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러미!2020.01.25.
“그럼 할 줄 알아야겠군.”
선우진은 싱긋 웃으며 라이오넬을 향해 내뱉듯이 대꾸했다.
“이기고 싶으니까.”
러미는 트럼프 카드로 하는 마작과 비슷한 게임. 마작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훨씬 더 단순해서, 규칙 자체는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손에 든 카드들 중에서 같은 숫자 세 장 이상이나, 같은 무늬로 이어진 숫자 세 장 이상이면 내려놓을 수 있고, 먼저 카드를 다 턴 사람이 이긴다. 패자는 손에 든 카드의 숫자를 모두 더하는데, 2부터 10까지는 숫자대로 계산에 반영하고, 그림카드는 전부 10으로 친다.
“하우스 룰을 일러주지.”
앤서니가 신경질적으로 트럼프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규칙 설명을 시작했다.
“방식은 브리티시 라운드 코너. 2,500포인트 승부다.”
라운드 코너라는 말은, 킹-에이스-2의 순으로 카드가 순환되어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에이스가 1이면서 동시에 14가 되는 방식. 2,500포인트 승부라는 것은, 패자의 손에 든 카드를 계속 더해나가서 그 합이 2,500에 도달했을 때 최종적인 승패가 결정됨을 뜻한다.
‘장쉐량이 말했던 대로 이 녀석, 외양과는 달리 꽤 신중하군.’
선우진은 앤서니의 붉은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반적인 러미 게임보다 승부 포인트를 높게 책정해 둔 것은, 운의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조금 늦고 귀찮아지더라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도록.
“덱에 조커를 포함시킬 거고, 점수는 15점으로 계산할 거다. 조커는 단독 멜드 역시 가능하지만, 만약 상대가 손을 다 털었을 때까지도 들고 있다면 한 장당 벌점이 두 배씩. 라운드 코너니까 에이스도 한 장당 15점, 벌점이 두 배. 러미도 두 배. 멜드를 하나도 못했을 경우도 두 배!”
러미 게임의 ‘러미’란 손에 들고 있던 모든 카드를 한 번에 다 털어버리는, 즉 ‘멜드’해버리는 경우다. 멋진 플레이인 동시에 포인트도 두 배나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큰 위험성이 따른다.
“이기는 사람이 다음 판의 딜러를 하는 거다. 첫 판의 딜러는 카드 플립으로 정하고.”
매끄러운 솜씨로 셔플을 끝마친 앤서니가 카드를 주르륵 늘어놓으며 말했다. 선우진은 귀찮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됐네. 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니, 첫 판 딜러는 그냥 당신이 하게나.”
그런 뒤, 카드 중 3분의 1쯤을 커팅해서 위로 올렸다.
“흥, 건방을 떠는군. 후회할 텐데.”
카드 덱을 다시 한데 모은 앤서니가 각자에게 열 장씩 카드를 배부했다. 카드를 다루는 실력은 제법 숙련된 수준이었지만, 속임수를 쓰려거나 하는 시도는 없다.
“내가 선이니까 나부터 집어오지.”
바닥의 덱에서 카드 한 장을 집어 올리며 앤서니가 말했다.
“좋을 대로.”
선우진이 여유롭게 대꾸했다. 그가 아직 자신의 패를 확인조차 않는 것을 보고, 라이오넬은 또 한마디 참견을 해댔다.
“이봐, 일본인! 뭘 모르는 모양인데 패를 들여다봐야 해! 이건 포커처럼 배짱만으로 베팅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고!”
“앉게, 남들이 게임하는 테이블에서 서성거리지 말고.”
선우진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앤서니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통역을 통해 그 말을 옮겨들은 장쉐량도 선우진을 두둔하며 나선다.
“그러시오, 로스차일드 씨. 빈자리가 있는데 굳이 서 있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이오.”
“아니, 나는 서 있는 것이 더 좋소. 그것이 저 일본인의 신경을 긁을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
라이오넬은 고집을 피우며 고집스럽게 팔짱을 꽉 꼈다.
‘협상을 할 줄 아는군그래.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 필요는 없지.’
선우진은 라이오넬을 보며 마음속으로 웃었다. 이 두 영국인 형제는 대화의 상대와 기 싸움을 벌이고 잡아 흔드는 것에 능하다. 자신들이 유리한 계약을 만드는 방법을 아주 오래 배우고, 또 끊임없이 실전에서 경험을 쌓은 인간들답다.
“이 판이 끝난 뒤에는…….”
앤서니가 자신의 손 안에 든 카드들을 이리저리 섞어 알아볼 수 없도록 하면서 장쉐량을 돌아보았다.
“우리와 거기…… 그 땅의 독점개발권 계약을 맺는 겁니다, 장쉐량 장군. 그 점은 이미 약속된 것이니까요.”
“나는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없소.”
장쉐량이 고개를 젓자, 앤서니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대화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잖소? 그런 게 아니라면 왜 바쁜 우리를 기다리게 만드신 거요?”
“그래요, 장군께서 우리를 존중한다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설마 여기 이 일본인에게 넘기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겁니까? 그러면 우리는 아주 기분이 상할 거고, 장쉐량 장군께서는 정말로 곤란해지실 게요!”
라이오넬도 장쉐량 흔들기에 동참해서 협박의 말들을 거침없이 빠르게 쏟아냈다. 장쉐량은 질린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고 테이블을 두드렸다.
“지금 나는 이 게임의 심판 자격으로 와 있소. 그런 이야기는 추후에 하시오!”
“어차피 내가 이긴 게임입니다. 그러니 미리부터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도 나쁠 건 없단 말입니다.”
앤서니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네 장의 카드를 내려놓았다.
“멜드! 8 네 장일세.”
네 장의 8을 자신의 앞에 펴놓은 뒤, 그는 클로버의 킹을 버렸다.
“으음, 당신이 버린 카드부터 집어가볼까? 나는 빼앗는 걸 즐기는 사람이니 말이야.”
선우진은 녀석이 버린 클로버 킹을 자신의 덱 안에 집어넣은 뒤, 가장 끝 쪽의 한 장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뒤집은 카드는 하트의 5다.
“큭큭큭, 이미 공개된 킹을 가져가고 네 패 5를 내려놓는다고? 정말로 러미를 할 줄 모르는 초보인가?”
앤서니가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듯 킥킥대며 덱에서 한 장을 집어간다.
“낮은 패는 가능하면 쥐고 있는 편이 좋아, 일본인. 그래야만 패하게 되더라도 대미지가 크지 않을 수 있는 거다.”
스페이드의 잭을 버리며 앤서니가 말했다. 선우진은 테이블 맞은편 그의 얼굴을 향해 후욱-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패하는 방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네. 늘 이기는 사람이어서.”
그러면서 보란 듯이 또 낮은 숫자를 버렸다. 이번에는 하트의 3이다.
“후후후후…….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잘난 척만 하는군. 일본에서는 어떻게 그런 방식이 통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만난 이상 호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앤서니는 날름 하트의 3을 집어가 세 장의 3을 내려놓고, 다이아몬드 9를 버렸다. 그런 뒤 잘난 척하며 자신의 손에 든 카드들을 타라락 두드렸다.
“이제 나는 세 장밖에 남지 않았어, 일본인! 그 사실을 알고나 있나?”
‘그래, 잘 안다. 네 녀석의 손에 들어있는 카드들이 각각 스페이드의 7과, 조커, 그리고 클로버 퀸이라는 사실도!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런 양상이 오도록 내가 커팅을 한 것이니까!’
선우진은 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덱에서 또 한 장을 뽑아 올렸다.
“뭘 집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우선 멜드를 해, 일본인! 세 장만이라도 좋아! 앤서니는 곧바로 승부를 끝내버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라이오넬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언뜻 선우진을 위해 충고를 해주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앤서니를 돕는 거다. 이쪽에서 멜드를 해줘야 녀석이 몇 장 안 남은 카드를 이리저리 붙여 털어버리기가 훨씬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선우진은 그를 힐끗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제 나를 응원하기로 한 건가? 나름 현명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그러면 당신의 동생이 지는 걸세.”
“건방진 소리 지껄이지 마!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드는 게 불쌍해서 일러주는 거니까! 적어도 기본은 갖춘 상대와 싸우는 게 신사라서!”
“그렇게 연민이 많은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선우진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또 한 번의 턴을 허비했다. 그렇게 세 번의 순번이 더 돌았을 때, 앤서니가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었다.
“됐다! 내 승리야!”
놈은 두 장의 4와 조커를 섞어 멜드한 뒤, 클로버 퀸을 버리는 패로 내려놓았다. 그러곤 곧바로 선우진의 손패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어디! 뭘 쥐고 있었기에 그렇게 멜드도 않고 버텼는지 보자, 일본인!”
“진정하라고. 그렇게 무례하게 굴지 않아도 패는 보여줄 테니까.”
선우진은 그의 손을 가볍게 피한 뒤, 열 장의 카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와하하하하! 이 바보 좀 봐! 가운데 끼워야만 완성되는 숫자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하하하! 그럴 줄 알고 나는 이 퀸을 마지막까지 절대 버리지 않았지!”
선우진의 패를 본 앤서니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선우진이 클로버의 9, 10과 잭, 킹을 꼭 쥐고 있었다는 게 엄청나게 기쁜 모양이다.
“일본인 당신 손에 들어있던 카드 열 장의 총합이 87! 너는 멜드를 하지 못했으니 두 배를 곱해야 하고, 에이스가 한 장 들어있었으니 또 그 두 배다! 그럼 이번 한 판으로 348점이야!”
“수학도 잘하는군.”
선우진이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라이오넬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대체 왜 멜드하지 않은 거야, 일본인? 적어도 세 장은 내려놓을 수 있었는데! 내가 경고까지 해 줬잖아?”
“나는 오로지 러미만 노린다네. 이런 식의 자잘한 승리에는 흥미가 생기질 않아.”
선우진은 한없이 거만한 태도로 답했다.
“또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는군. 뭐, 좋을 대로 해. 큰 판만 노리는 멍청이의 돈도 똑같은 돈이니까.”
앤서니는 미간을 찡그린 채 선우진을 노려보며 다시 셔플을 했다. 다음 판도 그 다음 판도, 그리고 그 다음 판도 양상은 비슷했다.
“스페이드 7, 8, 9 멜드!”
“10 세 장 멜드!”
앤서니는 꾸준하면서도 성실하게 눈치껏 멜드를 해가며 차근차근 손을 털었고, 선우진은 아무 것도 내려놓지 않은 채 패배를 맞이했다. 이 정도는 져줘야 나중에 크게 한 방을 먹여도 미련이 남아 또 달라붙는다.
“사이온지 선생, 나는 당신이 러미를 좀 하시는 줄 알았소. 이래서야 그냥 아까운 돈만 날리는 형국이 아닙니까?”
묵묵히 지켜보던 장쉐량마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본어로 걱정스레 물었다. 선우진은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쉐량 장군. 이쯤이야 한 번에 만회가 가능합니다.”
“심판과 일본어로 대화는 금지야! 자, 이번 판이 244점이었으니까 총 1,056점째다, 일본인. 너는 0점이고.”
네 번째 판까지의 합산을 마친 앤서니가 선우진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봐야 선우진의 평온한 태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좀스럽게 자잘한 판을 몇 번 먹고 나니 한없이 들떴나, 앤서니?”
“로스차일드 씨라고 불러! 건방지게 이름을 부르지 말고!”
앤서니가 발끈해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선우진은 약을 올리듯 천천히 그에게 대꾸했다.
“당신이 먼저 나를 사이온지 씨라고 예의 갖춰 부르면, 그때 생각해보지.”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일본인! 네 이름 따위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앤서니는 신경질적으로 셔플을 한 뒤 커팅을 하라고 카드를 내밀었다.
‘왔군.’
앤서니의 손 안에 든 카드 52장의 순서를 꿰뚫어본,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반가움의 탄성을 터뜨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조심하게, 앤서니. 이번엔 진짜로 러미할 걸세.”
선우진은 앤서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43장의 카드를 떼어 밑으로 보냈다. 정확하게 43장을. 앤서니는 차례대로 카드를 배포하며 비아냥댔다.
“러미를 하겠다는 소리는 이미 여러 번 들었어, 일본인.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0점일 뿐이지, 크킄.”
“그러나 내게는 큰 꿈을 꿀 용기와 비전이 있는 거야, 앤서니. 당신처럼 찔끔거리며 노력하는……, 뭐라고 할까, 태생적으로 통이 작은 사람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인 것이지.”
“마음대로 떠들어라, 패배자…….”
덱에서 한 장을 더 집어가 자신의 손패에 넣은 앤서니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흥분이 될 테지. 이해한다, 앤서니.’
선우진은 녀석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몰래 웃었다.
“으음……! 패가 영 복잡한데…….”
앤서니는 골치가 아프다는 투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카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스페이드의 3, 8, 10, 잭, 킹, 에이스까지. 스페이드가 무려 여섯 장이나 녀석의 손에 들어갔다. 거기에 조커 두 장과 하트 킹, 에이스, 그리고 덱에서 집어올린 것은 다이아몬드 퀸. 누구라도 러미를 노릴 수밖에 없는 그런 좋은 패다. 스페이드나 하트의 퀸 한 장만 들어오면, 곧바로 러미를 외칠 수 있는 상황. 거기에 선우진이 줄기차게 던져 놓은 미끼들이 녀석의 마음속에 큰 유혹의 그물을 드리웠다. 힐끔-! 앤서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선우진을 훔쳐본다. ‘이번에 러미까지 하면 이젠 저 밉살맞고 잘난 척하는 일본인 녀석의 코를 단번에 납작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물론 이런 판이 더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는 걸 모를 만큼 초보는 아니지만, 이미 승부는 반 이상 갈렸고 게다가…… 상대는 줄창 러미만 노리는 바보 일본인이 아닌가. 그러니 앤서니로서는 조금쯤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스페이드의 3을 버리겠다.”
녀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멜드를 하지 않고, 스페이드의 3만 바닥에 내려놓았다. 실제로 녀석의 손패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카드는 다이아몬드 퀸이지만, 그건 버릴 수 없다. 혹시라도 선우진이 그걸 덥석 집어가 퀸 트리플을 완성해버리면 녀석의 러미 기회가 60퍼센트 이상 줄어드는 까닭이다.
“이상하군, 앤서니. 낮은 숫자를 함부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조금 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나?”
선우진이 덱에서 한 장을 집어가며 빙글거리자, 앤서니는 반사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로스차일드 씨라고 부르란 말이다!”
“멜드, 멜드만을 반복해가면서 게임을 어린애처럼 운영하는 사람에게 그만큼이나 존중의 의사를 밝히고 싶지는 않네.”
선우진은 어림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은 뒤, 클로버의 퀸을 버렸다. 퀸을 보자마자 앤서니의 동공은 또 작게 흔들거렸다. 비록 무늬는 다르지만, 선우진이 퀸을 쓸모없는 카드로 간주해 버렸다는 건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단서였다. 그렇다면 선우진은 언젠가 스페이드나 하트의 퀸을 집어가더라도 곧바로 버릴 테니까.
‘그 퀸 두 장은 제일 밑바닥에 깔려있어, 앤서니. 내가 커팅을 그렇게 했지. 그러니 그 카드가 네 손에 들어갈 일은 없을 거다.’
다시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선우진은 덱에서 한 장을 집어 올리며 생각했다. 그가 빼낸 카드는 스페이드의 9. 이것만 쥐고 있으면 앤서니는 러미를 하기가 어렵다.
“이번에는 왜 서둘러서 멜드를 않나, 앤서니? 설마 러미를 노리고 있는 겐가?”
선우진이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앤서니는 교활한 눈빛을 빛내며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면 어쩔 텐가, 일본인?”
“무리야. 당신은 간이 작아서 말이지.”
“같잖은 소리!”
앤서니는 새로 집어갔던 다이아몬드의 7을 바닥에 도로 집어던졌다.
“이건 반갑군그래.”
선우진은 놈이 버린 카드를 얼른 집어올린 뒤 클로버의 8을 버렸다. 정말 그 7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덱에서 들어올 카드의 순서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면 다다음장인 하트의 2 대신, 다이아몬드의 10이 녀석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끄응…….”
또 쓸모없는 카드가 손에 들어가자, 앤서니는 작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슬슬 위험부담이 걱정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앞으로 네 턴 정도가 한계이겠군.’
고민으로 잔뜩 일그러진 녀석의 미간을 보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여섯 번이나 카드를 집었는데도 원하는 패를 못 얻어내면 녀석은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거고, 그러면 일단 조커 한 장과 에이스 두 장을 이용해 멜드를 하리라. 일단 그 정도 조처만 취해둬도 크게 잃을 일은 없으니까. 선우진은 그런 계산을 하며 하트의 2를 가져가고 클로버의 킹을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앤서니가 간절한 염원을 담아 덱의 카드를 집어 들었다.
‘스페이드 2나, 9, 퀸. 아니면 하트의 2나 퀸. 하다못해 아무 에이스라도 한 장만 더 들어오면…….’
슥-! 새로 집은 카드는 클로버의 2다. 앤서니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하필이면 아무 쓸모가 없는 무늬의 2가 들어왔다. 스페이드나 하트였어야 하는데, 이러면 버리기도 까다로워진다. 잠시 망설이던 앤서니는 결국 2를 다시 버리는 패쪽으로 던져버렸다. 그 다음 턴에서 앤서니에게 들어온 것은 하트의 4.
‘안 되겠어, 이제는 위험성이 너무 커졌다. 한 장만 더 보고 난 뒤에는 러미는 포기하고 멜드를 해 둬야지.’
앤서니는 하트의 4를 도로 바닥에 던졌다. 바로 전 턴에서 선우진이 스페이드의 4를 버린 바 있기에, 위험부담은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진작 좀 버리지.”
선우진은 앤서니가 버린 하트의 4를 집어오며 또 싱긋 웃었다.
“이깟 게 뭐라고 이렇게나 오랫동안 꼭 쥐고 있었던 건가?”
“지금 그 표정은 설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앤서니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리며 서성이던 라이오넬도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러미!”
선우진이 짧고도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뒤, 자신의 손패를 부채꼴로 펼쳐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 돼……!”
입으로는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앤서니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선우진이 공개한 손패 쪽으로 향했다. 9 세 장, 잭 세 장, 하트 2에서 5까지, 그리고 버리는 패는 다이아몬드의 7. 완벽하게 한 번에 다 턴 러미가 맞다.
“후우……! 후우……!”
앤서니는 거친 한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패 열 장을 꼭 움켜쥐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온다. 왜! 왜 이렇게 무리한 모험을 했던 걸까……! 그렇게 멋을 부리지 않아도 충분히 압도하며 이길 수 있었는데.
“앤서니.”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만큼 냉정한 목소리로 선우진이 명령했다.
“계산을 해야 하니 손패를 내려놓게.”
“계산……!”
앤서니는 맥없이 중얼거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패를 공개해야 한다는 사실은 물론 그 역시 잘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매너고 뭐고 다 엿이나 먹으라며 악을 쓰고 싶다.
“저 일본인의 말이 맞아, 앤서니. 카드를 내려놔.”
굳은 표정의 라이오넬이 다가와 앤서니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가문의 이름에 오점을 남기지 말라는 듯.
“으음……!”
길게 신음을 흘린 앤서니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자신의 손패를 모두에게 내보였다.
“오, 우리가 서로 필요한 패를 나눠 갖고 있는 형국이었군. ……그나저나 꽤 화려한걸, 당신의 손패.”
앤서니의 패를 확인한 선우진이 계산을 시작했다.
“에이스 두 장, 조커 두 장, 각각 30점씩에 10점짜리 패 다섯 장, 그리고 8. 총합이 118점이로군. 거기에 자네는 멜드를 못했으니 두 배, 러미이니 또 두 배. 조커가 두 장이니 그 네 배. 에이스도 두 배씩 두 장…….”
‘두 배’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던 선우진이, 다 끝났다는 듯 자신의 손 패를 탁 덮으며 말했다.
“총 7,552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