물론 헤이룽장 성 일대가 비옥한 광산지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매장량 40톤 규모의 금광이라는 건 좀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 금광이 현재 채굴작업 진행 중인 곳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 보존되어 온 곳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지요. 사금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 것도 불과 반 년여 전의 일입니다.”
“어째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장쭤린 대원수께서는 그곳을 직접 개발하시지 않은 게지?”
“어차피 중국 천하가 대원수의 것이니, 굳이 사사로운 욕심을 내실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저 친구를 대접하시고자 할 뿐. 다카하시 사장께서 100만 원이나 200만 원 정도만 더 투자해 길을 내시고 장비를 갖추면 곧바로 채굴작업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뭐, 뭐, 뭐, 뭐라고?”
다카하시는 말까지 더듬으며 통역관의 이야기를 끊었다.
“지, 지금 나더러 돈을 더 내놓으라고? 그, 그,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
“대신 장쭤린 대원수께서는 인력을 동원해 주시고 주변의 치안을 책임져 주실 겁니다. 중화민국 소유의 철도도 염가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해 드릴 것이고요. 다카하시 사장께서는 금을 마음껏 가져가시고 그저 2할의 세금만 지불하시면 됩니다. 그 정도면 정말로 후한 선물이지요.”
물론 조건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금이 나올 거라는 보장만 있다면. 그러나 그런 보장을 누가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다카하시는 입을 꾹 다문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미 400만 원을 허공에 날리게 생긴 이 상황에서, 200만 원을 더 내놓으라니! 어째 점점 더 깊은 사기의 늪에 빠져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원치 않으시면 계약서를 내놓으시랍니다. 대원수께서는 영국인 동업자를 찾아 개발을 하면 그만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도 그 땅을 원하는 데다, 그들은 군사 지원까지도 해 줄 수 있으니까요. 몇 년 정도 기다리시면 다카하시 사장께 400만 원의 손실도 되갚아 주게 될 거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장쭤린의 말을 전하던 통역관이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한마디를 보탰다.
“그렇게 하시면 다카하시 사장은 더 이상 좋은 친구로 남기 어려울 겁니다. 대원수의 호의를 뿌리치신 셈이라서.”
장쭤린의 눈치를 살피니 정말로 살짝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인다. 가뜩이나 심란할 이 상황에서 그를 더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카하시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힘없이 대꾸했다.
“아니! 무슨 그런 소리가 있나? 영국인들이 갑자기 왜 나와? 그들이 나처럼 장쭤린 대원수를 믿고 베이징과 만주에 400만 원을 묻은 건 아니잖나? 나는 그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보고 나서 움직이고 싶다는 걸세. 200만 원을 추가 투자한다는 건 내게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야. 이 세상 그 어떤 사업가를 붙잡고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할 거네.”
통역관이 그의 하소연을 중국어로 전달하자, 장쭤린은 콧수염 끝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펑톈에서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나면 대원수께서 직접 그곳으로 안내하시겠답니다. 그때 다카하시 사장의 눈으로 확인을 해 보시지요. 자, 이제 골치 아픈 이야기는 다 접어 두고 친구로서 술잔을 기울이시잡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게.”
다카하시는 두 손으로 술잔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제 그의 중국 체류 기간은 예정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늘어나게 생겼다. 잘한 것일까?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속에서 끝없이 질문이 쏟아진다. 매장량 40톤의 금광이라니……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금맥을 찾았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채굴 초기에 저 장쭤린이 이제 메구미를 데려와 장쉐량과 혼인을 시키자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 결국은 남 좋은 일만 다 해 놓고 쫓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냥 사이온지 군의 말대로 이쯤에서 그깟 400만 원쯤 없는 셈치고 잊어버릴 걸 그랬나?’
거짓 웃음을 지으며 장쭤린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다카하시 사장은 남몰래 초조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사이온지 군의 말이 옳다. 그의 재산 규모에 비하면 400만 원은 극히 작은 액수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런 소액들을 평생 동안 악착같이 지켜 냈기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이건 고위관료와의 이렇다 할 연줄도 없이 일가를 이룬 장사치, 다카하시의 자존심과 인생의 철학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덜컹-! 덜컹-! 몇 순배가 도는 동안, 열차는 어느새 펑텐군의 초소를 지나 황구툰에 이르렀다. 일본이 경영하는 만주철도와 중국의 경봉철도가 공유하는 구간이다. 반월형으로 휜 선로의 저 먼 앞쪽에서, 기관차가 교량 위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내일은 집사에게 전보를 보내 둬야겠군. 며칠 내로 미두 시장에서 팔아야 하는 계약 건들이 꽤 되니까. 가만히 두었다가는 괜히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어.’
다카하시는 새벽 동이 터 오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고생이 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다. 심지어 기쁘게. ***
“들어옵니다.”
교량 아래 절벽에 은신한 채 대기하고 있던, 관동군 병사들이 말했다. 토미야 카네오 대위는 엄폐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폈다. 번쩍-! 번쩍-! 열차 너머 언덕에서 불빛 신호가 반짝인다. 지금 달려오는 것이 바로 장쭤린이 탄 특별편성열차라는 의미다. 이제 결행의 시간이 왔다.
“……기다려. 아직이다.”
기관차가 교량의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토미야 대위는 손을 들고 병사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다. 칙칙 폭폭-! 치이익-! 빠르게 질주하는 열차의 제3량이 표식을 위해 세워둔 노란 구형 중화민국 깃발을 지난다.
“일 초, 이 초…….”
토미야 대위는 작게 소리 내어 수를 헤아렸다. 이미 왕래하는 기차들로 수없이 가상연습을 해 봤다. 제3량의 열차가 완전히 지나고 11초 뒤에 제8량의 중앙이 목표지점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구 초, 십 초, 십일 초! 눌럿!”
열하나를 헤아린 토미야 대위는 들어 올렸던 손을 힘차게 아래로 휘둘렀다. 뇌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던 병사가 곧바로 기폭장치를 눌렀다. 콰콰아아앙-! 선로에 설치되어 있던 시모세 화약 300킬로그램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깜깜했던 새벽 골짜기에 환한 불기둥이 피어올랐다.
터엉-! 폭발에 직접 휩쓸린 객차들이 박살난 채 하늘 높이 치솟고, 주변은 온통 불에 뒤덮여 버렸다. 쿠쿠웅-! 끼이이잉-! 기둥이 박살난 철교에서 쇠 꺾이는 소리가 울려나며, 다리 전체가 천천히 아래로 기울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몇 초 뒤, 기관차와 앞쪽의 객차들이 교량과 함께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주변은 온통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먼지로 뒤덮여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투투투투투-! 투투투투-! 요란한 중국어 욕설과 함께 기관총 발사음이 터져 나왔다. 아직 피해를 입지 않은 뒤쪽 객차의 경호부대에서 대응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어디야? 어디에서 쏜 거냐? 이 망할 놈들!”
뒤늦게 달려온 펑텐군 선로 경비대들도 가세해서 전방과 측면을 향해 무작정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댔다. 투두두두두-! 투투투투투-! 머리 위로 기관총탄이 날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바위 아래 납작 엎드린 토미야 대위가 부하들에게 물었다.
“폭발하는 순간, 본 사람 있나? 제대로 들어간 건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총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은 건가 싶어서 토미야 대위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8호차가 폭발한 것이 맞나? 장쭤린이 죽은 게 맞느냔 말이다!”
“그렇습니다!”
겁먹은 눈의 병사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나서도 토미야 대위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커다란 불꽃 때문에 폭발 순간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커흐윽! 크흑!”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벅차게 터져 나오는 기침 덕분에, 다카하시 사장은 정신을 차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입안으로 흙먼지가 쏟아져 들어온다.
“콜록, 콜록! ……윽!”
본능적으로 돌아누우려던 다카하시는 짧은 신음과 함께 어딘가로 굴러 떨어졌다.
“어윽! 큭!”
돌부리에 머리를 찧으며 멈춰선 다카하시는 멍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대체 왜 제대로 돌아눕지 못한 것인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위이이이잉-! 잠시 완벽하게 소리가 차단되어 있던 귓가에서 돌연 태풍처럼 커다란 소음이 울려왔다.
“……대원수! 대원수를 피신시켜라! 빨리!”
아주 멀리에서 중국어로 떠들어 대는 음성이 꿈속에서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피가……! 대원수 정신 차리십시오!”
“기관총! 골짜기 너머를 향해 발사해! 매복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쏴!”
“불을 꺼! 불이 뒤쪽 객차로 옮겨붙었다!”
모두들 목청이 찢어져라 뭔가 외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엄청나게 흥분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거기에 더해서 천둥 같은 기관총 발사음도 둔하게 고막을 두드려 댄다.
‘아…… 그래, 맞아. 난 지금 만주에 와 있었지…….’
다카하시는 그제야 조금 기억이 돌아왔다. 장쭤린의 특별편성열차에 탑승해서 그와 대담을 나누는 참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이 튕겨져서…….
‘여기가 어디지?’
다카하시는 눈을 껌뻑이며 아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보다 빠르게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저건…… 저건 내가 타고 있던 열차인가?’
저 멀리 폭연에 휩싸인 언덕 위쪽에, 불붙은 쇳덩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관총탄의 불빛도. 다카하시는 자신이 선로에서 꽤나 먼, 깊은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탁-! 타닥-! 쿠웅-! 불붙은 나무가 다카하시의 바로 옆에 쓰러지며 흙먼지와 불꽃을 사방으로 튀기고 있다. 화르르륵-!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태우며 얼굴까지 번져 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풀밭에도 어느새 불이 옮겨붙었다.
‘일어나야 해.’
다카하시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뿐, 몸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끄으으으으…… 으윽!”
바닥을 짚던 다카하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쓰러졌다. 허리가……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왜 이러지? 다리가 말을 안 들어……. 다카하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두 다리가 몸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꺾여 있다는 것을…….
“허윽!”
겁에 질린 다카하시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내, 내 다리가! 내 다리……!”
다리를 움켜쥐어 보려던 다카하시 사장의 눈이 더욱 커졌다. 피투성이가 된 손에…… 손가락이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
“안 돼! 아아아아! 안 돼에에에!”
절망감에 휩싸인 다카하시는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자마자 가슴에서는 곧바로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가 쏟아져 나왔다.
“쿨럭! 쿨럭! 커컥! 끄르륵!”
입술이 붉은 피로 물든 다카하시는 눈물범벅이 된 채 고통스레 몸부림쳤다. 불구가…… 되어 버렸다. 꺾이고 부러진 다리는 고칠 수 있을지 몰라도, 날아간 손가락은 다시 붙일 수 없다. 이제 평생 이대로 살아야만 한다.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지금 그는 마냥 슬퍼할 수만도 없다. 바로 옆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화르륵-! 불붙은 나무에서 또다시 화염이 넘실거리며 번진다. 찢어진 양복에 불이 붙은 것을 본 다카하시는 필사적으로 기어 도망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 좀! 나 좀 도와주시오! ……쿨럭! 쿨럭! 나 여기 아래에 굴러 떨어졌소! 다카하시 사장이오!”
바로 그 순간, 비탈에 비스듬히 걸려 있던 다카하시의 몸이 중심을 잃고 아래쪽으로 기울며 재차 구르기 시작했다. 우지끈! 쿵! 와작-!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들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나뭇가지에 스치며 볼이 찢기고, 튀어나온 바위가 갈비뼈를 으깼다. 쿠웅-! 협곡 아래로 떨어져 내린 다카하시는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멍하니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죽는 건가?’
선로가 있는 자리는 까마득하게 멀어져서 이제는 소리조차 잘 들릴 것 같지 않다. 아니, 설사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대체 누가 자신을 도우러오겠는가? 사방에 중국인들뿐인 이곳에서 그는 철저히 이방인일 뿐인데……. 그렇게 다카하시가 절망에 휩싸여 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 그놈들 진짜 무지하게 쏴 대는군.”
누군가 일본어로 중얼거리며 그의 곁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