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그놈이 또 왔습니다.2020.05.16.
“맞습니다. 이 만년필만 찾아낸다면 범인은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시바타가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도리질을 했다.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사이온지 선생. 무슨 집이나 자동차처럼 순찰을 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커다란 물건도 아니고.”
“하긴…… 그렇겠구려.”
선우진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만년필이라는 건 용의자를 특정하고 그의 거처나 사무실에 찾아가 수색을 해보지 않으면 찾아낼 수 없는 소품이다. 심지어 야밤에 청계천이나 한강에 몰래 버리면 영원히 감출 수 있을 만큼 크기도 작다. 하지만……, 선우진은 이미 문제의 그 만년필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의지도 가득하다.
“그러면 공개적으로 그 만년필의 제보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필적을 공개한다든가. 라디오 국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드릴 용의가 있소.”
선우진의 제안을 들은 시바타는 곤란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직은 이릅니다, 사이온지 선생. 그 만년필이 중대 증거라는 사실은 경찰 내에서조차 극소수의 간부들끼리만 아는 극비사항으로 처리중이올시다.”
“극비사항?”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범인이 소문을 듣고 미리 그걸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허어! 그런 것도 감안해야 하는군. 하지만 그렇게 극비로 처리한다면 문제의 만년필을 확보할 수도 없는 일 아니외까?”
선우진이 묻자, 시바타는 빙긋 웃었다.
“용의자를 체포하면서 소지품 일체를 압수하면 됩니다. 그중에서 만년필을 찾아내는 일은 차후에 은밀하게 진행할 게고요. 그리고 사실…… 필적이야 얼마든지 위조가 가능한 것이잖습니까.”
“일단 조선에 거주하는 내지인 중에서 공산주의자 전력이 있는 놈들은 계속해서 잡아들이는 중이니 잠시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스즈키 경시감이 끼어들어 공손하게 한마디를 보탰다. 선우진은 조금 의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런 혐의도 없이 무작정 체포해서 구금을 한단 말이오?”
“후후후. 죄가 없지는 않지요, 사이온지 선생. 빨갱이 전력이 있는 놈들이라니까요.”
스즈키가 음흉하게 웃으며 은밀한 어조로 속삭이자, 시바타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놈의 의견에 동조했다.
“지긋지긋한 공산주의자 놈들. 법만 아니라면 매일 몇 놈씩 잡아다가 패 죽일 텐데.”
“그렇군…….”
선우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 차별적이고 끔찍한 논리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총독이 듣는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있는 이 현실이 더욱 소름끼친다.
“스즈키 경시감이 저렇게 열심히 수사 중이니 아마 머지않아 꼬리가 잡힐 겁니다, 사이온지 선생.”
시바타는 나름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선우진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현재 경찰에서는 재조 공산주의자 일본인들 전체를 잡아들이고 있는 것이외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불온문서의 필체나 단어 사용을 감안할 때, 꽤나 인텔리라고 판단하여 일단 무식쟁이들은 다 제외시켰고…….”
시바타는 서류철의 마지막 장을 뒤적거리며 거기에 적힌 내용을 읽어내려 갔다.
“……그래서 현재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는 계층은 대학생들입니다. 교수의 연구실에서 종이를 훔쳐내어 썼다고 하면, 고급지로 불온 문서를 제작한 정황과도 일치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마도 학생들 중 일부가 내지에서 건너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포섭된 것일 테지요. 그 다음은…… 내지에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본토인들 중에서 공산주의 전력이 있는 자들.”
전혀 엉뚱한 곳에서 범인을 찾고 있지만, 선우진은 감탄한 어조로 녀석을 추켜세웠다.
“경이롭구려. 수많은 고려 사항들을 지켜가면서도, 불과 한나절 만에 거기까지 추리가 진행되었다니…….”
“그야…… 이런 것이 늘 우리가 하는 일이니까요.”
선우진의 칭찬을 들은 시바타는 이번에도 ‘우리’라고 하며 은근 슬쩍 자신을 끼워 넣었다.
“자! 이제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쯤 하고 우리는 연설 녹음을 시작하지, 사이온지 군. 자네의 충심과 열의는 잘 알지만, 그 일은 스즈키 경시감에게 맡겨 두세나. 이 사람이 잘할 게야!”
시가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한조가 손뼉을 쫙 치며 의욕적으로 나섰다.
“저번의 그 연설 레코드 판 말이지. 평이 엄청나게 좋더군. 듣다가 감동해서 울었다는 사람들도 많았고, 어쨌든 순식간에 100장이 다 팔려버렸어! 나중엔 가격을 1,500원으로 올렸는데도. 허허허허! 저게, 저게 아주 멋진 물건이더라니까!”
한조는 만족한 표정으로 이동식 녹음기를 가리켰다. 녹음기의 주변에는 한조가 주문했던 대로 옻칠에 도금까지 한 최고급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마치 이 자리에서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듯이.
“저 역시 이런 핑계로 각하의 연설을 매달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무한한 행운이자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허나 동시에 이런 때에까지 각하를 귀찮게 해드리는 것이 송구하기도 하군요. 불온한 무리들을 일망타진하는 것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선우진이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짓자, 한조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게 아니야, 사이온지 군! 오히려 보란 듯이 더 열심히 연설을 들려줘야지. 이런 위기에서야말로 진정 배짱이 드러나는 법이라네! 그깟 놈들에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만 반도 내의 내지인들과 조선인들이 나를 믿고 따를게 아닌가!”
“대단하십니다. 저로서는 생각도 못할 호기로운 태도. 그럼에도 역시 오봉 행사는 축소하시는 편이…….”
선우진이 슬쩍 미끼를 던지자, 한조는 곧바로 거기에 낚여들었다.
“안 돼, 안 돼! 축소도 없고, 생략도 없다! 오봉 행사는 모두 원래 계획대로 성대하게 진행될 것이야! 그래야만 해! 이 야마나시 한조가 총독으로 부임한 이래 처음으로 맞는 오봉인데, 시시하게 보낼 수야 없지! 교토의 다이몬지에 지지 않을 만큼 성대하게 큰 불놀이도 벌일 거고……. 오늘 라디오 연설에서 그 부분을 확실하게 밝혀줄 작정이다!”
말은 이렇게 대범한 척하지만, 한조는 분명 오봉 전에 범인들이 검거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만약 그가 정말로 어젯밤의 소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총독부 청사 정문에 저처럼 많은 병력을 배치했을 리가 없다. 어쨌거나 혼란을 원하는 선우진에게 있어, 한조의 이런 허세는 반갑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그가 다시 의견을 철회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선우진은 다시 한 번 그의 확언을 유도했다.
“그러나…… 두 가지 큰일을 병행하기에는 경찰 인력이 부족하지 않을는지…….”
“비상을 걸었으니, 지방의 경찰들까지 모두 철야작업하면 그만이야! 잠시 반짝 힘들겠지만 그래봐야 보름 정도만 고생하면 끝나는 거라고! 그러니 자네도 12일에 열리기로 되어있는 오봉경마대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예정대로 치르게나. 경찰들도 팍팍 동원해서 쓰고! ……어때? 내 말이 맞지 않나, 스즈키?”
한조가 스즈키 경시감을 돌아보며 묻자, 스즈키는 곧바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목청껏 외쳤다.
“하잇! 총독 각하의 교시를 받들어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됐군.’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국경지대를 포함한 조선 전역의 모든 경찰들이 차출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고, 그만큼 김구가 안전하게 상하이로 돌아갈 수 있는 확률도 높아졌다. 사람은 체력적 한계에 봉착하면 매사 허술해지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말이지, 사이온지 군. 나는 공식적이지 않은 경로의 인력들도 확보하고 있다네. 이번 일에서는 어쩌면 그들이 더 유용할는지도 몰라. 그…… 소위 우익 세력이라고 부르는 조직들 있지 않은가.”
‘소위 우익 세력’이라는 말을 할 때, 한조는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다는 듯 눈을 찡긋 해 보였다.
‘물론 잘 알지, 네놈이 조선 각지의 야쿠자들과 불량배들을 꽤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은…….’
한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대꾸했다. 이 돈에 미친 늙은이에게 배신당해,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목숨을 잃은 야마다의 얼굴도 눈앞에 스쳐 지난다.
“그자들이 좀 거칠기는 해도, 빨갱이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때려잡지. 죽창이랑 몽둥이, 일본도 정도만 갖고도 말이야. 게다가 선동도 제법 잘한다네. 예전 관동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에도 내가 뒤에서 몰래 그런 녀석들을 부려가지고, 빨갱이들과 불령선인 놈들을…….”
관동대진재 당시의 끔찍한 범죄에 대해 뭔가 털어놓으려던 한조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맨 정신에 그런 이야기는 좀 그러니, 나중에 술자리의 여흥을 위해 미뤄두세. 어쨌거나 그런 조직도 있으니 자네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세, 사이온지 군. 이제 녹음 기술자들을 들이게. 큼! 큼!”
선우진을 안심시킨 한조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마이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술자들이 들어와 녹음 준비를 하는 동안, 선우진은 그를 향한 혐오감을 미소 뒤에 감춘 채 부드럽게 말했다.
“한조 총독 각하의 용단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오며 이번에는 새로운 즐거움을 하나 선사해 드리고자 준비해보았습니다.”
소개를 마친 선우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연미복까지 본격적으로 갖춰 입은 트럼펫 연주자 두 명이 각자 악기를 쥐고 들어섰다.
“음, 뭔가? 이자들은?”
한조가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선우진은 여유 가득한 태도로 대꾸했다.
“총독 각하의 첫 번째 정기 연설을 수십 번 반복해서 들어보던 중, 문득 제가 의전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지요.”
그가 손짓을 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트럼펫 연주자는 힘차게 팡파르 연주를 시작했다. 빰빠바바- 빰빠바- 빰빠바바-! 빰빠바바바바- 빠아아-! 제법 웅장한 팡파르가 총독 집무실 내에 크게 메아리치는 걸 들으며 한조의 입가에는 히죽 웃음이 번져 나왔다.
“오오! 좋구먼! 이제야 뭔가 좀 격식이 갖춰진 느낌이야! 이 반주를 연설 직전에 담는다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역사적인 첫 번째 연설부터 이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제 불찰입니다.”
“뭘 그런 걸 신경 쓰나, 사이온지 군! 해 보면서 차차 갖춰나가는 것이지! 어쨌든 이건 꽤 괜찮군. 그런데 저자들도 여기에 대고 연주를 하는 것인가?”
한조가 자신의 마이크를 들어보였다. 선우진은 그가 좋아할 만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 마이크는 처음부터 총독 각하 전용으로 사용되기 위해 최고급으로 특별주문된 것입니다. 연주는 저 기계에서 별도로 녹음이 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중요하고 또 민감한 이야기였음에도, 시바타는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스즈키 경시감과 수사에 관한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으나, 애초에 그는 녹음기의 작동원리와 같은 기술적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래? 이게 또 특별제작된 것이로군. 어쩐지 내 목소리가 또렷하게 잘 들린다 했더니…….”
한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마이크를 유심히 살피는 동안, 준비를 모두 마친 기술자들은 새 음반을 올리고 기록용 철침을 걸쳤다. 빵빠바바-! 빵빠빠-! 빵빠바바-! 힘찬 나팔 소리가 제법 웅장하게 울리고 난 뒤, 한조는 마이크를 꽉 움켜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에…… 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다! 지금부터 정기 연설을 시작할 터이니 귀담아 잘 듣도록! 근래에 나를 해하려고 하는 불온한 자들이 작당을 벌이는 모양인데, 나는 그깟 놈들 조금도 두렵지 않아! 나는 달아나지도 숨지도 않는 사나이란 말이다! 이제 곧 그놈들을 일망타진해서 여생을 철창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주마! 어쩌면 이 연설이 나가는 동안에 이미 몇 놈쯤은 잡혀 들어왔을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주변 사람들도 생각을 잘 하고 처신하도록! 죄인을 감춰준 자는, 그 역시도 무시무시한 처벌의 대상이 된단 걸 잊지 않는 게 좋을 게야! 그 문제는 그 문제고…… 이제 곧 오봉인데, 내가 느끼기에는 오봉이 예전 같지 않아.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지……!”
소비에트 일본 혁명연합에 대한 경고로 시작한 라디오 연설도 역시,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지…….’로 이어졌다. 첫 연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지루하고 장황한 잔소리를 들으면서 선우진은 시바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아, 그리고…… 시바타 비서관과 만날 자리를 한번 주선해주었으면 하는 사업가가 있는데…….”
“음? 그렇다면 오늘 함께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직감적으로 돈 냄새를 맡은 시바타의 표정이 밝아졌다. 천하의 사이온지 유우야가 직접 소개를 해주겠단 걸 보면 결코 규모가 작은 사업이 아니라는 의미이고, 그렇다는 건 시바타 자신에게도 꽤나 짭짤한 뒷돈이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므로.
“허나 오늘은 오전의 그런 일도 있었고, 더구나 총독 각하의 연설 녹음까지 예정된 터라…….”
선우진이 귀엣말로 대답하자, 시바타는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총독 각하께서는 이미 저리도 익숙하신 것을. 그러면 내일은 어떻습니까? 아니, 당장 오늘밤에도 잠깐은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요정으로 가서 만날까요, 사이온지 선생?”
“그러면야 좋을 테지만, 내 일정이 영 여의치 않습니다그려. 경마대회 준비 문제도 있고 해서 며칠 정도는 미뤄야 하지 싶은데.”
선우진이 슬쩍 한발 빼는 태세를 보이자, 시바타는 애가 타는지 눈을 깜빡였다.
“다음부터 그런 일이 있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동행해 주십시오, 사이온지 선생. 각하께서 녹음하시는 동안에라도 비서실로 모시고 가, 따로 일을 처리하면 그만입니다. 사업가의 급한 마음이 방해를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옳지.’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비서실로 모시고 가겠다는 말이 나왔으니 이제 한조를 날릴 계획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처음에는 이병길부터 시작해서 차차 구로즈미가 준비해 둔 허수아비까지 녹음하는 날마다 데리고 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물론 선우진 자신이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일시에도 몇 번 정도는 비슷한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겠지만, 그쯤이야 조금 귀찮을 뿐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단 말이다! 우리는 무려 20세기를 살고 있어! 나만 해도 이 녹음 기계와 라디오라는 신문물을 이용해서 이렇게 연설을 하는 변화를 모색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 연설을 듣는 조선의 제군들은, 내선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거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때의 일이 생각나는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
선우진과 시바타가 멀리 물러서서 귀엣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한조는 마이크를 움켜쥔 채 아무 의미도 없는 잔소리를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 총독부에서의 용건을 마친 선우진은 프린스 호텔에 들러 안경 남자와 버스터를 안심시킨 뒤,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인천으로 돌아왔다.
“도지마.”
자택의 서재에 들어선 선우진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도지마를 불러 100원 지폐 다섯 장을 건넸다.
“후루타 양품점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만년필을 종류별로 전부 두 개씩 사오도록 해라.”
어차피 후루타 양품점에서는 수제 최고급품은 팔지 않으니, 500원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네, 도련님.”
왜 그렇게 많은 만년필이 필요한 것인지 물어볼 법도 하지만, 도지마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명령을 따랐다. ‘아니키’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는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아주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디…….”
서재에 홀로 남은 선우진은 책상 앞에 앉아 양복 안주머니에서 문제의 만년필을 꺼냈다. 이것으로 누군가를 잡으려면, 일단 몸체와 뚜껑부터 적당한 새것으로 갈아 끼워야 한다. 자개에 금까지 화려하게 장식된 이런 호화로운 모양이어서는 너무 눈에 띌 테니 곤란하다. 끼릭-! 끼릭-! 선우진은 압지를 이용하여 만년필에 남아있던 잉크를 모두 빨아들인 후, 촉이 달린 손잡이를 분리해냈다.
“이건 사포로 문질러 지워버리면 될 듯하고…….”
그는 만년필촉의 상단에 각인되어 있는 제조사 명과 일련제조번호를 조명에 비춰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조금만 조사를 해보면 어디에서 만들어진 물건인지는 대번에 밝혀지겠지만, 일련번호가 없이는 언제 어디에서 누가 구입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선우진과의 연관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 정도면 누명을 씌우기에 충분한 조건이 완성된다.
“분해한 김에 일단 깨끗이 닦아두는 편이 좋겠군.”
선우진은 장갑을 낀 채 만년필의 손잡이와 촉, 그리고 잉크가 들어가는 카트리지까지를 몇 차례나 꼼꼼하게 닦았다. 그렇게 준비 작업을 마치고 난 뒤, 차 한 잔을 청해 마실 때쯤 자동차를 타고 나갔던 도지마가 돌아왔다.
“도련님, 후루타 양품점에서 파는 물건은 이 정도뿐이었습니다.”
녀석은 종이봉투에서 수십여 개의 만년필을 하나씩 공손하게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선우진에게는 크기도, 모양도, 제조사도 다른 이 여러 개의 만년필 중에서 자신이 망가뜨린 촉에 맞는 몸체와 뚜껑을 고를 일만 남았다.
“저…… 그런데, 도련님. 하시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되는 건 잘 알지만, 이건 아무래도 말씀을 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문을 닫고 나가려던 도지마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뭐냐, 도지마.”
선우진이 고개를 들고 묻자, 도지마는 목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지금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예전 그…… 데츠잔과 도조라는 놈의 일행을 보았습니다. 그 왜…… 지난 봄 한강에서 만난 적이 있던…….”
“음?”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선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데츠잔의 일행이라고 하면 이엽회 놈들이 아닌가. 그런 놈들이 인천에서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건, 선우진에게 별로 유쾌하지 못한 소식이었다.
“그놈들의 일행이라고 하면 누구를 말하는 거냐, 도지마?”
혹시 시치헤이가 구로즈미의 심부름을 온 것인가 싶어 묻자, 도지마는 자신의 머리 부분을 짚었다.
“저는 이름은 모릅니다만…… 이렇게 정수리가 뾰족하고 콧수염을 기른…….”
“아아, 알겠다. 무타구치 렌야 녀석을 말하는 거군. 메구미 양에게 매혹되었던…….”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도지마가 분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네! 지금도 그…… 메구미 아가씨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엄연히 도련님께서 만나는 분인데, 감히 그따위 놈이 주제도 모르고 꽃다발까지 사와서는 집적대다니…….”
“무타구치가 메구미 양과?”
새 만년필의 몸체와 펜촉을 분리하고 있던 선우진의 손이 우뚝 멈췄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도지마. 어디에서 그놈을 보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