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4. 느낌이 좋은데요? (324/459)

324. 느낌이 좋은데요?2021.01.16.

16550760063084.jpg“실례했어요.”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사라가 세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16550760063084.jpg“이제야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귀한 손님들이 오신 날, 왜들 그렇게 늑장을 부리는지……. 하여간 제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요.”

16550760063095.jpg‘확실히 이 사람의 지배욕도 보통은 아니군.’

사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선우진은 생각했다. 식사 준비를 고작 몇 분 당기기 위해 70대의 노인이 응접실과 주방, 식당을 오가며 고용인들을 채근한다는 건 보통의 에너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혈관 속에는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정복자의 욕망이 혈액과 함께 흐른다. 그리고 그 유전자는 루즈벨트 가문이라는 특별한 가정환경 속에서 프랭크에게 몇 배나 더 증폭되어 전해졌다.

16550760063099.jpg‘사라는 중국에 불법 아편무역을 하며 부를 축적한 델라노 가문의 딸일세…….’

안경남자가 들려줬던 설명이 떠올랐다. 정복자의 욕망에 무법자적인 기질마저 가미되었으니, 이 가문의 적자인 프랭크를 통제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터다. 하지만……, 욕망이란, 약점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루즈벨트가 가진 욕망이 클수록 그를 공략할 수 있는 허점의 크기도 커지기 마련이고, 선우진에게는 승기를 잡을 기회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그 법칙에 엘레노어나 사라를 대입해도 다르지 않다.

16550760063084.jpg“우리를 대표해 식사기도를 해주시겠어요, 휴즈 씨?”

음식이 테이블 중앙에 놓이고 초가 밝혀졌을 때, 사라가 두 손을 모아 기도자세를 취하며 휴즈를 돌아보았다.

16550760063107.jpg“아, 저는…….”

예기치 못한 부탁에 당황한 휴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60063107.jpg“……사실 꽤 오랫동안 교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사라.”

식사기도라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신앙심을 잃었고, 아버지의 사후로는 그런 걸 해 본 적도 없다. 그저 미녀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와인을 마시고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왔을 뿐. 물론 꼭 해야만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 휴즈는 사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습관까지 바꾸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저 대단한 아이스 맨이 ‘프랭크의 어머니’라는 거대한 적수를 어떻게 설득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동행한 참관인이다.

16550760063084.jpg“……그렇군요.”

실망한 눈으로 휴즈를 잠시 바라보던 사라가, 그다음 사람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16550760063084.jpg“그럼 버스터 씨께 부탁을 드려야 할까요?”

16550760063107.jpg“유감스럽게도 사라…… 그 친구는…….”

공연히 식탁 전체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막기 위해 휴즈가 끼어들었다. 그 친구는 영어가 아직 서툽니다…… 라는 말을 하려고 할 때, 버스터가 맞잡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입을 열었다.

16550760076685.jpg“The eyes of all wait upon Thee, O Lord…….(모든 이들의 눈이 주님을 섬기니…….)”

16550760063107.jpg“윽!”

휴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버스터를 돌아보았다. 영어라고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밖에 하지 않던 부끄럼쟁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격식 있는 기도문이란 말인가?

16550760076685.jpg“……and Thou givest them their meat in due season. Thou openest Thine hand and satisfied the desire of every living thing. Our Father, Lord God…….(주님은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손을 펴사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바라는 바를 채워주시나이다. 나의 아버지, 주님…….)”

휴즈가 경악하든 말든 버스터는 진지하게 기도를 계속 이어갔다. 심지어 읊는 어조마저도…… 조금 구식이기는 하지만 아주 심하게 전문적이다.

16550760076699.jpg

16550760063084.jpg“……아멘!”

버스터의 기도가 끝난 뒤, 사라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아멘을 읊었다.

16550760063084.jpg“오, 하나님…….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시는 젊은 분은 오랜만에 본 것 같아요. 정말 신앙심이 깊군요, 버스터 씨.”

사라가 버스터에게 진심이 담긴 감사를 표했다. 실은 그저 할아버지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며 영어를 배운 영향이지만, 어쨌든 버스터가 이 자리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16550760063084.jpg“사실 저는 그 애가 정치계로 복귀하는 걸 원치 않았어요.”

저녁 식사의 메인요리가 나왔을 때, 사라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16550760063084.jpg“그 다리로 거친 사람들과 싸워가며 놀림감이 되고, 상처를 받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명망 있는 지역의 명사로 살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했죠. 엘레노어가 고집을 부려서 결국 정치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불안한 건 마찬가지네요.”

긴 한숨을 내쉬는 사라의 얼굴에는 정말로 걱정이 가득했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자 자랑인 루즈벨트가, 부정적인 소재로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16550760063095.jpg“프랭크는 잘 해낼 겁니다, 사라.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신체를 비하하지 못할 겁니다.”

선우진은 사라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예상대로 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760063084.jpg“어떻게 그런 걸 확신하시나요, 사이온지 씨?”

믿지 못하겠다는 어조의 질문이지만, 실은 믿도록 만들어달라는 열망이 진득하게 묻어있는 말이었다. 아기 아킬레우스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려 했던 테티스처럼, 세상 만물로부터 아들 발더를 해치지 않겠노라 맹세를 받아낸 여신 프리그처럼, 그녀 역시 자신의 아들이 늘 행복하고 강건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준비가 된 듯 보였다.

16550760063095.jpg“그야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업가가 그를 지원하기 위해 나섰으니까요.”

휴즈를 가리킨 선우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과장된 수사들을 늘어놓았다.

16550760063095.jpg“하워드는 프랭크를 위한 모든 것들을 대비해 놓았습니다. 그의 아픔은 감추고, 진가는 두드러지게 내보일 수 있는 전문가집단도 대기 중이지요.”

16550760063107.jpg“아이스 맨이 말하는 건 할리우드 최고의 기술자들과 분장사, 광고 전문가들입니다, 사라. 거기에 기자들을 구워삶을 언론 담당관, 또 휴즈 에어크래프트에서 파견된 전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들도 오늘밤 뉴욕에 속속 도착하죠.”

이번에도 휴즈는 선우진의 즉흥적인 허풍에,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적극적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선우진은 ‘들으셨습니까?’라고 하는 것처럼 눈썹을 한 차례 까딱이고, 말을 이었다.

16550760063095.jpg“영화 〈벤허〉에서보다 더 많은 엑스트라가 동원될 예정입니다. 그들이 프랭크의 이름을 연호하고 그가 가는 길마다 꽃을 뿌려 맞을 겁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많은 뉴욕 시민들도 프랭크와 사랑에 빠지겠죠. 저는 사라도 그 현장을 꼭 지켜보십사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 어느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 될 테니까요.”

16550760063107.jpg“비행기에서 색종이를 뿌릴 거라는 이야기도 해드려야지, 아이스 맨!”

재미가 난 휴즈는 한술 더 떠서 극한의 사치를 말한다. 사라는…… 당연히 매료되었다.

16550760063084.jpg“잠시만요, 사이온지 씨…….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프랭크가 어떻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고요? 어디에서 그렇게 한다는 건가요?”

사라의 주름진 얼굴은 간절한 기대로 들떴다. 이제는 결함이 있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고 믿었던 자신의 아들이, 놀림감은커녕 모든 뉴욕 사람들이 환호하는 존경의 대상이 될 거라니……. 이 세상 어떤 어머니가 그 신탁을 믿고 싶지 않겠는가?

16550760063095.jpg“아, 프랭크가 아직 그 이야기를 해드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선우진은 깜빡했다는 투로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16550760063095.jpg“하워드는 프랭크를 위해 아주 멋진 자동차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직 프랭크만을 위한 링컨 L타운카이지요.”

16550760063084.jpg“……쿨리지 대통령도 그 자동차로 퍼레이드를 하지 않나요?”

은발의 사라가 소녀처럼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선우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60063095.jpg“맞습니다, 사라. 정확히 같은 모델이고 더 신품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자동차의 뒷좌석에 프랭크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일어설 수 있는 장치를 해두었다는 겁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수많은 뉴욕 시민들이 연도를 메우고 환호할 때, 프랭크가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말입니다.”

16550760063107.jpg“〈벤허〉에서 라몬 노바로가 전차를 몰고 로마에 입성하는 장면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군요. 혹시 그 영화 보셨습니까, 사라?”

휴즈가 한손을 앞으로 쭉 뻗어 라몬 노바로의 포즈를 흉내 내며 상상력을 증대시킬 만한 양분을 제공했다. 이렇게 열성적인 기독교도 할머니가 그 영화를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사라는 손뼉을 치며 반색을 했다.

16550760063084.jpg“봤어요, 휴즈 씨! 정말 당당한 승자의 모습이었죠!”

수많은 연상 작용이 순식간에 사라의 머릿속에서 폭죽과 같이 펑펑 터지며 이어졌다. 고난에 빠진 벤허, 승리, 치유의 예수님. 기적과 같은 치유……. 거기에 해전의 장면들이 바다를 동경하는 그녀의 취향과 맞물려 감정을 증폭시켰다.

16550760063107.jpg“이건 그보다 더 멋질 거라고 약속드리죠, 사라. 더 많은 사람들이 꽃을 뿌릴 거고…… 솔직히 프랭크가 라몬 노바로보다 더 남자답게 생긴 건 사실이니까요.”

오직 어머니만이 믿어줄 거짓말이지만, 뭐 어떤가? 그들이 설득해야 하는 것이 바로 프랭크의 어머니인데.

16550760063084.jpg“오, 주님…….”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서 눈물이 글썽해진 사라가, 두 손을 가슴 앞에 그러모으고 물었다.

16550760063084.jpg“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요, 휴즈 씨 사이온지 씨? 어색해 보이거나 해서 놀림거리가 되면 안 되는데……”

16550760063095.jpg“이렇게 할까요, 사라?”

선우진은 사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16550760063095.jpg“자동차가 완성되면, 가장 먼저 당신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우리와 사라, 그리고 프랭크만 참여하는 시험 주행이자, 축제이지요. 혼자만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가 얼마나 멋진지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16550760063107.jpg“꽃다발도 우리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엄청나게 큰 놈으로! 까짓 거 이미 프랭크를 위해 100만 달러를 쓰기로 했는데, 꽃다발 값 2달러가 더 보태진다고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휴즈가 한마디를 보탰다. 그녀의 행복한 환상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팽창했을 때, 선우진이 분명하게 단서를 달았다.

16550760063095.jpg“약속하겠습니다. 프랭크와의 협상이 결렬되지 않으면 꼭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16550760063084.jpg“아…….”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사라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너무 꿈같은 이야기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들이 찾아온 이유는 프랭크와의 협력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냥 돌아가 버리면 라몬 노바로처럼 퍼레이드를 하는 아들의 모습도, 기적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16550760063084.jpg“제가 뭘 어떻게 하면 세 분과 프랭크의 관계가 다시 호전될 수 있을까요?”

사라는 식욕이 딱 끊어진 사람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렇게 멋진 모습의 아들을 볼 수 없도록 가로막는 벽이 무엇이든, 다 부숴버리겠다는 의지가…… ‘어머니 사라’의 음성에 짙게 배어 있다.

16550760063095.jpg“저는 제가 기여한 만큼의 지분을 원합니다. 그건 여기 하워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우진은 솔직하게 대답한 뒤 작게 도리질을 했다.

16550760063095.jpg“하지만 프랭크는 모든 파이를 혼자 차지하려고 하더군요. 아무리 프랭크가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작은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16550760063084.jpg“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겠죠! 맞아요!”

사라가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익히 잘 안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선우진은 사라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16550760063095.jpg“그가 원하는 게 파이인지, 아니면 환호인지……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당신께 정말로 보여드리고 싶으니까요.”

사실 그건 사라의 욕망에게 건네는 제안이었다. 사라는 뉴욕 주지사의 권력을 거머쥔 아들보다, 두 다리만으로 우뚝 서서 인파들의 환호를 받는 아들을 원한다. 후자 쪽이 더 그녀의 자존감을 가득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16550760063084.jpg“오늘은……, 준비가 너무 소홀했네요. 이렇게 귀한 분들이 오실 줄 모르고……. 세 분을 꼭 다시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데, 언제쯤이 괜찮을까요?”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선우진 일행에게 사라가 물었다. 혹시 협상이 잘 안 되더라도 내일 당장 훌쩍 떠나버리지 못하도록, 단 며칠이나마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16550760063095.jpg“영광입니다, 사라. 일시는 프랭크와 상의해서 정해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저 역시 당신의 미트로프와 수플레를 다시 먹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선우진은 이번에도 모든 부담을 온전히 사라와 프랭크에게 넘겼다. 이미 같은 테이블에 앉아 포커를 시작한 상대에게 안전한 선 따위를 그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16550760076685.jpg“기런데 동무…… 아무리 기래도 다 큰 사나들끼리 닥당을 해갖구서리 나많은 큰마니한테 거짓부렁 늘어놓는 거이는 영 맞갖디않단…….”

롱 아일랜드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버스터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깜깜한 도로를 노려보며 열심히 운전대를 돌리던 휴즈가 물었다.

16550760063107.jpg“버스터가 뭐라고 하는 건가, 아이스 맨? ……왜 기도를 할 때처럼 편하게 말을 안 하는 거지?”

16550760063095.jpg“자네와 나 둘이 짜고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사기를 친 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군.”

선우진이 버스터의 말을 영어로 옮기자, 휴즈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16550760063107.jpg“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버스터?”

휴즈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6550760063107.jpg“그렇다면 말이지, 진짜로 순진한 건 사라가 아니라 바로 자네일세. 백발에 속으면 안 돼! 사라는 뭐랄까…… 영악하고 집요해! 그녀가 아직도 루즈벨트 가문의 유산을 모두 움켜쥐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내가 보기엔 프랭크보다 사라가 한 수 위야. 암! 한 수 위고 말고…….”

16550760076685.jpg“……기래에?”

버스터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들을 사랑하는 것밖에 모르는 순진한 할머니라고만 생각했더니, 뭐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16550760063107.jpg“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아이스 맨? 자네가 하자는 대로 하기는 했는데…… 그 다음을 모르겠네.”

저택에 도달했을 무렵 휴즈가 선우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선우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16550760063095.jpg“사라와 프랭크가 싸우겠지. 그녀는 아들이 환호 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프랭크는 자기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을 테니 말일세.”

16550760063107.jpg“그래서 누가 이기나?”

언제나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는 휴즈가 곧바로 아이 같은 질문을 덧붙였다. 경제권을 가진 사라가 65대 35 정도로 우세를 보일 거라 예측하고 있었지만, 선우진은 더 핵심적인 답을 들려주었다.

16550760063095.jpg“누가 이기든 상관이 없네, 하워드.”

16550760063107.jpg“승패가 아무 의미 없다니……. 그럼 왜 굳이 시간을 투자해가며 싸움을 붙인 거지?”

16550760063095.jpg“그 두 사람이 서로 싸우면서 지칠 거라는 사실이 중요하네. 결론이 날 때쯤에는 승자도 패자도 아주 녹초가 되어있을 거라고 확신하네.”

16550760063107.jpg“호오……!”

휴즈는 선우진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검지로 그를 가리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50760063107.jpg“그 지친 상태의 사라와 프랭크를 상대하겠다는 거로군. 그런 거라면 납득할 만해. 브라보!”

16550760063095.jpg“이틀 정도 아예 연락을 끊고 있으면 더 애를 태울 수 있을 테지.”

동업자를 향해 선우진은 한 가지 전략을 더 일러주었다. 평생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살아온 루즈벨트에게는, 이 초조함이 아주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줄 것이다.

16550760063107.jpg“그럼 내일은 느긋하게 파티 계획이라도 짜보자고.”

휴즈는 선선히 선우진의 의견에 동조했다.

16550760063107.jpg“자네들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일에만 휘둘릴 수는 없지.”

부르응-! 그들을 실은 캐딜락은 문지기가 열어주는 정문을 통과해 길고 화려한 진입로를 내달렸다.

16550760063107.jpg“오디가 벌써 왔군…….”

저택 앞 분수대에 두 대의 캐딜락이 멈춰 서 있는 걸 발견한 휴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공항에 마중을 보냈던 차들이 돌아왔다는 건, 휴즈 에어크래프트의 엔지니어들이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택 뒤쪽의 차고에서는 대낮처럼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16550760063107.jpg“그런데…… 링컨과 플리머스는 어디에 있지?”

자동차에서 내린 휴즈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분명 그 두 대의 자동차를 오늘 낮에 구입하고 인도까지 받았는데…….

16550760063107.jpg“차고로 옮겼나?”

휴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차고가 가까워질수록 둔탁한 쇳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땅-! 덜그렁-! 따앙-!

16550760063107.jpg“……세상에!”

차고 앞에 도착한 휴즈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버스터도 깜짝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16550760076685.jpg“어드래서 이 자동차들이래 배리를 다 토해놨냔?”

내장을 토했다는 그의 표현처럼, 넓은 차고 바닥은 수많은 자동차의 부속들로 꽉 찬 상태다. 그 양쪽 끝에는 두 대의 새 자동차가, 아니 새 자동차였던 껍데기가 보닛부터 뒷문까지 모든 문을 다 활짝 연 채 방치되어 있다.

16550760145372.jpg“아, 오셨군요! 하워드!”

작업용 선반에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뭔가를 그리던 젊은 남자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16550760063107.jpg“오디…… 이게 뭔가? 왜…… 자동차들을 다 해부해 놓았어?”

오디와 악수를 하며 하워드가 물었다. 오디는 당연하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16550760145372.jpg“설계도면을 그리려면 일단 각 부품의 정확한 수치부터 알아야 하니까요. 포드에서는 링컨 L타운카 설계도면을 공개하지 않더라고요. 플리머스도 마찬가지고요. ……저분들이 바로 그 사이온지 유우야 씨 일행인가요?”

휴즈의 소개를 받은 오디는 선우진의 손을 꽉 맞잡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16550760145372.jpg“사이온지 씨! 정말로 뵙고 싶었습니다! 덕분에 신형 비행기 개발을 계속할 수 있게 됐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실 거예요.”

선우진에게 감사인사를 전한 오디는 해맑은 표정으로 설계도를 짚었다.

16550760145372.jpg“늦게 시작해서 아직 다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내일까지는 도면 작업이 끝날 겁니다. 링컨의 보닛 내부 공간을 효율적으로 재정리하면, 12기통 엔진으로 대체가 가능해요. 괴물이 되는 거죠.”

16550760063107.jpg“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디? 12기통 엔진 같은 건 필요 없어.”

하워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부품들을 살폈다. 오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50760145372.jpg“세계에서 제일 빠른 링컨을 만드는 게 아닌가요, 하워드?”

16550760063107.jpg“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하워드는 고개를 저으며 두 팔을 벌렸다.

16550760063107.jpg“발을 전혀 안 쓰고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뒷좌석에 비밀 리프트를 설치해야 한다고 했지.”

16550760145372.jpg“그거야 당연히 되는 거고요…….”

오디는 허공에 두 손으로 전진하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16550760145372.jpg“거기에 더해서 괴물 같은 주행성능을 가진 자동차를 만들려는 건 줄 알았죠! 그런 게 아니라면 저와 FC를 모두 불러들일 리가 없잖아요!”

16550760063107.jpg“그만큼 중요한 일일세, 오디.”

휴즈는 오디의 양 어깨를 짚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16550760063107.jpg“괴물 자동차를 만드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FC와 함께 모든 지혜를 짜내서…… 그러고 보니 FC는 어디에 있나?”

휴즈가 이리저리 살피자, 오디는 엄지로 창고 쪽을 가리켰다.

16550760145372.jpg“축음기를 가지러 갔어요. 아시잖아요. FC는 음악이 필요해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들른 곳도 레코드 가게였는걸요. 여기는 유럽에서 발매된 새 음반들이 서부보다 빨리 도착하니까요. ……아, 저기 오네요.”

오디가 턱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선우진과 버스터가 고개를 돌렸을 때, 행복한 얼굴로 구형 축음기를 들고 오던 젊은 흑인이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휴즈는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다.

16550760063107.jpg“겁먹을 것 없어, FC! 이 친구들은 인종차별 같은 거 안 한다고! 그러니 숨지 않아도 돼.”

16550760172415.jpg“……네, 하워드.”

FC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불안을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하워드는 그를 위해 해명을 들려주었다.

16550760063107.jpg“이해해주게, 아이스 맨. 자네가 인종차별이나 하는 악당처럼 생겨서 그런 게 아니야. 저 친구가 설계도면을 만지는 걸 보면, 꽤 많은 백인 엔지니어들이 불같이 화를 냈다네. 그래서 상처가 많기도 하고, 또 자기가 개입했다는 게 알려져서 혹시 내가 피해를 볼까 봐 걱정하는 걸세.”

16550760145372.jpg“……멍청이들.”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난다는 듯 오디가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16550760145372.jpg“FC의 연필이나 깎아줘야 할 놈들이 피부색을 희게 타고 났다는 것만으로 뻐기는 꼴이라니…….”

16550760063107.jpg“그래. 무슨 음반을 샀나, FC?”

선우진과 인사를 나눈 뒤 축음기의 태엽을 감는 FC에게 휴즈가 물었다. 이내 행복한 미소를 되찾은 FC는 몇 장의 음반을 들어보였다.

16550760172415.jpg“이런 저런 거요, 하워드.”

16550760063107.jpg“그거 좋군. 아름다운 아시아의 공주라는 거…… 이국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맛이 있는걸?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몸매도 좋고 말이지.”

휴즈는 단번에 나타샤의 앨범을 지목했다. 역시…… 바람둥이의 기질은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16550760172415.jpg“이건 정말 발매된 지 얼마 안 된 거라고 하더라고요. 영국에서 며칠 전에 도착했대요. 지금 들어볼까요?”

FC는 축음기의 바늘을 옆으로 돌리고, 신중하게 음반을 올렸다. “♪……I was oh so blue till you came along, just to make my life a wonderful song. You brought sunshine just to brighten my loneliness……♬” 나타샤가 나른한 템포로 부른 〈Deed I do〉가 흘러나온다. FC는 그 리듬에 맞춰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도면 쪽으로 걸어갔다. “♪……Do I want you? Oh my, do I honey, 'deed I do. Do I need you? Oh my, do I honey, 'deed I do……♬” 어느새 오디도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16550760145372.jpg“정말로 느낌이 좋은데요, 하워드?”

오디와 함께 리프트의 배선을 논의하던 FC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760172415.jpg“이 가수, 엄청나게 인기를 끌 것 같아요.”

16550760186686.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