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나타샤의 임무.2020.08.22.
“어억!”
택시 문과 선우진 사이에 끼다시피 한 영국군 지휘관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미스터 사이온지…… 이건 좀 곤란한…….”
귀빈이 술을 마시는 동안 외부를 경비한 경험은 많지만, 같이 마시자는 제안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식적이지는 않다.
“뭐가 문제인가?”
선우진이 뻔뻔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가 정색을 하고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게 영국군 지휘관으로서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술을 진탕 퍼마시고…… 어떻게 당신 경호를 하란 말입니까?’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휘관이 물었다. 그러나 선우진은 그 눈빛을 못 본 척하고 고집을 이어갔다.
“나랑 마시는 게 싫은가? 무시 받는 것 같아서 어째 점점 더 불편해지는군그래.”
“……아니, 저는 딱히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불편하다.’는 단어가 영국군 지휘관의 급소를 찔렀다. 그가 받은 명령은 ‘미스터 사이온지께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예의를 갖춰 호위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역시…… 미스터 사이온지와 함께 술자리를 할 수 있다면 크나큰 영광이겠으나, 제가 경호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뿐입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네. 저기 저 사람들은 호위도 없이 잘만 즐기는 중인데…….”
길거리의 신사들을 가리킨 선우진이 큰 인심이라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자네는 조금만 마시게. ……자네들도 가세! 다들 차에 탑승하게나! 저 뒤에 서 있는 트럭이 분명 자네들이 타고 온 자동차일 테지? 오늘은 아주 신나게 노는 걸세!”
선우진은 나머지 일곱 명의 병사들에게도 자동차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소위님…….”
병사들이 쭈뼛거리며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린다. 잠시 망설이던 지휘관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다들 탑승해! 미스터 사이온지께서 와이탄의 유흥가를 경험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원래대로라면 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그쪽의 재가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시간을 끌었다가는 이 변덕스러운 일본인 귀족 호색한이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
“좋아! 출발하게!”
지휘관을 택시 안에 밀어 넣는데 성공한 선우진은 기분 좋게 자동차 문을 두드렸다. 영국군 소위는 진땀을 흘리며 운전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와이탄의 모던 상하이 댄스 홀로 가게.”
“알겠습니다!”
인도인 운전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자동차를 출발시키는 동안, 선우진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창밖의 포스터를 가리켰다.
“음! 저런 것도 좀 보고 싶군! 저 숙녀분이 나오는 공연은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나?”
“중국식 오페라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릅니다만……. 저 공연은 이곳 애스터 하우스 호텔에서 열리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래? 어쨌든 지금 우리가 가는 곳도 저런 이국적인 미녀들로 가득한 즐거운 곳이겠지?”
들뜬 표정을 연기한 선우진이 은밀하게 덧붙였다.
“점잖게 앉아서 이야기만 하는 데라면 나는 자네의 안목에 실망할 걸세.”
“점잖은 곳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경호 트럭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던 지휘관이 대답했다.
“오히려 너무 천박하고 선정적이어서 불편하다고 하실까 봐 조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만.”
“좋아! 바로 그것일세!”
선우진은 마음에 들었다는 듯 허벅지를 쫙 내리쳤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택시와 트럭은 이미 와이바이두 교를 건너 와이탄에 접어들었다.
“이곳입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공공 조계의 끝부분에서 자동차가 멈추자, 지휘관은 재빨리 먼저 내려 선우진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오, 나쁘지 않군! 좋아! 입구에서부터 벌써 흥청거리는 기세가 느껴지는군 그래! ……음?”
색깔 전등이 번쩍거리는 입구와 간판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선우진이 문득,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뒤 프랑스 조계 쪽의 유흥업소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며 말했다.
“어째 나는, 저곳이 더 끌리는걸?”
“미스터 사이온지! 저기는…… 프랑스 조계입니다!”
사색이 된 지휘관이 달려와 정중하게, 그러나 완강한 태도로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선우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저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려진 간판을 보게! 뭔가 이국적인 공연을 하고 있는 게야! 나는 말이지! 이곳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세!”
선우진이 개구진 얼굴로 경극 분장을 한 간판을 가리키자, 영국군 지휘관은 펄쩍 뛰었다.
“저 그림은 진짜 여자가 아니라 다 남자들이 분장을 한 것…… 아니, 그것보다도…… 무, 문제가 됩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저희는 공공 조계를 지키는 방위군이기 때문에, 이 복장과 무장을 유지한 채로 프랑스 조계로 들어가면 외교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프랑스 조계는…… 중국인들의 세력이 강합니다. 미스터 사이온지께서 이런 시간에 방문하신다는 건…….”
“괜찮네! 나는 중국인들을 차별하지 않네. 아니, 오히려 좋아하지! 내가 했던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이국적인 걸 원한다니까! ……어이, 거기 여러분! 곰방와!”
지휘관의 어깨를 두드려준 선우진은 프랑스 조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팔을 높이 들고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지휘관이 얼른 그의 앞으로 막아서며 말했다.
“저들이 불편해합니다! 특히 저곳의 경비를 담당하는 중국인 자경단들이 불편해 할 겁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그럼 저희와 마찰을 빚게 될 것이고…….”
“어째서 나를 싫어할 거라고 단정 짓나?”
“그야…….”
지휘관은 이 말을 해도 되는 것인지 한참 고민을 한 뒤에야 결국 힘겹게 내뱉었다.
“……미스터 사이온지께서는 일본인이시니까요.”
“일본인이 왜?”
“하아……! 얼마 전 펑톈에서 있었던 장쭤린 폭사 사고 때문입니다. 그…… 저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죽일 놈이 그 일을…… 일본 군인들의 소행으로 몰아가버린 바람에, 이곳의 중국인들은…… 특히 하층민들은 더욱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큽니다. 안 그래도 지난 사변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했는데…….”
그 일을 만들어 낸 ‘죽일 놈’ 당사자에게 장쭤린 폭사 사고의 영향을 예절바르게 설명하는 동안, 영국군 지휘관은 선우진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신중에 또 신중을 기했다. 어쨌거나 이 정도의 반일 감정이라면 프랑스 조계 내부에서 일본 경찰의 단속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을 듯하다. 선우진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래서 저들이 저렇게 나를 노려보는 것인가?”
경계선 너머에서 물건을 나르던 불량한 외모의 중국인들 한 무리가, 우뚝 멈춰 서서 적의에 가득 찬 시선으로 영국군의 총을 노려본다. ‘프랑스 조계로까지 넘어와서 단속을 하면 우리도 당하지만은 않겠다!’고 강변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다. 영국군 지휘관은 연신 흐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그보다는 저희의 군복을 보고 경계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들은 일본인도 아닌데, 왜 미워하겠는가? ……아! 영국도 청나라와 전쟁을 했었지! 하하하!”
선우진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영국군 지휘관의 어깨를 감쌌다. 그에게 붙잡혀 댄스홀로 끌려들어가기 전, 지휘관은 부하 병사들에게 엄한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조계와 인접한 곳이니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 만약 댄스 홀 안에서 큰 소리가 나면 곧바로 진입하고!”
“큰 소리가 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자네는 너무 매사에 진지하군! 자, 자! 대금은 이걸로 지불하게!”
선우진은 영국군 지휘관에게 100엔 지폐 몇 장을 건네고, 댄스홀 앞쪽에 자리한 짧은 치파오 차림의 여자들을 가리켰다.
“여기에는 여자들끼리만 밤나들이를 나온 숙녀분들이 많군! 상하이의 숙녀들은 다들 이렇게 개방적인가? 내가 말을 걸어도 무례를 범하는 것은 아닐 테지?”
댄스홀 무대에서는 잔뜩 치장한 가수가 나타샤와 비교조차 되기 어려운 수준의 노래 실력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는 중이었다.
“절대로 무례는 아닙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저들은…….”
웨이터에게 군도와 모자를 맡기고 좋은 자리를 부탁하던 영국군 지휘관이 다급하게 선우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택시 댄서들이니까요! 미스터 사이온지께서 춤을 청하시면 굉장히 기뻐할 겁니다!”
“택시 댄서?”
처음 들어보는 조합의 단어에 선우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영국군 지휘관은 조금 전 웨이터에게서 사들인 종이쪽지다발을 들어보였다.
“택시처럼 잠시만 빌릴 수 있는 춤 상대입니다! 이 쪽지 한 장을 내밀고 춤을 청하면, 미스터 사이온지께서 원하는 만큼 함께 춤을 춰드립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하셔도 기꺼이 그렇게 해 드릴 겁니다. 방으로 불러올리려면 쪽지가 더 많이 필요하고요…….”
“아하, 대강 이해는 했네. 영국식 유흥인 모양이로군.”
“정확히는 미국식입니다. 이 부근의 영업장들은 미국 사업가들이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댄스홀과 택시 댄서의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하던 영국군 지휘관이, 문득 기죽은 말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실망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제 봉급 수준으로 누릴 수 있는 향락은 이 정도가 최고여서…….”
“아니, 아니! 이만하면 훌륭해! 어디 우리도 파트너를 골라서 재미있게 놀아보세! 잔뜩 취하고 싶어지는구만!”
선우진은 손뼉을 쫙 마주친 뒤 환하게 웃었다. 슬슬 피로가 밀려오지만, 이만하면 꽤 많은 목적을 이뤘다. 영국 병력이 프랑스 조계와의 경계선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은 두웨성에게 전해져 그의 신경을 긁을 것이고, 이 영국군 소위는 자신이 경극에 관심을 보이더라는 정보를 램슨 경에게 전달할 테니까. 그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면…… 선우진은 아주 쉽게 놀라운 마술을 선보일 수 있다. ***
“어쩌면…… 조금 위험한 일에 발을 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애스터 하우스 호텔 메인 식당에서 나타샤와 조찬을 함께하면서 선우진이 입을 뗐다. 상하이 뒷세계의 우두머리와 맞부딪쳐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일단 나타샤에게는 미리 알려두어야 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어머나…… 무서워라.”
나타샤는 포크에 찍은 요리를 입으로 옮기며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농담을 던졌다.
“안드레이와 함께 있으면 평생 위험한 일 같은 건 안 하게 될 줄 알았는데요…….”
바로 어제까지 일본 해군함에 김구를 숨겨 옮겨오는 일을 함께했으면서, 새삼스레 ‘위험’을 거론한다는 게 우습다는 의미일 터다. 그녀의 말이 옳다. 기꺼이 선우진과 동지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 나타샤는 이미 가장 위험한 싸움의 한가운데에 스스로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아주 거칠고도 지난할 긴 싸움에…….
“어제 그 서양인 아가씨와 관련된 일인가요, 안드레이?”
그의 표정만으로도 대강의 사정을 짐작한 나타샤가 물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그랬습니다만…… 조금 더 사정을 알고 보니, 임시정부와도 연관이 있는 일이더군요.”
“그건 또 흥미롭네요.”
나타샤는 영리해 보이는 눈을 빛내며 선우진 쪽으로 우아하게 몸을 기울였다.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른 아침의 호텔 식당은 한가로웠고,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씩 웨이터가 시중을 들기 위해 들를 때마다 말을 끊어가면서, 선우진은 어젯밤 벨에게서 들었던 정보들을 차분히 전해주었다.
“……그렇군요. 프랑스 조계의 사정이 그렇게나 열악한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모닝커피를 곁들여 흥미롭게 이야기를 다 들은 나타샤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약밀매조직이 경찰 역할을 하는 곳이라니…… 최악이네요. 그분들이 계속 그런 곳에 계시도록 해도 되는 걸까요?”
‘그분들’이란 물론 김구와 상해임시정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선우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도리질을 했다.
“물론 제 마음 같아서는 다른 곳으로 거처와 청사를 모두 옮기시라고 하고 싶지만, 아마도 제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하긴…… 한번 결정적인 도움을 드리긴 했어도, 안드레이는 여전히 외부인일 테죠. 당연히 경계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요.”
“맞습니다, 나타샤 양. 그분들은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아주 오래 갇혀 계셨기 때문에,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신세를 졌던 세월만큼 장제스에 대한 신뢰가 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장제스의 보호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는 갑작스런 제안을 수용할 리가 없지요……. 선우진은 뒷말을 생략했지만, 그의 총명한 동지는 이미 다 알아들었다.
“그럼 역시…… 시간을 두고 신뢰를 쌓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렇습니다만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해 보여서, 급한 대로 수를 좀 써 두려 합니다.”
선우진이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전체를 장악한 두웨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게만 관대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그가 감히 불법적인 일에 조선인을 동원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미리 조처를 해둘 생각이다.
“그런 엄청난 말을 해도 허언처럼 들리지 않는 사람은 안드레이 뿐일 거예요.”
커피 잔을 마주 들어 경의를 표한 나타샤가, 우아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제 역할은 뭐죠?”
상하이 최대의 범죄조직 두령과 얽혀야 한다는데도 그녀는 위축된 기색이 없다. 역시 대단한 배짱의 소유자. 선우진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둥 황제를 압도해주셔야 합니다.”
***
“미스터 사이온지! 이렇게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오 1분 전에 수행원들을 잔뜩 거느리고 호텔 커피숍으로 찾아온 영국재중특명전권공사는, 너무 기뻐 견딜 수 없다는 듯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의 그 공손한 태도에서, 선우진은 찰스 로스차일드가 가진 힘을 역력히 느꼈다.
“마일즈 램슨 경! 여기에서 뵈니 더욱 반갑구려! 어제는 정말 큰 신세를 졌소!”
선우진은 웃는 낯으로 어젯밤의 일부터 거론했다. 램슨은 볼을 부르르 떨며 도리질을 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어제는 참으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톰슨 대위는 자신의 실수를 정말로 부끄러워하며 크게 반성중입니다만, 원하신다면…….”
램슨은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을 이었다.
“아프리카 장기복무로 보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독한 더위와 황열병, 말라리아로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 곳이죠.”
선우진이 아무 말도 없이 턱만 까딱 하면, 정말로 그렇게 할 기세다. 선우진은 손을 들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무슨 그런 농담을……. 비록 숙녀들 앞에서 실례를 저질렀지만, 톰슨 대위는 신사답게 사과했고 그 사과는 받아들여졌소. 이제 끝난 일이니 더 거론할 필요가 없다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그럼 제게 이 아름다운 숙녀분과 인사를 나눌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손수건으로 땀을 찍어낸 램슨이 나타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우진은 나타샤를 정중하게 가리켰다.
“물론입니다, 램슨 경. 인사하시오. 나타샤 양이올시다.”
“나타샤 양이라고 하시면…… 일본의 어떤 가문인지…….”
낯선 성을 들은 램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일본보다는 러시아 이름에 가까운데……. 선우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어서 본성을 알려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바라오. 다만 그녀는…… 나보다 훨씬 고귀한 가문의 숙녀라는 점만 일러드릴 수 있소. 어차피 추후에 알게 되실 테지만…….”
“아! 그렇습니까?”
램슨은 정색을 하고 옷매무시를 바로 잡았다. 영국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찰스 로스차일드가, 귀빈으로 모시라고 당부한 사이온지 유우야보다…… 훨씬 고귀한 사람이라고 하니 자연스레 황족이 연상된 까닭이다. 그 말을 뒷받침하듯 드레스와 모자, 장신구도…… 대단히 기품이 넘친다.
“참으로 영광입니다, 미스 나타샤! ……이쪽은 케스윅 대영제국 상하이총영사, 그리고 공공 조계 의회의 페센든 의장입니다.”
상하이 공공 조계의 최고요인들을 차례로 나타샤와 선우진에게 소개한 램슨이, 정중하게 물었다.
“미스터 사이온지께서는 혹시 베이징 오페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선우진의 짐작대로, 어젯밤 함께 술을 마셨던 영국군 지휘관을 통해 경극에 큰 관심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선우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지만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소. 그리고 나보다도 여기 나타샤 양께서 더 좋아하시고.”
“그렇다면 점심 식사 후에 베이징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마침 극장에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저 밖의 여배우도 나오는 공연이오, 램슨 경?”
선우진의 질문에 램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배우가 출연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극단의 공연도 매우 훌륭합니다. 아, 그리고…… 그 배우도 공연을 관람할 겁니다. 같은 학교의 후배들이니까요. 원하시면 만나보실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해보겠습니다.”
“램슨 경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디 지금 당장 출발해볼까?”
힐끔 나타샤의 눈치를 살핀 선우진은 제멋대로 점심식사 일정을 건너뛰어 버렸다. 당황한 램슨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공연이 시작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상관없소. 배가 많이 고프시오, 램슨 경?”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램슨은 또 한 번 볼을 부르르 흔들었다. 사이온지 유우야를 접대하는 중요한 임무 앞에서 식사가 두어 시간 미뤄지는 것쯤은 너무 사소한 일이다.
“그럼 갑시다.”
선우진이 눈을 빛냈다. 나타샤도 향낭이 달린 작은 부채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기대가 되네요.”
황제와 싸우러 가는 길이었지만, 그녀의 도도한 표정에는 아주 작은 두려움조차 깃들어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