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장신의 용의자.2020.05.09.
“뭐, 뭐냐? 이놈들……!”
당황한 일본 경찰들이 소리 나는 방향을 향해 손전등을 돌렸다. 휘익-! 눈부신 노란빛이 자신을 향해 똑바로 비쳐들기도 전에, 버스터의 몸은 이미 허공에 떠올랐다. 터, 턱-! 한성은행의 벽을 타고 두 걸음이나 내달린 버스터가, 경찰들의 뒤쪽으로 뛰어내리며 놈들의 머리통을 차례로 걷어찼다. 빠박-! 듣기만 해도 뼈가 아파오는 통렬한 타격음이 울리고, 두 일본경찰은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금부터는 선우진이 나설 차례다.
“노, 놓아라, 이놈들!”
쓰러지는 경찰 놈의 품 안으로 뛰어든 선우진은, 놈의 팔을 잡아 자신의 셔츠 위에 걸치며 굵은 목소리를 냈다. 이제 이놈이 본능적으로 셔츠를 움켜쥐어 주기만 하면 이 구역에서의 작전은 성공이다. 선우진은 아주 가볍게 몸싸움을 벌이다가 놈의 발밑에 실수인 척 격문을 흘리고 도망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툭-! 자신의 어깨에 걸친 경찰 놈의 팔이 아무런 힘없이 바닥으로 슥 미끄러진다.
“이, 이놈! 놓지 못할까?”
당황한 선우진은 바로 옆 다른 경찰의 손을 잡아당겨 보았다. 허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툭-! 이놈의 팔도 곧바로 뚝 떨어지며 보도를 때렸다.
“하아……!”
실망한 선우진은 옆구리를 짚고 선 채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 두 놈은 모두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문 상태. 그저 일격을 맞았을 뿐인데, 아주 제대로 기절을 해 버렸다. 이런 상태의 놈들과는 실랑이도 불가하고, 이 상황을 기억에 남길 도리도 없다. 쫘악-! 쫙쫙-! 조금 아프다 싶을 만큼 호되게 뺨을 때려 봐도, 놈들은 좀처럼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포기한 선우진이 도리질을 하며 버스터를 돌아보았다.
“너무 세게 때렸지 않나.”
“기르케 약골일지 내래 알았냔?”
버스터도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선우진은 그에게 재차 요점을 짚어주었다.
“이래서야 곤란하네.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하되, 의식은 어렴풋이 남아있어야 한다니까.”
“하이구야! 기렇게 쉬운 두문이었는데 고저 내래 기거이르 실수했구만기래! 어디 동무래 한번 딕덥 해보라우! 턱두가리를 갈기믄 다리래 더덜루 풀리니까네!”
“내 주먹을 맞고 쓰러지겠는가. 자네가 해야지. ……여기는 이미 텄으니 얼른 다음 지점으로 가세.”
선우진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손전등을 끈 뒤,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두 사람은 석조 건물들의 짙은 그림자 속에 숨겨둔 자동차에 올라 골목 안쪽을 내달렸다. 새벽 동이 터오기 전에, 그리고 저 기절한 두 놈이 깨어나 막무가내로 호각부터 불어대기 전에 서둘러 멀리 옮겨가서 일을 마쳐야만 한다. 스윽-! 중앙청 부근에 자동차를 세운 선우진은 시동도 끄지 않고 건물 뒤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언제나 경찰들이 순찰을 도는 구역이다. 버스터가 문득 걱정되는 얼굴로 패커드를 돌아본다.
“더거이…… 더렇게 내비뒀다가 뉘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이네, 동무?”
“훔쳐가 주면 나야 더 좋지.”
선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만약 사이온지 유우야 소유의 고급차가 도난당했다고 하면, 가뜩이나 혼란스러워질 경찰들을 더욱 바쁘게 만들 수 있다.
“오고 있으니, 시작하세나. 이번에는 좀 약하게 부탁하네.”
새 순찰조를 발견한 선우진이 버스터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버스터는 허공을 향해 두어 차례 발차기 연습을 해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기거이 재벨스럽구만기래. 너무 되쎄우 때리믄 안 된다는 거이. 이 정도믄 되갔나?”
“쉿-!”
선우진은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선말을 하는 걸 들키면, 공연히 애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 피해를 입게 된다.
“……동지! 이번의 이 거사를 성공시켜야만 우리 소비에트 일본 혁명연합이 앞으로 크게 도약할 수 있소! 그러니 반드시 맡은 바 임무를 다해주시오! 특히 다이너마이트 폭파를 이용한 요인의 암살은 매우 중요하니……”
선우진이 굵게 꾸며낸 목소리로, 순찰조의 관심을 끌 만큼 크고 분명하게 속삭였다.
“하이, 하이!”
버스터도 유일하게 일본인처럼 할 수 있는 말로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신경은 오로지, 다가오는 일본 경찰들을 향해서만 곤두세워졌다.
“어이! 거기 누구냐? 어디서 감히 불손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게야?”
이번에도 대번에 걸려든 경찰들은, 손전등을 내비치며 건물 뒤쪽으로 뛰어왔다.
“아뿔싸! 여기를 경찰들에게 들킬 줄이야! 동지들 튀시오! 다들 달아나요! 내일 다시 만납시다!”
꽤나 많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상황을 조작하는 동안 경찰들의 발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놈들이 사브르를 빼든 채 코너를 막 돌았을 때,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버스터가 그린 것처럼 매끄러운 발차기를 두 놈의 턱에 차례로 선사해주었다. 빠악-! 덜컥-! 손전등과 사브르를 놓친 경찰들은 입을 헤벌쭉 벌린 채 통나무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와아앗! 이놈! 이거 놓아라!”
오른쪽 경찰의 품 안으로 재빨리 뛰어든 선우진이 다급한 연기를 하며 놈의 손을 자신의 셔츠에 걸쳤다.
“아으으으으……!”
경찰 놈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옹알이 같은 무의미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뭔가 말을 하고 싶기는 한데, 언어를 통제할 만큼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다. 그래도 이번에는 의식이 꽤나 남아있다.
“이놈! 이걸 놓으라니까!”
선우진은 놈의 손을 떼어내는 시늉을 하면서, 미리 귀퉁이를 찢어놓은 격문을 놈의 손아귀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서류가방에서 몇 장의 격문을 더 꺼내 재빠르게 허공에 뿌렸다. 쿵-! 선우진에게 한 번 더 밀쳐진 오른쪽 경찰 놈의 얼굴이 바닥을 내리찧자, 흙먼지가 인다.
“으으으으……!”
왼쪽 경찰 놈도 긴 신음을 흘리며 땅을 짚어보려다가 다시 쓰러졌다. 어떻게든 일어나보려 애를 쓰고는 있는데, 완전히 풀려버린 다리 때문에 도무지 중심을 잡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 새끼! 파쇼의 개!”
선우진은 굵은 목소리의 일본어로 공산주의자다운 욕설을 퍼부은 뒤, 놈의 배를 걷어차고 버스터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휙-! 달리는 동안 버스터는 놈들의 호각을 멀리 집어던져 버렸다. 소리를 지르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호각으로 이 일대의 경찰들을 다 불러 모으는 건 아직 곤란하다.
“한 번만 더 하세, 버스터!”
남촌 깊숙이 총독부 쪽을 향해 차를 몰면서 선우진이 말했다. 두 번의 예행연습을 마쳤으니 이제 정말로 중요한 적의 심장부를 찌를 차례다.
“기러자우, 까짓 거! 봉길이 동무를 위하는 일이라는데 내래 그 정도도 못하갔네?”
버스터는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호쾌한 태도로 대답한 뒤,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부르르릉-! 선우진은 핸들을 틀어 커다란 천주교당 건물을 끼고 우회전했다. 혼마치 2정목이 가까워지자, 아직도 불이 밝혀진 총독부의 웅장한 건물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이쯤이면 될 것 같으이.”
경성전기회사 뒤쪽에 자동차를 세운 선우진은 이번에도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하차했다. 총독부까지는 아직 몇백 미터 이상 남았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때는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그러니 이쯤에서 자주 오가는 순찰 경찰들을 상대하는 편이 낫다. 이번에도 과정은 똑같았다.
“이런! 들켰다! 달아나시오, 동지들!”
선우진은 꽤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과장되게 외쳤고, 이제 감을 잡은 버스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주 가볍게 두 놈의 일본 경찰을 쓰러뜨려버렸다. 물론 가물가물할 정도로 의식은 남겨둔 채.
“놓지 못할까, 이 파시스트 놈들!”
선우진은 기절 직전의 경찰에게 구겨진 격문을 넘겨주고, 다시 자동차를 향해 내달렸다. 너무도 쉽게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등 뒤에서 째지는 호각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는……. 삐이이익-! 삐이이익-! 청량한 새벽의 공기를 모두 뒤흔들어 찢을 만큼 날카롭고 큰 소리가 길게 메아리치며 울린다. 아마도 다른 순찰조가 조금 전 맞은 놈들을 발견한 것이리라. 그러자 반대편 도로에서도 다른 경찰들이 그에 화답해 호각을 불어대며 순식간에 상황이 급박해졌다.
“애빠지게 됐구만기래. 사람이야 빠져나갈 수 있다디만, 고저 이 자동차래 문제란.”
막 조수석 문을 열려던 버스터가 주변을 둘러보며 퇴로를 모색했다. 저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인다. 이제 잠시 후면, 이곳으로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들 것이다. 하지만 선우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총독부 근처에서 일을 벌일 때부터, 어차피 이 정도의 소동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범을 잡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법이다.
“자네 혼자 따돌리는 건 문제 없겠나?”
선우진이 묻자, 버스터는 코웃음을 쳤다.
“기까이 것도 못하갔네?”
“자, 그럼 이걸 갖고 잠시만 숨어있게. 여기서부터는 내가 맡을 테니. 경찰들을 다른 곳으로 몰고 가겠네.”
선우진은 버스터에게 그의 조끼와 양복을 넘기고, 자신도 서둘러 상의를 걸쳤다.
“삽한 짓 하디 말라우, 동무! 내래 오시라워서 기런 꼴 못 본단! 기러디 말고 날콰 함께 도망치자우!”
“위험할 것도 없고, 조바심을 낼 일도 없다네. 이 역시도 다 계획에 들어있던 바니까. 자, 잠시만 저곳에서 몸을 숨기게.”
선우진은 버스터에게 건물의 계단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버스터는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선우진의 말을 따랐다. 처음 만났을 때 원산의 일본 경찰들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던 모습이 기억난 까닭이다.
“수고 많았네! 좀 쉬고 곧 만나세.”
선우진은 가볍게 손까지 흔들어준 뒤,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부르르릉-! 패커드의 속도를 올리며 선우진은 한손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고, 넥타이를 바로 당겨 맸다. 그리고 얼굴의 땀을 훔쳐냈다. 슥-! 그렇게 가볍게 단장을 한 것만으로도, 그는 다시 완벽하게 말쑥한 귀공자로 돌아왔다. 룸미러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선우진은 오늘의 또 다른 준비물, 올드파 위스키 병을 집었다. 콸콸콸-! 병에 든 위스키의 절반쯤을 길 위에 뿌린 선우진은 한 모금을 들이켜 입 안 가득 술 냄새가 배도록 했다. 그렇게까지 하고 났을 때, 모퉁이를 막 돌아 나온 경찰들이 그의 자동차를 막아섰다.
“멈춰! 거기 자동차! 멈춰!”
네 명의 경찰이 호각을 불고 손전등을 흔들며 생난리를 친다. 선우진은 브레이크를 밟아 자동차를 멈춰 세운 후, 귀찮다는 듯 물었다.
“뭔가?”
“이 자동차, 어디로 가던 중인가?”
말단 경찰이 다가와 반말로 질문을 던지자,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온 그의 상관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아……! 하아……! 말조심해, 자동차를 좀 보고 이야기하라고!”
“에?”
말단 경찰은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 보니 이 자동차, 흔히 보는 닛산 릴라 트럭이나 쉐보레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크고 고급스럽다. 이런 차의 주인이라면 분명…… 대단히 큰 부자이거나, 고위 관료, 혹은 화족일 터다.
“저…… 존함이…….”
한층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단 경찰이 물었다. 선우진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사이온지 유우야다.”
“아……!”
말단 경찰과 그 상관은 긴장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들을 뒤따라온 두 명의 다른 경찰들도 ‘사이온지 유우야다…….’라고 수군댄다.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이름 정도는 익히 들어 잘 안다. 총독부를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사교계의 왕자. 게다가 대단한 거부. 사이온지 유우야 님이 주최하는 행사에 동원되었다가 돌아온 경찰들은 모두 그 넉넉한 인심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자랑을 늘어놓고는 했다. 특히 경마대회가 열릴 때면, 다들 자신이 차출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분위기였다.
“술을…… 드시면서 운전을 하신 겁니까?”
선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말단 경찰이 물었다. 한쪽 팔은 창밖에 걸쳐둔 채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위스키 병을 들고, 그저 한 손만으로 핸들을 쥐고 있는데……, 이 화족 남자는 조금도 저어하는 기색이 없다. 말도, 마차도, 만취 상태에서는 몰 수 없도록 되어있다. 자동차도…… 물론 아직 단속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안 되는가?”
선우진은 뻔뻔하게 되물었다. 당황한 말단 경찰은 눈을 껌뻑였다.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 사이온지 님이 혹시 사고라도 당하시면 곤란하기에 우려가 되어서…….”
“나는 멀쩡해. 별로 마시지도 않았고.”
선우진은 네 명의 일본 경찰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위스키 병을 기울여 한 모금을 더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술을 마시다 보니 문득 내 말들이 보고 싶어져서 경마장으로 가는 중이다. 그놈들을 깨워 함께 축음기로 하부노미나토를 들어야지. ……그보다 무슨 일인가? 이런 새벽에 길을 막고?”
선우진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로 물었다. 물론 그의 허리띠 안쪽에는 권총도 준비되어 있으나, 지금 이들을 상대로 그런 걸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 경찰들 역시도 선우진이 준비해 둔 대본의 엄연한 등장인물들이니 심리적으로 조종을 하는 게 먼저다.
“아니…… 그게…… 불온한 자들의 준동이 있다기에, 제압을 하기 위해서…….”
상관 경찰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선우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불온한 자들의 준동이라고? 총독부가 바로 지근인 이곳에서 말인가?”
“아, 아니! 지금 제압을 위해 출동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이온지 님.”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 총독 각하의 안위가 염려된단 말이네! 범인은 몇이나 된다던가?”
“그게……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예닐곱 명 이상이라고…….”
상관 경찰이 대답했다. 버스터에게 맞고 쓰러졌던 놈들이, 문책을 면하기 위해 용의자의 규모를 부풀려 보고한 것이리라. 물론 이 역시 선우진의 계산 내에 들어있던 바다.
“예닐곱……. 아아, 그러고 보니…….”
선우진은 진짜 주정뱅이처럼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드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쪽에서, 우르르 달려오는 한 무리와 마주 지나쳤지. 혹시 그놈들인가?”
버스터가 숨은 곳과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자, 경찰들은 반색을 했다.
“아, 그렇습니까? 소중한 정보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이온지 님! 그럼 저희는 이만……!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가 지목한 곳으로 달려가려는 상관 경찰에게 선우진이 말했다.
“아니, 아니! 그럴 것 없네! 자네들 타게!”
“……네에?”
난데없이 고급 승용차에 탑승하라는 명령을 하자, 경찰들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뒤덮였다.
“하, 하지만…… 저희는 지금 범인을 쫓아야만 하는…….”
“그러니까 타라는 거야! 내가……!”
술 취한 사람 특유의 과장된 태도로 핸들을 팡- 두드리며 선우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차로 따라잡아 주지! 제깟 놈들 달아나봐야 이제 소용없어! 뭘 하고 있나, 빨리 타지 않고! 이 사이온지 유우야, 그런 놈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단 말이다!”
“아……, 아, 그러면 실례를 무릅쓰고…….”
망설이던 상관 경찰은 부하 한 놈과 함께 패커드에 오른 뒤, 다른 두 부하들에게 걸어서 수색을 계속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너희 둘은 지원 병력을 기다려서 이 부근을 샅샅이…….”
부아아아앙-!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진은 엑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아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끼기기기긱-! 그런 뒤 곧바로 거칠게 자동차를 회전시켰다. 그 모든 동작을 하는 동안에도 오른손에는 여전히 위스키 병이 그대로 들려있다.
“어어어어! 어어!”
벽을 들이받을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가자, 조수석에 탑승한 상관 경찰이 공연히 비명을 지른다. 이런 고급차가 박살나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견책을 받게 될까 봐 두려운가 보다. 하지만…… 어떻게 말릴 수 있단 말인가?
“그놈들 중에 키가 꽤 큰 놈이 있었어!”
엉뚱한 길로 자동차를 몰아 비틀비틀 질주하며 선우진이 소리쳤다. 상관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이온지 님! 놈들에게 습격당한 순사의 말로는, 무리 중에서 대단히 장신의 늘씬한 남자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놈에게서 빼앗은 격문도 확보해두었습니다.”
“아마…… 나보다 조금 더 크지 않을까 싶던데……. 한…… 이 정도일까나.”
선우진은 잠시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정수리 위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아! 그렇게나 큽니까?”
상관 경찰이 중요한 정보라는 듯 입속에서 한 번 더 되뇐다. 이놈은 이제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그런 놈이니까 반드시 눈에 띌 테지. 잡히기만 해 봐라, 이 노옴……!”
한층 더 속도를 올리며 눈을 부릅뜨던 선우진이 문득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경황이 없어서 나 혼자 마시고 있었군. 이렇게나 수고하는 경찰들을 두고서. ……자!”
선우진은 위스키 병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듯 상관 경찰에게 내밀었다.
“한 모금씩 들이켜게! 피곤이 조금은 가실 거네!”
“아, 아니…… 그것은 좀…….”
상관 경찰의 얼굴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추격 중에 술을 마시다니, 그런 일을 해도 되는 걸까?
“내가 주는 술은 못 마시겠다는 겐가?”
선우진은 진정한 주정뱅이의 대사를 읊으며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 말 다음에도 상대가 거절을 하면 보통은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닙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크아!”
선우진의 기세에 눌린 상관 경찰은 황급하게 술병을 기울이고, 뒷자리의 부하에게도 넘겼다.
“아아, 이런 것도 좋군! 새벽에 자네들처럼 충직한 경관들과 범인을 추적하다니!”
선우진은 진심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그가 짜 둔 각본대로 착착 흘러간다. 사고 현장에서 경찰들과 직접 얽혀 대화를 나눴으니……, 이제 이 사건을 오늘 라디오 뉴스로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