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두웨성을 불러와라, 애송이.2020.09.02.
“상관없어요!”
멍샤오둥은 크게 손을 내저었다.
“도박이 싫으면 그냥 차를 마시거나 술잔을 기울이면 되지요! 중요한 것은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하는 거예요.”
대형 레코드 사업가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열망이, 그녀의 태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램슨은 그녀에게 선우진을 양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스터 사이온지…… 결정에 영향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멍샤오둥의 초대를 통역으로부터 전해들은 램슨은, 조심스레 선우진에게 속삭였다.
“레코드 취입을 하시려면 아무래도 일정이 빠듯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게다가 말을 타고 산책하실 계획도 이미 수립되어 있고…….”
이미 프랑스 영사에게 사람을 보내 대강의 사정까지 다 설명해놓았는데……. 사이온지 유우야를 극진히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이깟 경극배우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피곤해.”
한참 들떠서 멍샤오동에게 칭찬의 말들을 떠들어대던 나타샤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런……!”
그녀의 이마를 짚어본 선우진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열이 좀 있군요, 나타샤 양. 너무 흥분하신 까닭입니다.”
“아름다운 노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열중해서…….”
나타샤는 두통을 꾹 눌러 참는 사람처럼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이 급작스런 상황 변화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물론 램슨과 페센든이다.
“총영사관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미스 나타샤! 부디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램슨이 영사관 직원을 돌아보고 전화를 걸라고 명령하려 할 때, 선우진이 그를 만류했다.
“의사는 필요 없소이다, 램슨 경. 이 숙녀분의 두통은 내가 잘 아는 바, 약보다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호텔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아비누 저퍼에서 말을 타기로 했는데, 귀한 기회를 놓치긴 싫어요…… 아아……!”
고집을 피우며 일어나려던 나타샤가 의자를 짚으며 다시 허물어졌다. 당황한 램슨은 볼을 부르르 흔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조프리 대로는 내일이든, 모레든, 언제든 다시 비워도 됩니다! 제가 비우지요! 지금은 미스 나타샤의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부디 미스터 사이온지의 조언을 받아들여주십시오!”
물론 다른 사람이 이따위 제멋대로인 짓을 저지른다면 곧바로 목을 졸라버리겠지만, 이 여자에게는 그렇게 화를 낼 수가 없다. 사이온지 유우야의 손님이기도 하고…… 또 이 까다로운 공주님의 비위를 맞춰가며 레코드 취입을 하는 순간, 그들에게는 적어도 만 달러 이상의 경제적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족이 아닌가!
“램슨 경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타샤 양. 지금은 이 두통을 잠재우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만약 나타샤 양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는…….”
선우진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가슴을 짚고 애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선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타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가 선우진의 부축을 받으며 대기실을 떠나려하자, 가장 당혹스러워한 것은 멍샤오둥이었다.
“이렇게…… 금방 가시는 건가요? 모처럼 귀한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대로 보내기는 아쉽군요.”
통역관이 그녀의 말을 전했다. 선우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 역시 아쉽지만, 이 가수의 건강 문제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일이라 해주게.”
그러면서 선우진은 자신의 말과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눈빛에 담아 멍샤오둥에게 보냈다. 우뚝-! 열망이 가득한 시선을 받은 멍샤오둥은, 안타까워하며 뒤따르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뒤, 비로소 여유를 되찾고 황제다운 위엄을 갖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숙녀분께서 부디 조속하게 건강을 되찾으시면 좋겠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오늘의 감동은 정말로 오랫동안 제 가슴 속에 남아있을 거란 말도요.”
나타샤는 멍샤오둥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선우진에게 기대어 극장을 나섰다.
“계단을 조심하십시오, 미스 나타샤!”
램슨과 페센든이 양쪽에서 혹여 미끄러질까 봐 대비를 하고, 앞쪽에서는 총영사가 자동차까지 가는 길을 텄다.
“정말로……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미스터 사이온지?”
자동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그 짧은 동안에도, 램슨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뒷좌석에 힘없이 기대어있는 나타샤의 연기가 너무도 완벽했던 탓이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여 그를 안심시켰다.
“예전에도 만족스러운 공연을 보시고 나면 가끔씩 이렇게 미열을 앓곤 하셨소이다. 두어 시간 안정을 취하시면 다시 기운을 되찾으실 게요.”
“아무래도 샤토 와인을 대접해드렸어야 했나 봅니다.”
램슨은 엉뚱한 과일주에게까지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나타샤는 웃음을 꾹 참고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대접해주신 술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어요, 램슨 경.”
“도착했습니다, 미스 나타샤.”
잠시 후 자동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서고, 호위병들이 자동차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베이터까지 선우진과 나타샤를 배웅한 램슨이, 죄인처럼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저희는 미스 나타샤의 쾌차를 기원하며 이곳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저쪽에서는 당연히 기다리지 말고 일단 돌아가서 공무를 보라는 답을 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곧 돌아오겠소.”
선우진은 짧은 인사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문을 닫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아…….”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없이 예의바른 표정으로 기다리던 램슨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에서 슬픔을 가장하고 있던 페센든도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청난 분이군요.”
케스윅 총영사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외교관이다 보니 신분이 높은 귀족들은 꽤 자주, 그리고 많이 만나 왔지만…… 저 본명도 모르는 일본 공주만큼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은 처음 봤다. 궁궐 밖에서 저 정도라면 내부의 시종들은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1분 뒤에 뭘 하게 될지도 모를 지경이라니.”
램슨도 동의를 표했다.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질 않나, 어렵게 일정을 조정해두었더니 갑자기 픽 쓰러지질 않나……. 둥 황제와 싸웠다가 또 곧바로 치켜 세워줬다가…… 여러모로 혼이 쏙 빠지는 기분이 든다.
“얼음을 곁들인 위스키 세 잔 가져다주게.”
세 사람은 호텔 로비와 마주한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시가에 불을 붙였다. 위스키로 입술을 적시고 시가 연기를 뿜어낸 페센든이 말했다.
“그럼 레코딩은 언제 진행하는 겁니까?”
거금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는 초조할 수밖에 없다. 램슨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가를 쓸어내렸다.
“모르겠구려. 그런 문제를 지금 거론할 수나 있겠소이까? 저 변덕쟁이 공주가 병이 덜컥 나 버렸으니, 미스터 사이온지의 머릿속도 복잡하지 않겠소?”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램슨 경?”
케스윅 영사가 물었다. 명색이 상하이 공공조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영국인인데, 이렇게 집사처럼 기약도 없이 그저 기다린다는 건 적잖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특히 영사관 직원들과 호위병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얽혀있는 일을 생각해보시오, 케스윅 총영사.”
램슨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특별히 당부까지 한 분이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자본과 영향력을 소유한 분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당장 레코드 취입만 해도…… 우리 모두에게 큰 경제적 이익이 발생할 일이고. 그러니 여기에서 몇 시간쯤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말을 이으려고 램슨이 입술을 뗐을 때,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짧은 종소리가 울렸다. 땡-! 그리고 엘리베이터 보이가 열어준 문을 통해 선우진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다들 바쁘실 텐데…….”
선우진은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니……, 미스터 사이온지…… 어떻게 이리도 금방…….”
램슨은 헛것을 본 사람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타샤를 부축하고 올라갔으니, 그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머리맡을 지키고 있을 거라고만 여겼는데…… 어째서 이 남자는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왔단 말인가?
“곧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의자에 앉은 선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램슨이 다시 물었다.
“혹시…… 미스 나타샤께서 바로 회복하신 겁니까?”
“전혀!”
선우진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앞으로 두어 시간 정도는 누워계셔야 할 게요. 날씨도 이리 더운데 낯선 곳에서 무리를 하신 게지. 그러나 덕분에 나는 이렇게 짧은 자유를 얻었으니…… 나타샤 양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그 자유를 즐겨봐야 하지 않겠소.”
“미스터 사이온지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라는 것이……?”
물어보는 램슨의 눈에 걱정이 깃들었다. 어젯밤 이 귀족 부호를 경호했던 소위로부터 전해 들었던 난잡한 이야기들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리 무엇이겠소? 오늘 처음 알게 된 이국적인 친구를 다시 보러 가려 합니다. 세 분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일이니, 통역관만 잠시 빌려주시구려. 일단 친밀해지고 나면 통역관도 필요치 않겠지만…….”
선우진은 멀찍이 떨어진 대형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바람둥이의 화신과 같은 그 모습에 램슨 일행 세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리도 아름다운 공주를 호텔에 두고, 그 잠시를 못 참아 또 다른 상대와 염문을 뿌리려는 이런 미친놈이 있다니…….
“저, 저기…… 미스터 사이온지…….”
가장 빨리 이성의 끈을 붙잡은 램슨이 신중하게 어휘를 고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멍샤오둥은 이미……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 건 상관없소, 램슨 경. 나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저 잠시…… 우정을 나누려는 것일 뿐.”
선우진은 웃는 낯으로 너무도 간단히 램슨의 첫 번째 만류를 뿌리쳐버렸다. 램슨은 혀가 바짝바짝 말라 들어간다.
“그녀의 가장 큰 후원자인 두웨성은…… 프랑스 조계의 자경단장이자, 상하이 최대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입니다. 그…… 일본 귀족과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자 경극 배우가 단둘이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걸 알게 되면…….”
“내가…….”
갑자기 웃음기를 거둔 선우진이 램슨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일개 범죄조직의 우두머리가 두려워…… 원하는 여자조차 만나지 못할 사람으로 보이시오, 램슨 경?”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기에서 눌린 램슨은 일단 손사래부터 친 뒤, 변명을 이어갔다.
“두웨성이 감히 미스터 사이온지에게 대적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심려하는 것은, 그가…… 멍샤오둥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램슨은 이 외도가 꺼림칙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상하이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있는데, 왜 이 호색한 귀족은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를 만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통역관을 빌려주기 싫으면 그만두시오. 내가 호텔 중국인 직원을 개인적으로 고용하든가 해서 내 패커드를 직접 운전해 가리다.”
선우진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딱 잘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램슨 일행 세 사람은 그를 따라 일어나서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무슨 그런 말씀을……! 당연히 저희가 경호와 통역을 책임지겠습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선우진을 만류한 램슨은 손짓으로 통역관과 호위병들을 불렀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남자의 치정극이 안전하게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호위하는 것뿐이다. ***
“하하하!”
선우진이 통역관을 대동하고 들어서는 걸 대기실 거울로 확인한 멍샤오둥은, 턱을 치켜들고 기분 좋게 웃었다.
“이리도 빠르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통역관이 멍샤오둥의 말을 번역해줬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멍샤오둥은 이미 외출 복장으로 갈아입었고 깜짝 공연을 위해 급히 했던 분장도 다 지웠다. 아까 눈짓으로 은밀한 메시지를 전달받은 뒤, 줄곧 선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우리의 재회를 위해 움직인 듯하다고 전해주게.”
선우진은 여유롭게 대꾸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 의자로 옮겨 온 멍샤오둥이 차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물었다.
“서양노래를 부르던 여성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 내가 그녀 생각을 해야 합니까?”
선우진은 멍샤오둥의 눈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멍샤오둥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위대한 예술가를 만나는 건 언제나 즐겁지만, 오늘은 한층 더 기쁘다오. 그래서 축배를 들까 합니다.”
선우진은 손가락을 까딱거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 호위병들에게 술을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위스키와 잔, 얼음까지 탁자 위에 놓이자, 선우진은 직접 멍샤오둥의 잔을 채워주고 건배를 청했다.
“만나기 어려운 좋은 인연을 위하여.”
“원래는 일본인과 술잔을 마주 기울이지 않지만,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니 예외로 두려고 해요.”
선우진과 함께 기분 좋게 한 모금을 들이켠 멍샤오둥이 미소를 머금었다. 선우진은 눈을 크게 뜨고 팔을 벌려보였다.
“내가 특별하다고요?”
“다른 일본인 사업가들과 달리…… 그, 교만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답니다.”
멍샤오둥의 말을 옮기며 통역관은 선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선우진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 그런 말을 전하면서 조심할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통역관이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멍샤오둥은 선우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내 경극을 칭찬했는데, 당신은 그 연기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나요?”
“그 심오한 세계를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슴을 울릴 만큼은 알아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칭찬해줘 봐요.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운 멍샤오둥이 턱을 괴고 선우진의 대답을 청했다. 선우진은 검지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어째 시험을 받는 기분이기는 한데…… 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요. 일단, 고막을 울리는 음의 변화가 좋았습니다. 오늘 당신이 연기한 비극적인 정서가 고스란히 느껴졌으니까요. 아, 아아아……! 아아아아! 이런 부분 말입니다.”
선우진이 음의 고저를 달리해서 그녀의 흉내를 내자, 멍샤오둥은 손뼉까지 쳐 가며 재미있어했다.
“하하하! 좋아요! 그 다음은요?”
“미숙한 아름다움이 큰 여운을 남겼습니다.”
“미숙하다고요? 그게 칭찬인가요?”
“당신의 젊음에 어울리는 싱싱한 생명력이 느껴졌으니까요. 그 어떤 노년의 대배우도, 그런 생명력으로 무대를 채울 수는 없을 겁니다.”
“흐음……!”
멍샤오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잠시 선우진을 노려보았다. 그런 뒤 벌떡 일어나, 심부름하는 소년에게 명령했다.
“다들 나가라고 해! 오늘은 친구와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
평소 남자 역할을 도맡아 해온 탓인지, 일상에서도 그녀의 행동은 대단히 남성적이다. 우르르-! 심부름하는 소년이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서 그녀의 지시를 전하자, 복도에서 기웃거리던 일꾼들과 단원들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모두 극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네놈이…… 끄나풀이었구나.’
당황한 얼굴로 가장 먼저 뛰어나가는 애송이를 보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이제 저놈은 두웨성에게, 멍샤오동이 일본인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할 터다. 그러면 아무리 영국 조계라고 해도 찾아오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탁-! 복도에 아무도 남지 않은 걸 확인한 멍샤오둥이 불투명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닫고 돌아섰다.
“당신 말이 맞아요.”
다시 자리에 앉은 멍샤오둥은 잔을 위스키로 채우며 말했다.
“오늘 내가 했던 공연은 정식으로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미숙할 수밖에요. 하지만 내 얼굴을 마주보며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죠. 왜인지 아나요?”
“모르겠군요. 어쩌면 당신의 위엄에 눌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선우진이 순진한 연기를 펼치자, 멍샤오둥은 얄미운 듯 입술을 샐쭉거렸다.
“이미 다 알면서 놀리지 말아요. 내 후원자가 두웨성이기 때문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다들 눈치를 보고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거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난…… 이런 상황이 싫어요. 언제나 가짜 칭찬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죠. 심지어 객석을 전부 다 두웨성이 채워둘 때도 있었어요. 그의 부하들로 말이에요. 그런 자들이 두목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보내는 갈채는, 갈채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렇게 싫은데, 어째서 관계를 정리하지 않습니까?”
선우진이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자, 멍샤오둥은 크게 한 모금을 들이켜고 쓰게 웃었다.
“그를 버리고 메이란팡의 넷째 부인이 됐어요! 이보다 더 선명한 관계 정리가 있나요?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공연이 끝나고 그가 대기실로 찾아오면, 사람들은 다 제멋대로 생각하죠. 아하! 아직도 멍샤오둥의 뒤에는 두웨성이 있구나 하고요. 그가 끝내지 않으면, 나는 끝낼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이에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려 봐도, 나는 여전히 이 새장 속에 있어요.”
술잔을 꼭 잡고 도리질을 하던 멍샤오둥이, 선우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당신이 레코드 사업가라는 말을 듣고 급하게 공연을 선보였던 거예요. 미국에서 대량으로 레코드를 판매하신다고요?”
“뭐, 그런 사업도 합니다.”
선우진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멍샤오둥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내 노래도 미국에서 판매될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을 해줘요.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녀가 톰슨 대위와 마찰을 빚었던 곳이 프랑스 쪽이 아닌 영국 조계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본론으로 접어들 줄은 몰랐다.
“글쎄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고민에 잠긴 사람의 연기를 한 뒤에 선우진이 말했다.
“판매가 되려면 일단 미국인들이 당신의 공연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낯선 방식의 노래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을 테죠. 그리고 그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오로지 당신의 노력에 달렸습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사업가로서의 전망 같은 건 없나요?”
멍샤오둥은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전망보다 중요한 건 당신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고난을 이겨낼 만한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무슨 근거로요?”
멍샤오둥이 물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선우진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의 오른 어깨 위쪽을 가리켰다.
“당신의 수호신이 내게 알려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