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5. 모르는 게 없는 남자, 의지할 데 없는 여자. (315/459)

315. 모르는 게 없는 남자, 의지할 데 없는 여자.2020.12.16.

지이익-! 지이익-! 휴즈가 화강암 기둥에 박혀 있는 사자 문양의 턱 부분을 누르자, 부근에서 전기 도어 벨이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0757615845.jpg“휴즈 씨시군요.”

잠시 후 문지기 숙소에서 걸어 나온 직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고, 높디높은 철창살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16550757615845.jpg“들어오시지요, 이쪽 신사분께서는……?”

16550757615854.jpg“일본의 귀족이자 대부호 사이온지 유우야 씨일세. 나와 공동으로 이 저택을 임대하신 분이지.”

그러니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서 모시게……. 휴즈의 엄한 눈빛이 뒷말을 대신했다. 직원은 선우진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16550757615845.jpg“자동차를 부를까요, 휴즈 씨?”

문지기 직원이 물었다. 휴즈는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

16550757615854.jpg“아니, 날씨가 좋으니 그냥 걷지. 사이온지 씨에게 집의 구조도 보여드릴 겸.”

넓군……. 길게 쭉 뻗은 화강암 바닥 진입로를 걸어가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정원에 일렬로 이어진 대형 분수만 해도 세 개나 되고, 그 너머에는 작은 분수와 구름다리까지 배치되어 있다. 석 달 임대하는 가격이 2만 달러라고 해서 어떤 수준일까 궁금했는데, 이 정도면 단순히 저택이 아니라 작은 성에 가깝다.

16550757615854.jpg“영국인들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서 그렇다네, 아이스 맨.”

선우진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휴즈가 ‘알아, 좀 과하지.’하는 표정으로 설명을 곁들였다.

16550757615854.jpg“성공한 사업가들이 자꾸 영국 귀족의 대저택을 흉내 내서 비슷한 걸 짓는다니까? 마치 자신의 가문이 아주 오래 전부터 부유한 명문가였던 것처럼 말이야. 이 저택도 마찬가지고.”

1655075761587.png“휴스턴에 있는 자네 집은 어떤가?”

16550757615854.jpg“나도 속물 미국 부자이기는 하지만, 텍사스 쪽은 뭐랄까…… 이렇게 화려한 걸 지향하지 않네. 이런 식으로 잘 가꿔진 정원은 없지만, 대신 부지는 훨씬 더 넓지. 그냥 말을 달리기에 좋은 광활한 평원에 붉은 벽돌집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걸세.”

환하게 조명이 밝혀진 분수대 옆을 지나며 휴즈가 대꾸했다. 이 저택의 정원만 해도 걸어 다니기에는 불편할 만큼 넓은데, 이보다 훨씬 더 광활하다니…….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큰지 새삼 절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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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57615854.jpg“조금은 낯간지러울 만큼 사치스럽지만, 파티를 열 때에는 진가를 발휘할 걸세. 직원들의 숙소를 제외하고도 손님용 침실이 열다섯 개나 되니, 우리 모두가 편안하게 지내는 데 아무 문제도 없을 테고……. 아 참, 그러고 보니 우리도 자동차를 더 구입해야 할 것 같은데…….”

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휴즈가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캐딜락 세 대면 한 달여의 뉴욕 살이 정도는 충분히 풍족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갑자기 나타난 조선의 황태자 일행 때문에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제는 적어도 한 대, 아니면 두 대 정도의 자동차가 더 필요해졌다.

1655075761587.png“사흘 뒤에는 주문해 놓은 자동차들이 이곳 항구에 도착할 예정일세. 걱정할 필요 없네, 하워드.”

선우진의 대답에 휴즈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16550757615854.jpg“자동차들……이라고? 한 대가 아니군? 게다가 이쪽 항구에 도착한다는 걸 보면 유럽에서 오는 모양이구만! 어떤 차인가?”

1655075761587.png“음, 히스파노 수이자를 두 대 구입했네. 한 대로는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아서.”

16550757615854.jpg“오, 하느님……! 이 저택 주인보다 더 재수 없는 부자처럼 굴잖아, 자네! 그렇게까지 과하게 귀족 티를 낼 있나? 패커드 정도로도 충분할 텐데.”

선우진의 입에서 최고가의 자동차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자 휴즈는 질린다는 듯 입을 벌렸다. 선우진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1655075761587.png“황태자를 위한 자동차이니 귀족인 티를 낼 필요가 있지.”

16550757615854.jpg“자네, 피에르를 위해서 그 정도까지 투자를 아끼지 않는 건가…….”

그제야 납득한 하워드 휴즈가 입가를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57615854.jpg“뉴욕에서 히스파노 수이자를 몰고 다니는 동양인이라니…… 눈길 하나는 확실하게 끌겠군, 하하하! 그나저나…… 이 친구들, 빌리와 저녁은 잘 먹었는지 살짝 걱정이 되는걸?”

파안대소하던 휴즈의 눈빛에 일말의 긴장이 어렸다. 아무리 빌리가 사교적인 성격이라고 해도, 초면인 사람들과 함께 낯선 집에서 함께 먹는 저녁 만찬이라는 건 어색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최악의 경우 그녀는 당장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자고 투정을 부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16550757643932.jpg“아하하하하!”

불이 환하게 밝혀진 저택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그의 우려를 깨끗하게 불식시켜버렸다.

16550757615854.jpg“이 아가씨들…… 어지간히 신이 났는데?”

나타샤와 빌리의 들뜬 음성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휴즈도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16550757615845.jpg“하워드! 유우야!”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빌리가 여전히 활짝 웃으며 달려와 그들을 안으로 끌어당겼다.

1655075766312.png“왔군. 민주당 사무실에 들렀던 일은 잘 되었나?”

나타샤, 버스터와 함께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안경남자도 손을 들어 그들을 반겼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과 술잔들만 보아도, 그들이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선우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빌리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16550757615845.jpg“하워드, 피에르에게 아무 거라도 물어봐요! 빨리!”

그녀의 뺨에 피어오른 홍조는 단순히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16550757615854.jpg“무슨 소리야, 빌리?”

휴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자, 빌리는 그의 품에 안겨 두 팔을 활짝 벌렸다.

16550757615845.jpg“피에르는 다 맞춰! 정말 뭐든지 다 알고 있어! ……볼래요?”

재미있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철지난 코스모폴리탄 잡지를 뒤적이던 빌리가 뒤쪽의 한 페이지를 짚었다.

16550757615845.jpg“아, 그래! 이거면 되겠어! ……자, 피에르 질문할게요!”

1655075766312.png“……더 하는 겁니까? 꽤 오래 한 것 같은데…….”

안경남자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어도 빌리는 고집스레 검지를 흔들어댔다.

16550757615845.jpg“하워드는 못 봤잖아요! 놀라게 만들어 주자고요! 작년에 할리우드에서 흥행 1위를 기록한 영화는? 빨리 맞춰 봐요! 제발요!”

1655075766312.png“1927년 할리우드 흥행 1위 작품은 파라마운트사에서 제작한 〈윙스〉요.”

안경남자가 별 고민도 없이 바로 답을 내놓자, 빌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16550757615845.jpg“그 〈윙스〉의 감독과 주연은?”

1655075766312.png“윌리엄 웰맨 감독, 클라라 보우, 찰스 로저스, 리처드 알렌, 게리 쿠퍼 주연.”

16550757615845.jpg“봤지, 하워드? 봤지요? 하하하하! 이렇다니까! 피에르는 정말로 다 알아!”

빌리는 이 상황이 신기해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휴즈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16550757615854.jpg“그 친구가 아는 게 많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빌리. 하지만 그 정도는 너무 쉽잖아. 영화에 관심이 있는 십 대들도 맞출 만한 문제라고.”

16550757615845.jpg“호오! 챔피언에게 도전하시는 건가요, 하워드?”

빌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휴즈를 도발한 뒤, 침을 묻혀 잡지의 책장을 넘겼다.

16550757615845.jpg“좋아요, 그럼 이번 문제는 먼저 답을 맞히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으로 가보자고요!”

멋대로 다음 문제를 정한 빌리는 휴즈가 볼 수 없도록 장난스럽게 책을 세웠다.

16550757615854.jpg“나는 그런 유치한 경쟁 같은 건…….”

16550757615845.jpg“문제입니다……. 소설가 O. 헨리의 필명은 이 도시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정했어요, 이 도시의 지명은? 빨리 알려줘요, 피에르! 하워드를 이기자고요!”

휴즈가 귀찮다는 듯 거절의 의사를 밝혀도, 빌리는 빠르게 질문을 읊어나갔다. 안경남자는 몇 초간 휴즈를 위해 시간을 준 뒤에야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태도로 대답했다.

1655075766312.png“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뉴올리언스에서 친구와 함께 신문을 넘기다가 O. 헨리라는 필명을 지어냈다고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소.”

16550757615845.jpg“하하하하! 봤지, 하워드? 피에르는 기적이야! 기적이라고! 이런 사람 본 적 있어요?”

빌리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원래부터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 휴즈가 이런 패배를 받아들일 리 없다.

16550757615854.jpg“문학잡지에 나온 가십 기사 같은 건 지식이라고 할 수도 없어, 빌리.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놀리기 위해 당신들이 모두 사전에 협의를 해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16550757615845.jpg“어머 세상에, 하워드…….”

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도리질을 했다.

16550757615845.jpg“피에르가 천재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지금 우리 모두를 다 사기꾼으로 모는 거예요? 정 그렇게 못 믿겠으면 당신이 문제를 내 봐요.”

16550757615854.jpg“딱히 그럴 의도는 없지만, 빌리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라면…….”

휴즈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잡지와 책들을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항공 역학이지만, 전문지식 계산 문제를 내는 건 너무 치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만약 거기에서도 상대가 답을 맞춰버리면 그건 진짜 추한 패배가 되리라. 그러니 평범한 상식이라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문제를 골라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정말로 맞히기 어려울 수준의…….

16550757615854.jpg“이게 좋겠군…….”

심각한 얼굴로 출제용 책을 고르던 휴즈는 결국 선반 위에 장식되어 있던 성경을 집어 들었다. 낯선 이름이 잔뜩 나오는 이 책은 난제의 보고다. 앞뒤로 책장을 뒤적이던 휴즈가 검지로 책의 구절을 짚은 채 물었다.

16550757615854.jpg“에…… 로마서 16장 7절에서 이 사람들에게 문안하라고 하는데…….”

1655075766312.png“그건 성경 전체에서 보자면 그리 중요한 맥락의 대목이 아닌데…….”

안경남자가 무의미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휴즈는 근엄하게 대꾸했다.

16550757615854.jpg“이상한 핑계 대지 말고 모르겠으면 그냥 모른다고 하게, 피에르.”

1655075766312.png“알고는 있네. 그 두 사람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일세.”

16550757615854.jpg“하하! 아닌데! 정답은 우르바노와 스다구라네! 자네도 만능은 아닌 거야, 피에르! 한번 보고 나면 절대로 잊어먹지 않는 사진과 같은 기억력이라는 건 환상이라고!”

휴즈는 검지를 흔들며 기분 좋게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안경남자의 다음 말이 그를 경직시켰다.

1655075766312.png“……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건 16장 9절일세, 하워드. 아마도 숫자를 잘못 읽은 것 같군.”

16550757615854.jpg“……윽!”

눈이 휘둥그레진 휴즈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두르다가 정말로 깨알처럼 박힌 숫자를 잘못 읽었다.

16550757615854.jpg“……젠장! 피에르, 자넨 정말 미쳤군. 성경도 통째로 외운 건가? 기독교도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말일세!”

그는 서둘러 성경을 덮은 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면 더 물어볼 필요조차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16550757615854.jpg“천재라는 걸 인정할 테니, 엘레노어 루즈벨트에 관해서 일러주기나 하게.”

휴즈는 빌리와 함께 안락의자에 걸터앉으며 피에르를 향해 손을 벌렸다. 안경남자는 이상하다는 투로 물었다.

1655075766312.png“자네들은 지금까지 루즈벨트와 함께 있었던 게 아닌가?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랬나?”

16550757615854.jpg“처음 만난 남자에게, 그의 아내 이야기를 캐물으라고? 진심인가, 피에르?”

휴즈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르는 것이라고는 없는 남자가 왜 이런 부분에는 이렇게 무심한 것인지 모르겠다. 안경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바꿨다.

1655075766312.png“뉴요커 잡지를 읽은 적이 없나, 하워드? 거기에 엘레노어에 관해 자세히 다룬 기사가 몇 번이나 실렸네만…….”

16550757615854.jpg“그따위 지역 잡지 같은 건 관심도 없네. 내가 주요기사로 다뤄진다면 모를까.”

휴즈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피에르는 이번에도 별 고민조차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1655075766312.png“엘레노어 루즈벨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즈벨트 가문 사람일세. 26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카이기도 하지.”

1655075784213.png“어머, 그럼…… 같은 성끼리 결혼한 경우네요?”

나타샤가 조금 놀라자, 피에르는 손을 저었다.

1655075766312.png“성은 같지만 따져 보면 아주 먼 친척이어서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입니다, 나타샤 양. 물론 남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가까이 지내던 사이이지만요.”

16550757615854.jpg“저기…… 피에르.”

술잔으로 입술을 축인 휴즈가 조금 서둘러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16550757615854.jpg“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것보다 좀 더 구체적인 정보일세.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뭐…… 그런 것 있지 않나?”

1655075761587.png“루즈벨트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서 자네의 조언이 필요한 상황이네, 피에르.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면 이 선거에서는 이길 수가 없을 걸세.”

거실 뒤편의 대형 창을 통해 밤바다를 내다보고 있던 선우진이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피에르는 안경을 밀어 올려 쓰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5766312.png“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일단 사라 루즈벨트 때문에라도 그들의 결혼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삐걱거렸네.”

1655075784213.png“사라 루즈벨트요?”

나타샤가 그건 또 누구죠? 하는 표정으로 묻자, 안경남자는 친절하게 답을 일러주었다.

1655075766312.png“사라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어머니입니다, 나타샤 양. 중국과의 불법 아편무역으로 큰 부를 쌓은 델라노 가문의 딸이지요. 루즈벨트 후보의 이름 중간에 들어간 D는 그 델라노의 약자입니다. ……이 사라라는 여성의 성격은 참으로 독특하네.”

다시 휴즈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안경남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1655075766312.png“그녀는 자신이 낳은 유일한 아들 프랭크에게 엄청나게 헌신적이었지만, 동시에 집착이 심하기도 했지. 예를 들어서 그녀는 프랭크에게 직접 읽고 쓰기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그를 하버드에 보내기 위해 보스턴으로 이사까지 했을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성인이 된 뒤에도 프랭크를 품에서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네.”

16550757615854.jpg“품에서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게 뭔 소리인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휴즈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안경남자는 그를 가리켰다.

1655075766312.png“자네가 아버지를 잃었던 때와 비슷한 나이에 프랭크도 부친을 여의었네.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였지. 하지만 그는 스무 살이 된 이후에도 유산을 모두 물려받지 못했다네. 바로 그의 어머니인 사라가 경제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일세. 뿐만 아니라 프랭크는 성인이 된 뒤에도 어머니와 함께 거주했네.”

16550757615854.jpg“그건 좀…… 심한걸?”

조금 놀란 휴즈와 빌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개척시대라면 모를까, 20세기 뉴욕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성인 남자라는 건 어딘가 좀 이상하다. 심지어 독립할 만한 충분한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16550757615854.jpg“그래서…… 엘레노어와 결혼을 하면서 뒤늦게 독립했나?”

휴즈가 물었다. 안경남자는 천천히 도리질을 했다.

1655075766312.png“아니, 결혼 후에도 함께 살았다고 봐야 옳을 걸세. 그러니까 이런 걸세…….”

안경남자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컵들 중 하나를 중앙으로 옮겨놓으며 말을 이었다.

1655075766312.png“사라는 애초에 자신의 아들이 엘레노어와 결혼하는 걸 반대했네. 하지만 시어도어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고 싶었던 프랭크는, 엘레노어와의 결혼을 강행했지. 자신보다 그녀가 시어도어와 훨씬 더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이지. 결국 사라는 결혼을 인정하고 그들이 신혼 살림을 차릴 집을 선물했네.”

16550757615854.jpg“그럼…… 문제가 다 해결된 것 아닌가?”

안경남자가 신혼집으로 가정하고 놓아둔 유리컵을 바라보며 하워드가 말했다. 안경남자는 또 한 개의 유리컵을 그 곁에 바짝 붙여놓았다.

1655075766312.png“그리고 사라는 그 바로 옆에 똑같은 모양의 집을 한 채 더 지었네. 심지어 두 집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일세. 사라의 집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프랭크의 신혼 살림집으로 이어지는 것이지. 그런 걸…… 독립이라 부를 수 있겠나?”

16550757615845.jpg“……소름끼쳐. 기분이 나빠지려고 해요, 피에르.”

빌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결혼을 반대했던 시어머니가 바로 옆집에서 함께 살려 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16550757886338.png“오마니 봉양이래 하는 거이 무시기 기렇게 재벨스러운 일이냔? 기러믄 내싸둬야 옳갔냔?”

대강의 대화 내용을 알아들은 버스터가 유교적 사고를 내비쳐봐야 아무도 동의해주지 않는다. 선우진은 손을 들어 조선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걸 영어로 전했다.

1655075761587.png“미국인들은 성인이 되면 부모의 슬하에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버스터. 이 나라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예의바른 아들의 행동일세. 물론 경제적 능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

16550757615854.jpg“예의를 떠나서…… 대부분의 명문가라면 자신의 딸이 그런 대접을 받는 걸 용납하지 않지.”

휴즈도 선우진의 의견에 동의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빌리는 그제야 구원을 찾았다는 듯 피에르에게 물었다.

16550757615845.jpg“그래요! 엘레노어의 부모님은 왜 가만히 있었죠? 당연히 사라에게 항의를 해야죠!”

1655075766312.png“엘레노어는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소.”

16550757615845.jpg“아……! 너무 끔찍한 이야기네요……. 가엾어라.”

엘레노어에게 감정이 이입된 빌리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여자여서 사라가 멋대로 대했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난다.

1655075766312.png“실제로 엘레노어는 지금까지 늘 기죽은 채 살았다고 하오. 십 대 초반을 런던의 기숙학교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쪽에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죠. 어쨌거나 사라와 엘레노어는 기본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 상성이라오.”

16550757615854.jpg“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1655075766312.png“사라는 항해에 대단한 로망을 가진 사람일세. 어린 시절을 홍콩에서 보내며 그곳에서 배를 타고 여행을 즐긴 탓이지. 반면에 엘레노어는 유년 시절 겪었던 여객선 사고의 악몽 때문에 항해 자체를 끔찍하게 두려워한다네. 그래서 결혼을 반대할 때 사라는 프랭크와 함께 카리브해로 유람선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 엘레노어가 따라올 수 없도록 말일세. 매사에 이런 식이지. 결혼, 출산, 육아…… 모든 부분에서 두 여자는 계속 충돌을 해 왔네. 아니, 충돌이라기보다는 사라의 일방적인 공세에 가깝지만.”

1655075761587.png“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사라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가만히 듣고 있던 선우진이 물었다. 이십 대 초반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사십이 넘은 사람이 시어머니의 강압에 계속 순종만 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안경남자는 이번에도 바로 답을 들려주었다.

1655075766312.png“그건…… 사라와 엘레노어의 관계가 의사모녀 형태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일세. 부모를 모두 잃은 뒤 엘레노어는 친척 아주머니인 사라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고, 그때 구축된 심리적 의존성이 아직도 꽤 강력하게 작용을 하는 것일 테지.”

16550757615854.jpg“여러모로 숨이 턱턱 막히는군. 그런 상황에서 프랭크까지…….”

휴즈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선우진도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렇게 폭군에 가까운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남편은 다른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으니…… 루즈벨트와의 사이가 좋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터다.

1655075761587.png“그렇다면 지금도 엘레노어는 사라의 조언을 잘 따르나?”

선우진이 물었다. 만약 아직도 그 의존적인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 루즈벨트의 어머니에게 접근하는 편이 오히려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1655075766312.png“아니…… 그렇지 않을 걸세.”

안경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1655075766312.png“엘레노어는 1924년, 현 주지사이자 대통령 후보인 알 스미스가 당선될 때 아주 큰 역할을 수행했지. 그녀는 그것을 계기로 단번에 민주당의 주요인사로 올라섰고, 당연히 시어머니와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우위를 점했네.”

16550757615854.jpg“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피에르…….”

휴즈가 손을 들어 안경남자의 말을 끊었다.

16550757615854.jpg“엘레노어가 무슨 능력으로, 주지사 선거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건가?”

시어머니에게도 쩔쩔맬 만큼 기가 약한 여인이, 그보다 훨씬 더 격렬한 전쟁터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 너무 황당하게만 들린다. 안경남자는 ‘기억나지?’하는 표정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1655075766312.png“아까 말했듯, 그녀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대통령의 조카일세. 그런데 알 스미스와 맞붙었던 공화당의 주지사 후보는 바로 그 시어도어의 아들이었네. 그러니…….”

16550757615854.jpg“……그녀가 민주당 편에 선 게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던 것이군. 굉장히 영리한걸?”

휴즈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입가를 쓸었다. 말하자면 엘레노어가 알 스미스를 지지함으로써, 루즈벨트 가문의 지지 세력을 절반으로 나눠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안경남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5766312.png“나 역시 그녀의 그 결정이 정말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네. 만약 당시에 시어도어의 아들이 당선되었다면…… 루즈벨트 가문의 정치적 유산을 그가 독점했을 것이고, 프랭크는 영영 복귀할 수조차 없었을 테니 말일세. 물론 시어도어 루즈벨트 2세는 그녀를 평생 원망하겠지만…….”

16550757615854.jpg“그래서…… 그다음에는?”

1655075766312.png“그다음은…… 정확한 정보라기보다는 가십에 가깝네만…….”

안경남자는 분명하게 단서를 붙인 뒤에야 설명을 이었다.

1655075766312.png“프랭크의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엘레노어가 그에게 크게 실망을 했다는 황색잡지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네. 프랭크가 어떤 여자 때문에 그녀와 이혼을 하고 싶어 했다는 게야.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고 하더군.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니 그저 심심풀이 정도로만 듣게…….”

16550757615854.jpg“그 황색잡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정확하군. 놀라울 정도야.”

휴즈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 안경남자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16550757615845.jpg“뭐예요, 뭐? 자세히 좀 알려줘 봐요! 루즈벨트 후보가 정말로 호색한이에요?”

눈이 휘둥그레진 빌리가 휴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휴즈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16550757615854.jpg“잠깐만, 빌리. 이따가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 지금은 피에르로부터 조언을 듣는 게 먼저야.”

1655075761587.png“현재 그녀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뭔가, 피에르.”

선우진이 물었다. 그 정도의 정치적 계산을 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한 여인이라면, 아무리 남편이 밉다고 해도 표면적으로나마 거래에 응해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이쪽에서 그녀가 원하는 걸 정확히 제시해줘야 하겠지만…….

1655075766312.png“엘레노어는 빈민구제와 여성을 위한 교육에 관심이 많네. 그녀 역시 나타샤 양처럼 적극적인 신여성이 된 것이지.”

안경남자가 말했다.

1655075766312.png“작년부터는 맨해튼의 토드헌터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중일세. 동시에 발-킬 공업사를 설립해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있지. 하지만…….”

16550757615854.jpg“오호, 그 ‘하지만’은 아주 좋은 ‘하지만’처럼 들리는걸?”

초조하게 기다리던 휴즈가 반색을 했다. 뭔가 뜻대로 잘 안 되는 것이 있어야 이쪽에서도 나설 계기를 얻는다. 안경남자는 막연하게 동쪽을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1655075766312.png“브롱크스의 빈민가 재정비 사업이 부동산 소유주와의 마찰로 난항을 맞았다는 기사를 읽었네.”

16550757615854.jpg“브롱크스 쪽에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애스터 가문일 텐데…… 아마도 윌리엄 빈센트일 걸세.”

휴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그때까지 영어 대화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던 버스터가 신기하다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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