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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단체 사진이 없는 이유. (248/459)

248. 단체 사진이 없는 이유.2020.04.25.

16550736492473.jpg“시작하면 되는 건가, 사이온지 군?”

목소리 가다듬기를 마친 한조가 마이크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16550736492481.png“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총독 각하.”

선우진이 손짓을 하자, 라디오 국에서 나온 직원들이 곧바로 기계 장치 가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기를 연결한 직원들은 녹음용 턴테이블 위에 불을 밝히고, 새 비닐 레코드판을 꺼내 올렸다. 우웅-! 우웅-! 총 네 개의 큰 덩어리로 구성된 기계의 좌측 끝에서는 진공관에 전기가 주입되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기록용 기계 침의 압력까지 모두 미세하게 조절이 끝난 뒤, 선우진은 마이크를 켰다.

16550736492481.png“이제 준비는 끝났습니다.”

16550736492473.jpg“이렇게 간단한가? 허어,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구만! 내 책상보다도 작은 크기의 기계로 녹음이 된다니, 대단해! 이런 신제품을 알아서 척척 사들인 자네도 참으로 대단하고! 좋아, 시작하자고! 조선 총독의 1호 방송연설이다!”

한조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선우진은 손가락을 모두 편 채 그에게 말했다.

16550736492481.png“이 손가락이 모두 접힌 뒤에 말씀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기술자가 스위치를 켜자, 턴테이블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우진은 천천히 하나씩 손가락을 접었다. 5, 4, 3, 2, 1!

16550736492473.jpg“조선의 오늘이…… 나는 심히 우려스럽다!”

시작 신호가 떨어진 뒤, 한조는 곧바로 마이크를 움켜쥔 채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16550736492473.jpg“참으로 대단한 위기를 겪고 있어! 이것은 재조일본인과 반도인을 가리지 않고 마찬가지인데,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썩어빠졌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야! 봐주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생각해보면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세상이 이렇지 않았어! 그때는 말이지…… 아차!”

한참을 떠들어대던 한조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선우진을 돌아보고 물었다.

16550736492473.jpg“내가…… 내 이름과 직위를 밝혔던가?”

16550736492481.png“아니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우진은 정중하고도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조는 난감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16550736492473.jpg“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래서야 녹음을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잖나? 목소리만 듣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텐데! 허허, 이것 참…….”

16550736511819.png“총독 각하! 지금 그 말씀도 아마 녹음이 되는 것일 텐데…….”

시바타가 끼어들어 한마디 하자, 한조는 더욱 당황했다.

16550736492473.jpg“뭐라고?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처음부터 다시 하세! 명색이 총독이나 되어서 이런 실수를 했다고 하면 안 되지! 큼! 큼! 그리고 시바타 자네는 끼어들지 말고! 연설에 자네 목소리가 섞여 들어가면 곤란하잖나! 그런 조언은 손짓으로만 하란 말이야!”

실수는 자신이 저질러놓고, 공연히 시바타를 타박하며 화풀이를 하려 든다. 시바타는 추궁을 당하면서도 지금의 이 말들 역시 녹음되고 있다는 손짓을 거듭 해댔다.

16550736492473.jpg“아……!”

그제야 자신이 아직 마이크 앞에 있음을 깨달은 한조가 쩍 입을 벌렸다.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하던 한조는 다급하게 선우진을 불렀다.

16550736492473.jpg“사이온지 군! 이거 이러면 안 돼! 멈춰 주게! 처음부터 새로 녹음을 하고 싶네! 설마 이대로 전부 다 라이오에 방송되는 것은 아닐 테지?”

그야말로 혼자서만 보기 아까울 정도의 허접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라디오 방송국 외에서 소리를 녹음해 나중에 따로 방송한다는 것은, 일본에서조차 생소한 모던 라이프다. 아무리 육군 대신 출신에 총독까지 오른 고위직 관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16550736492481.png“걱정하지 마십시오, 한조 총독 각하. 녹음은 언제든 중단할 수 있고, 또 원하신다면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하셔도 무방합니다.”

선우진은 기계 장치로 다가가 녹음용 철침을 들어 올린 뒤, 평상의 서랍을 열어보였다. 서랍 내부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 비닐판들이 잔뜩 들어있다.

16550736492481.png“한쪽 면에 무려 11분이나 녹음이 가능하니 시간도 넉넉합니다.”

16550736492473.jpg“11분! 그러면 20분이 넘는 연설도 가능하겠구만!”

한조의 작은 눈이 활짝 뜨였다. 레코드판의 재생시간은 보통 노래 한두 곡 정도가 한계인데, 이 신 기계장치는 그 두 배가 넘는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16550736492473.jpg“시간에 쫓기지 않고 연설을 할 수 있다니 그 또한 마음에 드는군. 그런데 혹시, 조금 전 연설했던 내 목소리를 지금 들어볼 수도 있겠나?”

16550736492481.png“물론 가능합니다, 각하.”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라디오 국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지시를 받은 직원들은 복도에 준비시켜 두었던 축음기를 들여왔다.

16550736492473.jpg- 치직, 치직……. 조선의 오늘이…… 나는 심히 우려스럽다! 참으로 대단한 위기를 겪고 있어! 이것은 재조일본인과 반도인을 가리지 않고 마찬가지인데,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썩어빠졌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야! 봐주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생각해보면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축음기에 판을 올리자, 한조의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한조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배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두고 자신의 연설을 경청했다.

16550736492473.jpg“괜찮군! 이렇게 제3자의 입장이 되어 들어보니까 사이온지 군 자네가 내 연설에 매료되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 역시 내가 목소리가 좋다보니……!”

16550736492481.png“저 역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녹음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만족하는 중입니다.”

선우진이 비위를 맞춰주자, 한조의 입술 사이로 흐뭇한 웃음이 터졌다.

16550736492473.jpg“그나저나 사이온지 군, 자네에게 조금은 미안하군. 내가 연설을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매번 이렇게 시간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말이야.”

16550736492481.png“총독 각하의 연설을 공식적으로 기록해 보관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오히려 큰 영광입니다. 어느 한 마디, 어느 한 문장.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금과옥조이고, 역사의 기록이니까요. ……아! 몇 번을 다시 들어도 좋군요.”

선우진은 바늘의 위치를 옮겨, 짤막하게 끝난 한조의 연설을 또다시 재생하면서 새삼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조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16550736492473.jpg“그렇게 고마워해주니, 연설을 하는 나로서도 보람은 있네만……. 역사의 기록이라는 건 무슨 소리인가?”

16550736492481.png“한조 총독 각하께서 장차 내각 총리대신으로 영전하시면…….”

내각 총리대신이라는 단어가 선우진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자마자, 한조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16550736492473.jpg“하하하하, 이 친구! 참……! 성급해! 아직 이르다고! 조선총독에 부임한 지 채 1년도 안 되었는데 벌써 내각 총리대신이라니!”

말로는 성급하다고 하지만 그는 몸을 비비 꼬며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16550736492481.png“하지만 결국은 성사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격동의 시대는 위인을 원하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선우진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아주 당연한 수순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태연히 감언을 계속했다. 한껏 들뜬 한조가 억지로 근엄한 척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주억댄다.

16550736492473.jpg“음, 그야 뭐……. 나도 자금력만 조금 더 갖추면 본격적으로 정우회에 줄을 대서 나설 생각일세. 사실 인물로 따지자면 다나카보다야 내 쪽이 몇 배나 나으니 말이네.”

16550736492481.png“그때가 되면 정치와 통치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생과 젊은이들이, 나아가서는 관료와 고급 장교들까지도 모두, 한조 총독 각하의 연설을 반복해서 들으며 꿈과 지식, 그리고 우수한 연설의 기술을 모두 키울 테지요.”

16550736492473.jpg“으음! 뭐, 배워준다고 하면야 나로서는 가르치는 보람이 있지!”

만족해하던 한조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16550736492473.jpg“음? 헌데 사이온지 군, 자네가 그렇다고 하니 궁금해지네만 그, 혹시 이 판을…… 여러 장 똑같은 걸 만들 수도 있는 겐가? 노래가 들어있는 판은 그런 게 가능한 것 같던데……. 이 작은 기계로는 그건 무리일 테지?”

16550736492481.png“복사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총독 각하?”

16550736492473.jpg“아, 그래! 바로 그거야! 이 레코드판도 책과 마찬가지로 복사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16550736492481.png“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애초에 저는 매회 녹음이 끝날 때마다 한조 총독 각하께 원본과 함께, 복사본 레코드 판 100장씩을 증정할 계획이었습니다.”

16550736492473.jpg“100장이나? 그 많은 걸 다 뭘 하라고?”

16550736492481.png“각 도청과 군청에 비치해두면 매일 두고두고 각하의 명연설을 다시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부디 한 장만이라도 소유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명사들이 많을 겁니다. 한조 총독 각하께서 포상처럼 선물하신다면, 비할 수 없는 영광이 되겠지요.”

선우진이 유려하고 달콤한 언어로 아첨의 말들을 이어가자, 한조의 입은 귀에 걸렸다. 거기에 더하여 시바타까지 장삿속이 가득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0736511819.png“총독 각하! 연회에서 유상 판매를 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한 장당 천 원으로 가격을 책정해두면, 순식간에 다 팔려나갈 겁니다.”

16550736492481.png“그건 충분히 투자 가능성이 있겠군요. 한 주에 단 100장만을 찍어내는 한정판이라 희소성이 있으니까요. 어쩌면 웃돈이 붙어 거래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우진이 시바타 놈의 미친 계획에 부채질을 해주니, 한조의 가슴 속은 금세 욕망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16550736492473.jpg“호오, 백 장이면…… 매주 그것만으로도 십만 원이군. 그거…… 나쁘지 않겠어! 다 팔지는 말고 한 열 장씩 쯤은 따로 빼두게. 내가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려 생각중이네.”

아직 본격적인 녹음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한조는 이미 자신의 연설 레코드판으로 얼마나 벌어들일지를 계산하며 꿈에 부풀었다.

16550736492473.jpg“좋아! 좋아!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고!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지! 새 판을 걸어 주게나, 사이온지 군!”

한조는 시가에 불까지 붙여 물고서 의욕을 북돋웠다. 선우진은 그의 책상 위에 꽤나 큼직한 모래시계를 놓아주며 말했다.

16550736492481.png“11분으로 맞춰둔 모래시계이니, 이것을 보시면서 시간을 조절하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음?”

위치를 옮겨가며 설명을 계속하려던 선우진이 문득 말을 멈추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16550736511819.png“양복이 찢어지셨습니다, 사이온지 선생! 허허, 꽤나 고급품이실 텐데 아까워서 어쩐다!”

그의 뒤쪽에 서 있던 시바타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선우진의 양복은 기계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걸려 길게 찢겨나가 있었다.

16550736492481.png“하아, 다행입니다.”

자신의 옷을 확인한 선우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한조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16550736492473.jpg“다행이라니 뭔 소리인가, 사이온지 군? 미츠코시에서 맞춘 양복이 그리 찢겨버렸는데!”

16550736492481.png“이제라도 위험성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만약 이 쇠 부품이 한조 총독 각하께 상처라도 입혔다면, 저는 너무도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 상상을 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선우진이 진심어린 어조로 대답하자, 한조는 멋쩍어하며 손을 저었다.

16550736492473.jpg“그 정도로 뭘 그러나! 고의도 아니고 기계라는 것이 원래 다 그 정도의 위험성은 갖고 있게 마련이지. 어쨌든 이제 위험한 걸 알았으니, 마이크만 선을 늘여서 이쪽에 두고 그 기계는 벽 쪽에 붙여두자고.”

괜찮다고 하면서도 한조는 기계를 치우라는 손짓을 했다. 양복이 쫙 찢겨나간 걸 보고나니, 겁이 덜컥 난 모양이다. 선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라디오 국 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16550736492481.png“저쪽 벽으로 붙여두게.”

직원들이 평상을 옮겨 시바타의 방과 맞닿은 벽에 기계를 바짝 붙여둔 뒤에도, 선우진은 여전히 불안하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16550736492481.png“아무래도 주변에 낮은 울타리라도 설치해두는 편이 더 낫겠군. 돌아가는 대로 최고급 목재 울타리를 주문해야겠어. 울타리에 금색 줄을 쳐서 막아두면…….”

16550736492473.jpg“뭘 그렇게까지 하는가, 사이온지 군? 그냥 두게. 어차피 녹음이 다 끝나고 나면 도로 가져갈 기계장치 아닌가?”

16550736492481.png“그렇지 않습니다, 한조 총독 각하. 이 장치는 제가 각하께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증품입니다. 언제든 사용하시기 전에 연락만 해 주십시오. 기사들을 보내겠습니다.”

16550736492473.jpg“이걸 나한테 선물하겠다고? 아니, 이건…… 아무래도 꽤나 고가의 장치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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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조는 깜짝 놀라면서도, 싫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최신 기계 장비는 어지간한 자동차보다도 훨씬 더 값이 비싸고 희귀해 보인다. 총독부를 찾는 모든 이들이 이 기계를 부러워하리라. 게다가 사실…… 이 기계는 꽤나 재미있는 장난감이기도 하다. 이걸 갖고 있으면 연설 연습을 할 때에도 당연히 도움이 될 것이고……, 자신이 직접 부른 군가를 레코드판에 녹음해서 조선주둔군에 배포할 수도 있다.

16550736492473.jpg“흐음…….”

자신이 부른 군가의 레코드판이 연병장의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던 한조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16550736492473.jpg“사이온지 군이 정 그걸 원하면 뭐 내가 억지로 말릴 수는 없지. 그…… 자네가 두르겠다는 나무 울타리 말인데, 옻칠을 하면 좋을 것 같군. 울타리 위쪽은 둥글게 해서 금박을 입히고, 두르는 줄은 자주색과 금색 비단실로 엮으면 될 것 같네.”

16550736492481.png“확실히 그리 하면 총독부 집무실의 위상이 살 듯하군요.”

원하던 바를 이룬 선우진은 입에 발린 소리로 대꾸한 뒤, 기사들에게 서둘러 녹음 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한조의 책상 앞에 놓아둔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어놓았다.

16550736492473.jpg“이 몸은 야마나시 한조 조선총독이다! 지금부터 라디오 연설을 시작하겠다. 중요한 이야기이니까 모두 잘 듣고 마음에 새기도록! 조선의 작금에 대해 나는 심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둘러보면 참으로 대단한 위기를 겪고 있어! 이것은 말이야! 재조일본인과 반도인 모두의 문제인데,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썩어빠졌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 심각해! 도저히 눈 뜨고는 봐주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정신들을 차려! 생각해보면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마이크 대를 움켜쥔 한조가 신나게 떠들어댄다. 두 번째 녹음이어서 그의 연설은 한결 매끄러웠지만, 떠들어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꾸만 한쪽 손이 병든 닭의 목처럼 이상한 각도로 점점 비틀어져 갔다. 아마도 마이크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긴장시키는가 보다.

16550736511819.png“……각하, 손을……! 손이 지금……!”

시바타 비서가 안타까운 듯 손을 바로 하라고 속삭여 봐도, 한조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지금 모래시계를 곁눈질하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만도 벅찬 상황인 까닭이다.

16550736596413.jpg“으으음……!”

다른 비서들도 눈을 찌푸린 채 한조의 이상한 몸짓을 참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조선 총독의 첫 라디오 연설 녹음이 열기와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기계에 부착된 두 번째 집음 마이크가 벽에 바짝 붙여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지는 못했다. *** 칠월 중순 무렵, 미국영사관에서 선우진의 경성사무실로 한 통의 큰 서류봉투를 전해왔다. 겉봉의 수신인은 영사관의 레이. 하워드 휴즈가 레이에게 외교우편의 형태로 보내고, 레이가 다시 인편으로 선우진에게 전달한 서신이다. 여러 사람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면 혹시 모를 우편검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선우진은 자신이 누구와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 현 총독부와 관련된 인사들에게는 더더욱.

16550736492481.png“헨슨 영사에게 매우 감사한다고 전해주시오.”

선우진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미국 영사관 직원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16550736623509.jpg“헨슨 영사께서는, 사이온지 님께서 미국제 고급품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에 늘 감사하고 계십니다. 저희가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알려만 주십시오. 아, 그리고 이건 이번에 저희 영사관으로 도착한 미국 신제품 광고지들입니다. 혹시라도 사이온지 님의 흥미를 끌 만한 물건이 있을까 해서…….”

영사관 직원은 광고지로 가득 찬 또 하나의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그간 패커드 승용차와 오티스 에스컬레이터, 녹음기계, 최신식 영사기까지 수많은 미국제 초고가품들을 척척 사준 명사 최우수고객이니, 그들로서도 각별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16550736492481.png“어디…….”

미국 영사관 직원을 돌려보낸 선우진은, 봉투 뜯는 칼을 꺼내 편지를 개봉했다. - 안녕, 친구! 자네가 보낸 직원들이 모두 휴즈 에어 크래프트 신축 기숙사에 무사히 도착했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은 훈련생 신분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만. 하워드 휴즈는 대뜸 어별교 사람들의 도착 소식부터 전했다. 선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16550736492481.png“레이에게 큰 빚을 졌군.”

아무리 하워드 휴즈가 채용을 요청했다고는 하지만, 하와이도 아닌 미국 본토로 어별교 인원 모두를 기술전문직 자격으로 이주시킨다는 건, 레이와 미국 영사관의 협조가 없었다면 명백히 불가능했을 일이다. - 이틀 동안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자네가 이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발한 것인지 궁금해졌네. 무엇보다도 특이한 점을 고르라면 다들 나이가 꽤 많더군. 비행과 관련한 경력을 가진 이도 없고. 보통의 항공학교 입학생들과는 많이 달라. 하지만 자네가 골랐을 때에는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 뭐, 발음은 서툴지만 다들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고. 어제는 <지옥의 천사들> 촬영 현장에 이들을 초대해서 실제 전문 곡예 비행사들의 비행을 참관하도록 했네. 이제 앞으로 3년간 이들이 전부 우수한 비행기 조종사들과 정비사가 될 수 있도록, 내가 책임지고 교육을 하겠네. 자네가 투자한 만큼, 또 우리가 꿈꾸는 만주 항공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나는 최선을 다할 걸세. 그 부분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16550736492481.png‘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네, 하워드.’

선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 대꾸했다. 하워드 휴즈라는 사람이 뭔가를 건성으로 할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다. 이 남자는 최선, 최고가 아니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종류의 강박적인 인간이 아니던가. - 루스벨트 후보와 함께했던 후원 파티는 굉장히 우호적인 분위기로 잘 마무리되었고, 자네의 추가 후원금도 전달했네. ‘일본의 부자 귀족’인 자네를 굉장히 만나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 물론 기막힐 만큼 멋진 말들로 포장해둔 내 공이 크다네. 빌리도 옆에서 몇 마디 거들었고. 에…… 이제 다른 사업 이야기를 할 차례인가? 영화는 말이지, 그…… 자네가 투자한 <지옥의 천사들> 말일세. 그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쩔 수가 없어. 촬영이 여전히 내 욕심에 차질 않아서 진전이 굉장히 더디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신형 비행기 제작도 아직은 결과물을 내기 어렵네. 내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둘 다 완성이 지연되어버리는군. 이상하게도……. 또 돈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그건 아닐세. 자네가 일전에 투자해 준 200만 달러는 꽤나 든든하게 잘 버텨주고 있으니까. 물론 추가 투자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때 나는 이렇게 펜을 들어야만 하겠지. 영화와 돈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제 아무리 하워드 휴즈라고 해도 조금 위축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우진이 레이를 통해 투자금을 전달한 때로부터 벌써 반 년 이상이 지났기 때문이다. 물론 선우진은 지금 그 정도 액수가 아쉽지는 않다. 추신. 자네에게 기념사진을 보내주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하도 완강히 안 찍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단체 사진은 없네. 재수가 없다나, 뭐라나. 핑계는 이리저리 대지만, 아마 이들은 아직도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미신을 믿는 모양이야. 내 날카로운 추리로는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네. 어쨌든 훈련 받는 동안 뒷모습 사진은 몇 장 찍었으니, 그거라도 보게. 편지 말미에는 단체 사진을 보내지 못한 이유가 적혀 있었고, 봉투를 뒤집어보니 사진이 몇 장 나왔다. 모두 다 먼발치에서 찍은 뒷모습 사진들뿐이다.

16550736492481.png“훗!”

가장 위에 놓인 사진을 보며 선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비행기 옆에 서 있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비록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그들이 이일석과 김성옥이라는 걸 선우진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6550736492481.png“아니. 이들은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는 게 아닐세, 하워드.”

선우진은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6550736492481.png“그 어떤 때라도 얼굴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게야. 언젠가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자신을 던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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