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도련님, 이건 옻칠된 거다.2020.01.04.
- 만주?
오츠카 소좌가 선우진의 말을 따라 되뇌었다.
- 만주라고 간단히 말은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넓은데……. 그중 어디를 가시겠다는 건가?
“펑톈, 황구툰일세.”
선우진이 답을 해 주자, 오츠카 소좌가 깜짝 놀란다.
- 황구툰? 거기는 지금 난리가 났는데? 이보게, 사이온지 선생. 그쪽은 지금 위험지역일세. 민간인은 접근 자체가 금지되어 있단 말이네. 웬만하면 당분간 그 부근으로는 가지 않는 것이…….
“그곳에서 꼭 볼 일이 있네.”
선우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강한 의지를 느낀 오츠카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 설마…… 또 여자 문제인가?
“뭐, 그렇게 됐군.”
선우진은 녀석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아직 다카하시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 그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 그러면 말려도 소용없겠군. 하아…… 사이온지 선생, 당신은 정말이지…….
전화기 너머에서 오츠카 소좌의 푸념에 이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출항 서류를 확인하는 모양이다.
- 에…… 시기가 시기인지라, 배는 많군. 오늘밤 인천 축항에서 만주로 출항하는 해군수송선이 세 척 있네. 다렌 행, 안둥 행, 그리고 잉커우 행.
“그중 어느 항구가 가장 황구툰과 가까운가?”
- 그야 단연 안둥 항이 제일 근거리이고 남만주철도와도 연결되어 있지만, 그건 지금 승선이 어려울걸? 20시 5분 출항 예정이니 말일세.
오츠카의 대답을 들은 선우진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오후 7시 57분. 출항까지는 채 10분도 남지 않았는데, 지금 자신은 제물포 구락부에 있다. 아무리 서둘러 차를 몰아 간대도 축항까지 15분은 족히 걸린다. 거기에 또 도로 통제를 위해 막아둔 쇠사슬을 풀고, 오츠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까지도 감안을 해야만 한다.
- 잉커우 행 배가 22시에 있는데, 항해거리가 너무 머니까, 차라리 자정 무렵에 출발하는 다렌 행 배에 승선하시게. 그러면 지금 안둥 행 수송선을 타는 것과 비교해도 대략 아홉 시간 차이 정도밖에 나지 않을…….
“안둥 행 배를 타야겠네.”
선우진은 오츠카의 말을 끊고 확고히 선언했다. 아홉 시간이면 방치된 부상자가 사망에 이르고도 남을 만큼 아주 큰 차이다. 지금 메구미와 다카하시 사장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
- 아니, 그건 바로 몇 분 뒤에 출항을 해야 하는…….
“부탁하지, 오츠카 소좌.”
-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리던 오츠카가 결국은 선우진의 고집에 굴복했다.
- 사이온지 선생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로서는 당할 수가 없지. 알았으니 여덟 시 반까지는 오시게나. 더는 미루기 어려울 테니까 말일세.
“고맙소, 오츠카 소좌. 사례는 반드시 하겠네.”
- 고맙기는 우리 사이에 이 정도로 뭘, 곧 보세. ……그나저나 젠장. 어디가 고장 나서 급히 정비를 했다고 보고서에 쓰지? 보일러 압력이 너무 높아졌다고 할까…….
오츠카가 전화를 끊으며 작게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우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메구미의 곁으로 돌아갔다.
“어떻다고 하던가요?”
메구미는 기도하듯 간절히 두 손을 모은 채 물었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의 주위에 서서 위로의 말을 건네던 일본인 사업가들도 숨을 죽이고 선우진의 입을 주목했다. 선우진은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 펑톈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메구미 양.”
“그렇군요……!”
마지막 희망의 보루였던 선우진마저 모르겠다는 답을 들려주자, 메구미는 또 눈물을 삼켰다. 평생 어려움이라고는 겪어 본 적이 없었던 그녀에게, 아버지의 실종이라는 대사건이 얼마만큼 견디기 힘든 고난일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그곳으로 가 알아보려고 합니다. 총독부에서도 협조를 해 주겠다고 하니, 조금만 더 마음을 굳게 먹고 기다려 주십시오.”
선우진은 메구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허어! 역시……! 참으로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대일본제국의 쾌남이올시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야말로 인맥도 두텁고 호기롭군요!”
주변의 사업가들이 앞다투어 선우진을 칭송하며 감탄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메구미는 우려가 가득한 표정이 되어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사이온지 님마저 위험을 겪게 할 수는…… 만약 혹시라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픈 것인지, 또 어떤 말을 애써 삼키는 것인지 선우진은 잘 안다. 그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위험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댁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돌봐 주십시오, 메구미 양. 자동차를 타고 오셨습니까?”
“네…….”
감격한 얼굴의 메구미가 입술을 꾹 깨물고 대답했다. 선우진이 그녀를 부축해 구락부 밖으로 나서자, 낯익은 다카하시 사장의 뷰익 자동차와 운전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도착하는 대로 전보를 드리겠습니다.”
메구미를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 준 선우진이 다정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뒷좌석에 탑승하려던 메구미가 문득 선우진에게 물었다.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사이온지 님? 미약한 힘이나마 곁에서 돕고 싶습니다! 제 아버지의 일이니까요.”
“접근할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간신히 한 자리를 얻은 터라, 아쉽지만 메구미 양을 모시고 갈 수는 없습니다.”
선우진은 상냥하게, 그러면서도 동시에 분명히 거절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사건 현장에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와 동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겠지요.”
메구미는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 역시 예전 츠바키만큼이나 처연하고 애처롭다.
“괜찮을 겁니다. 기운 내십시오, 메구미 양.”
선우진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 뒤 문을 닫고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에에…… 도련님. 또 여자를 울린 거냐?”
다임러 승용차 곁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선우진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바바, 자동차 안에 옷가방은 들어 있나?”
“그야, 당연히 있습니다요. 언제 경성으로 가자고 변덕을 부릴는지 모르니까 사흘 치 갈아입을 옷 정도는 늘 예비해 둬야지.”
“좋아. 그럼 해군 축항으로 가자, 바바.”
선우진이 다임러의 문을 열려고 할 때, 사이토 사장이 급히 주차장 쪽으로 달려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우야 군! 유우야 군! 잠시만 기다려 주게나!”
“아, 사이토 사장.”
선우진은 조금 긴장한 채 그를 맞았다. 처음 마음을 터놓고 후미오의 죽음에 관해 일러주던 밤, 사이토가 간곡하게 부탁했던 이야기가 떠오른 까닭이다. 만주는 위험하니 부디 조심해 달라고……. 게다가 메구미의 부탁을 받고 나선다는 점 역시, 유키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을 성싶다.
“제가 만주에 가는 것이 염려되시리라 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구미 양이 저리도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걸 보니 도저히…….”
“아니, 그 반대일세. 자네가 돕겠다고 나서 주어서 너무도 뿌듯하고 자랑스럽네! 사나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사이토는 고개를 저은 뒤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 다카하시 사장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어 왔어. 그가 나와 격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무시했던 것이지. 다카하시 사장도 분명 그런 내 못난 마음을 알고 있었을 걸세. 그런데…… 메구미 양에게서 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가슴이 꽉 막히는 것만 같으이. 이제야 내 교만함을 깨달았네.”
사이토는 선우진의 두 손을 꼭 잡으며 간곡히 허리를 숙였다.
“다카하시 사장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뭐든 하고만 싶다네. 배편은 준비되었나? 혹시 아니라면 지금 인천항으로 가서 우리 회사의 배를 사용하게나.”
“다행히도 해군의 친구들이 안둥까지는 도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선우진이 대답했다. 아무리 사이토 사장의 배를 전세 내어 사용한다고 해도, 해군의 쾌속선보다는 느리다. 게다가 해군의 쾌속선을 이용하면 세관을 통과하기 위한 대기 시간도 필요 없다.
“그렇군. 다행이네!”
사이토 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대견하다는 듯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럼 사이토 해운의 안둥 지사와 남만주 철도에 연락을 해 두겠네. 자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고. …… 아무쪼록 몸조심하게나.”
사이토 사장은 주름진 손가락에 한 번 더 힘을 꽉 준 뒤에야 선우진을 놓아 주었다.
“도련님, 지금 이게 무슨 난리인 거냐요?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왜 갑자기 그 아가씨는 울고, 사이토 사장은 고개를 숙이는 겁니까? 게다가 난데없이 축항으로 가자는 건 또 무슨 경우고?”
다임러의 시동을 걸어 구락부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바바가 물었다. 선우진은 시간부터 확인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 서둘러라, 바바. 여덟 시 반까지는 승선해야 한다.”
“승선? 이 밤중에 배를 탄다고?”
굽잇길을 벗어난 바바가 속도를 올리며 얼빠진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녀석으로서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는 소식이다.
“그래. 만주에 갈 거다, 바바. 황구툰에.”
“에에? 황구툰이라고 하면…… 어제 그 기차가 박살났다는 거기 아닌가? 거기는 도련님이 왜 갑니까요?”
“다카하시 사장이 사흘 전 그 기차에 탔던 것 같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연락이 되질 않아.”
“사흘 동안 연락이 없다고?”
바바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하면…… 죽은 게 아닌가, 도련님? 내 생각은 그런 것 같은데…….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전보를 보내서 가족들을 안심시켰을 테니까요. 젠장, 다카하시 사장이 왜 그런 변을…….”
바바는 입가를 훔쳐내면서도 자동차를 더욱 서둘러 몰았다. 실은 선우진의 예감 역시 녀석의 의견과 다르지 않다. 평소 다카하시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렇게 긴 시간동안 잠잠하다는 건 뭔가 심각한 변을 당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모르지.”
선우진은 말을 아꼈다. 그가 큰 부상을 입고 입원중일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선우진은 그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믿고 싶었다. 그의 재산을 차지하는 것과,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니까. 부르응-! 다임러 승용차가 엔진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경인산업화 도로에 닿았을 무렵, 통제용 사슬은 이미 걷혀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사이온지 님. 8번 도크입니다.”
경계 책임을 맡은 초급 장교가 선우진에게 인사를 건네고 해군기지의 철문을 열어주었다. 도크의 번호까지 일러주는 걸 보면 오츠카가 미리 다 연락을 해 두었나 보다.
“젠장, 바빠 죽겠는데 하필이면 제일 구석진 데로 가야 하네.”
이미 해군 축항 내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는 바바가 투덜대며 이리저리 운전대를 돌린다. 순식간에 기지 내부를 통과한 그들의 자동차가 8번 도크에 도착하자, 초조한 표정의 오츠카가 그들을 맞았다.
“휴우……. 다행이 더 늦지는 않게 와 주셨군그래.”
시간을 확인한 오츠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둥으로 가는 쾌속수송선의 선적용 계단 주변에는 아무런 작업도 또 왕래도 없다. 오로지 선우진을 위해 고장을 가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을 뿐. 턱-! 라디오 밀수를 위해 몇 번이나 군함을 이용해 본 적이 있는 바바가, 아주 능숙하게 짐 가방을 해군 병사들에게 넘긴다. 녀석은 담배로 사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해군 병사들 역시 당연하다는 듯 담배를 챙기고, 짐 가방을 배 안으로 옮겼다. 그중 아무도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묻거나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안둥까지는 얼마니 걸리겠나?”
선우진이 물었다. 오츠카는 배를 슬쩍 돌아보고 대답했다.
“당신 덕분에 출발 시간이 지연되어서 25노트 이상으로 고속 항해할 예정이니, 대략 네 시간 반 정도면 닿을 테지. 그나저나 여자 문제로 3만 톤 급 해군 수송선 출항을 지연시키다니……. 그런 사람은 일본 역사상 당신 하나뿐일 게요, 사이온지 선생.”
녀석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전장 200미터가 넘는 기리시마의 위용은 정말 대단한 것이기는 했다. 군축협상을 위해 고속 전함을 수송선으로 위장해서 사용하고 있는 터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압감이 상당하다.
“사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여자의 부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네, 오츠카 소좌.”
선우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며 농담을 건넸다.
“뭐, 어련하시겠소이까. 자, 이것이 기리시마 호의 승선증이오.”
승선하기 직전 오츠카는 책임자의 직인이 찍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냥 승선하면 되지만, 돌아올 때는 그곳의 해군 장교에게 이걸 내 보이시오. 이야기는 다 되어 있으니, 다른 설명은 할 필요 없소. ……그리고 권총은? 챙겨 왔소?”
슥-! 선우진은 양복 깃을 열어 권총의 손잡이만 살짝 내비쳤다. 오츠카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이미 여러 번 했던 충고를 반복했다.
“좋소. 누누이 말해 왔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 주저하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버리시오. 그런 다음 해군 기지까지만 피신하면 그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리다. ……아 참, 안둥에 도착한 다음 황구툰까지는 어떻게 갈 생각이오?”
“자상하기도 하군.”
선우진이 가볍게 웃자, 오츠카는 담배를 꺼내 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상할 수밖에! 당신에게서 받는 월급이 해군 봉급보다 몇 배나 더 많은데.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따라 황구툰으로 가서 경호라도 해 주고 싶소이다.”
“사이토 해운의 안둥 지사까지만 태워 주게. 그 후에는 그쪽에서 남만주철도와 협의해 편의를 제공해 줄 예정이니.”
“하여간 발도 넓지. 해군에, 사이토 해운에, 남만주철도라니! 일본의 모든 대형 수송수단은 다 협조를 하는 셈이군. 왜, 총독부에서는 돕는다고 안 합디까?”
“음, 실은 총독부 공동 조사단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네.”
“허……!”
오츠카는 도저히 못 당하겠다는 듯 두 손을 흔들었다.
“정말이지, 그 권세에는 질렸소이다. 나도 내세에는 당신처럼 한번 살아 보고 싶군. 잘 다녀오시오.”
오츠카와 헤어진 선우진은 해군병사를 따라 선실로 향했다. 짐을 선적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분증 검사 따위의 과정은 전혀 없었다. 정기적으로 요금을 지불해 둔 보람이 느껴진다.
“안둥에 닿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복도 끝의 방문을 두드려 주십시오.”
해군병사가 공손히 문을 닫고 사라진 뒤, 선우진은 선실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생겼군.”
총 면적은 다다미 다섯 장 정도의 넓이나 될까. 한쪽 벽에는 철제 2층 침대가 배치되어 있고, 창문 아래엔 아주 좁은 고정 형 책상과 의자. 그것이 전부다. 책상 위에 올려진 두 병의 맥주는 오츠카의 선물인 듯했다. 한쪽 벽에 붙은 쪽문을 여니, 협소한 화장실과 세면대가 나타났다. 모든 것이 결코 안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이나마도 장교용 선실이기에 갖춘 편의시설이리라.
“음. 배마다 크기 차이는 조금 있지만 모양은 대략 비슷하다요, 도련님.”
여러 번 해군의 수송선으로 밀수품을 실어 날라 본 바바가, 익숙하게 아래쪽 침대를 차지하고 벌렁 눕는다.
“그런데 누가 범인인 겁니까, 도련님?”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올 때, 바바가 물었다. 둥근 창문을 통해 외부를 살펴보던 선우진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글쎄다. 네 생각은 어떠냐, 바바?”
“난 잘 모르겠다요, 어떤 놈들은 장제스 소행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놈들은 일본 육군 놈들이 죽여 버린 거라고도 하고……. 그래서 물어보는 겁니다. 도련님은 똑똑하니까.”
“나 역시 확답을 해 줄 만큼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바바. 직접 현장을 보지 않고는 뭐라 말하기가 어렵구나.”
선우진은 맥주로 입을 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일본 육군들이라면 능히 그런 암살을 저지르고도 남을 놈들이지만, 장제스 역시 만만치 않은 야심가인 데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촤아아-! 창밖에서는 물살이 수포와 함께 번져 나가고, 항구가 빠르게 멀어져 간다. 이렇게 커다란 쇳덩이가 이리도 놀라운 속도로 바다를 가르고 나아간다니, 선우진은 보고 있으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끄응, 이런 큰 배를 처음 타 본 모양인데……. 촌티는 그만 내고 지금 눈을 붙여 둡시다요, 도련님. 거기 도착하고 나면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을 테니까.”
바바가 다가와 창밖 구경에 여념이 없는 선우진을 침대 2층으로 밀어 올렸다. 녀석의 말이 옳다. 지금은 체력을 비축해야 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이렇게 흔들려서야 잠을 잘 수 있을까?’
익숙지 않은 바다의 흔들림을 느끼며 선우진은 리벳이 박힌 철제 천장을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사이온지 군! 내가 누구인가? 2 포 카드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하하!’
다카하시 사장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하다. 너구리처럼 능글맞고, 가끔 조선인들을 업신여기던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선우진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 *** 지루하고 긴 여정이었다. 꼬박 네 시간 반 동안 항해를 했고, 안둥 역까지 자동차로 이동, 그런 뒤에는 남만주철도에서 제공한 긴급호송열차를 타고 또 네 시간 가까이를 달려가야만 했다. 일본 해군과 사이토 해운, 남만주철도로부터 최대의 편의를 제공받았는데도 그 정도였으니, 평범한 사람들은 접근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이온지 님?”
열차가 황구툰을 1킬로미터 가량 앞둔 지점에서 멈춰 서자, 마중 나와 있던 일본측 공동 조사단 대표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치다 고로 영사라고 합니다. 모쪼록 사이온지 님께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해 드리라는 부탁을 하세가와 비서 과장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고맙소이다, 우치다 영사. 현장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펑톈 군대가 워낙 흥분한 터라, 저희로서는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지요.”
통제 구역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인 펑톈 군인들과 일본 육군들의 표정에는, 그의 말대로 긴장감이 가득했다. 아주 작은 돌발 상황 하나만으로도 언제든 교전이 벌어질 수 있는,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다만 그래도 다행이라 할 것은, 조금 전 막 공동 조사단에 한해서 황구툰 출입이 가능해졌다는 정도입니다. 물론 폭파 현장 바로 근처까지만 접근이 가능하지만요. ……일단 아침부터 드시겠습니까?”
우치다가 대형 막사를 가리키며 식사를 권했다. 선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먼저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소이다.”
“그러시지요. 어쨌거나 이렇게 시간을 맞춰 도착하시다니 운이 좋으십니다. 그제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던 조사단들은 기다리느라 아주 진이 빠진 상황이어서요.”
우치다는 경비하고 있는 펑톈 군인들에게 신분증을 내보이고, 선우진과 바바를 출입금지구역 안으로 안내했다.
“저기 보이는 저 철교의 잔해가 폭발 현장입니다만, 지금은 접근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협의를 통해 차차 더 다가가야겠지요.”
우치다는 망원경을 선우진에게 건네며 북쪽을 가리켰다. 망원경을 눈에 대고 배율을 조정하자, 멈춰서 있는 열차와 불에 타고 휜 채 끊긴 철교가 보인다.
“정말 어마어마했던 모양이군.”
선우진이 말했다. 주변의 나무가 모두 뿌리째 뽑혀 나간 것만 보아도, 당시의 폭발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주변까지도 파편이 날아온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치다 영사가 고개를 끄덕인 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는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다 살펴보시고 나면 일러주십시오.”
“도련님…….”
선우진과 둘만 남았을 때, 바바가 아주 얇고 작은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보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 이거 좀 봐라. 옻칠한 게 탄 겁니다요.”
녀석이 선우진의 눈앞에서 그 작은 조각을 손끝으로 문지르자, 새까만 숯 같은 것이 묻어난다.
“음, 틀림없어. 옻칠이야. 킁킁! 이 석탄 냄새도 그렇고.”
가루를 새벽 햇빛에 비춰 본 녀석은 손끝의 냄새까지 킁킁 맡아 본 뒤, 혼자서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바바?”
선우진이 묻자, 바바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일본 화약이 터진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