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뉴욕으로 가는 두 가지 방법.2020.10.31.
1928년 9월의 5일도, 다른 달의 5일과 마찬가지로 한조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퍼져나갔다.
-일단 예의부터가 영 되먹질 않았다! 틀려먹었단 말이다! 높은 사람을 만날 때에 건성으로 고개만 숙이는 그런 놈들은, 인간 이하라고 평할 수밖에 없어!
프린스 호텔의 특실 내부도 한조의 연설로 쩌렁쩌렁 울리는 중이다. 턱까지 괸 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안경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탓인지 목소리가 조금은 더 굵어진 느낌인걸?”
“음, 마이크를 조종해서 그렇게 바꾸어 놓았다네. 한조가 좀 더 낮은 음성을 원하더군.”
느긋하게 대꾸하는 선우진을 향해 안경남자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서 신기한 듯 물었다.
“자네는 그런 일도 할 수 있나?”
“내가 하는 게 아닐세. 녹음기계를 조작하는 기사들이 한 것이지.”
선우진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안경남자는 여전히 감탄에 푹 빠진 표정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말로 놀랍군. 단순히 소리를 녹음했다가 전파로 내보는 것뿐 아니라 실제와 다르게 들리도록 한다니……. 대체 어느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이 그렇게 조용히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라디오 스피커에서는 낮게 꾸몄다는 예의 그 음성이 계속 떠들어댔다.
-그러니 내가 요즘 젊은이들에게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윗사람을 모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것들! 분골쇄신하라는 말이다! 견마지로를 다해야 해! 어떤 걸 하면 윗사람이 기뻐할지 항상 고민하고 실천으로 옮기라는 말이다! 실천! 그런 것이 아랫사람의 본분이라는 걸 잊지 않아야 해! 내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육군 제2보병여단의 참모로 재직했을 때는……
“아, 고저 그 아새끼래 말도 재별스럽게 많구나야! 이거이는 말단지가 따로 없단! 고저 했던 니야기래 하고 또 하고! 념불도 아니고 이게 뭐이네? 내래 면구스러워서리 우덩 이렇게 하려고 해도 못 하갓구만! 남들 다 듣도록 할 거이믄 미리 검둘이라도 돔 할 거이디! ……음? 와 기렇게 보는 거임매?”
반복되는 이야기에 지쳐 짜증을 부리다 선우진과 눈이 마주친 버스터가 물었다. 선우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저 연설을 알아듣는 것이 신기하고 좋아서 그랬네. 참으로 장하이.”
지난 가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일본어는커녕 조선말을 읽고 쓸 줄도 몰랐던 사람이, 이렇게 일본어 연설을 전부 다 이해한다는 건 참으로 대단하다. 버스터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새삼 실감이 됐다.
“기거이야…… 내래 혼다서 한 거이 아니디! 고저 저 녀성동무래 옆에서 알쾌주고, 저 아새끼래 번다소리래 늘어놓고 했으니까네 배운 거 아니갓서? 기리구 매까디게 할라믄 상구 멀었단!”
칭찬에 쑥스러워진 버스터는 아직 능숙하지 못하다는 겸손까지 부려가며 작게 도리질을 했다. 잠시 후 화려한 팡파르와 함께 총독의 연설이 끝나자, 안경남자가 라디오의 전원을 끄고 나서 말했다.
“제대로 녹음이 된 것이 맞나? 중간에 잡음이 조금 섞인 것 같긴 하네만,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네그려.”
“저도 못 들었어요. 정말 열심히 귀를 기울였는데…….”
라디오 가까운 자리에서 청취에 집중하던 나타샤도 미간을 찌푸렸다. 총독의 연설 사이에 뇌물거래 현장이 녹음됐다 하기에 꽤나 기대를 했는데, 이런 정도라면 문제가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선우진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맞습니다, 나타샤 양. 어느 부분인지 미리 알고 듣지 않으면 절대로 모를 겁니다. 마이크 음량의 분배가 8대 2 정도로 한조 쪽이 더 크게 되어있으니까요.”
“자네 말투는…… 자네는 어디 부분쯤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안경남자가 묻는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개의 와인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렇다네. 연설이 방송되기 전에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레코드를 돌려듣고 또 들었지. 요령만 알면 확실히 들을 수 있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잘 알아채기 힘들 뿐.”
“하지만 그러면 곤란한 것 아닌가? 한조의 비리를 자네 혼자 알고 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나? 라디오 연설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했어야지!”
“그렇게 하면 재미는 있겠으나, 내가 연루되어 곤란하네. 그리고 동시에 한조에게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고 말일세.”
“뇌물 거래를 하는 음성이 조선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는 것이……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 거라고? 그건 어째서 그런가?”
안경남자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깜빡이자, 그의 가장 든든한 벗이 검지를 세워 흔들어보였다.
“지금은 한조의 이번 연설을 녹음한 레코드가 한 장뿐이니 그렇다네. 그가 라디오방송국에 연락을 취해서 그 원본을 파기해버리면 증거가 사라지지. 그럼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 연설을 들었대도 별로 의미가 없네. 오해라고 발뺌을 하면 그만이니까.”
선우진은 나타샤부터 버스터까지 차례로 와인 잔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망신은 좀 당할지 몰라도, 총독 파면까지 끌고 가기는 어려워지네. 또 만약 재판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를 고발하는 입장의 증인으로 설 총독부 관료가 있겠나?”
“일리는 있네만 그럼 자네는……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셈인가?”
안경남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분명히 거래 현장을 녹음했는데도 아직 사용할 수 없다니……. 조선 총독을 무너뜨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이 된다. 선우진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도망칠 수도, 감출 수도 없을 지경까지 몰아넣은 뒤에 터뜨려야지. 그자가 가진 모든 권세를 다 동원해도 도저히 수습을 할 수 없도록. 한조가 몰락할 그날을…… 지금 미리 축하하세나.”
짧은 건배사를 읊은 선우진이 와인 잔을 기울였다. 그를 따라 크게 한 모금을 들이켠 버스터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무래 어버리 크다는 거이야 딘닥부터 알고 있었디마는, 조선 총독을 날리는 문데를 개디구 기딴 식으루다 흥겁게 니바구하는 사람은 조선에 동무 하나뿐일 거란.”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총독을 날리겠다는 둥 떠들어대면 말 같지 않은 허풍으로 치부해버릴 일이지만, 이 영민한 동무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상하이로 김구와 윤봉길을 무사히 빼돌렸을 뿐 아니라, 감옥에 갇혀 있던 윤봉길의 가족도 불과 며칠 만에 주먹 한 번 쓰지 않고 빼내주는 마술을 부렸다.
“칭찬은 고맙네만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날리는 것은 아닐세. 한조가 스스로의 욕망 때문에 몰락하는 형상인 게지. ……참.”
대단한 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꾸한 선우진이 문득 주제를 바꾸는 질문을 던졌다.
“어제 내가 보내준 책자는 확인해보았나?”
“아, 그것 말인가?”
안경남자가 여러 권의 책들로 어지럽게 덮인 탁자 한 구석에서 여객선 홍보책자 꾸러미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타샤 양과 함께 살펴보기는 했는데…… 이것 꽤 결정하기 어렵더군. 둘 다 장단점이 뚜렷해서 말이지.”
안경남자는 입가를 매만지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버스터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뭐이를 결덩하라는 거이네?”
“아, 자네는 아직 모르나?”
선우진이 묻자, 안경남자가 버스터 대신 대답을 들려주었다.
“저 친구는 요즘 영어공부를 하느라 하루 종일 미국 선교사와 함께 지내다가 야심한 밤이나 되어야 들어온다네. 얼굴 보기도 쉽지 않으이.”
“미주리고주리 닐러 바치디 말란! 내래 민망하디 않네!”
버스터는 부끄러워하며 안경남자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선우진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는군. 멋지네.”
“기딴 칭찬이래 맞갖디 않으니까네 그만두란! 내래 상기도 그 미국 아바이래 말하는 거이 반절도 못 알아듣갔서.”
“절반을 알아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차츰 나머지 절반도 차오를 테지…….”
버스터를 칭찬해 준 선우진은 여객선 홍보책자 꾸러미를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조선에서 미국의 뉴욕이라는 도시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네. 하나는 우리의 서쪽으로 향하는 방법일세.”
선우진은 한 무더기의 책자들을 한쪽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좀 복잡한 여정이라네. 먼저 인천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남중국해와 아라비아 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해 아프리카를 넘은 뒤, 다시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서 영국의 리버풀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호화유람선을 타는 방법이지.”
“고저 말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히는구나야! 머이래 기리케 애빠디고 번답한 거이냔?”
수많은 지명이 빠르게 지나가자 버스터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선우진은 세계지도가 그려진 책자를 펴서 이동할 경로를 손가락으로 직접 그려보였다.
“그 번잡스러움이 이 항로의 장점이자 단점일세. 이런 식으로 가는 동안 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도시에 잠시나마 들러볼 수 있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일이 꽤 많이 소요되네.”
“꽤라는 거이 며칠이나 되는 거냔?”
“음, 거꾸로 역산을 해볼까? 일단 뉴욕에서 출발해 리버풀까지 도착하는 데에 약 8일 정도가 걸리네.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고 인도까지 닿는 데 2주, 인도에서 홍콩까지는 5일, 홍콩에서 상하이를 거쳐 인천까지 오는 데 아마 또 4일. 여기에 정박지에서 배를 갈아타기 위해 하루나 이틀씩 머무는 시간을 더해야만 하네. 그러면…… 꼬박 6주는 걸리겠군.”
“기러믄 다른 방법은 없는 거이네?”
버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6주 동안이나 계속 배에 타고 내리기만 반복해야 하다니,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다. 선우진은 또 다른 책자를 버스터가 보기 편한 방향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다른 방법은 인천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를 거친 뒤, 오사카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것일세. 그 기간이 총 3주. 거기에서 다시 파나마 운하를 지나 뉴욕까지 도착하기까지 2주가 걸린다네. 이 항로가 조금 더 빠르고, 대형 고급 여객선만을 이용하는 것이어서 안락하기도 하지.”
“하지만 단점은…… 망망대해만 계속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겠군그래.”
안경남자가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음. 오사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닿을 때까지 사방 어디를 보아도 검푸른 바다뿐일 테니 말이네.”
“뉴욕이라는 도시의 땅을 밟아보려면 아무리 빨라도 5주가 걸려야 한다니, 미국은 정말 먼 나라군요.”
나타샤가 감탄의 의미를 담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하이까지 이틀 동안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세상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낄 수 있었는데, 5주라니……! 그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보라우, 동무. 내래 니바구만 들어도 돔이 쑤시는 기분인데, 더 빠른 길이래 없냔?”
버스터가 숨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나간 내 친구 하워드가 선보였던 극단적으로 빠른 방법이 있긴 하네만, 이건 권할 수 없을 듯하이.”
“어째서 못 권하는 디는 나중 문데고, 기거이 뭔디 어디 들어보기나 하잔!”
“샌프란시스코에서 알래스카, 알래스카에서 캄차카 반도, 캄차카 반도에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비행기를 몰아 날아온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청진으로 넘어와 기차를 타더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아 미국에서 경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걸 대입해보면 2주 안에 뉴욕까지도 갈 수 있겠지.”
“기러믄 우리도 고저 기렇게 하믄 되디 않갔네?”
버스터가 반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선우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냉정하게 손을 저었다.
“뇌우를 만날 때마다 추락을 걱정해야 하는 위태로운 탈것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를 태울 수는 없네. 게다가 너무 흔들림이 심해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장시간 비행이라는 것이 고문처럼 느껴진다는군. 뉴욕에 도착했을 때 녹초가 되어서는 곤란하네. 우리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니 말일세.”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는 건가?”
안경남자가 물었다. 선우진은 곧바로 답을 들려줬다.
“서쪽 항로를 택할 거라면 서두르는 것이 좋겠네. 6주나 걸린다고 하니 나흘 뒤에는 출발을 해야지.”
뉴욕 주지사 선거는 11월 6일. 아무리 후원금으로 인심을 사 놓았대도 선거 전에 미리 만나 안면을 터두지 않으면, 앞으로 대단한 영향력은 끼칠 수 없다.
“나흘?”
급박한 일정을 들은 안경남자는 깜짝 놀라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아직 여행허가증도 마련해놓지 않았는데! 아니, 그런 것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떤지도 모르겠네! 조선인이 미국까지 가겠다는 걸 총독부에서 허가해줄까?”
“자네들의 여행허가증은 이미 다 준비해뒀네.”
선우진은 동료들을 안심시킨 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일본인 신분으로 위조된 것이지만…… 총독의 직인까지 찍혔으니 진짜 신분증과 진배없지. 자네들은 그저 국새와 옷가지 정도만 챙기면 될 걸세.”
“하지만…… 자그마치 6주 동안이나 이어질 항해인데, 그 정도로 괜찮을까?”
안경남자의 얼굴에 걱정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선우진은 와인 잔을 마저 비우고 일어섰다.
“나머지는 내가 준비함세.”
“이 사람, 조금 전에 와놓고 또 어디를 가려는 겐가?”
안경남자가 너무 빠른 이별을 아쉬워하며 물었다. 선우진은 싱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기를 치는 인간은 원래 바쁜 법이라네, 이해해주게. 내일 또 들르지.”
그 역시 이렇게 바삐 일어서는 것이 아쉽지만, 곧 항해가 시작되면 흉금을 튼 대화는 그때 길게 나눌 수 있으리라. 어쨌든 지금은 또 다른 거짓의 미끼를 드리우러 가야만 하는 시간이다. ***
“오봉 연회는 어땠습니까?”
평소의 포커 멤버들이자 경마장 운영진들과 오랜만에 만난 선우진이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오봉 연회라…….”
구니토미 소장이 입술을 삐죽였다.
“……참으로 무료한 연회였지요. 연설은 길지, 귀빈들은 무게만 잡고 있어서 딱딱하지, 한편으로는 뇌물을 바치라고 닦달을 해대지……. 사이온지 선생이 더욱 애틋하게 그리운 밤이었습니다.”
“그래도…….”
미우라 은행장이 구니토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구니토미 소장께서는 요즘 더 많은 이득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주식현물취인소의 지점을 내는 것에 대한 허가를 취득하셨다고……. 사이토 총독 각하께서는 끝내 허락하시지 않았던 일 아닙니까?”
“그러면 뭘 합니까? 작은 지점 하나 내기 위해 바친 뇌물이 얼마인데요.”
구니토미는 생각하기에도 진저리가 나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시바타 비서에게 얼마, 총독 후원금으로 또 얼마, 사업진행비로 얼마! 한조 총독 각하께 비밀리에 또 얼마! 일이 성사되고 난 뒤에는 감사금까지 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들어간 돈을 다 회수하려면 앞으로 3년은 걸릴 겁니다. 도중에 정말이지,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니까요. 이미 들어간 돈이 너무 많아서 발을 빼지 못한 것뿐입니다.”
“뇌물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여러 번 뜯어가는 분은 드물긴 하지요. 한조 총독 각하께서는 좀 다른 의미로 대단하십니다.”
미우라가 점잖은 투로 한조를 비웃자, 미츠코시 백화점 사장 우라사키도 인상을 썼다.
“뇌물도 뇌물이지만, 저는 그…… 본토에서 스기우라 공작 쪽 사람들이 방문할 때마다 설설 기는 모습이 더 보기 싫습니다. 좀 우습지 않습니까? 아무리 스기우라 공작께서 현재 일본을 쥐고 흔드는 막후 실세 중 한 명이라지만…… 이쪽 역시 현직 조선 총독이란 말입니다. 좀 더 뭐랄까…… 위엄을 갖춰 주셨으면 하는 것이 그리도 무리한 부탁일까요?”
“확실히…… 스기우라 공작 쪽 사람들의 조선 방문이 잦아지기는 했습니다. 사이토 총독 각하 치하에서라면 그런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구니토미 역시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카모토 중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육군의 수뇌부가 의기양양하게 조선을 찾는 건, 불안한 징조인 동시에 불쾌한 일이기도 했다. 놈들의 거친 무례함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이번 오봉 연회에도 같잖은 육군 장교 몇 놈이 스기우라 공작의 축전을 들고 찾아와, 연회가 벌어지는 내내 점령군처럼 굴며 성질을 긁어댔다.
“이래저래 따져 봐도…….”
미우라는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부터 그 연회에 불참하시기로 한 사이온지 선생이 현명하셨던 게지요.”
“그런데…… 사이온지 선생! 우리에게만 슬쩍 그 소문 속의 숙녀가 누구신지 좀 공개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계속 기회를 엿보던 우라사키가 혈색이 좋은 볼을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이며 물었다. 선우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정색을 했다.
“소문 속의 숙녀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소이다만.”
“하하! 왜 이러십니까, 사이온지 선생! 저희도 다 귀가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밀회를 즐기셨던 그 숙녀분 말입니다!”
우라사키가 무슨 대단한 소식이라도 전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미우라도 점잖은 말투로 한마디 거들었다.
“세간에서는 황실의 공주님이 아니냐고 수군댑니다만…….”
“하긴…… 사이토 총독 각하께서도, 지금의 천황 폐하와 젊은 시절 우정을 쌓으셨던 사이지요. 그렇다면 공주님의 안내역을 하신 겝니까, 사이온지 선생께선?”
구니토미는 아예 공주라는 단정을 지어놓고 질문을 던졌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히 널리 퍼졌군.’
경성 사교계의 최정점에 있는 세 사람이 이 정도로 관심을 갖는 이야기라면, 머지않아 선우진이 바라던 것처럼 조선 전체로 소문이 번져나갈 것이다.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으셨소?”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으면서도, 선우진은 두려운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우라사키가 두 팔을 활짝 벌려보였다.
“사방에서 다들 이야기합니다! 프랑스 조계에서 훤칠한 일본귀족이 날씬한 모던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산책을 즐겼다고. 그런데 그 시점이 공교롭게도 사이온지 선생께서 상하이에 다녀오신 때와 같더란 말이지요. 훤칠한…… 일본귀족. 사이온지 선생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우라사키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선우진을 가리켰다. 선우진은 손을 저으며 한층 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니……. 나는…… 그 날씬한 모던 걸이 공주님이라는 소문의 진원지를 묻는 겁니다.”
물론 조선에 그 소문을 퍼뜨린 건 다름 아닌 선우진 본인이다.
“그야…… 영국 영사관 관료들과 프랑스 영사관 관료들이 앞뒤에서 마차를 호위했다고 하니,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외교적 귀빈으로서 그만큼의 특권을 누리실 만한 분은…….”
우라사키가 선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길게 늘이자, 미우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황실의 공주님 외에는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허……! 이거 큰일이군. 이래서 내가 좀 은밀히 다니자고 그렇게 간청을 드렸던 것인데…….”
선우진은 진심으로 난감하다는 듯 얼굴을 가렸다. 어지간해서는 표정의 변화조차 잘 보이지 않는 그가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하자, 모두 깜짝 놀랐다.
“아니, 사이온지 선생! 대체 왜 그러십니까?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인지요?”
우라사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만에 하나, 이 일로 사이온지 유우야와 관계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그는 인생 최고의 포커 친구를 잃게 된다.
“아니, 우라사키 사장은 아무 잘못도 없소이다. 잘못은…… 너무 고귀한 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나의 우유부단함에 있을 뿐.”
“너무 고귀한 분! 그, 그렇다면 정말로 황실의…….”
우라사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우진은 그의 말을 끊으며 간곡하게 부탁하는 시늉을 했다.
“부디…… 그 말은 입에 담지 말아주십시오. 혹시라도 훗날 그분의 혼사에서 구설이라도 생기면 저는 정말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선우진의 입에서 공주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최고로 강력한 긍정! 선우진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다들 이 소문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그래. 널리 퍼뜨려라. 사이온지 유우야가 일본의 공주와 상하이에서 밀회를 즐겼다고.’
선우진은 세 사람을 보며 마음속으로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뿌려놓은 풍문의 씨앗이 내년 봄 조선인들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행복으로 피어날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