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세 개의 원숭이 머리.2020.09.05.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 미치광이가?’
눈이 휘둥그레진 통역관은 입을 꾹 다문 채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수호신 같은 황당한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어서 그녀에게 말을 옮겨주게.”
선우진은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뻔뻔하게 재촉했다.
“하하하! 난데없이 어깨 위를 가리키기에 뭔가 했더니……!”
통역관으로부터 선우진의 말을 옮겨들은 멍샤오둥은 다시 한 번 손뼉을 치며 마치 연극무대에서처럼 파안대소했다.
“내게 수호신이 있고, 당신은 그게 보인다고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선우진은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대답을 옮겨야 하는 통역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멍샤오둥이 오른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럼 아직도 여기에 매달려 있나요? 아니면 지금 막 다른 곳으로 옮겨갔나요? 어쩐지 머리가 간지러운데요?”
그 질문을 하는 동안에도 자꾸 웃음이 치미는지, 멍샤오둥은 몇 번이나 입을 가렸다. 선우진은 그녀의 어깨를 가리켰던 검지를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농담 식으로 물어보시면 대답해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조롱하는 것은 당신의 수호신뿐 아니라, 모든 영적인 존재들에게 큰 무례를 범하는 일이라오.”
“됐어요, 장난은 그만두세요.”
멍샤오둥은 여전히 빙글거리면서도 치우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두웨성이나 좋아할 만한 소리네요. 그는 미신을 신봉하니까요.”
‘그럴 테지.’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대꾸했다. 손에 피를 묻히고 남을 짓밟으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으레 초월적 존재에게 집착한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두려움을 이길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럼 내가 조금 전 해드렸던 이야기는 잊어버리십시오.”
선우진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위스키 잔을 잡았다. 멍샤오둥은 그와 마주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수호신이 있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소?”
“당신이…….”
크게 한 모금을 들이켠 멍샤오둥이 도발적인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장담을 해주길 원해요. 레코드는 잘 판매될 테니, 함께 미국으로 가서 공연을 하자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도박은 하지 않습니다. 또 허언도 않지요. 사업가로서 불확실한 일을 무조건 가능하다고 약속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선우진은 완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멍샤오둥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쫙 벌렸다.
“허언을 않는다고요? 조금 전에 내 어깨 위에 붙은 수호신을 봤다고 하신 분이 맞나요?”
“그 이야기는 잊어버리시라니까요.”
선우진이 진지해져서 대꾸하자, 멍샤오둥도 잠시 신중하게 어휘를 고른 뒤 물었다.
“좋아요, 그럼…… 확실한 것만 말해줘 봐요. 내가 당신을 따라나서겠다면, 어느 정도의 수입을 보장해줄 수 있죠?”
“보장 가능한 수입이라……. 음, 그건 쉬운 계산이 아니군요. 당신의 노래는 서양인들에게 낯선 것이어서.”
냉철한 사업가의 연기를 시작한 선우진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첫 해에는 수입이라 부를 만한 수준의 돈벌이가 아예 안 될 겁니다. 가장 좋은 홍보 방법은 당신의 공연을 영화에 잠깐 집어넣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인데…… 아무리 내가 영화 제작자에게 부탁을 한다고 해도, 촬영과 편집을 거쳐 상영까지 이어지려면 꽤 긴 시간이 소요될 거요.”
“당신은 미국 영화 제작자도 알고 있나요?”
멍샤오둥의 눈이 욕심으로 더욱 커졌다. 할리우드 영화는 상하이에서도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 곳에 출연한다면…… 정말로 중국이 떠들썩해질 것이다. 선우진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친구가 많아지게 마련이죠.”
“그렇지만……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그런 부탁을 쉽게 들어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내 친구들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선우진은 자신 가득한 말투로 분명하게 단언했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고, 또 쉽게 믿어주기도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그가 말하니, 당연한 사실처럼 들린다. 그 호기로운 모습을 본 멍샤오둥의 눈빛에는 한층 더 깊은 호감이 서렸다.
“이런…… 당신의 친구가 되려면 아주 각오가 대단해야겠는걸요?”
눈을 가늘게 뜨고 선우진을 이리저리 가늠하던 멍샤오둥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영화를 찍고 나면 나도 미국에서 레코드 10만 장을 판매하는 인기인이 되는 건가요?”
“언젠가는 그리 될 테지만, 처음부터 10만 장은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나를 놀리는 건가요?”
선우진이 즉각적인 확답을 피하자, 멍샤오둥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노래에 반했다고 해놓고, 천하의 둥 황제를 그 서양노래 부르는 여자보다 푸대접을 하려 들다니! 내 공연이 뛰어났다고 한 건 거짓말인가요?”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계속해서 나타샤를 의식하고, 또 질투했다. 선우진은 조금의 감정 변화도 내보이지 않고 차분히 대꾸했다.
“아름다움은 숫자 같은 것으로 기준을 삼지 않습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멍샤오둥은 여전히 불만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는 도저히 체면이 서질 않아요. 두웨성이 깜짝 놀랄 만한 대우가 아니라면 곤란하다고요.”
역시…… 당신은 그 관계를 즐기고 있어……. 선우진은 쀼루퉁해진 멍샤오둥의 입술을 보며 마음속으로 대꾸했다. 이 순간 그녀가 두웨성을 거론함으로써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두웨성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겹다던 말과 달리, 이 경극 배우는 사실…… 두웨성의 관심과 인내심 사이에서 결코 끝나지 않는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다. 동료 경극 배우와 결혼을 했던 것도, 하필이면 영국 조계에서 마찰을 빚은 것도, 그리고 지금…… 선우진 자신과 마주 앉아서 미국으로 떠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모두 다…… 그 일그러진 줄다리기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황제의 체면은 중요하겠지요.”
선우진은 납득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위대한 예술가와 친분을 쌓기 위한 대가로 1만 달러 정도는 큰돈도 아니고 말입니다. 좋습니다. 먼저, 영화 그리고 레코드 10만 장.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약속드리리다.”
“정말인가요? 그런 의미에서 약속의 술잔을 나눠요!”
기분이 좋아진 멍샤오둥이 위스키 잔을 높게 치켜들었다.
“이번 생일 축하 공연만 끝나면, 나는 당신을 따라 미국으로 갈 거예요! 두웨성에게도 그렇게 말하겠어요! 이제는 진짜 이별이라고!”
‘나를 이용해서 그의 질투를 유발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선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 그 시각, 선우진의 패커드를 몰고 나간 바바는 상하이 북쪽 해안의 일본해군 기지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음?”
기지 정문을 경비하던 일본해군 장교가 선우진의 자동차를 알아보고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
“자네는…… 사이온지 선생의 종자가 아닌가? 왜 혼자 온 게야? 사이온지 선생께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사이온지 유우야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에게 군함의 선실 한 칸을 내어주고 받는 수수료가, 봉급보다 더 큰 수입인 까닭이다.
“아니, 문제는 아니고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요. 저기…….”
자동차에서 내린 바바는 일단 확인질문부터 던졌다.
“그…… 이쪽에서 보낸 전보도, 프랑스 조계까지 들어갑니까?”
“당연하지 않겠나. 군사 전보이니 닿는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지.”
“그러면…… 해군기지 내에서 말이 새나갈 염려는 없을 테지요?”
“말이 새어 나간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해군 장교는 의미를 이해해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바바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전보의 내용이 프랑스 조계의 중국인 야쿠자들에게 소문이 난다거나…….”
“큭! 장난치는 겐가? 당연히 그런 일은 없네!”
해군장교는 코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왜 중국인 야쿠자들 따위와 얽히겠는가? 그런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과 말일세.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는가?”
“여기로 와서 전보를 좀 보내라고…… 도련님께서 말씀하셔서 말입니다요. 이게 소문이 나면 안 되는 기밀이라서…….”
바바는 그제야 셔츠 주머니 안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종이쪽지를 펴보였다.
“영어로군……. 벨이라는 서양인에게 보내시는 전보인 것 같기는 하네만…… 이 주소는 사이온지 선생과 어울릴 만한 곳이 아닌데?”
쪽지에 적힌 주소와 영어로 된 전보 내용을 훑어본 해군 장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온지 유우야가 이렇게 긴급하게 기밀 유지까지 해가며 전보를 보내는 곳이 부유층 거주지가 아니라는 게 이상하다…… 고 생각하던 해군 장교는, 돌연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아하! 여자 문제인가?”
“잘은 모르지만 그…… 그럴 겁니다요, 아마도…….”
바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군장교는 그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얼굴로 전보의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이 전보를 받는 즉시 와이탄 로열 클럽의 로비로 오시오……. 크으, 유래 없는 바람둥이라는 소문대로 엄청난 분이구만, 역시…….”
늘씬하고 세련된 단발머리 미녀와 함께 군함에서 내린 게 어제인데, 오늘 오후에 벌써 다른 여자를 불러내는 전보를 보내다니……. 게다가 그 기밀이 누설될까 봐 해군의 군사전보를 사사로운 연애에 이용하려는 발상을 하다니……. 이렇게 부지런하고 적극적이며, 또 발칙하게 연애활동을 하는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다.
“사이온지 선생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지. 아무 걱정 말게. 그런데…… 조금 전 자네가 중국인 야쿠자 운운했던 건 뭔 소리인가?”
해군 장교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양 여자를 꾀어내는데 중국 폭력조직에게 정보가 새어 나갈까 봐 걱정한다는 건…… 어째 얼핏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와이탄 로열 클럽은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곳이 아닌가.
“아, 저는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그게 제가 찾아온 두 번째 용건과 관계가 있습니다요.”
바바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해군 장교에게 내밀었다.
“도련님께서 그 일과 관련해 하야시 중위님께 이 봉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정말인가?”
해군 장교는 반색을 하며 가슴을 짚었다. 사이온지 유우야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뭔가를 개인적으로 부탁하려 한다는 게 너무 기뻐서…… 그의 심장은 승진심사 결과 발표를 기다릴 때보다 더욱 급하게 뛰었다. ***
“내가 재미있는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요? 하하하! 두웨성이 얼마나 미신을 신봉하는지?”
기분이 잔뜩 고양된 멍샤오둥은 깔깔 웃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술기운이 적당히 돌기 시작한 뒤부터 그녀는 웃음과 말이 더욱 많아졌고, 그중에는 정말로 은밀한 비밀들도 섞여 있었다.
“그가 엉덩이 바로 위에 뭘 숨겨놓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여기, 이 부분을 말하는 거예요.”
멍샤오둥은 몸소 일어서서 자신의 허리와 골반이 만나는 부분을 짚었다. 그런 뒤 선우진이 고민하거나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정답을 일러줬다.
“원숭이 머리가 세 개!”
세 손가락을 펴 보인 멍샤오둥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등을 짚고 말을 이었다.
“그걸 여기, 옷 속에 꿰매어 항상 몰래 숨기고 다녀요. 그 원숭이 머리를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죠.”
원숭이 머리라니, 몹시 기괴한 이야기였지만 선우진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농담으로 받았다.
“그런 곳에 원숭이 머리를 세 개나 숨길 수 있다니, 냄새는 차치하더라도 두웨성은 엉덩이가 엄청나게 큰 모양이군요.”
“하하하! 그냥 원숭이 머리를 잘라서 넣은 게 아니에요! 엉덩이가 크다니! 하하하!”
멍샤오둥은 짤깍짤깍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눈물까지 맺힐 만큼 한참 웃어대던 멍샤오둥은 다시 은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특별한 기술로 두개골을 빼내고 말린 것이어서 정말로 작아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 원숭이 머리 세 개가 언제나 그의 등 뒤쪽을 보고 있는 거죠.”
“그것 참 든든한 경호원이군요.”
“하하! 경호는 러시아인들이 하니까 원숭이는 필요 없어요. 그 원숭이 머리는 3면을 위한 부적이에요. 그렇게 하면 인생에서 가장 먹기 어려운 세 가지 국수가 모두 자기 것이 된다나요? 바로 체면, 정면, 장면.”
“잠깐, 잠깐…….”
선우진은 기분 좋게 취한 사람처럼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인지 다 알아듣지 못했는데…… 같은 중국인인 자네가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게. 원숭이 머리가 무슨 국수를 먹는다고?”
선우진은 통역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통역관은 멍샤오둥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원숭이 부적이 복을 불러오고 신의 가호로 적을 물리쳐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중국어에서는…… 얼굴과 국수의 발음이 모두 미엔으로 같습니다, 미스터 사이온지. 그것을 이용한 말장난입니다. 체면, 정면, 장면.”
다시 한 번 3면을 분명히 일러준 통역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일단 자신이 떳떳해야 하고, 애정관계가 원활해야 하고, 좋은 상황에 놓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각각 체면, 정면, 장면이라 표현한 것이지요.”
“호오, 그런 말이군.”
선우진은 알아들었다는 손짓을 했다. 메시지 자체는 수신, 제가, 치국평천하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 원숭이 머리 부적 같은 것이 곁들여지니 확실히 더 인상이 강렬하다.
“그 원숭이 부적의 힘이 엄청나서, 아무도 두웨성을 해칠 수 없어요.”
멍샤오둥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나 선우진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로 그 부적이 그리 영험하다면, 경호원을 둘 필요가 없겠지.’
이미 신물의 주인을 두 번이나 만나 본 그에게, 원숭이 머리 따위는 아무 두려움도 줄 수 없다. 상대가 그런 것에 의지하고 매달린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공략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그나저나…….’
테이블 아래에서 회중시계를 슬쩍 열어본 선우진은 혀를 찼다.
‘생각보다 더 조심스러운 자로군.’
끄나풀 애송이가 사라진 지도 이미 한참이 지났는데, 두웨성은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없다. 이 시간까지도 오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멍샤오둥이 얽혀 있어도, 공공 조계 안으로는 들어올 엄두를 못 낸다는 의미일 터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쳐들어가주지.’
마음을 정한 선우진은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나갑시다.”
선우진의 갑작스런 제안에 멍샤오둥도, 통역관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요, 미스터 사이온지?”
통역관이 물었다. 선우진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언제까지나 이 극장을 독점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이곳은 예술가들의 공간이니, 술을 더 마시려면 적당한 장소를 찾아야지.”
‘그 예술가들은 이미 다…… 둥 황제가 내쫓아버렸잖아요?’
어이없어하는 통역관의 얼굴이 항변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벌떡 일어나, 선우진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멋진 곳으로 가서 축하의 잔을 더 들고 싶군요.”
선우진은 멍샤오둥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말했다. 이미 한껏 기분이 좋아진 멍샤오둥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중국술을 마셔요! 그리고 내가 마작도 가르쳐줄게요, 친구!”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선우진은 그녀를 에스코트한 채 극장을 빠져나와 자동차 쪽으로 향했다. 멍샤오둥을 위해 롤스로이스의 문을 열어줄 때, 옆 건물 벽 뒤에 숨은 채 이쪽을 주시하는 중국인들의 불량한 시선이 느껴졌다.
‘부하들을 보내 감시는 하고 있었군.’
선우진은 놈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멍샤오둥을 자동차에 태우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자네는 저 차를 타게.”
선우진은 운전사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 뒤쪽에 대기 중인 병력 호송용 트럭을 가리켰다.
“하지만…… 미스터 사이온지, 저는…… 귀빈을 편안하게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차마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자동차 밖으로 걸어 나온 운전사가 조심스레 저항을 해 본다. 통역관도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저었다.
“미스터 사이온지, 뒷좌석이 훨씬 더 안락할 겁니다.”
그래봐야 술에 취한 고집쟁이 귀족의 연기를 하는 선우진을 이길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운전이 하고 싶어졌네. 그 결정에 불만이 있나?”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운전사가 도리질을 한다. 벌써 운전석을 떡 차지하고 앉은 선우진은 권위가 가득한 말투로 명령했다.
“나는 어디가 좋은 술집인지 모르니, 자네가 저 트럭 운전사와 의논해서 길을 안내하게. 상하이에서 가장 좋은 곳이어야 하네!”
“아, 알겠습니다!”
운전사는 고개를 꾸뻑 숙인 뒤, 재빨리 트럭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영국군들까지 모두 태운 트럭이 천천히 와이탄 북쪽을 향해 전진했다.
“후후후……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두웨성이 알면 아마 흥분해서 길길이 날뛸 거예요.”
뒷좌석에 앉은 멍샤오둥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흘렸다.
“공공 조계에서 술자리를 하지 말라고, 그가 계속 당부했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그쪽 술집에서는 술에 독이라도 푼답니까?”
트럭을 따라 천천히 자동차를 출발시킨 선우진이 조수석의 통역관을 통해 물었다. 그의 농담이 마음에 든 멍샤오둥은 의자를 두드리며 웃어댔다.
“하하하! 아니오.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얼마 전에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분 나쁜 일을 좀 겪었어요. 영국 군인들은 나를 존중하지 않거든요.”
톰슨 대위와의 마찰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선우진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허, 그래요? 그럼 프랑스로 갑시다!”
과장된 목소리로 대꾸한 선우진이, 갑자기 자동차의 운전대를 끝까지 홱 돌렸다. 끼기긱-! 타이어가 도로와 마찰하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동안, 그들을 태운 롤스로이스는 와이탄 도로의 반대방향으로 회전했다. 부우우으응-! 자동차의 기수를 남쪽으로 바꾼 선우진은, 가속페달을 끝까지 눌러 밟았다. 라디에이터 그릴 양쪽에 붙은 작은 영국국기가 바람에 날려 쉴 새 없이 펄럭인다. 엄청난 속도로 프랑스 조계를 향해 돌진하는 선우진을 보며 통역관이 울상을 지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미스터 사이온지? 그쪽은 프랑스 조계입니다!”
“무슨 상관인가?”
선우진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장난스레 눈썹을 까딱거렸다.
“프랑스 조계에도 술집 정도는 있겠지.”
그 말을 하는 사이, 롤스로이스는 영국 국기를 휘날리며 이미 프랑스 조계로 접어들었다. 마약왕을 잡으러, 마약왕의 작은 왕국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