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 승낙. (271/459)

271. 승낙.2020.07.15.

16550743550422.png“이놈들에게 기회라…….”

시바타는 노덕술과 강용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16550743550422.png‘김덕기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이들을 풀어줘도 되는 것일까?’

시바타는 그 부분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조선인 경찰들에게 윤우의 수사의 주도권을 넘기고 싶은 유혹도 강하게 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책임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다. 물론 만약 운 좋게 김구를 검거할 경우, 그때의 공은 모두 자신이 차지할 요량이지만.

16550743550432.png“이병길 후작에게서 믿을 만한 자들이라고 보증을 받아두면 되지 않겠소이까?”

선우진이 또 다른 유혹의 제안을 흘렸다. 시바타에게는 너무도 달콤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조선 후작이 보증을 해서 풀어주었다고 하면,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리하면 이병길을 김덕기 사건의 증인으로 확보하는 양수겸장도 된다.

16550743550422.png‘사실 윤우의라는 이름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큰 사건이 아니기도 하지…….’

시바타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배후에 김구만 엮이지 않았어도, 이건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할 일이다. 그저…… 요주의감시 대상이었던 지방의 불령선인 한 놈이, 결국 사고를 치기 위해 행방을 감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총독부에게 책임이 돌아갈 일도 없고,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 까닭도 없는 아주 미미한 사건이라고나 할까.

16550743550422.png‘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김구에 대해 똑바로 고해바치지 않은 이놈들의 탓으로 몰면 되는 것이고……. 아니, 아예 이놈들이 김구와 한패였다고 뒤집어씌워도 좋겠군.’

생각을 정리한 시바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43550422.png“하긴 아무래도 같은 조선인이니, 조선인에 대해 제일 잘 알 테지. 그놈이 숨을 만한 곳이라든가…….”

1655074355045.jpg“허억!”

갑작스레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노덕술과 강용남은 제자리에 납죽 엎드려 머리를 땅에 박았다.

16550743550455.png“하,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기회를 주신다면, 대일본제국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윤우의 체포를 저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윤우의 놈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점은 마음에 조금 걸리지만 그 정도 문제쯤이야 그리 애먹지 않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노덕술과 강용남은 생각했다. 어차피 경성은 좁다. 이렇게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당장 내일 오전이면 전국수배가 떨어질 텐데, 그렇게 되면 윤우의는 움쭉달싹도 할 수 없는 신세다.

16550743550422.png“네놈들, 정말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시바타가 두 조선인 경찰을 굽어보며 물었다. 노덕술은 살짝 고개만 들어 재차 간청했다.

16550743550455.png“저희는 이미 수백이 넘는 불령선인들을 검거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확실히 처리해 보이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시바타 비서 과장과 사이온지 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놈의 교활한 머릿속에서는 이미 손익 계산이 다 끝났다. 비록 지금의 꼴이 좀 비굴해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다. 어차피 김구만 잡으면 포상에 특진에 총독의 표창까지 이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런 굴욕적인 순간은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다. 자칫 사형수로 내몰릴 뻔했던 한 시간 전과 비교하면, 이건 정말 큰 다행이 아닌가.

16550743550422.png“으음……, 어쩔까.”

시바타가 놈들의 애를 태우기 위해 뜸을 들일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고 이병길이 들어섰다.

16550743578756.png“나를 찾으셨다고, 시바타 비서 과장? 어? 사이온지 선생께서도 계셨군요.”

이병길이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은 두려운 어조로 물었다. 이 새벽에 총독부 비서 과장이 직접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온 것도 기이한데, 총독부 별관 지하실의 광경이 너무도 살풍경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조선 후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조선인 경찰 둘이 속옷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도 이상하지만, 그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사이온지 유우야의 존재.

16550743578756.png‘이 사람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이런 깊은 새벽에……. 대체 무슨 사고가 났던 게야?’

이병길은 최대한 머리를 굴리면서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지난 5월 총독부에서 겪었던 그 참사가 자연스레 그의 뇌리에 떠오른다.

16550743578756.png‘저놈들…… 또 사이온지 선생께 무슨 무례를 범한 것인가? 그러면 곤란한데……. 이러면 저놈들을 소개한 나까지 무릎을 꿇어야 하나? 이런 제길, 조선 최고 귀족 체면이 아주 똥이 되는군…….’

이병길은 원망스런 시선으로 노덕술과 강용남을 노려보며, 시바타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뗐다.

16550743578756.png“이, 이게…… 무, 무슨…… 자리인지 잘 모르겠구려. 뭔 사고라도 났소? 그리고…… 김덕기 형사는 어디에 있소이까?”

16550743550422.png“끄응…….”

시바타는 무게를 잡으며 조선인 경찰들을 가리켰다.

16550743550422.png“김덕기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드리기로 하고, 우선 제가 묻지요. 최근에 저들의 수사와 관련해서 식솔들을 빌려주셨습니까, 후작 각하?”

16550743578756.png“……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찔린 이병길이 얼빠진 신음을 흘렸다. 윤우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고 지난 5월 사이온지 유우야가 분명히 경고했는데…… 놈을 감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되는 것일까?

16550743578756.png‘뭐냐?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이병길이 필사적으로 노덕술과 시선을 맞추며 눈빛으로 추궁했다. 노덕술은 ‘김덕기’라고 입모양만으로 말한 뒤,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16550743578756.png‘시인을 하라고?’

이병길은 눈을 깜빡이며 고민에 빠졌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인정하고, 뭘 부정해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뭔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또 수상하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병길은 잠시 더 고민하다가 결국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16550743578756.png“아…… 그렇소이다. 그…… 윤우의라는 놈이 김구와 접선을 한다고 해서…….”

16550743550455.png“에헤엠! 쿨럭! 쿨럭! 아이구우! 쿨럭!”

김구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노덕술은 가슴을 움켜쥐고 크게 헛기침을 해서 이병길의 목소리를 덮었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 조선말로 떠들었다.

16550743550455.png“쿨럭! 아이구! 김가 놈 이름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후작 각하! 그러면 우리도 다 김덕기처럼 죽습니다! 쿨럭!”

16550743578756.png“으응?”

이병길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이게 대체 무슨 도깨비장난인지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16550743578756.png‘아…… 그런가? 김구가 월경을 했는데 그것을 경무국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을 받는 건가? 그래서…… 김덕기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라고 하는 건가?’

곤란해서 눈만 껌뻑이고 있던 이병길의 머릿속에, 할아버지 이완용으로부터 물려받은 교활한 꾀가 얼핏 스쳐지나갔다. 그제야 조금은 상황 파악이 된 이병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덕술의 표정을 살펴가며 아주 천천히 한마디씩 내뱉었다.

16550743578756.png“맞소이다…… 그, 윤우의가 누군가와 만난다고, 아니! 뭔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였기에…… 끄으응, 제가 일손을 좀 내주었는데…….”

그렇게 이병길이 똥마려운 사람처럼 끙끙 앓아가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고 있을 때, 조금 전 명령을 받고 뛰어나갔던 경찰이 서류철을 안고 돌아왔다.

16550743607199.jpg“시바타 비서 과장! 이것이 윤우의의 조서입니다!”

16550743550422.png“이리 내 봐라. 좋아, 이제 이 사진을 수천 장 인쇄해서…….”

의욕이 충만해서 서류철을 펼치던 시바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서류에 첨부된 사진 속 윤봉길의 얼굴이 퉁퉁 부은 멍투성이였기 때문이다. 모진 매질을 당하고 난 직후에 찍은 것이어서, 원래 어떤 인상이었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다.

16550743550422.png“……이게 뭐야? 이런 걸로 어떻게 놈을 알아볼 수 있겠나?”

시바타는 난감해하며 중얼거렸다.

16550743550422.png“이것 말고 다른 사진은?”

시바타가 서류를 가져온 경찰에게 물었다. 놈은 겁먹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16550743607199.jpg“별도의 사진은 딱히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6550743550422.png“어떻게 이따위 사진을 기록으로 남길 수가 있냐고, 이 멍청아? 네놈은 이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겠어, 아앙?”

심부름을 다녀온 경찰이 찍은 사진도 아니건만, 시바타는 애먼 상대에게 화풀이를 하려들었다. 그렇게 시바타의 주의가 온통 사진으로 쏠려있는 사이, 이병길과 노덕술은 재빨리 조선말로 속닥거리며 필요한 정보들을 주고받았다.

16550743550455.png“후작 각하, 김덕기가 빨갱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얽히면 죽습니다. 그리고…… 윤가 놈이 김가 놈과 연관이 있다는 소리도 하면 안 됩니다.”

16550743578756.png“왜 그런가? 제때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 동티가 나기라도 했나? 그러게, 진즉에 다른 경찰들과 함께 공조수사를 할 것이지……. 그나저나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왜 와 계신 건가? 설마 그날 암살 오인조니 뭐니 하며 거짓말을 했던 것 때문에 화가 나셨는가?”

이병길이 선우진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물었다.

16550743550455.png“아니 그것이 아니라…… 김덕기 체포 현장에 함께 계셨는데…….”

노덕술의 대답이 느려졌다. 조금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이 자리에 민간인인 사이온지 유우야가 떡하니 한자리를 차지한 채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방에서 현재 가장 영향력이 크고 힘이 센 사람이 바로 그인 것을.

16550743550432.png“시바타 비서관.”

선우진은 놈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들으며 시바타에게 다가가 함께 윤봉길의 사진을 가리켰다.

16550743550432.png“이 역시 나쁘지는 않을 것 같소이다. 이걸로 전단을 만들어 뿌리시오.”

16550743550422.png“에? 이, 이런 사진으로 정말 수배가 되겠습니까, 사이온지 선생? 이 정도로 퉁퉁 붓고 멍이 심하게 든 얼굴은, 가족들이나 친우를 제외하면 아무도 못 알아볼 것 같은데요?”

시바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윤봉길의 사진을 들어올렸다. 그럴 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선우진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16550743550432.png“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요. 아까 그놈들이 증언하기를, 자신들과 격투를 벌이고 달아났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 그 윤우의라는 자의 얼굴 역시 꽤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도 이 사진과 비슷하지 않겠소이까?”

16550743550422.png“오호, 하긴…….”

시바타의 입이 감탄으로 벌어졌다. 피투성이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까 그 두 불량배들의 꼴을 감안해볼 때, 분명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이었으리라. 윤우의를 감시하던 불량배들이 모두 수십 명이었다고 했으니,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멀쩡히 달아날 수는 없었을 거라 보는 편이 타당하다.

16550743550422.png“음, 그렇군요. 윤우의 놈도 꽤 큰 상처를 입었을 겝니다.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역시 날카롭다니까요.”

단번에 납득당한 시바타는 입가를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방 안쪽에서는 노덕술과 이병길이 필사적으로 조선말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16550743578756.png“그러니까 윤우의가 누군가와 접선을 해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첩보는 얻었지만, 그 만나기로 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하라는 말인가? 그럼 되나?”

16550743550455.png“네, 후작 각하! 저놈들은 김가 놈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질색하니, 그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혹시 김가 놈 이야기가 나오면, 그건 다 김덕기가 제멋대로 지어낸 허황된 소리라 하셔야 하굽쇼.”

16550743578756.png“알겠네. 알겠어……. 그런데 이러느니 그냥 윤가 놈을 지금 잡아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병길이 물었다. 급하게 집을 떠나오느라 자신의 불량배들이 윤봉길을 놓쳤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노덕술은 한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16550743550455.png“후우……. 저도 조금 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후작 각하의 식솔들이 윤가 놈을 놓쳤답니다. 어찌 그리 야물지 못한 놈들을 붙여놓으신 겁니까요?”

16550743578756.png“에? 설마 또?”

이병길은 깜짝 놀라 도리질을 했다. 몇십 명이나 되는 불량배들이 겨우 한 놈을 놓치다니……. 게다가 이게 벌써 두 번째다. 대체 윤우의라는 놈의 뒷배에는 누가 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16550743550432.png“하여간 잠시만 틈을 주면 조선말로 지껄여대는군, 저놈.”

선우진이 문득 노덕술을 돌아보며 근엄하게 나무랐다. 이병길과 더 말을 맞추려던 노덕술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이병길도 뜨끔해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16550743550422.png“후작 각하의 식솔들이 윤우의를 놓쳤습니다. 덕분에 수사는 큰 혼선을 빚게 되었지요.”

윤봉길의 사진을 대량 인쇄하라고 지시를 내린 시바타가 이병길에게 말했다. 이병길은 난감해하며 이마를 짚었다.

16550743578756.png“아, 아니…… 그것이…….”

16550743550422.png“어째서 즉각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고, 그리 개인적인 결정을 내리셨소이까? 아실 만한 분이…….”

16550743578756.png“그…… 이 두 조선인 경찰이, 아니 당시에는 김덕기 형사까지 세 명이…… 그리 하면 오롯이 자신들의 공이 될 수 있다며, 한 번만 힘을 빌려달라고 간청을 하기에 마음이 흔들려버렸소. 면목이 없소이다, 시바타 비서 과장.”

이병길은 잘못을 세 경찰들에게 떠넘겼다. 하여간 이자 역시 비열하기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인간이다.

16550743550422.png“저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양해해 드릴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만, 공사에서는 그리할 수가 없지요. 더군다나 이병길 후작께서는 지금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소비에트 일본 혁명연합의 간부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다고 하니, 없던 일로 치부해버리기는 어렵습니다. 자…….”

시바타는 백지 상태의 조서를 이병길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16550743550422.png“어째서 윤우의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한 뒤에도 경찰에 신고를 않으신 것인지, 그날 저 조선인 경찰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여기에 솔직하고도 자세히 기록해 주십시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후작 각하.”

냉정하기 짝이 없는 시바타의 말투에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뚝뚝 넘쳐흐른다.

16550743578756.png“꼭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니 조서를 쓰기는 쓰겠습니다. 허나…….”

이병길이 선우진을 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16550743578756.png“그 자리에는 사이온지 선생께서도 함께 계셨는데, 그래도 괜찮겠소이까?”

16550743550422.png“이미 저 두 놈에게서 진술을 받았습니다만, 그런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후작 각하께서 뭔가 착각을 하신 것은 아닐는지요.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아마도 그 첩보를 들은 후에 합류하셨을 테지요. 그러면 반드시 기술해야 하는 사항도 아니고 말입니다.”

시바타는 철저하게 선을 그어 이병길의 협박을 차단했다.

16550743578756.png“허! 그랬었군. 내가…… 그날 워낙 취해서…….”

노덕술과 강용남의 표정을 살핀 이병길은 탄식을 터뜨리면서도, 결국 순순히 만년필을 꺼냈다. 이미 다 말이 맞춰진 이상, 혼자 버텨 봐야 미친놈밖에 안 된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총독과 연이 닿으려면 사이온지 유우야의 호감이 절실하다.

16550743550422.png“자, 그리고 이건 두 조선인 경찰을 위한 후작의 탄원서 겸 보증 서류입니다.”

이병길이 한 가지를 수락하자마자, 시바타는 또 한 장의 백지를 내밀었다. 이병길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16550743578756.png“탄원서는 또 뭐고, 보증 서류는 또 뭐요?”

16550743550422.png“비록 큰 실수를 저질러 불령선인 체포에 지장을 주긴 했어도, 대일본제국을 향한 저 두 형사의 충심을 믿어도 좋다는 보증이라고나 할까요? 일이 이렇게 틀어져버렸으니 말입니다. 설마 그 정도 신뢰도 없는 놈들을 위해서 범죄 신고를 늦추신 것은 아닐 테지요?”

시바타는 뻔뻔하게 반문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이병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여기에서 보증을 못한다고 버티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왜 즉시 윤우의를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책망이 쏟아질 따름이다.

16550743578756.png“개새끼들…….”

서류를 받아든 이병길은 노덕술과 강용남을 흘겨보며 조선말로 욕설을 내뱉었다.

16550743578756.png“너희 때문에 내가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이냐……. 무능한 등신들 같으니…….”

16550743550432.png“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병길 후작.”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선우진이 부드러운 어조로 이병길을 달랬다.

16550743550432.png“어차피 다 형식적인 서류일 뿐이오. 후작에게까지 책임이 돌아갈 일은 없소이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다 저 조선인 형사들 잘못 때문이라는 걸, 시바타 비서관도 잘 알고 있소.”

바짝 긴장해 있던 와중에 그 목소리는 마치 천상의 은혜처럼 한없이 부드럽게만 들렸다. 이병길은 감격을 숨기지 못하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16550743578756.png“그,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이온지 선생. 조금은 기운이 나는군요.”

16550743550432.png“찬찬히 쓰시오. 잠시 힘이 들기는 해도, 결국은 정의가 승리할 테지.”

선우진은 이병길을 다독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강용남과 시선을 맞췄다.

16550743550432.png‘노덕술은 영 실망스러우나 그래도 자네만은 믿고 있네.’

짧은 눈빛 교환이었음에도, 마음속으로 전한 그 말은 분명히 강용남에게 전해졌다. 선우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 것과 동시에 강용남의 입가에 번진 엷은 미소가 그 증거다.  

16550743718067.jpg

  *** 이병길과 두 조선인 경찰은 새벽 여섯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총독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쏴아아아아-!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때문에 아직도 캄캄한 총독부 건물 앞에서, 이병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16550743578756.png“후우우……. 네놈들을 믿었던 보상이 이거냐? 내 평생, 이런 새벽에 개처럼 끌려 나와서 그따위 굴욕적인 조서를 작성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자동차 앞에 선 이병길은 두 놈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16550743550455.png“죄송합니다.”

노덕술은 비굴하리만큼 깊게 허리를 숙이고 무조건 사죄부터 했다. 하지만 이병길의 화는 그 정도로 풀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닌 듯 보였다.

16550743578756.png“듣고 싶지도 않다, 이 잡놈들아. 당장 윤우의인지 하는 그놈부터 잡아와. 그리고…… 자정이 되기 전까지 매일 내게 찾아와서 보고하고! 보증인인 나에게까지 누를 끼치면 정말로 가만 두지 않겠다.”

이병길은 홱 고개를 돌려 놈들을 외면한 뒤 자동차에 올라 차갑게 내뱉었다. 그리고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16550743550455.png“염병. 지랄하고 앉아있네. 큭큭큭.”

놈의 자동차가 멀어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노덕술이 비열하게 킥킥대며 강용남을 돌아보았다.

16550743550455.png“그래도 우리는 용케 살았다. 안 그러냐, 용남아?”

16550743607199.jpg“아, 손 치우쇼! 징그럽게 웃지 말고!”

강용남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노덕술의 팔을 밀쳐내며 버럭 화를 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노덕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16550743550455.png“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갑자기 넌 또 왜 지랄이야? 형님도 몰라보고?”

16550743607199.jpg“됐수다! 형님은 니미……! 퉤엣!”

강용남은 불쾌하다는 듯 바닥에 침을 탁 뱉은 뒤 노덕술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16550743607199.jpg“당신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거지발싸개 같은지 내가 오늘 아주 똑똑히 봤으니까, 더 이상 살랑거릴 생각 마슈! 이제는 나이 많다고 봐주고 그러는 거 없수다!”

16550743550455.png“뭐라고? 이 개새끼가 뒈져가는 걸 살려놨더니 고맙단 말은 못할망정……!”

16550743607199.jpg“살려줘? 네가 죽일 뻔했던 건데, 뭘 살려줘! 네가 그 지랄로 배신만 안 했으면, 덕기 형님도 그렇게 빨갱이로 안 몰렸을 거다! 왜? 이번에도 윤가 놈 못 잡으면 다 내 탓으로 몰아서 나도 죽이려고? 그렇게 하고 싶냐,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으응?”

강용남은 자신의 멱살을 쥐려는 노덕술의 팔을 잡아 꺾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오늘 분명히 깨달았다, 이놈이 얼마나 뱀처럼 사악한 인간인지를……. 이놈과 계속 붙어 다녀 봐야 결국 언젠가는 또 김덕기 꼴이 되어 등에 칼이 꽂히고 말리라.

16550743550455.png“이, 이 새끼!”

노덕술은 분통을 삼키며 물러섰다. 마음 같아서는 이 버릇없는 놈을 쥐어 패고 싶지만, 상대는 꽤나 실력이 좋은 검도 선수다. 정식으로 맞붙으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16550743607199.jpg“이제 나 혼자 수사하고, 이병길 후작께도 나 혼자 보고할 테니까 간섭하지 마슈! 또 근처에서 기웃거리기만 해 봐, 아주! 대가릴 까놓을 테니까!”

강용남은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노덕술을 위협한 뒤 세차게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향해 나아갔다. 어차피 노덕술은 부산 경찰. 이쪽에 끄나풀도 뭣도 없는 놈이다.

16550743607199.jpg“흥, 개새끼……. 누구를 호구로 알고. 내가 이 새끼야, 불령선인을 때려죽인 수로만 따져도 너보다 몇 배는 위야. 싸가지 없는 새끼…….”

빗속을 걸어가며 강용남은 혼잣말로 욕설을 웅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어그러질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칠 걸 그랬다는 후회가,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발 앞서서, 그 만년필이 노덕술의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면…… 그랬다면 덕기 형님은 살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졌다.

16550743607199.jpg“음?”

그렇게 한참 동안 걸음을 옮기다 인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선 강용남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부터 뭔가가 자신을 쫓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16550743607199.jpg“엇, 사이온지 님! 아까 먼저 귀가하신 줄 알았는데……!”

선우진의 패커드를 알아본 강용남이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달려가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아까 그 눈신호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보다.

16550743550432.png“타게나, 할 이야기가 있으니.”

선우진이 안쪽에서 자동차의 문까지 열어주며 친절하게 말했다. 재빨리 뒷좌석에 오른 강용남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16550743607199.jpg“이거…… 이렇게 푹 젖은 채로 이런 고급차의 의자를 더럽혀도 되는 것인지…….”

16550743550432.png“무슨 그런 걱정을 하는가? 편히 앉게. 아, 술 한 잔 하겠나? 목이 마를 텐데.”

선우진은 직접 위스키까지 따라주며 환히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강용남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이 확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16550743607199.jpg‘그래……. 덕기 형님이 날아가 버렸고, 노덕술이랑도 의절을 했으니 이제 이쪽 동아줄을 더 잡아야지. 이게 진짜 금줄이야! 이병길 따위랑은 비교가 안 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위스키를 홀짝이는 호사를 누리며 강용남은 결심했다. 오늘 새벽 내내 그가 절실하게 느낀 것은, 이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남자의 엄청난 영향력이었다. 저승사자보다 더 무시무시한 시바타 비서 과장조차도, 이 남자의 손바닥 위에 있다. 그렇게 달콤한 꿈에 젖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을 태운 자동차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한강변에 멈춰 섰다.

16550743550432.png“아무래도 조용한 장소가 나을 듯해서 이리로 왔네.”

먼저 자동차에서 내린 선우진이 말했다.

16550743607199.jpg“아, 예! 그렇군요. 호젓해서 좋습니다!”

강용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활짝 웃었다. 저 덩치 큰 운전기사가 사이온지 유우야에게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조금 불만이지만, 그 정도야 뭐 어떤가. 애초에 신분이 다른 것을.

16550743550432.png“내가 말일세. 꼭 필요한 것이 있어 부탁을 하려는데, 들어주겠는가?”

담배를 권한 선우진이 직접 불까지 붙여주며 물었다. 손가락으로 비를 가린 채 담배연기를 내뿜은 강용남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43607199.jpg“그러문입쇼! 어떤 명령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사이온지 님! 이 강용남!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16550743550432.png“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도 편하군.”

평온하게 대꾸한 선우진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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