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 이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올시다. (225/459)

225. 이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올시다.2020.02.05.

16550730586457.jpg“아하, 그렇지!”

앤서니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기가 번졌다.

16550730586457.jpg“플레이를 하는 건 찰스였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큭큭큭.”

앤서니는 자조적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킥킥댔다. 라이오넬은 다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16550730586467.jpg“그래, 앤서니. 저 일본인이 오늘 행운 덕을 좀 봤지만, 찰스 앞에서는 어림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긴장을 풀어. 너 지금 너무 위축되어 있다고.”

16550730586457.jpg“알겠어, 라이오넬. 이해해 줘. 너무 오랜만에 겪어보는 패배라서 뭔가 좀 큰 충격을 받았나 봐.”

앤서니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을 진정시킨 라이오넬이 선우진 쪽으로 돌아와 조건을 확인했다.

16550730586467.jpg“그럼 내일모레 밤 다시 한 번 게임을 하는 겁니다, 사이온지 씨. 우리 쪽에서는 다른 플레이어가 참가하고, 내기 금액은 3천만 위안.”

1655073058648.png“내가 이겼을 경우의 조건을 잊지 마시오.”

선우진은 라이오넬에게 분명히 못을 박은 뒤, 짐을 챙겨 일어섰다.

16550730586485.png“도련님! 그런 건 절 주십시오! 아이 참, 무겁다니까요!”

바바가 황급히 달려와 선우진의 담배와 라이터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자신의 도련님이 이겼다는 사실에 녀석의 얼굴에도 뿌듯한 기운이 가득하다. 하지만 바바보다도 더 기쁘게 오늘의 승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16550730586489.png“사이온지 선생…….”

역사 귀빈실을 빠져나올 무렵부터, 장쉐량의 입가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넘실넘실 넘쳐흘렀다.

16550730586489.png“대단한 실력자셨구려. 저 앤서니가 저렇게 맥을 못 추고 당하는 건 처음 봤소. 아니, 당하는 것 자체를 처음 보았다고 하는 게 옳겠군.”

장쉐량은 다시 생각해봐도 신기하고 대견하다는 듯 선우진과 어깨동무를 했다. 비록 이틀 정도뿐이지만, 저 집요한 로스차일드 형제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사이온지라는 이 남자는 로스차일드 형제를 이긴 승리자다.

1655073058648.png“저는 그저 행운의 도움을 받았을 뿐입니다, 장쉐량 장군. 그렇게 칭찬을 하시면 부끄러워집니다그려.”

선우진은 겸손하게 그 칭찬을 넘기며 한없이 호의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장쉐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30586489.png“행운의 도움이라……. 겸양의 말씀일 테지만, 설혹 사실이라 해도 그 역시 천리의 흐름인지도 모르겠소. 사이온지 선생은 하늘이 내게 보내준 귀인인가 보오.”

선우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하다. 이제 조금만 더 마음의 벽을 걷어내면, 장쭤린이 사망했다는 비밀까지도 털어놓을 기세다.

16550730586489.png“오늘 같은 날은 밤을 세워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싶소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았지.”

자신의 자동차에 선우진을 태우며 장쉐량은 아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맞다. 이제부터는 그 폭발 사고의 뒷수습을 위해 머리를 모을 때다.

16550730586489.png“보좌관들에게서 보고를 받았는데, 치료중인 부상자 중에 다카하시 사장은 없다고 했소. 생존자 명단에서도 못 보았고.”

시가에 불을 붙인 장쉐량이 다카하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1655073058648.png“그렇군요.”

선우진은 조금 심각해진 채 대꾸했다. 생존자들을 모두 조사했는데도 그 이름이 없다면 죽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카하시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크기가 점점 더 줄어들어서,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아졌다.

16550730586489.png“정확한 사망자 명단이 없으니,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구려. ……혹시 내가 왜 아직 사망자 명단조차 만들지 않은 것일까 하고 의아해했소?”

어딘가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장쉐량이 물었다. 선우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1655073058648.png“탑승자 명단이 없다고 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일 테지요.”

16550730586489.png“그뿐이 아니라오. 상황이 꽤나 복잡하고 참담하지.”

장쉐량은 시가 연기와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깜깜한 밤거리를 향해 망연한 시선을 던졌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전등 불빛들 너머 저 멀리에 유흥가의 홍등이 보인다. 그렇게 5분여를 더 달린 자동차는 커다란 사당 앞에 멈춰 섰다. 사당의 앞에도 역시 무장한 펑톈군들이 잔뜩 도열해 있었다.

16550730586489.png“이제부터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지 보여 드리리다, 사이온지 선생. 담대한 분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소이다만, 그래도 마음을 굳게 드시오. 비위가 상할 겁니다.”

장쉐량은 위스키가 든 금속 플라스크를 꺼내 한 모금을 들이켠 뒤, 선우진에게도 권했다. 선우진은 별 대꾸 없이 선선히 그걸 받아마셨다.

16550730586489.png“자, 이제 들어가 봅시다.”

장쉐량은 부하들의 경례를 받으며 선우진과 함께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향의 연기를 맡으며 몇 개의 거대한 붉은 기둥을 지나고 나니 정원 중앙에 간이로 설치된 커다란 천막이 나타났다.

16550730586489.png“너, 너! 손전등을 갖고 따라 들어와라.”

장쉐량은 횃불 곁에 서 있던 천막 경비들 중 두 명을 지목해 중국어로 명령을 내리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웨에엥-! 이이잉-! 깊은 밤의 횃불과 천막 주변에는 엄청난 수의 날벌레들이 날아다닌다. 슥-! 장쉐량은 이미 익숙한 듯 손을 휘휘저어 날벌레들을 쫓아낸 뒤, 천막의 장막을 걷었다.

1655073058648.png‘음!’

장쉐량의 뒤를 따라 한 발짝을 안으로 내디딘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작게 신음했다. 손전등 불빛을 받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팔, 다리, 혹은 발목이나 머리가 잘린 상체, 불에 타 버린 머리 따위가 넓은 천막 내부를 가득 채운 채 양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개중에는 멀쩡하게 사람의 형상을 유지한 것들도 섞여 있었지만, 그마저도 모두 지독할 정도로 훼손된 상태여서 마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50730586489.png“폭발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긴 시신들이지. 괜찮으시오, 사이온지 선생?”

장쉐량이 선우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선우진은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1655073058648.png“견딜 만합니다.”

16550730586489.png“역시나 대단하시군. 반평생을 말 위에서 보낸 내 동지들 중에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어쨌든 이 처참한 시체들이 바로 우리가 사망자 명단조차 만들지 못한 이유요.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수는 25명이지만 실제로 죽은 사람은 30명일 수도, 혹은 40명일 수도 있소. 아직은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지.”

물끄러미 일부만 남은 사체를 응시하던 장쉐량이 다시 플라스크의 위스키를 꿀꺽 삼킨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50730586489.png“팔과, 다리, 가슴과, 머리가 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니 총 몇 명이 죽은 것인지, 그 손발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소. 그나마 얼굴이 붙어있는 시체들마저도, 이런 지경이니…….”

장쉐량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얼굴이 불타서 짓이겨진 시신이 누워있다. 시체에 줄로 묶어둔 종이에는 아마도 발견된 장소와, 처음 보았을 때 기록한 특징 따위가 적혀 있는 듯하다.

1655073058648.png‘이중에 다카하시 사장의 팔이나 다리도 있는 것일까…….’

선우진은 잘린 채 숯덩이가 된 신체부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다. 위이잉-! 애애앵-!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천막 내부에서는 쉬파리들이 끊임없이 날며 신경을 긁어댔다. 아무리 펑톈 군 병사들이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고 쫓아봐야 별 소용이 없다. 방부 처리를 했다고 해도 6월의 훈훈한 날씨 속에서 며칠이나 이 많은 시체들을 방치했으니, 벌레가 꼬이는 게 당연하다.

16550730586489.png“아까 내가 말했던 그 세 번째 시체는 바로 저기에 있소. 저기 가장 안쪽의 우측에.”

장쉐량이 멀리 천막 반대편을 가리키자, 부하병사들은 얼른 그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었다. 비교적 멀쩡한 사체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척-! 선우진은 망설임 없이 크게 걸음을 옮겼다. 다카하시 사장의 행방을 알기 위해 찾아온 곳이었지만, 이제는 이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는 일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만약 장쉐량이 일본군의 편에 서 버린다면 중국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는 것은 물론, 만주에서 거주 중이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16550730586489.png“어쨌든 이렇게 도와주어서 정말로 고맙소이다. 골짜기에서 발견한 그 두 시체들의 정체도 덕분에 곧 밝혀질 전망이고, 우치다 영사를 만나더라도 할 말이 생겼소.”

부하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라오며 장쉐량이 말했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부하들의 귀 같은 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손전등 불빛의 광원이 가까워지자, 처참한 사체들의 모습이 조금씩 더 확연하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1655073058648.png‘……이런!’

선우진은 우뚝 멈춰서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리가 박살나고 손가락이 다 잘려나간 그 시체가 누구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1655073058648.png‘다카하시 사장!’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크게 불렀다. 터졌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얼굴이 짓뭉개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자주 보았던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특징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저 퉁퉁한 살집, 그리고 으스러진 얼굴에 남은 긴 구레나룻. 땅딸한 키와 불룩한 아랫배, 몸집에 비해 가는 팔과 다리. 이 시체가 바로 다카하시 사장이다. 오열하는 메구미의 얼굴이 문득 선우진의 눈앞을 스쳐간다. 그녀는 얼마나 괴로워한 뒤에야 이 현실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직 아버지를 잃기에는 너무 어리고 여린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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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한 곳은 황구툰 선로 아래. 장제스 군 시체에서 북쪽으로 15보 떨어진 바위 위. 신원미상.’ 선우진은 다카하시 사장의 시신에 붙어있는 종이 표를 읽었다. 비록 문법은 다르지만, 한자를 알아보고 의미를 추정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16550730586489.png“뭔가 특별한 점을 발견하셨소? 눈빛이 예사롭지 않구려. 선생과 나는 오늘까지 일면식도 없던 사이이거늘, 이렇게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나서준 은덕은 참으로 크고 감사한 것이오. 결코 잊지 않겠소, 사이온지 선생.”

아무 것도 모르는 장쉐량이 옆에 서며 물었다. 선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1655073058648.png“아니. 이제 이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소이다, 장쉐량 장군.”

16550730586489.png“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사이온지 선생? 응? ……설마?”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을 해보던 장쉐량이 눈을 크게 떴다. 선우진은 이마를 짚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3058648.png“맞습니다. 장제스 군 시체 옆에서 발견된 이 시신이 바로 다카하시 사장입니다.”

16550730586489.png“그런 참극이! 허, 전혀 몰랐소이다! 그 시체가 다카하시 사장일 거라고는……, 말을 듣고 보니, 얼핏 그 모습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장쉐량은 황망해하며 머리를 싸쥐었다. 물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사업을 하며 친분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다카하시 사장이 이들과 보낸 시간은 고작 며칠 정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훼손된 시체에서 그 얼굴을 유추해내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을 것이다. 게다가 장쉐량은 선우진을 만나기 전까지 다카하시 사장이 그 열차에 탑승했는지조차도 몰랐다.

16550730586489.png“유감이오, 사이온지 선생. 이렇게 되어버려서…….”

장쉐량이 선우진의 어깨를 짚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선우진은 그의 손등을 툭툭 두드려 감사의 뜻을 전한 뒤, 다시 다카하시 사장의 시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을리고 찢겨 넝마처럼 변한 양복, 엉망으로 부러져 원래의 길이와 모양을 알 수 없는 두 다리. 잘려나간 손마디. 정말로 끔찍한 최후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것은…… 원래의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박살나버린 얼굴과 머리였다.

1655073058648.png‘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심한 부상을 당한 거요, 다카하시 사장?’

선우진은 시신을 더 꼼꼼히 살펴보기 위해 자세를 낮춰 앉으며, 그 짓이겨진 얼굴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코와 이마를 비롯한 눈 주변의 뼈가 깊게 함몰되었고, 두 안구는 모두 터져버렸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불빛을 비춰보니 앞니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1655073058648.png‘폭발에 휩쓸려 날아가면서 철제난간에 얼굴을 짓찧기라도 한 것일까?’

선우진은 다카하시 사장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상상하기 위해 최대한 두뇌를 가동했다. 쇳덩이 객차가 하늘로 튕겨져 올랐을 정도였으니, 사람 몸이 망가지는 것쯤은 이상한 일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 왜 이 사람 혼자서만 그 멀리까지 날아갔단 말인가? 선우진은 손을 뻗어 다카하시 사장의 몸을 받친 후 들어 올려, 머리 뒤쪽을 살펴보았다. 불에 타 듬성해진 머리카락 사이로 몇 개의 커다란 상처가 눈에 띈다. 으깨진 두개골이 비쳐 보일 만큼 깊고 크게 절개된 상처였다.

1655073058648.png“지갑이나, 여행허가증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다카하시 사장의 양복 안주머니를 짚어본 선우진이 물었다. 여행허가증은 서류가방에 두고 다닐 수도 있지만, 지갑이 없다는 건 이상했다. 웨이터에게 물 한 잔을 부탁해도 팁을 주려면 돈을 소지해야만 한다.

16550730586489.png“그랬다면 다카하시 사장이라는 걸 내가 알게 됐을 테지. 신분을 유추할 수 있을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소.”

장쉐량은 고개를 저었다.

1655073058648.png“그렇습니까……?”

선우진은 다시 고민에 잠겼다. 양복 주머니가 뜯겨나가지 않았는데, 그 안의 내용물만이 깨끗이 사라졌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폭발에 날려갈 때 유실되었다고 하기에는, 주머니의 입구가 다른 곳에 비해 너무도 멀쩡하게 보존되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대충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다.

1655073058648.png‘그리고 이 피…….’

안주머니 주변에 유독 진하게 말라붙은 검은 피를 바라보던 선우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이 피는 다카하시 사장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릴 만큼 깊은 상처가 가슴에는 없다. 그러니 누군가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다카하시 사장의 양복을 뒤져, 지갑을 빼갔다고 추론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16550730586489.png“사이온지 선생의 입장에서는 내 부하들을 의심하실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런 상황에서 망자의 지갑에 손을 댈 만한 이들은 아니오만, 그래도 모를 일이지. 당시 시신에 접근했던 병사들을 다시 불러 엄중히 조사를 해 보리다.”

선우진의 마음을 넘겨짚은 장쉐량이 황급히 말했다. 선우진은 그를 돌아보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1655073058648.png“장쉐량 장군의 군대를 모욕할 마음은 추호도 없소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보아도 그들이 피 묻은 손으로 이렇게 자국을 남기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장군의 병사들이 이 시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흘러나온 피가 이미 거의 다 굳었을 시기이니까요.”

일본군들이 장쉐량에게 가짜 장제스 군의 시체에 관해 알린 것은, 폭발이 있었던 새벽으로부터 장장 열네 시간 이상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러니 장쉐량의 부하들 손이 피로 젖은 채 다카하시 사장의 시신을 뒤졌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사람의 피는 몸 밖으로 흘러나온 뒤, 그렇게 오랫동안 액체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

16550730586489.png“그렇겠구려…….”

오명을 벗게 된 장쉐량은 안도하며 선우진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자그마치 천육백만 위안을 투자해 준 귀빈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스러운데, 만약 그 시신에 도둑질까지 했다면 다카하시 사장의 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일이다.

1655073058648.png“그러니 이 양복 안주머니를 흠뻑 적실 만큼 흥건했던 피는 다른 사람에게서 묻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누가 손에 피를 묻혔는지 알고 있지요.”

선우진이 말했다.

16550730586489.png“아편 중독자들을 마구 난자해 죽인 그 일본군들…….”

장쉐량은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웅얼거렸다. 아편 중독자들의 시체가 그 지경으로 훼손되었을 때는, 칼을 휘두른 놈들 역시 온통 붉은 피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어쩌면 다카하시 사장 역시 그놈들의 손에 당한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증인을 없애기 위해 아직 숨이 붙어있었던 그를 때려죽인 것이라고 하면…… 별 무리 없이 앞뒤가 들어맞는다.

1655073058648.png“펑톈에서는 일본 돈이나 조선 돈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선우진이 뜬금없는 질문을 장쉐량에게 던졌다. 장쉐량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성실히 답을 들려줬다.

16550730586489.png“그렇소, 사이온지 선생. 화폐 가치가 일정하고 잘 떨어지는 법이 없어서 오히려 상인들이 더 반기는 분위기라오.”

1655073058648.png“그건 좋은 소식이로군요. 그렇다면 이 범인 놈들을 잡을 수 있소이다, 장쉐량 장군.”

선우진이 단호한 어조로 제안했다. 다카하시 사장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지만, 살인범들을 잡아 죄를 묻는 일은 가능하다. 게다가 놈들의 자백을 받아내면, 우치다 영사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특히나 선우진이 제안했던 그 세 번째 아편 중독자의 이야기를 지어낼 때 엄청나게 유용하리라.

16550730586489.png“나 역시 그렇게 하고는 싶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소? 우치다 영사는 그저 경비대라고만 했을 뿐,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소이다. 그 수많은 일본군들 중에 누가 저 양복에 피를 묻혔는지 알 수가 없단 이야기요. 설사 이름을 알아낸다고 해도 결코 지갑에 손을 댔다는 걸 시인하지는 않을 것이고.”

장쉐량이 난색을 표한다. 그러나 선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1655073058648.png“원래대로라면 그럴 테지만, 놈들이 다카하시 사장의 지갑을 가져간 순간 스스로 꼬리를 드러낸 것과 다름없습니다. 갑자기 큰돈이 생긴 군인이 갈 만한 곳은 뻔히 예상할 수 있지요.”

16550730586489.png“유곽인가…….”

장쉐량은 단번에 알아듣고 입가를 쓸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3058648.png“그렇소이다, 장쉐량 장군. 적어도 내가 아는 일본의 군인들은 그렇게 하더군요. 이 범인 놈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카하시 사장의 지갑을 손에 넣은 것이, 그제 이른 새벽. 우치다 영사와 자신의 상관들에게 상황 보고까지 다 마쳤으니, 이제 슬슬 풀어질 때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어쩌면 벌써 한 번 이상 홍등가에 들러 흥청망청 써댔을는지도 모르겠군요.”

평소에도 다카하시 사장의 지갑 안에는 늘 3천 원 이상의 현금이 들어있었다. 외국으로 나오는 마당에 그보다 적은 액수를 소지했을 리는 없다. 아까 낮에 바바와 함께 머물렀던 그 허름한 가게를 기준으로 계산해 볼 때, 3천 원이면…… 거의 무한으로 계속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1655073058648.png“인근의 홍등가를 돌며 은밀하게 수소문해 보시지요, 장쉐량 장군. 어제오늘 못 보던 일본인들이 몰려와 큰돈을 썼다면, 그놈들이 바로 범인이올시다.”

16550730586489.png“그렇게 하는 동안 놈들과 맞닥뜨릴 수도 있겠구려. 으음, 그런데 만난다손 치더라도 무슨 핑계로 이놈들을 잡아 족치지?”

장쉐량이 손끝의 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런 시점에 명확한 이유 없이 일본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거나 체포한다는 것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주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변사체로 발견된다고 해도 이야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만주철도의 선로를 경비한다는 명목 아래 엄연히 합법적으로 주둔하는, 국제연맹 소속국의 군인들이기 때문이다.

1655073058648.png“장쉐량 장군께서 직접 다카하시 사장의 복수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거대한 사건의 수습을 모두 책임지셔야 하는 분이 그런 자잘한 문제에까지 신경을 쓰시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저 어떤 인상의 일본인이 홍등가에서 돈을 썼는지, 혹은 쓰는지만 확인하고 내게 일러주십시오.”

선우진은 장쉐량을 안심시킨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073058648.png“나머지는 내가 다 처리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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