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 정산. (256/459)

256. 정산.2020.05.23.

16550738920746.jpg“그, 그러지 마시오, 사이온지 사장!”

긴장감으로 얼굴이 굳은 무타구치 렌야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육군 소좌라는 자신의 직위를 감안하면 대범하게 맞서 제압하는 것이 옳겠으나, 저 자의 손에 들린 몽둥이가 너무 굵다. 아마도 곡괭이자루나 뭐 그런 것으로 보이는데, 저걸로 자칫 머리라도 잘못 맞으면……,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16550738920746.jpg“그걸 내려놓으시오! 우리 서로…… 후회할 짓은 하지 맙시다!”

딴에는 압박을 준다고 한 말이었는데, 선우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16550738920755.png“후회?”

선우진은 얼음처럼 냉정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16550738920755.png“지금 자네에게 교훈을 주지 못한다면, 그게 후회스러울 테지.”

그런 뒤 그는 천천히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몽둥이로 벽을 두들기면서 무타구치와의 거리를 줄였다. 탁-! 타악-! 타악-! 단단한 나무로 콘크리트 벽을 때리는 소리가, 창고 안에서 메아리치며 무타구치의 신경을 긁는다.

16550738920746.jpg‘젠장…….’

무타구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 사이온지라는 놈의 무표정함에 소름이 끼쳤다. 무섭다.

16550738920746.jpg‘어떻게 저런 섬뜩한 낯빛이 나오는 거지? 이놈은 그냥……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부자 한량일 뿐이잖아! 화족 놈들은 사람을 기죽이는 법에 대해 가정교육이라도 받는 건가?’

그렇게 계속 뒷걸음질을 치던 무타구치의 발이 뭔가에 턱-! 걸렸다. 무타구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 길고 긴 창고의 끝까지 몰려 벽의 선반에 닿은 것이다.

16550738920746.jpg‘후우……! 후우……!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무타구치는 진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신이 고를 수 있는 방법들과,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고민했다.

16550738920746.jpg‘맞서 싸워야 하나……?’

가장 먼저 무타구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 자신 역시 뭔가 대적할 만한 무기를 집어 들고 분노에 눈이 돌아간 저 화족 놈과 맞대결을 펼치는 방안이었다. 창고인 만큼 무기로 삼을 수 있는 각목도 사방에 널렸다. 사실 전력으로 맞싸운다면 질 것 같지는 않다고…… 무타구치는 믿고 있었다. 자신은 엄연히 훈련받은 군인이고, 상대는 그저 부모를 잘 만난 부자 귀족 샌님일 뿐이니까. 저렇게 호리호리하고 긴 팔다리에서 뭐 대단한 힘이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16550738920746.jpg‘그렇게 하다가 만약 저놈의 대갈통이라도 깨뜨리게 되면 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무타구치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육군 고급 장교가 치정문제로 화족과 난투를 벌여 큰 부상을 입혔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리는 순간, 그의 군 경력은 완전히 끝이 난다. 게다가 그 피해자는 일본 막후의 최대실력자 사이온지 긴모치의 피붙이.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미래가 펼쳐질 것인지는, 깊게 생각을 해보지 않아도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자신이 데츠잔 대좌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메구미에게 접근 중이었다는 점이었다. 다카하시 사장을 죽인 진범이 따로 있다는 둥 이엽회 내부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흘렸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데츠잔은 분명 죽음으로 그 책임을 물게 하려 들 터다. 그것이 이엽회의 엄연한 규칙이므로.

16550738920746.jpg‘맞서 싸우는 건 안 돼. 그랬다가는 정말로 뒷감당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무타구치는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설득과 협박, 두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무타구치는 협박 쪽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16550738920746.jpg“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빨리 선반에 팔을 뻗은 무타구치는 일단 손에 집히는 대로 긴 각목을 들었다.

16550738920746.jpg“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요, 사이온지 사장!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에서는 정식 교과과정에 검도를 포함시키고 있소! 내가 몽둥이를 쥐면 당신은 상대가 안 돼!”

무타구치는 각목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검도자세를 취하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상대의 저 굵은 몽둥이와 비교하자면 자신의 이 각목은, 내구성 면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다.

16550738920755.png“전력으로 덤벼라, 소좌. 나 역시 사정을 봐줄 마음은 없으니까.”

선우진이 대답했다. 정말로 조금도 봐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 서늘한 목소리에 가득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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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채 2.5미터 남짓. 이제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협박까지도 실패한 무타구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선우진의 발에 집중했다. 아무리 봐도 상대는 검도에 문외한. 그렇다면 이 싸움의 우위는 엄연히 자신이 쥐고 있다. 물론 무타구치 본인도 육군성에서만 근무해온 전형적인 관료식 군인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자들보다야 훨씬 나을 거다.

16550738920746.jpg‘좋아……. 저놈이 내 머리를 후려치려고 저 몽둥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을 노리자. 이 각목으로 놈의 손을 때려 무기를 놓치도록 하고, 유도로 업어 친 다음 바닥에 눕혀 조르기로 제압하면…….’

무타구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나름의 각본을 써내려갔다.

16550738920746.jpg‘차라리 내가 먼저 불시에 겁을 줘서 놈의 손이 위로 향하게 만들자.’

제법 그럴듯한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생각에, 무타구치의 입가에는 모처럼 엷은 미소까지 지어졌다. 하지만 그가 모르고 있는 아주 중요한 변수가 하나 존재했다. 그건 바로 선우진이 가진 도박사의 눈과 손이다. 엄청나게 빠른.

16550738920746.jpg“대체 왜 이러는 거요, 사이온지 사장? 당신 정도 되는 남자라면 따르는 여자도 수없이 많을 텐데…… 그깟 시시한 여자 한 명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얼굴을 붉혀야 하겠소? 응? 뭐라 대답을 좀 해 보……!”

질문 공세를 퍼부으며 선우진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던 무타구치가 별안간 기합과 함께 각목을 내질렀다.

16550738920746.jpg“하아앗-!”

목표는 선우진의 얼굴. 물론 진짜 타격을 주려는 목적은 아니고 선우진이 움찔해서 몽둥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 손목을 내리치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빠악-! 선우진은 다짜고짜 몽둥이를 사선으로 내리 휘둘러 무타구치의 허벅지를 갈겼다. 오른손목의 힘만으로 빠르고 가볍게……! 마치 처음부터 가짜공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코 바로 앞까지 날아온 각목에는 관심조차 없다.

16550738920746.jpg“까으윽!”

허벅지가 터지는 것 같은 고통에 무타구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때, 선우진의 두 번째 공격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16550738920746.jpg“이익!”

겁이 덜컥 난 무타구치는 각목을 꼭 쥔 채, 전력으로 몽둥이를 맞받아쳤다. 상대의 손목을 노리느니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이미 뇌리에서 깨끗이 지워진 지 오래다. 저기에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죽는다! 빠각-! 선우진의 몽둥이와 마주 부딪친 순간, 무타구치의 각목은 허무하게도 절반으로 동강나 버렸다. 날카로운 파편들을 튀기며 맥없이 부러져나가는 각목의 단면이 눈에 들어오자, 무타구치의 심장은 내장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무기가…… 사라졌다.

16550738920746.jpg“으아아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무타구치는 미친놈처럼 울부짖으며 선우진을 향해 각목의 나머지 부분을 내던졌다. 허나 이번에도 선우진은 아주 가볍게 몸을 틀어 그걸 피하고, 몽둥이를 호되게 내리쳤다. 뻐억-! 고시엔의 포수 미트에서나 날 법한 엄청난 소리가, 무타구치의 어깨에서 터져 나온다.

16550738920746.jpg“끄아아아!”

무타구치는 째지는 울음소리를 내면서도 일단 선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몽둥이! 저 원수 같은 몽둥이만은 놓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죽는다!

16550738920746.jpg“으얍!”

선우진의 팔목을 움켜쥔 무타구치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몽둥이를 잡아 비틀었다. 타악-! 데구르르-! 잠시의 몸싸움 끝에 마침내 문제의 몽둥이는 벽을 때린 뒤, 멀리 튕겨졌다. 눈엣가시를 해치워버린 무타구치의 가슴 속에서는 한없는 희열의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16550738920746.jpg“으하하하하!”

무타구치는 체중을 실어 선우진을 밀어치고 재빨리 몽둥이가 굴러간 쪽으로 달려갔다.

16550738920746.jpg‘이제 저걸로 네놈을 때려주마! 어디 얼마나 아픈지 네놈도 한번 맞아봐라! 뒈질까 봐 겁이 나서 차마 머리는 못 때리겠지만, 허벅지 정도는…….’

무타구치는 광기어린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몽둥이를 집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몽둥이를 잡은 그의 손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6550738920746.jpg“헉!”

무타구치는 신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어느새 그의 뒤를 따라온 선우진이 새 각목을 치켜들고, 성난 호랑이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서있었다. 깜빡했다. 이곳은 창고 내부. 나무 막대기쯤은 사방 어디에도 널려있다는 것을…….

16550738920746.jpg“이 새끼!”

두려움에 휩싸인 무타구치는 본능적으로 선우진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따악-! 선우진이 내리친 각목이 그보다 앞서 무타구치의 손등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16550738920746.jpg“아윽!”

뼈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 무타구치는 그만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떼구르르-! 통제를 잃은 몽둥이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해 창고 반대편까지 튕겨져 날아간다. 무타구치의 시선이 그 모습을 끝까지 다 쫓기도 전에, 선우진은 재차, 삼차 사정없이 매질을 퍼부어댔다.

16550738920755.png“그깟 시시한 여자 한 명이라고?”

세차게 각목을 휘두르던 선우진이 잠시 손을 멈추고 분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16550738920755.png“여자가 아니라 고작 1원 한 푼이라 해도, 내 것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걸 알게 해 주마!”

사납게 언성을 높이던 선우진은 다시 각목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16550738920746.jpg“으아아아!”

무타구치는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보려 머리를 감싼 채 허공을 향해 발차기를 날려보지만 그래봐야 다리에 각목의 공격이 꽂힐 뿐이다.

16550738920755.png“그 어떤 것이라도, 내가 주기 전까지는!”

빠악-!

16550738920755.png“내 것에!”

빠악-!

16550738920755.png“손을 대면!”

빠악-!

16550738920755.png“용서 않는다!”

빠악-!

16550738920755.png“그것이 사이온지 가문의 남자니까!”

한 마디에 한 대씩, 선우진은 마치 연인을 강탈당한 바람둥이 화족처럼 교만한 말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감히 자신들이 죽인 피해자의 딸에게 접근한 이 뻔뻔하고 교활하고 또 사악한 놈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엽회 놈들에게 경고를 보내야 한다는 의도도 있었다. 만약 무타구치의 이런 일탈을 적당히 넘어가준다면, 놈들은 차차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남자를 그저 만만한 돈줄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빠각-! 그렇게 사정없이 무타구치를 강타하던 도중, 각목이 뚝 부러져 버렸다. 선우진은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피 묻은 각목 조각을 던져버리고, 바로 옆에 놓여있던 밀걸레자루를 집었다.

16550738920746.jpg“그…… 그만! 그만! 이제 알아들었으니까 그만둬! 제발!”

바닥에 쓰러진 무타구치가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울부짖었다. 녀석의 손가락이 새파랗게 질린 것으로 보아 어딘가 뼈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지만, 선우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16550738920755.png“아직도 건방을 떠는군.”

밀걸레자루의 끝을 두 손으로 움켜쥔 선우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16550738920755.png“언제 교육이 끝날 것인지는 내가 정한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선우진은 다시 크게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단 손을 댔으면, 다시는 덤벼들 엄두조차 들 수 없도록 혹독하게 매운 맛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빠악-! 빠악-! 빠악-! 몇 분이나 더 모질게 계속되던 매타작은 밀걸레자루마저 부러진 뒤에야 끝이 났다. 투웅-! 선우진은 동강난 자루를 내던져버리고, 바지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16550738920746.jpg“끄으으응……!”

그가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무타구치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의식을 잃거나 한 건 아니다. 인정사정없이 내리치는 척했지만, 머리나 갈비뼈를 강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6550738920755.png“후우우……!”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선우진은, 무타구치를 내려다보며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16550738920755.png“엄살 부리지 마라, 무타구치 소좌. 이 정도로 끝내준 걸 고맙게 여겨.”

16550738920746.jpg“끄으으으! 그게……! 할 말이냐, 이 새끼!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아으윽!”

절규하는 무타구치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 배어있다. 하긴 들떠서 찾아온 길에 손등과 팔, 그리고 어쩌면 종아리까지도 골절이 되었을 상황이니 나름대로는 분하기도 할 일이다. 이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돌아볼 능력조차 애초부터 결여된 것들이 아니던가.

16550738920755.png“아직 제대로 가르침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군.”

선우진이 또 다른 몽둥이를 찾기 위해 선반을 뒤적이자, 무타구치는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16550738920746.jpg“히익! 자, 잠깐만! 그만! 제발 그만하시오! 사이온지 사장,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끄윽!”

선우진의 바짓단이라도 잡아보려고 손을 뻗던 무타구치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부러진 팔의 지독한 고통 때문에 그의 손가락은 심하게 경련하듯 떨렸다.

16550738920755.png“병원에는 보내주마. 치료비는 내가 지불할 테니, 부담 갖지 마라.”

16550738920746.jpg“으으음……! 후우우……!”

원망스레 눈을 흘긴 채 숨을 몰아쉬는 무타구치에게 선우진은 치명적인 결정타를 날렸다.

16550738920755.png“데츠잔 대좌에게도 설명을 해두겠다. 치료 때문에 복귀가 늦어지는 문제 역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소좌.”

16550738920746.jpg“……안 돼!”

무타구치는 눈을 부릅뜨고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했다.

16550738920746.jpg“데츠잔 대좌에게는 알리지 말아주시오, 사이온지 사장! 남자끼리……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끝난 것 아니오? 이, 이렇게 하고도 분이 아직 안 풀렸소?”

무타구치는 시퍼렇게 퉁퉁 부은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16550738920746.jpg“제발! 여기에서 끝을 내주십시오! 이런 일을…… 이엽회에까지 알리면 나는……! 다카하시 양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공식적으로 나는 캄차카 반도 수색 임무 중이란 말입니다! 크흐흑!”

고개를 숙인 채 애원을 하던 무타구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딴에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고백하는 모양새였지만, 선우진은 이미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바다. 데츠잔처럼 야심이 가득한 인간이, 이런 멍청이를 보내서 메구미에게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청혼을 하도록 계획을 꾸밀 리가 없다. 이 무타구치라는 놈은 오늘 이렇게 지독한 봉변을 당했다는 걸, 그 어디에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하리라.

16550738920755.png“……좋아.”

한동안 무타구치가 고개를 처박고 있도록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던 선우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0738920755.png“나도 남자다. 내가 매질을 한 놈 정도는 책임을 져 줘야지. 그런 것이 교육이니까.”

16550738920746.jpg“정말입니까, 사이온지 사장?”

무타구치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반색을 한다. 선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38920755.png“그래. 하지만 너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에 새겨라. 만약 오늘 이후 내 허락 없이 네놈이 인천을 또 기웃거린다면…….”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던진 후 구두로 비벼 끈 선우진이, 하인을 대하듯 섬뜩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16550738920755.png“그때는 이 정도 가벼운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

  *** 무타구치를 병원에 보낸 뒤, 선우진은 다카하시 사장의 저택으로 향했다.

16550739018216.jpg“사이온지 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밤이 늦을 때까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카하시 사장의 집사 겸 운전기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우진을 다시 보게 되어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그 진심어린 감정이 말투와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16550739018216.jpg“주인님께서 건재하셨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집사는 회한이 가득한 어조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 역시 메구미처럼 눈에 띌 만큼 초췌해 보였다. 다카하시 사장이 사고를 당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건만, 그 짧은 사이 정말로 많은 풍상을 겪은 얼굴이다. 선우진은 집사의 등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16550738920755.png“들어갑시다.”

16550739018216.jpg“……사이온지 님! 오셨군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다카하시 사장의 부인이 반갑게 선우진을 맞으며 소매를 붙잡는다.

16550739018216.jpg“저기…… 그 무타구치 소좌라는 분과의 관계는 오해하지 마셔요. 제가…… 권한 것이니, 메구미에게는 화를 내지 마시고 그냥 다시 예전처럼 교제를…….”

16550739044743.jpg“어머니!”

다카하시 부인이 초조하게 아까의 일에 대해 해명하려 하자, 메구미가 나서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16550739044743.jpg“사이온지 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려고 오신 게 아니라니까요!”

16550739018216.jpg“아니…… 그래도 오해가 있으면 안 되잖니. 청춘 남녀가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가 주책 떨어서 일이 틀어지면 너무 아까우니까……. 이렇게 반듯하고 좋은 분이신데, 너를 귀애하셨고…….”

다카하시 부인은 겸연쩍어하면서도 딸을 위한 변명을 계속했다. 메구미와 꼭 닮아 웃음이 많았던 그녀이건만, 이제는 얼굴에서 여유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는지, 눈가에 깊이 팬 주름이 말해주고 있었다.

16550738920755.png“저야말로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다카하시 부인.”

선우진은 다카하시 부인을 진정시킨 뒤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16550738920755.png“그런데, 지금은 일단 재정과 관련한 서류부터 같이 훑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두 분을 위한 조언을 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16550739018216.jpg“아유……. 그게……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보여드리기가 너무 부끄럽네요.”

다카하시 부인은 한 손으로 볼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별다른 고생 없이 오로지 부자 남편만을 믿고 살아온 그녀에게, 지금의 이 상황은 분명 감내하기 어려운 위기. 무엇을 어찌해야할 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나서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는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16550739018216.jpg“이쪽입니다, 사이온지 님.”

집사가 넓은 저택의 내부에 위치한 서양식 건축물 쪽으로 선우진을 안내했다. 입식 구조의 넓은 서재 안에, 두툼한 서류문서들이 잔뜩 놓여있다.

16550739018216.jpg“재무를 담당하던 비서들이 다들 그 사고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그래도 영 부족해서……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큼직한 테이블 위에 정리된 서류들을 가리킨 집사가, 금고의 문을 열며 한마디를 보탰다.

16550739018216.jpg“이 안에 든 것은 주인님께서 생전에 아끼시던 문서들입니다. 친척들이 열지 않으면 죽인다고 제 목을 조르기도 했지만, 저는 끝끝내 버텼습니다.”

16550738920755.png“장하오. 다카하시 사장께서도 분명 고마워하고 계실게요.”

선우진은 집사를 칭찬해 준 뒤, 금고 내부의 서류들을 테이블로 옮겼다. 그중 맨 위에 위치한 것은, 중화민국 대원수의 직인이 찍힌 봉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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