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 아아, 너무도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241/459)

241. 아아, 너무도 감동적인 말씀입니다.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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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의 판매량은 바로 그날부터 엄청나게 늘었고, 매일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16550734682949.jpg“혹시 오늘도 뭐 돈 될 만한 뉴스가 나오려나?”

미두와 주식을 거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기대를 품고 아침부터 라디오를 켜둔 채 하루를 시작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개인용 라디오를 사서 자랑스레 사무실이나 집에 비치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주식 거래 대리점이나 미두 대리점, 대중식당과 술집, 찻집도 라디오가 켜져 있어야 매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점들의 유리문 앞에는 으레 다음과 같은 종이 안내 문구가 자랑스럽게 나붙었다. - 최신식 일본제 라디오 완비, 라디오 뉴스 지금 점내에서 방송 중! 그 작은 종잇조각의 유무에 따라서 상점의 매상이 크게 달라졌다. 라디오가 있는 곳은 손님들로 붐볐고, 없는 곳은 한산하게 파리를 날렸다. 그만큼 6월 21일 장쭤린의 사망 소식을 일찍 알렸던 충격은 컸다. 푼돈을 모아 현물시장에 뛰어든 합백꾼들 중에서도 몇백 원씩을 챙긴 이가 적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로지 라디오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돗다’, 즉 쌀을 사는 쪽에 돈을 건 때문이라고들 했다. 일확천금의 열망을 품은 사람들에게 그건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

16550734682949.jpg“젠장,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한 번만 오면 좋을 텐데…….”

투기꾼들은 찻집에서 10전짜리 커피를 시켜놓고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면서, 초조하게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여유가 있는 계층은 해태를 피우고, 한 푼이 아쉬운 사람들은 마코를 태운다는 점 정도가 다를 뿐, 그 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선우진이 인천의 창고에 쌓아두었던 밀수 라디오가 거의 바닥을 드러낼 정도였다. 역시 가장 강력한 지렛대는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물론 선우진의 또 다른 상술도 라디오 판매 증가에 크게 한몫을 했다. 수신 계약을 맺고 대금을 지불해야만 들을 수 있던 일본과 달리, 선우진은 라디오 기계를 소유한 경우엔 누구나 무료로 라디오를 청취 가능하도록 허가해 주었다. 일단 라디오가 생활 속에 깊숙하게 자리 잡기만 하면 수신료 몇 푼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한 까닭이다.

16550734682958.png“라디오 판매가 이리도 잘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일주일 뒤, 연회에서 만난 우라사키는 환하게 웃으며 라디오 이야기부터 꺼내놓았다.

16550734682958.png“대당 가격이 500원이나 하는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팔려나간다는 말입니다! 200대 가지고 있던 재고가 다 동이 날 지경이어서 본토 미츠코시 백화점에 추가 주문도 넣었습니다. 천 원대의 고급형 라디오도 하루에 한 대씩은 팔리는 추세이고요, 하하하하!”

안 그래도 혈색 좋았던 우라사키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만 원이 넘는 판매 실적을 단 며칠 만에 올렸다는 사실에 그는 잔뜩 고무돼 있었다. 고급형 라디오는 수제로 제작된 나무 틀 내부에 라디오 본체와 배터리, 스피커, 안테나를 보기 좋게 배치한 물건이다. 일반 라디오와 비교해서 그리 큰 성능의 차이는 없지만, 부속품과 전선이 너저분하게 늘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부유층의 선택을 받았다.

16550734682965.png“200대라…….”

우라사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구니토미 주식현물거래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734682965.png“그 정도 팔린 것치고는 주위에 라디오가 너무 흔한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16550734682958.png“아! 최근에 팔린 것이 그 정도이고, 작년부터 판매되었던 것부터 다 합치면 이래저래 350대는 되지요. 다른 잡화점에서도 취급 중이고요.”

우라사키의 답변에도, 구니토미는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얼굴이었다.

16550734682965.png“아니,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퍼진 느낌입니다. 못해도 경성 안에만 칠, 팔백 대 이상은 깔려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길을 지나다닐 때마다 라디오 소리가 들릴 수 있을까요?”

16550734682984.png‘팔백 대라니, 2천 대는 가볍게 넘지.’

선우진은 구니토미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경성과 인천에 얼마나 많은 라디오가 깔려있는지는, 직접 라디오를 밀수해서 판 그가 제일 잘 안다. 경성에 약 2천 대, 인천에 800대. 미츠코시에서 500원에 파는 물건을 잡화점에서 270원에 판매 중이니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쭉쭉 팔려나가는 참이다. 개중엔 이문을 남기고 다른 이에게 되팔려 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우라사키가 일본에 추가주문을 넣었듯, 선우진 역시도 오늘 일본 군수송선 편으로 새 물건들을 잔뜩 들여온다. 세금 한 푼 물지 않은 밀수품 라디오들을. 하지만 이 정도로는 만족할 만하지 않다. 선우진은 지금보다 열 배 이상 라디오가 깔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귀 기울이기를 원했다.

16550734710191.png“뭐, 본토에서 사용하던 물건을 가져오신 분들도 계실 테지요. ……참! 라디오에서 그 노래 들어보셨습니까?”

상황을 논리적으로 풀이해준 미우라가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저 ‘그 노래’라고 말했을 뿐이건만, 우라사키는 단박에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34682958.png“하부노 미나토 말씀입니까?”

16550734710191.png“바로 그렇습니다! 아시는군요, 우라사키 사장!”

16550734682958.png“이야! 저는 말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에이, 뭐야. 사토 치야코가 부른 게 아니잖아!’라고 했는데……. 한 세 소절 넘어가고 나니까, 캬아! 이게 완전히 기가 막히더군요!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게, 뭔가 아련해지고 말입니다!”

우라사키는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이 받았던 감동을 표현했다. 미우라 은행장이 십분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16550734710191.png“저도 고향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가슴을 싸르르 울리는 것이, 원곡 가수인 사토 보다 더 잘 부르더군요.”

16550734682965.png“빅터 레코드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건 뭐 비교도 안 될 정도였습니다. 저도 그 노래를 듣고 너무 좋아서 축음기에 사토의 음반을 올려보았는데…… 영 맛이 살지 않더란 말이죠. 워낙 목소리도 좋지만 특히나 이 구성지게 꺾는 기교가…….”

구니토미도 나타샤의 절대적인 우위를 주장하며 혀를 내둘렀다. 우라사키가 문득 굳은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16550734682958.png“그 노래 들으면서 저는 어쩐지 다카하시 사장이 떠올라 먹먹해지더군요. 그렇게 서둘러 가실 줄이야……. 참으로 인생무상.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만, 언제나 기력 넘치고 유쾌하게 사시던 분이셨는데…….”

16550734710191.png“그러게나 말입니다. 자, 우리 다카하시 사장을 기리며 한 잔 하실까요?”

미우라가 술잔을 들어 올리자, 모두가 거기에 응했다. 단번에 샴페인을 비운 뒤, 구니토미가 입을 뗐다.

16550734682965.png“그런데 그 가수 누굽니까, 대체?”

가수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기에 궁금증은 더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16550734682958.png“저에게 물어보시는 겁니까?”

우라사키가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구니토미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16550734682965.png“미츠코시에서 음반을 판매하시지 않습니까?”

16550734682958.png“아니오, 저희는 전혀! 그런 음반 입고되지도 않았습니다.”

우라사키는 손사래를 치며 선우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16550734682958.png“사이온지 선생께서 아실 테지요. 라디오 방송국의 일이니까요.”

16550734682984.png“제가요?”

선우진은 전혀 뜻밖이라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16550734682984.png“후후, 아무리 제 소유의 사업체라고는 하지만, 제가 음반에 적힌 가수 이름까지 일일이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노래가 방송되는지도 몰랐습니다.”

16550734682958.png“하긴!”

세 사람은 대번에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디오뿐만 아니라 경마를 포함한 여러 굵직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거액의 주식, 미두까지 하는 그가 그런 자잘한 일에 신경 쓴다는 것은 어딘가 말이 안 된다. 그런 업무는 어디까지나 하위 관리직들이 전담하는 일이니까.

16550734682984.png“하지만 세 분께서 그리 좋아하신다고 하니, 방송국 직원에게 문의는 해 보겠습니다. 누군가는 알고 있을 테지요.”

선우진이 전화기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몸을 돌리려 할 때, 세 사람은 일제히 만류했다.

16550734710191.png“무슨 그런 말씀을! 그냥 여기서 이야기나 더 나누시지요, 사이온지 선생!”

16550734682965.png“그래요, 사이온지 선생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재미가 없습니다! 음반이야 어차피 수일 내로 미츠코시에서 판매될 테니, 그때 천천히 알아도 되는 것이고요! 또 라디오에서도 꾸준히 내보내주지 않습니까?”

미우라와 구니토미가 선우진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간곡하게 도리질을 해대는 동안, 우라사키는 지나가는 웨이터를 붙잡고 새 술잔을 집어 올렸다.

16550734682958.png“자, 자! 그러지 말고 한 잔씩 더 드십시다!”

16550734682984.png“그럼 그렇게 할까요.”

애초부터 일러줄 마음이 없었던 선우진은, 못 이기는 척 걸음을 멈추고 술잔을 건네받았다.

16550734682958.png“당연히 그래야지요! 안 그래도 따분한 이 총독부 연회에서 사이온지 선생마저 안 계시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우라사키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탄력 있는 볼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을 들은 구니토미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34682965.png“도대체 이번 총독부는 왜 이리 연회를 자주 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바쁜 사람들을 억지로 불러모았으면서 말이지요. 탄신일 기념 연회까지는 이해를 하지만, 육군대신 취임 7주년 기념 연회에, 정3위 영전 4주년 기념 연회라니……. 그런 일들이 굳이 이렇게 성대하게 기념해야 하는 일이기는 합니까?”

16550734710191.png“뭐……, 다 축하 인사를 노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연회 비용은 공식 행사 운운하며 총독부 예산으로 치르고, 인사 받은 건 뒤에서 개인적으로 챙기고…….”

미우라는 ‘인사’라는 단어를 말하며 엄지와 검지로 돈 세는 흉내를 냈다. 구니토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투덜댔다.

16550734682965.png“후우……, 인사하다가 허리가 휠 정도입니다. 물론 저야 염원하던 주식 거래 대리점 허가를 몇 군데나 받았으니 당분간은 꼼짝없이 참석을 해야 할 판입니다만.”

16550734710191.png“듣자하니 연회가 끝난 뒤에는 축하금 봉투를 일일이 직접 열어보신다고 하더군요. 액수가 만족스럽거나, 반대로 너무 작은 사람은 따로 이름을 적어둔다는 소문도 있더이다.”

미우라가 세간에 도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이에, 우라사키는 멀리 야마나시 한조가 서있는 방향을 응시하며 도리질을 했다.

16550734682958.png“저도 돈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저분처럼 노골적으로 밝히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이쿠, 이런 젠장!”

얼굴이 시뻘게진 우라사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미우라가 물었다.

16550734710191.png“왜 그러시오, 우라사키 사장?”

16550734682958.png“총독 각하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설마 제가 흘겨보는 걸 들킨 건 아닐 테지요?”

16550734710191.png“허허……. 얼른 웃는 낯으로 바꾸시구려. 이쪽으로 오십니다.”

미우라가 혀를 끌끌 차며 익숙한 영업용 미소를 만면 가득 지었다. 돌아보니 정말로 한조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다. 그리고 그의 한 걸음 뒤를 이병길이 다급한 표정으로 졸졸 따르고 있었다.

16550734794669.png“총독 각하! 중추원의 권한을 조금만 더 올려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으로 알고, 평생 감사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총독부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하여…….”

이병길은 두 손을 비비며 열심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하려 해보지만, 한조는 조금도 들으려는 기색이 없다.

16550734794716.jpg“그만두시오, 후작! 내가 왜 중추원에게 아까운 예산을 더 낭비해야 한다는 게요? 안 그래도 요즘 조선의 귀족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크거늘! 당신들이 정말로 내게 충심을 가진 건지도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겠소.”

16550734794669.png“예에? 아이고, 총독 각하! 왜 그리 서운한 말씀을! 저희가 반도애일회 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전개하고 있는지 보고를 드렸지 않습니까? 그간 모금해 둔 금액만 해도 백오십만 원이 훌쩍 넘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대일본제국과 총독 각하를 향한 뜨거운 충정에서 비롯된…….”

16550734794716.jpg“말로만 뜨겁다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야지 않겠소? 당장 오늘만 해도 반도애일회의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군! 무엄하게 인사도 없이 말이야!”

한조는 진심으로 분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의 일갈에 똥개처럼 움찔하면서도 이병길은 변명을 멈추지 않았다.

16550734794669.png“그…… 이지용 백작은 지금 위중한 상태입니다, 총독 각하! 병원에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 하여 자택으로 데려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다 여기시고 부디 너그러이…….”

16550734794716.jpg“그 사람이 아프다고 한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한조가 걸음을 멈추고 매섭게 다그친다.

16550734794716.jpg“조선 백작이라 하여 내가 초대장을 송부한 것만 해도 서른 차례가 넘어! 그런데 얼굴을 비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 뻔한 핑계를 또 늘어놓는 게야? 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한조가 총독에 부임한 지 불과 6개월. 그사이에 서른 번이나 공식 연회며 행사를 개최했다는 부분부터가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이병길로서는 그런 지적은 할 수 없다.

16550734794669.png“그……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가족들이 임종을 지키기 위해 대기 중이라고…….”

16550734794716.jpg“듣기 싫다고 했는데!”

한조의 바짝 마른 긴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진 뒤에야 이병길은 입을 다물었다.

16550734794716.jpg“으음, 정말로 한심한 놈들이야! 조선 귀족이라는 것들은 그저 제 자잘한 이득밖에는 모르는 족속들처럼 군다니까!”

선우진 일행 앞으로 걸어온 한조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16550734794716.jpg“이렇게 영광스러운 파티에 참석하면서 봉투에 고작 천 원을 넣어 내밀다니! 그것도 반도애일회라는 단체의 명의로 말이야! 수십 명이 겨우 그것만 내고 말겠다는 거라고! 좀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아직도 바로 근처에 서 있는 이병길에게 들으라는 듯 그의 목소리는 컸다.

16550734794716.jpg“귀족이라면 귀족다운 풍모를 보여야 존중을 해 줄 것 아냐! ……안 그런가, 사이온지 군?”

그렇게 씩씩대던 한조였지만 선우진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볼 때엔 이미 눈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언제나 가장 많은 금액을 봉투에 담아내는 선우진이야말로 그에게는 둘도 없는 충신이다.

16550734682984.png“저들이 알아듣도록 제가 다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한조 총독 각하.”

선우진이 겸손한 어조로 대꾸하자, 한조의 입술 사이에서 웃음이 비실비실 새 나왔다.

16550734794716.jpg“그렇게 해 주게나, 사이온지 군! 조선 귀족들은 말이지, 좀 제대로 된 지도를 받아야 돼! 저렇게 이기적이어서야 곤란하지! ……들었소, 후작?”

선우진의 어깨를 짚고 부드럽게 말하던 한조가, 이병길을 돌아보며 퉁명스레 확인했다. 이병길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34794669.png“네! 네! 총독 각하!”

16550734794716.jpg“사이온지 사장에게서 배우란 말이야! 알아들었으면 이제 물러가시오!”

16550734794669.png“네! 다, 다시 한 번 겨, 경하드리옵니다! 총독 각하!”

동경의 시선으로 선우진을 힐끔거리던 이병길은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총독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 그의 얼굴가득 묻어났다.

16550734794716.jpg“참으로 답답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일단 말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절이라는 것이 턱없이 부족해! 물론 사이온지 군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 친구야 워낙에 명문가에서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모범적인 가정교육을 받은 정통화족이니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안 되지. 그 외에는 다 글러먹었어! 내가 젊었을 땐 말이지, 이렇지 않았다고……!”

그가 끝없이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조짐에, 우라사키 일행은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육군 사관학교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떠들어대는 저 교훈담은 이미 수십 번이나 듣고 또 들었다.

16550734794716.jpg“내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육군 제 2 보병 여단의 참모로 재직하면서,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어! 왜냐하면 그 당시의 나는 어디까지나 참모였으니까, 내 모든 공훈을 다 내 상사에게 돌렸기 때문이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몰라도, 내 시절에는 그게 당연한 거였고, 또 예절바른 행동이었지! 그런데 정작 내가 소장이 되어 1914년에 제18보병 여단을 지휘하면서 칭타오 전투에 참여했을 때는…… 어이, 듣고 있나?”

16550734682958.png“예, 총독 각하…….”

느닷없이 지목당한 우라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하품을 하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쥔 채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이 길고 긴 이야기는 대체 왜 이리도 끝이 나지 않는단 말인가.

16550734794716.jpg“……그게 왜 그런 줄 아나? 다들 잘못된 지식을 머릿속에 주입받아왔기 때문이야! 정신이나 마음이 물질을 압도한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지! 그게 말이 돼? 그게 말이 되느냐고! 마음만 받아주십시오, 따위의 같잖은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 놈들에게 나는 꼭 묻고 싶어져! 그렇다면 내가 네놈의 봉급 봉투 안에 돈 대신 ‘참으로 고맙다’라고 쓴 편지를 넣어서 주어도 괜찮겠나, 라고 말이지! 그러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않은가? 정신은 물질을 이기지 못한다고!”

발동이 걸린 한조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정신개조에 관한 철학을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미우라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스쳐갔다. 정신개조가 나왔으니,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지긋지긋한 잔소리도 다 끝이 난다.

16550734794716.jpg“다들 신문물을 좀 더 익힐 필요가 있어. 군대만 해도, 내가 제1차 군축을 하고 난 뒤에 훨씬 더 강력해졌지! 머릿수가 줄었다고 투덜거리는 것들이 있는데, 그깟 장교 놈들 천 명이든 2천 명이든, 대체 그놈들만으로 뭘 할 수 있겠나? 차라리 그놈들 줄 봉급으로 장갑차 한 대, 비행기 한 대를 더 사는 것이 더 이득이지! 비행기를 직접 보고 난 뒤에도 야마토 정신으로 맞서면 된다고 하는 놈들은 애초에 글러먹은 거야!”

젊은이들의 예절이 형편없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훈시는, 몇 개의 반환점을 돌고 돈 뒤에 신문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저 길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맥락도 일관된 교훈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지루한 잔소리였다.

16550734836428.jpg“하아아……!”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할 때, 선우진이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한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16550734682984.png“아아,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크게 배우고 그러면서도 감격했습니다, 한조 총독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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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34794716.jpg“응?”

모두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심지어 야마나시 한조 본인조차도 조금 의외라는 듯 물었다.

16550734794716.jpg“정말인가, 사이온지 군?”

16550734682984.png“그렇습니다, 총독 각하. 요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각하의 가르침을 듣고 나니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느낌입니다. 특히나……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16550734794716.jpg“큼, 큼. 뭐 그렇다고 하면 다행이고.”

16550734682984.png“그러면서도 동시에 너무 아까워 견딜 수가 없군요. 여기 모인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소중한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총독 각하의 이런 훈시는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관직을 맡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학생들과, 모든 일본인, 나아가서는 조선인들에게까지도 더할 수 없는 금과옥조가 되어줄 것입니다.”

16550734794716.jpg“……그 정도인가?”

한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34682965.png“당연합니다, 한조 총독 각하!”

16550734710191.png“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16550734682958.png“언젠가 제 아이들이 크면 오늘 들려주신 말씀을 꼭 전해주려 합니다!”

누구 하나 예외랄 것 없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배우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아양을 떨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평생 미워해달라고 한조에게 달려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16550734682984.png“공사를 돌보시느라 늘 바쁘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각하께옵서 허락해 주신다면…… 가끔 한 번씩이라도 라디오를 통해 이런 훈시 말씀을 조선 전체에 알리고 싶습니다.”

엄청난 감언이설로 한조를 잔뜩 띄워놓은 선우진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한조가 즉각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6550734794716.jpg“오오, 좋은 생각이군! 어찌 자네는 이다지도 영특한가! 작금의 젊은이들과 어찌 이다지도 다르단 말인가! 내지인과 반도인들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내가 그 정도 틈은 내 볼 수 있지. 다음 달부터는 라디오에서 정례 연설을 해주겠어! 시바타와 일정을 조절하라고! 아니, 아니! 조절할 것도 없어! 매달 5일을 연설 방송일로 정하게!”

16550734682984.png“감사합니다, 총독 각하!”

목적을 이룬 선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총독의 정기 연설이 예약되어 버렸으니, 이제 조선의 모든 관공서와 경찰서, 기차역, 학교, 그리고 대형 회사들은 라디오와 대형 스피커를 강제 구입하고 청취할 수밖에 없다. 대 라디오 시대의 막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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