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양이 중요하다.2020.07.18.
“사, 사, 사이온지 님! 이, 이게 무슨……!”
갑작스레 총구를 마주하게 된 강용남은 얼음처럼 빳빳하게 굳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거부 화족의 안주머니에서 느닷없이 육혈포가 튀어나오다니!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처음 몇 초간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언뜻 이해조차 안 됐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쳐다봐도 사이온지 유우야의 저 손에 들린 것은 분명히 권총이 맞다. 그리고 조준하고 있는 자세도 꽤나 능숙한 모습이다.
“왜, 왜, 왜 이러십니까?”
강용남이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며 자신에게도 필사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 이런 이상한 돌발 행동을 하는 걸까? 바로 조금 전까지 그렇게도 다정하게 담배에 불까지 붙여주던 사람이…….
“그것이 마지막 말인가?”
잔잔하고 고요한 어조로 물어오는 선우진에게서 장난기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곁에서 우산을 받치고 선 채 강용남을 노려보고 있는 바바의 표정도 단호함 그 자체다. 끼릭-! 선우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방아쇠가 눌리며 작은 쇳소리를 낸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세게 당기면 총알이 튀어나올 것이다. 이게 뭐지? 일단 도망쳐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일단 맞서 싸워서 제압을 해? 그리 영리하지 못한 강용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도, 맞서 싸우는 것도 전부 다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일단 이 거리……, 사이온지 유우야와 그의 간격이 애매하다. 사람 한 길 정도 되는 이 정도 거리에선, 그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 총알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검도로 단련된 몸이라지만, 상대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쇄도해서 경호원을 물리친 후 총을 쳐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저렇게 침착한 표정을 한 남자를 상대로는…….
‘왜? 왜 저렇게 차분하지? 저게 정말로…… 사람을 권총으로 쏘려는 인간의 눈빛 맞아?’
강용남은 선우진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선우진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강용남을 응시한 채 그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방아쇠 위에 올려진 손가락에서는 아주 작은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극히 평온하기만 하다. 마치 연기를 하는 사람처럼…….
‘……아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강용남은 뭔가 깨달음을 얻고 마음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래! 이게 뭔지 알겠다! 사이온지 님께서 지금 나를 시험해보시려는 게야! 한계까지 밀어붙여서, 정말로 가까이 둬도 될 만큼 충성스러운 인간이 맞는지!’
그렇게 믿어버리고 나니, 강용남도 조금은 침착해질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기개 있고 그럴듯한 말로 이 시험을 멋지게 통과해버리자고……, 그래서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금동앗줄을 꼭 붙들자고, 그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이온지 님!”
강용남은 과장된 어조로 가슴을 짚으며 열변을 토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씀만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비록 조선인으로 태어났으나…… 언제나 천황폐하와 총독부를 위해 불령선인들을 잡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충심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목숨은 아깝지 않사오나, 설마 저를 윤우의같은 놈들과 한패라고 의심하신다면 그건 견디기 어려운 치욕입니…….”
타아앙-! 터져 나온 총성이 강용남의 목소리를 삼켰다. 털썩-! 강변의 젖은 흙 위로 거칠게 나가떨어진 강용남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껌뻑였다. 이 엄청난 충격! 그리고 심장을 쥐어뜯는 것만 같은 격렬한 통증!
“……한 번도 그리 의심해 본 적 없다네.”
총성의 울림이 고막에서 지워져갈 때쯤, 선우진이 얼음처럼 차갑게 내뱉었다. 하지만 강용남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넋이 나가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잠시 감각이 마비되었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멍하기만 하다. 분명한 것은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저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사실뿐.
“아…… 아아아…… 아아…….”
바닥에 비스듬히 누운 채 자신의 배를 짚어본 강용남이 피로 점철된 손을 바라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손이 전부 다 새빨갛다. 그의 시선이 손바닥에서 복부로 내려갔다. 피가……, 뜨겁고 붉은 피가 왈칵왈칵 흘러나와 빗물을 타고 아래로 흐른다.
“흐으……!”
일단 피를 막아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두려움이 강용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출혈이 너무 지나치면 목숨을 잃게 돼……. 강용남은 재빨리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자리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뜨거운 고통이 뒤늦게 그의 신경을 엄습했다.
“아으으으! 으아아아아!”
강용남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프고, 또 두렵다. 그저 슬쩍 짚어본 것뿐이지만, 복부가 뻥 뚫렸다. 이런 미친……! 이렇게……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왜? 대체 왜에에에에?”
강용남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선우진을 흘겨보며 악을 썼다. 아무리 크게 소리질러 봐야 소용없는 허허벌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용히 죽어가기에는 너무도 억울하다, 분하다. 이런 미친 짓이 있다니…… 어째서 갑자기 조선의 경찰을 쏜단 말인가? 분명히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건만……. 꽈르으응-! 한강 남쪽에서 벼락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대지를 뒤흔든다. 강용남이 질러대는 비명은 그 천둥과 요란한 빗소리에 완전히 짓밟혔다. 사방이 다시 고요해질 때까지 물끄러미 놈을 내려다보고 있던 선우진이 조선말로 입을 열었다.
“조선이 독립하면 어차피 네놈은 사형. 그 벌을 조금 일찍 받았다고 생각해라.”
“으허……! 어억!”
너무도 뜻밖의 말을 들은 강용남은 귀신을 본 사람처럼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등으로 기었다.
“다, 당신은…… 아니, 너는…… 너는 대체! 뭐…… 뭐……!”
사, 사이온지 유우야가…… 화족 사이온지 유우야가, 조선말을 하다니……!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머릿속이 들어있던 모든 정보가 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아무 판단도 내려지지 않는다. 풀썩-! 드러누운 채 철철 흘러나온 피로 땅을 흥건히 물들이던 강용남이,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더 이상은 팔다리에 기운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아……! 하아……! 사이온지…… 유우야가…… 하아……!”
강용남은 젖은 모래 위에 널브러져 마지막 숨을 헐떡이면서 아무 의미 없는 혼잣말을 웅얼댔다. 크게 벌어진 입을 통해 빗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숨이 막혀 어떻게든 피해보고 싶지만, 이제 그에게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일조차 버겁다.
“도련님, 이제 슬슬 끌고 가자요. 보아하니까 뻗은 것 같은데.”
덩치 큰 몸종의 목소리……. 녀석에게서 우산을 받아든 사이온지 유우야가 조용히 대꾸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래, 바바. 한 번 더 말하는 것이지만 양을 잘 맞춰둬야 한다.”
“에헤이, 참! 맡겨 두라니까, 도련님! 그런 걸 실수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몸종은 호언장담을 하며 저벅저벅 다가왔다.
‘대체 무슨 양을 맞추라는 것인가?’
가물거리는 눈구멍에 빗방울을 맥없이 받아들이며, 강용남은 사력을 다해 추리를 해보려 노력했다. 물론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그의 뇌는 그런 고도의 논리적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큼 활성화된 상태가 아니다. 총격을 당한 복부에서는 단 1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엄청난 격통이 밀려와 모든 사고를 마비시키는 중이니까.
“아, 참! 그런데 도련님…….”
강용남의 머리맡에 선 바바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놈보다 아까 그 노덕술이라는 놈을 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그놈이 더 약은 것 같았는데…….”
“그놈은,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
선우진이 짧게 대답했다.
‘다른 쓰임새……라는 건 또 뭐냐,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강용남은 힘겹게 눈꺼풀을 껌뻑거려 선우진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눈동자를 돌렸다.
‘어떻게 저리도…… 태연하지? 방금 사람을 쏴 놓고서……. 그것도 경찰을…….’
어느새 권총을 거두고 서 있는 선우진을 보면서 강용남은 엉뚱한 것이 궁금해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뭐더라, 뭐였더라……. 깜빡……! 깜빡……! 깜……빡……!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눈꺼풀이 덮여있는 시간이 차차 조금씩 더 길어진다. 부르르릉-! 잠시 후 또 한 대의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트럭인가 보다. 그리고 곧바로 깊은 어둠이 그를 덮쳤다.
***
“헉!”
윤봉길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버스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언제 잠이 들었던 것일까.
“돔 더 자두라우, 동무. 고저 매칠동안 질 나쁜 아새끼들한테 쫓개 다니믄서리 맘 팬히 잠도 못 잤을 거 아니네?”
바로 곁을 지키고 있던 버스터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윤봉길은 똑바로 의자에 앉으며 눈가를 문질렀다.
“부끄럽네……. 자네는 이렇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를 지켜주고 있는데 나는 둔하게 졸고 있었다니…….”
꽤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는 탓에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너머는 아직도 아침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캄캄하다.
“기거이야 피곤하니까네 자부람이 쏟아지는 거이 맞디 않갔서?”
버스터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윤봉길은 엷게 웃음을 지었다.
“피곤하다는 말도 하기 부끄럽군. 정작 불량배들을 다 때려눕힌 건 자네인데…… 음?”
작게 중얼거리던 윤봉길이 문득 말을 멈추고 1층 쪽을 내려다보았다. 구우웅-! 구우웅-! 구우웅-! 침침한 조명 아래 피아노 쪽에서 낮은 화음과 아주 고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워낙에 솜씨가 좋아 처음엔 축음기를 켜 둔 것인가 싶었지만, 이내 누군가 정말로 연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앉아 있는 곳에서는 피아노 주변이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아, 디금 이 창가래 그…… 나타샤 동무 솜씨란. 기가 막히디?”
그가 뭘 궁금해하는 것인지 알아챈 버스터가 설명을 들려주었다. 윤봉길은 버스터를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타샤? 그럼 버스터 자네처럼 암호명을 쓰는 여성 동지인가?”
“하하, 암호? 아라사 식으로 별명이래 디어 부르기는 하는데, 뭐 대단한 거이는 아니고…….”
멋쩍게 웃은 버스터는 1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보라우! 이 동무래 깼으니까네 올라오라우!”
그 한마디에 피아노 반주와 노래가 뚝 그쳤다.
‘어떤 사람들일까?’
윤봉길은 아래쪽에서 울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일어나 옷매무시를 바로 했다.
“자, 시름하디말구 이거이나 한 대 피우란.”
버스터는 무슨 보약이라도 권하듯 담배를 내밀었다. 윤봉길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어이쿠, 이 사람! 예배당에서 담배가 웬 말인가? 남의 종교를 모시는 곳에서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네.”
“예배당? 어차피 이 건물이래 다 얼레뿌리루다가 지은 가짜란!”
“그래도 싫네. 정 피우고 싶으면 잠시 나가서 피우세나.”
완강히 고개를 젓는 윤봉길을 보며, 버스터는 재미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큭! 하애간에 고디식한 동무고만기래.”
그렇게 윤봉길과 버스터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천천히 2층으로 올라온 나타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타샤라고 합니다.”
서양식 최신 유행 원피스 차림의 숙녀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숙이자, 윤봉길은 꽤나 당황한 얼굴로 답례를 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윤봉길입니다.”
그녀의 화려한 외모가 굉장히 낯설고 이례적이어서 윤봉길은 놀랐다. 피아노를 치며 신식 창가를 부른다는 것으로 미루어 신여성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이렇게나 멋지게 차려입은 미녀일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 손이 바로 을사오적 이지용을 때려눕힌 주먹이군요.”
윤봉길에게 악수를 청한 나타샤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뭐랄까…… 도무지 독립운동조직에 속해 있을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버스터도 꽤나 멋쟁이라고 여겼건만, 이 나타샤라는 아가씨는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경성에서 대 인기라는 소위 미츠코시의 마네킹 걸이라고만 추측했으리라.
“나도 반갑네. 우선은 피에르라고 불러주게.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별명을 쓰는군.”
나타샤의 뒤에 서 있던 안경 쓴 남자도 살짝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건넸다. 한눈에도 영리한 사람임을 알게 하는 그 눈빛. 윤봉길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체를 눈치 챘다.
“자네가 바로…… 버스터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던 그 영민한 친구이신가!”
윤봉길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안경 남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네가 버스터 편에 보내주었던 귀한 돈 덕분에 안순이는 살았네. 병원 치료를 받고 나니 이제는 시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어. 정말로 고마우이!”
만나 본 적도 없는 자신의 집에 우환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 윤봉길은 예산에서 지내는 동안, 늘 그 영민한 친구에 대해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아니, 아니! 아니란! 이 잘난 척하는 아새끼래 고저 그 동무랑은 영 딴판이니까네 오해하지 말라우! 이 아새끼래 사람 마음이니 사정이니 기딴 거이 전혀 모른단!”
버스터가 황급히 나서서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윤봉길은 그 말을 듣고 나서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라고? 이렇게나 인텔리로 보이는데…….”
“아, 물론 이거이도 아는 거이는 덩말 많디마는 또 그만큼 흠도 많아서리, 그 령민한 동무콰는 댈 거이가 아니란.”
버스터가 몹시 실례되는 말을 면전에서 늘어놓는데도, 정작 안경 남자는 별반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다. 안경 남자는 여전히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호기심 가득한 어조로 물어댔다.
“백범을 만나기로 했다면서? 두 사람이 연락은 어떻게 주고받았나?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 언제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나? 무슨…… 암호 같은 것을 정했을 테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윤봉길은 조금 황당해졌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들이라지만, 도저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여럿 섞여 있다.
“저…….”
윤봉길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은…… 대단히 미안한 말이네만,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해 줄 수 없다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반드시 비밀을 지키겠다고 이미 약조를 한 바 있기에…….”
“이해해요. 피에르도 윤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랍니다. 이분은 그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 할 따름이에요.”
나타샤가 옅은 미소로 윤봉길을 안심시켰다. 그저 도움 몇 번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의 비밀 약속마저 술술 털어놓는 사람이라면, 그들도 원치 않는다. 그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과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
“아, 그래요. 그렇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윤봉길이 안경남자의 눈을 마주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연락은…… 지난달부터 인편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네. 처음에는 진짜 상하이 대한민국 정부 사람인지 의심스러웠으나, 이야기를 나눠볼수록 점점 분명해지더군. 그분들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 이유도 알 것 같았고.”
“그야 자네는 지금 조선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니, 상하이 정부 쪽에서도 당연히 원할 테지. 그런 인재가 많아야 사람도 모여들고 자금도 마련되는 법 아니겠나.”
안경 남자가 충분히 납득한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윤봉길은 겸허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고 하시더군. 그래서 기꺼이 이 한 몸 투신하겠다고 답을 했다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돕겠다고 말씀드렸지.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그 얼마나 큰 영광이란 말인가.”
“그러면…… 백범과 함께 상하이로 갈 셈인가?”
안경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윤봉길은 이번에도 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가지 말게.”
안경 남자가 갑자기 얼굴을 쑥 들이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걸세. 상하이 대한민국정부는 지금 엄청난 내우외환을 겪고 있다네. 자금난에, 분열에, 서로 반목하고, 심지어 건물 임대료를 지불 못 해 몇 차례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신세야. 한때 천 명이 넘게 모였던 그 단체에, 지금은 겨우 수십 명만 남았다고 하이. 요즘은 그 소수의 인원마저도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돈벌이에 나서야만 한다는데, 그런 곳에 자넬 보내고 싶지 않네.”
“자네도 버스터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군…….”
윤봉길은 난감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똑같네. 힘들다고, 어렵다고 다들 피하기만 하면 어쩌겠나? 힘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그 시점부터 우리에게는 힘든 미래가 주어진 걸세. 나는 그 고난을 피하고 싶지 않다네. 내 몸이 힘들고 아픈 것보다, 어린아이들이 일본말, 일본글을 국어라고 배우는 편이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우니까.”
“아니, 아니!”
안경 남자는 열심히 도리질을 했다.
“나는 조선의 이 슬픈 현실을 외면하라고 종용하는 게 아니네. 독립을 도모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싸우세나. 암 그래야만 하고말고! 단지 우리와 함께하자는 걸세! 우리 쪽은 자네의 재능과 꿈을 더 크게 피우도록 도울 수 있네. 사실은 우리라고 해도…… 안드레이의 능력이 9할9푼이지만…….”
“후후후. 나를 그리 높게 쳐주어 고맙군. 하지만 말이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나는 상하이로 갈 걸세. 자네들은…….”
윤봉길은 안경 남자부터 나타샤, 버스터까지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어떤 단체에 속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여유로워 보여. 그리고 실력도 뛰어나지. 나만 해도 자네들에게 두 번이나 큰 도움을 받았지 않나.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고. 반면…… 자네 말대로 상하이 정부는 지금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라네. 나처럼 미력한 존재에게까지도 도움을 청할 만큼 말일세. 그러니 나는 그분들과 함께하고 싶은 거야. 그것이 바로 ‘의’고, 또 ‘협’이니까. 아마 자네들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하네.”
“하아……!”
설득에 실패한 안경 남자가 손끝으로 안경을 끌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불통이기도 하지만, 사실 틀린 논리도 없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니, 누가 그를 말릴 수 있겠는가. 끼이익-! 이 층의 네 사람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적한 예배당 앞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창밖을 내다 본 버스터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왔구만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