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2021.01.06.
“대외적으로는 부부 관계를 유지하면서…….”
엘레노어는 일단 선우진과 손을 맞잡으면서도, 아직 확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사업가로서 프랭크의 당선을 돕고 지분을 차지한다고요?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사이온지 씨?”
“안 될 이유가 뭡니까, 루즈벨트 부인?”
악수한 손에 힘을 주며 선우진이 물었다. 엘레노어는 멍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이야기는 유례가 없는 것이어서……. 마음 한구석에서 두려움이 드는군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하기도 하고요.”
주지사의 부인은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법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나,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관습적으로 굳어버린 역할이 분명히 존재한다.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해, 음식을 나눠주는 자애로운 대모.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이고, 주지사 부인을 거기에 대입해 봐도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지금 이 동양인 신사가 제시한 조건은, 그러한 통념을 까마득히 뛰어넘어 버리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왜 불안하다고 느끼시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루즈벨트 부인께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실 수 없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입니다.”
선우진은 진지하면서도 차분하게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엘레노어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훗……!”
그녀 본인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겠어서 저어하는 이유를 단번에 말로 정리할 수 없는데, 이 동양인 신사는 그걸 두 개의 문장만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호언장담이 전혀 허풍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신기함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 두 가지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군요, 사이온지 씨.”
엘레노어가 말해보라는 듯 손을 펼치자, 선우진은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먼저…… 프랭크의 행정능력이나 정책이 오틴저 후보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경우라면 프랭크의 선거운동에 동참하는 건 사회사업가로서의 양심을 속이는 행동일 겁니다.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뉴욕 주 전체를 퇴보시키는 셈이니까요.”
“아니오, 사이온지 씨…….”
엘레노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도리질을 했다.
“그렇지 않아요. 프랭크는 거의 20년 전부터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정책을 수립했던 사람이고, 중앙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반이 있죠. 게다가 해군차관보를 지내며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했고 말이에요. 그는 능력 있는 정치인이자, 행정가가 맞아요. 오틴저 후보의 엄벌주의와 비교해 봐도, 프랭크 쪽이 뉴욕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후보라는 건 분명합니다. 다만 좋은 남편이 아닐 뿐인 거죠.”
“좋습니다, 루즈벨트 부인. 저 역시 프랭크가 오틴저 후보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믿습니다. 그럼 프랭크는 일단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군요.”
선우진은 중지를 접어보인 뒤, 다시 물었다.
“하지만 만약 루즈벨트 부인께서 현재 다른 상대와의 결혼을 원하신다면, 그 경우에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건 어려울 테죠. 프랭크와 사이좋은 부부처럼 연극을 하는 것이, 지금 사랑하는 분에게 상처를 줄 테니까요.”
“……다른 상대? 결혼? 내가요?”
상상도 해본 적 없는지, 엘레노어는 자신의 가슴을 짚은 채 어처구니 없어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역시 전혀 아닙니다, 사이온지 씨. 운명의 짝을 꿈꾸던 소녀는 이제 내 안에 없어요. 제게는 다른 목표가 생겼고,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벅차답니다.”
“그럼 우리가 힘을 모으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군요, 루즈벨트 부인.”
선우진이 검지까지 마저 접고 확신에 찬 태도로 단언하자, 휴즈가 짤깍짤깍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
“후원회에 합류하신 걸 환영합니다, 루즈벨트 부인. 프랭크를 뉴욕 주지사로!”
“그렇게 되는 건가요……?”
선우진의 말들을 곰곰이 곱씹어보던 엘레노어가,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질문을 던졌다.
“이 모든 걸…… 프랭크와 상의한 뒤에 저를 찾아오신 게 아니잖아요, 사이온지 씨 휴즈 씨. 정말로 프랭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으시나요?”
이 두 사람이 루즈벨트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20년 이상을 그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아는 프랭크는 결코 정치적인 권력을 남에게 나눠 줄 사람이 아니다. 특히 아내에게는 더더욱…….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프랭크는 유능한 정치인입니다, 루즈벨트 부인. 득실을 따질 줄도 알고, 득이 된다면 고집을 꺾고 물러날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뜻이죠.”
선우진이 대답했다. 걸을 수 있다고 바득바득 우기며 그 이상한 장치를 고집하던 프랭크가, 휴즈의 자동차 유세 전략을 단번에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그는 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적어도 공적인 부분에서는 그렇다.
“프랭크는 정치인으로서 재기하기 위해 이번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패하면 그에게 다음 기회라는 건 주어지지 않을 테지요. 사실상 마지막 기회인데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승리도 없으니,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요. 그 부분은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루즈벨트 부인.”
“좋습니다, 사이온지 씨.”
잠시 더 고민해보던 엘레노어가 마음을 굳힌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분을 믿고 한번 기다려보겠습니다. 부디 프랭크와 잘 협상하셔서 좋은 사업 제안을 해주세요.”
프랭크의 곁에서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 보상으로 돌아올 결과를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일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잔뜩 모인 자선파티에서도 셀 수도 없이 얼마나 여러 번 거짓 미소를 지었던가…….
“이건…… 이제 돌려드려야죠. 잠시나마 설렜던 게 사실입니다. 행복한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레노어는 50만 달러 수표를 선우진에게 돌려주며 미소를 지었다. 선우진은 정색을 하고 손을 들었다.
“저는 한 번 발행했던 수표를 거둬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루즈벨트 부인.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 프랭크의 선거운동과 제 후원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브롱크스 빈민가 재건 사업은 뉴욕 주의 예산으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제가 프랭크에게 그것을 지분으로 요구하면, 사이온지 씨께서 굳이 전액을 부담하시지 않으셔도…….”
“브롱크스 빈민가 재건은 이미 시행되기로 한 일이니, 프랭크에게는 다른 지분을 요구하십시오. 당신이 말씀해주신 48시간 노동시간 규정도, 최저임금 책정도, 아동노동착취 근절도 제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느껴졌습니다.”
선우진이 말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엘레노어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사이온지 씨께서는 정말로, 그 사업의 비용 전액을…… 혼자서 부담하고자 하시는 건가요?”
“혼자서는 아닙니다, 루즈벨트 부인.”
선우진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휴즈를 가리켰다.
“하워드와 공동으로 부담할 겁니다. 조금 전 말씀드렸다시피.”
“그렇게 중요한 일에 내가 빠질 수는 없죠.”
이제 꽤 여유를 되찾은 휴즈가 선우진의 장단에 맞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선우진의 기부가 진심이었다는 걸 깨달은 엘레노어는, 그제야 감격해하며 수표를 심장께로 당겨 꼬옥 끌어안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럼 정말로 이 수표를 받아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사업자금으로 쓰겠습니다, 사이온지 씨, 휴즈 씨. 그리고 앞으로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되면 염치를 무릅쓰고 또 청구서를 보내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루즈벨트 부인.”
선우진은 차 탁자에 올려두었던 중절모를 집어올리고 인사를 건넸다.
“프랭크와 협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개인적인 질문을 한 가지만 더 여쭐까요?”
휴즈, 버스터와 함께 서재를 나서려던 선우진이, 엘레노어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저희가 본 그 편지들에 대해, 루즈벨트 부인께서 알고 계시다는 걸…… 로젠맨 씨나 다른 친구들도 압니까?”
만약 그들이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미련하게 계속 엘레노어의 협조를 요청하는 중이라면, 빨리 참모직에서 떨어내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 정도 사리분별이 안 되는 사람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쓸쓸하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오. 이게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소문을 내겠어요. 그들이 아는 건 루시의 편지 정도뿐입니다. 그 건은 워낙 오래된 일이고, 프랭크 본인이 주변에 털어놓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런 비밀을 오늘 처음 만난 저희에게는 알려주셨군요.”
선우진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자, 엘레노어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대꾸했다.
“저 자신도 신기하기는 하지만, 왠지 사이온지 씨께는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행복한지에 관해 처음으로 물어봐주신 분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군요.”
작게 한숨을 내쉰 엘레노어가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말을 이었다.
“그간 다른 사람들은 저를 찾아와…… 오직 프랭크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또 충고했거든요. 중요한 선거이니 프랭크를 도와야 한다……, 아직도 프랭크를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프랭크가 많이 힘들어 한다……, 이러다가 프랭크가 패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프랭크뿐이었죠. 저라는 사람의 심정은 없었어요.”
“젠장, 그 사람들 정말…… 최악이로군!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화가 날 지경입니다.”
오직 프랭크의 입장에서만 생각했던 또 다른 남자, 휴즈가 뻔뻔하게 도리질을 하며 엘레노어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제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정하십시오, 루즈벨트 부인. 당신은 누군가에 딸린 사람이 아니라 이 선거를 승리로 이끌 숨겨진 주역이고, 어엿한 한 사람의 거물 사업가이니까요.”
“거물 사업가라고요? 그건 너무 과장된 칭찬이 아닌가요, 휴즈 씨? 제 사회사업은 이제 겨우 막 시작한 수준인데요.”
쑥스러워하는 엘레노어의 반응에, 휴즈는 천천히 검지를 흔들었다.
“아직 모르시는군요. 200만 달러 규모의 사업자금을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거물 사업가입니다, 루즈벨트 부인. 이러니저러니 말들을 해대지만, 결국은 돈이 증명을 해주는 거죠.”
그녀가 자신들로부터 200만 달러를 후원받게 될 거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전략적으로 상기시킨 뒤에야, 휴즈는 서재를 나섰다.
“곧 또 뵙죠, 루즈벨트 부인.”
선우진, 버스터와 함께 여유롭게 작별인사를 건넨 휴즈는 천천히 캐딜락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자동차가 출발한 뒤에도 엘레노어는 미소 띤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며 그들에 대한 호감을 표했다. 부르으으응-! 속도를 올려 한 블록을 내달린 휴즈는 갑자기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홱 꺾어 우회전을 했다. 끼이익-! 엘레노어가 시선에서 사라지자마자 급정거로 자동차를 멈춰 세운 휴즈가, 운전대를 움켜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무슨 일인가, 하워드?”
조수석의 선우진이 물었다. 하워드는 선우진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냐고?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아이스 맨? ……하긴 자네 본인은 모를 수도 있겠군. ……그럼 이렇게 설명해주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휴즈가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수도 없이 했던 말이 있네, 아이스 맨. 어떤 소리일 것 같나? ……휴즈, 자네는 미친놈이야! 너무 큰 도박을 하고 있잖아!”
휴즈는 선우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룸미러 속의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 소리쳤다. 그러고는 다시 선우진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300만 달러를 들여 영화 한 편을 찍겠다고 했을 때, 또…… 완전히 새로운 비행기를 만들기 위해서 휴즈 에어크래프트를 설립하고, 아무 이익도 나지 않는 회사에 계속 돈을 쏟아붓고 있을 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지. ……휴즈, 자네는 미친놈이야! 너무 큰 도박을 하고 있잖아! 그럼 나는 대놓고 비웃었다네. 당신이야말로 겁이 너무 많은 것 아니오? 라고 대꾸하면서 말일세…….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것 같나, 아이스 맨?”
“글쎄?”
선우진이 짐작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짐짓 모르는 척하자, 휴즈는 돌연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는 미친놈이야, 아이스 맨! 너무 큰 도박을 하고 있잖아!”
그래봐야 선우진은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온화하게 되물을 뿐이다.
“도박을 한 기억은 없네만?”
“도박을 한 적이 없다고?”
그 태연한 반응에 휴즈의 눈은 또 한 번 커다래졌다.
“방금 자그마치 200만 달러를 그냥 날릴 뻔했잖나, 아이스 맨! 브롱크스 재건인지 뭔지 하는 그 이상한 사업 때문에!”
과장되게 두 팔을 벌린 그는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음성을 쏟아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다 잘된 셈이지만, 루즈벨트 부인이 자네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우리는 아무 이득도 없이 그 사업자금만 후원했어야 하는 거였네, 아이스 맨. 후우……!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아찔하군! 자그마치 200만 달러라고!”
휴즈가 아무리 200만 달러라는 액수를 강조해도, 선우진의 반응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녀가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네. 현명한 사업가라면 거절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니 말일세.”
“그건 그저 자네의 예상이었을 뿐이야, 아이스 맨!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고.”
휴즈는 적극적으로 도리질을 했다. 그런 휴즈의 어깨를 툭 치며 선우진이 미소를 지었다.
“만에 하나 잘 안 풀렸대도 우리가 손해를 볼 일은 없었을 걸세, 하워드. 브롱크스 빈민가 재건의 모든 비용은 가련한 빈센트가 온전히 부담하게 될 테니까.”
“그 역시 자네의 계획에 불과한 거잖나. 빈센트의 동의를 받아둔 일이 아니잖은가. 반면에 우리 쪽에서는 이미 60만 달러가 실질적으로 사용되었고, 또…… 루즈벨트 부인에게 약속해 둔 빚으로 150만 달러 이상이 남았지. 그런데 우리는 또 프랭크를 설득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네.”
휴즈가 손을 꼽아가며 비용을 나열했다. 빈센트에게 돌려준 10만 달러 수표에, 조금 전 발행한 50만 달러까지…… 이쪽에서 투자한 금액은 벌써 60만 달러에 달하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저택 임대료와 자동차 구입비 같은 자잘한 금액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루즈벨트의 주지사 당선까지는 앞으로도 여러 단계가 남았는데, 만약 한 발이라도 삐끗하면 곧바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를 입어야 한다.
“꽤 큰 투자임에는 분명하나 그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네, 하워드.”
선우진이 짧은 문장으로 분명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거짓말에 지쳐있는 엘레노어에게 누군가 또 그녀를 기만하려 든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 사업을 해야 하는 동업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기도 했다.
“젠장, 그것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했던 대답이군. 어쩔 수 없다……?”
휴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그에게 시간을 준 선우진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기분은 어떤가, 하워드?”
“더럽게 짜릿해.”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내뿜은 휴즈가 선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처음 비행기를 조종했을 때만큼이나 심장이 뛰어. 이 쾌감에 중독될까 봐 무서울 지경이네. 즉흥적으로 200만 달러를 내거는 도박이라는 건 또 이런 맛이 있군…….”
“그럼 더 짜릿해지러 가세나. 프랭크를 설득해야지.”
중절모를 눌러 쓴 선우진이 좌석 깊숙이 몸을 기댄다.
“기런데, 동무…….”
휴즈가 다시 자동차를 출발시키자,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모든 대화를 듣고만 있던 버스터가 입을 열었다.
“로동 나가는 어르나들이래 있다는 거이 얼레뿌리 아니고 참말이네?”
“아동노동 착취 말인가? 글쎄…… 미국 사회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네만, 루즈벨트 부인이 그렇게 말했으니 사실일 테지.”
선우진이 조선말로 대꾸했다. 버스터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타믄 뭐이래 탈이 났어도 단단히 났구나야, 이만치 번신하고 잘사는 나라에서리 어드래서 어르나들으르 부린단 거냔?”
엄청나게 많은 자동차들과 화려한 고층 석조건물들이 가득한 이런 대도시의 이면에 그런 문제가 존재한다는 게, 버스터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보다.
“무슨 이야기 하는 건가? 응? 나도 들을 수 있도록 영어로 말하면 안 되나, 챔피언?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걸 보면, 분명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휴즈가 룸미러로 버스터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된 대화를 들을 때마다 질색하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 태도는 전에 비해 한결 공손해졌다. 몇 시간 전 저 수줍음 많은 호랑이가 뎀프시를 단번에 때려눕히는 기적을 목격한 까닭이다.
“왜 이런 부유한 나라에서 아동들이 노동에 내몰리는지 모르겠다는군.”
선우진이 버스터 대신 질문을 전하자, 휴즈는 부끄럽다는 듯 이마를 쓸었다.
“아하, 그래……. 그건 미국의 어두운 단면이지. ……자본가들 때문일세, 버스터. 자본가들이라는 단어 아나? 아주 돈이 많은 사람들! 부자들 중에서도 더 부자들. 빈센트 같은 놈이 자본가의 전형이지! 물론 아이스 맨과 나도 돈은 많지만, 자본가들과는 성격이 다르다네. 그들은 뭐랄까…….”
휴즈는 이따금씩 룸미러로 버스터와 시선을 교환하며 천천히, 가급적 쉬운 단어로, 손짓까지 곁들여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 뭔가를 만들지 않네. 대신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엄청난 이자를 받아내지. 이자를 못 내면 담보를 빼앗고, 선로를 독점하고, 부동산을 계속 매입해 임대사업을 확장하고……. 말하자면 그놈들은 흡혈귀와 비슷해. 그런 놈들 때문에 미국은…… 이렇게 겉으로 멀쩡해보여도 안에 병이 들어있네. 나도 영화 자금 때문에 몇 번 만났지만…… 정말 상종 못 할 놈들이야.”
당시를 회상하는 동안 휴즈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선우진을 찾아오기 전 그가〈지옥의 천사들〉추가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가, 그 표정 안에 역력히 담겼다.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가겠지.”
선우진이 부드럽게 휴즈를 위로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프랭크를 주지사로 만들려 애쓰는 것 아닌가?”
“아니!”
휴즈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빈민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목표일 뿐이야, 아이스 맨. 솔직히 프랭크가 그런 일들을 다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고 말이네. 나는…… 이권을 챙길 걸세. 일단 뉴왁 공항의 확장과, 시설 이용권부터 말이네. 도와준 만큼 확실히 지분을 약속받아야지.”
***
“절대로 안 돼!”
휴즈와 선우진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루즈벨트는 언성을 높였다.
“지분이라니! 남편이 주지사 후보가 되었으면 아내로서 당연히 돕는 거지! 감히 그 지분을 요구한다고? 나는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소, 하워드!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거요!”
얼굴이 시뻘게진 루즈벨트가 반 푼어치의 어림도 두지 않고 격렬히 손사래를 쳐댄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극렬한 반응이어서 휴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로서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요, 프랭크? 우리 너무 뻔뻔해지지는 맙시다. 그럼 루시와 마거리트, 앨리스는 어떻소? 그녀들은 정부로서 당연히 당신을 도와야 합니까?”
“……윽! 엘레노어가 당신들에게 그런 소리까지 털어놓았소? 또 지극히 그녀의 입장에서만 내 험담을 했을 테지…….”
루즈벨트는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무실 내에는 그들 세 사람뿐이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휴즈는 지금은 그런 부차적인 문제로 수다를 떨 때가 아니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이봐요, 프랭크. 나쁜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엘레노어는 그저 사회사업을 하겠다는 거예요. 뉴욕 주의 빈민들에게 더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것은 당신의 공약에도 포함되어 있는 부분이고 말입니다.”
“그럼 내가 그런 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내조를 잘하면 되겠군! 왜 엘레노어가 전면에 나선단 말이오? 주지사로 당선되는 건 그녀가 아니라 나인데!”
“글쎄요, 프랭크. 지금의 분위기대로라면 당선되는 건 당신이 아니라 오틴저 후보일 거요.”
휴즈는 진지하게 루즈벨트의 가정이 가진 문제를 지적했다. 물론 루즈벨트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은 백중세일 뿐, 누가 우세하다고 판단할 수 없소! 그리고…… 자동차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하워드? 내가 손만으로 운전할 수 있는 플리머스! 그리고 일어설 수 있는 장치가 설치된 링컨 무개차! 그것만 있으면 단번에 흐름이 바뀔 게 분명하다고!”
“그 무개차에 엘레노어와 함께 앉아서 퍼레이드를 한다면 그럴 테지요, 프랭크! 내 제안은 애초부터 그런 모습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계획이었소!”
휴즈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유세에서 엘레노어가 아예 사라져 버린다면, 아무리 열심히 돌아다니며 목이 터져라 연설을 해도 점점 표만 잃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겠지. 루즈벨트는 왜 아내가 함께 하질 않지? 라고 말이오!”
“상관없소! 어차피 오틴저도 독신이니까! 남자들끼리의 승부가 되면 나로서는 불리할 게 전혀 없지!”
루즈벨트가 마지막 저항을 위해 고집을 부려본다. 하지만 휴즈는 냉정하게 검지를 흔들었다.
“불리하다니까요, 프랭크.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편보다는,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 쪽이 훨씬 더 나아 보인다는 걸 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요? 다시 한 번만 더 설명해드리리다. 엘레노어의 도움이 없이는, 이 선거에서 결코 이기지 못할 거요. 당신은 그녀가 필요해요, 프랭크!”
“젠장……!”
화를 이기지 못한 루즈벨트가 한숨을 몰아쉬다가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하워드. 미안합니다만 두 분, 잠시만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소?”
수화기를 귀에 댄 루즈벨트가 다이얼을 돌리며 나가달라는 몸짓을 했다. 철컥-! 선우진은 곧바로 팔을 뻗어 수화기 걸이를 꾹 눌러버렸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은 것에 놀란 루즈벨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오, 유우야! 통화를 해야 하니 자리를 피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의 허락은 필요없소, 프랭크.”
선우진은 루즈벨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이건 당신 혼자 판단하면 되는 문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