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맹세컨대 정말 몰랐습니다.2021.03.06.
“정말로…….”
샴페인을 뒤집어쓴 루즈벨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내가 이긴 게 맞는 거요, 유우야? 아직…….”
루즈벨트는 칠판 앞에 서 있는 직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들은 선우진이 잔을 채워 건넸다.
“저 사람들은 아직 합산을 다 못했지만, 하워드와 나는 벌써 끝냈소. 그게 수학의 좋은 점이지요, 프랭크.”
선우진은 멍한 표정의 루즈벨트와 가볍게 건배한 후 말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계산을 하든, 계산하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국 정답은 하나라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오해가 있으면 안 되잖소?”
일단 샴페인으로 입술을 축이면서도 루즈벨트는 일말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의 말만 믿고 한껏 기뻐했다가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까 봐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프랭크!”
두 병째의 샴페인을 열심히 흔들어대고 있던 휴즈가, 개구쟁이 소년같이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가 기뻐하고 있는 동안 당신 혼자서 그렇게 벌벌 떨고 있어봤자 결과는 바뀌지 않으니까! 하하하!”
펑 소리가 나게 뚜껑을 밀어 연 휴즈는 선우진과 루즈벨트, 그리고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샴페인을 뿌려댔다. 얼빠진 시선으로 그 광기 어린 축하를 바라보던 로젠맨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기긴 한 모양이군요.”
“그랬으면 좋겠소, 사무엘.”
그 못지않게 얼떨떨한 표정의 팰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수준이었다면 그도 대강 계산을 끝마쳤으련만, 지금 이건…… 너무 지독한 접전이어서 좀처럼 가늠이 되질 않는다. 뉴욕 선거관리위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인지, 그들은 아직 당선 확정 전화도 받지 못했다. 지금쯤 아마 그쪽도 정신없이 표를 더하는 중일 터다.
“……계속 계산합니까?”
칠판 앞에 서 있던 민주당 직원들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미 한쪽에서는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데 분필과 지우개를 들고 덧셈을 해 나간다는 게, 어쩐지 바보스럽게 느껴지는가 보다.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로젠맨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당연히 해야지! 그게 우리 일이잖나?”
로젠맨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칠판으로 다가갔다. 유대인답게 지독하다는 평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저쪽은 즐기게 두고, 우리는 신중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해보세. 혹시라도 실수가 있으면 곤란하잖나. ……자, 나도 이쪽에서 따로 계산을 하겠네.”
지우개를 집은 로젠맨은 대통령 선거 뉴욕 상황판을 거침없이 지워버리고 옆 칠판의 숫자들을 적어 내려갔다. 알 스미스야말로 암산으로도 쉽게 판가름이 될 만큼 완전히 패배했다. 홈그라운드인 뉴욕에서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주들의 상황은 확인해볼 필요조차 없는 수준이다. 어쩌면 역대 최고 격차로 패하지 않았을까?
“확실한 거죠? 사이온지 씨, 휴즈 씨.”
아직도 기도하듯 모아 쥔 손의 깍지를 풀지 않은 엘레노어가 묻자, 휴즈는 그녀에게도 샴페인을 건네며 선우진을 가리켰다.
“이 친구가 이 정도 간단한 계산을 실수할 것 같습니까, 엘레노어? 아뇨,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는 아이스 맨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휴즈는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운 뒤 말을 이었다.
“……이 승리를 축하하면 되는 겁니다. 물론 나도 이미 계산을 끝냈고요. 크으……! 이 샴페인, 유난히 달콤하군요.”
“하아……!”
엘레노어는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겨우 좀 흥분을 가라앉힌 엘레노어는 선우진과 휴즈에게 차례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 두 사람의 적극적인 개입과 권유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꿈꿔왔던 복지사업은…… 그저 망상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루즈벨트 부인.”
선우진은 한손을 허리 뒤로 두른 채 정중하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앞으로도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애써 주시리라 믿습니다.”
‘나라를 잃고 이 먼 곳까지 떠밀려온 무력한 조선인들을 위해서도…….’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하하하하하!”
그로부터 30분 이상이 흐른 뒤에야 민주당 뉴욕 사무실 내부는 비로소 본격적인 웃음소리와 축하주의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엘레노어도 여러 보좌관들과 마음 편히 축하의 술잔을 나눴고, 두 번이나 검산을 마친 로젠맨은 팰리, 루즈벨트와 어깨동무를 한 채 계속 샴페인을 들이켬으로써 그간 켜켜이 쌓인 피로를 씻어버렸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 그렇게 얼마나 흥분과 희열 속에서 이 아슬아슬한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을까, 마침내 뉴욕주 선거관리위원회에 파견되어있던 직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겼습니다! 공식적으로 집계가 완료되었어요! 워낙 격차가 크지 않지만, 오틴저 후보 쪽에서 재검표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째서 그렇지?”
팰리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3만 표 차이도 나지 않는 대접전이었는데, 재검표 요구가 없을 거라는 정보는 상당히 뜻밖이다. 어쨌든 이제 정말로 홀가분하게 승리 선언을 해도 되는 상황이 왔다.
“수고 많았네! 정말 수고했어!”
로젠맨과 팰리는 한목소리로 직원의 노고를 치하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가 내려진 그 전화기로 루즈벨트의 시선이 향한다. 꿀꺽-! 한동안 물끄러미 전화기를 응시하던 루즈벨트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욕망을 읽은 선우진은 손수 전화기를 집어 그의 앞으로 옮겨주었다.
“전화 드리시오, 프랭크. 아직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는 중일 게요.”
“훗……!”
루즈벨트는 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걸 싫어하지 않았소, 유우야?”
사라에게 전화를 걸려 했을 때 곧바로 수화기 걸이를 눌러버렸던 선우진의 모습이,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하지만 선우진은 덤덤하게 도리질을 했다.
“허락을 구하는 것과 기쁜 소식을 알리는 건 다르지요, 프랭크. 어서 그녀를 안심시켜 드립시다.”
라디오로 이 소식이 전해지려면 내일 오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 사라의 주름살은 더욱 깊어지리라.
“그렇게까지 권하니 그럼…….”
루즈벨트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결국 수화기를 들고,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뚜르륵- 달칵! 신호가 한 차례 다 가기도 전에 저쪽에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울렸다. 그녀 역시 지금까지 숨죽인 채 연락을 기다려왔다는 의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사라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떨렸다. 주지사에 당선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머니!”
수화기를 꽉 쥔 루즈벨트가 희열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이겼어요! 제가 주지사가 됐습니다! ……네! 확실합니다! ……맞아요! 아뇨, 지금은 사무실에서 파티를 할 겁니다! 집에는 내일 갈게요! ……네! 그럴게요! 네!”
루즈벨트는 어머니와 잠시 더 대화를 이어간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서 수화기를 넘겨받은 휴즈가 장난스레 물었다.
“사라가 뭐라고 합니까?”
“엘레노어와 집에 올 때…… 당신과 유우야를 꼭 함께 데려오라고 하시더군.”
루즈벨트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녀도, 그도…… 이 승리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사라는 더더욱 절실하게…….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프랭크? 축하파티에 승리의 주역이 빠질 수는 없지. 우리에게 빚진 것, 잊지 마시구려…….”
다이얼을 돌리며 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가고 통신선 너머의 상대가 전화를 받자, 휴즈는 곧바로 용건을 전달했다.
“밥! 결과 통보 받았소? 이겼다오! ……누구? 알 스미스? 큭! 그런 사람이야 패색이 짙든 말든 내가 알게 뭐요? 신임 뉴욕주지사로 선출된 게 프랭클린 루즈벨트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아니, 그런 말을 하려고 전화를 건 게 아니오.”
단시간에 샴페인을 그만큼 들이켰는데도 느긋해지기는커녕, 그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내일 선거결과를 알리는 호외 말이오! 그 문구는 정했소? ……뭐라고요? 신승? 그런 건 별로요! 전혀 끌리지가 않소! 내가 일러줄 테니 잘 들어보시오, 밥!”
휴즈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기 위해 한 템포 호흡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극적인 승리! 부디 그 어휘를 사용해주시오. 어렵게 이겼다느니, 표차가 많이 나지 않았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굳이 큰 글씨로 써넣을 필요 없소! 알겠소, 밥? ‘극적인 승리’입니다! ‘다시 우뚝 서다!’도 나쁘지 않소, 어쨌든 반드시 긍정적인 어휘를 써야 하오! ……그야 파티는 당연히 예정대로 열리지요! 그날 봅시다!”
호외에 쓰일 문구까지도 세세하게 정해준 뒤에야 휴즈는 다음 신문사 편집장의 번호를 돌렸다. 이렇게 완벽히 이미지를 구축해두지 않으면…… 2년 뒤에 다가올 선거에서 또 고전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 기분 좋게 취한 휴즈가 선우진과 함께 민주당 사무실을 나선 건, 정말로 깊은 새벽이 다 되어서의 일이었다. 샴페인도 바닥났고, 사람들의 체력도 완전히 바닥나서 더 이상은 축하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휴즈는 크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좋은 꿈들 꾸시오, 모두들!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기자들과 인터뷰가 이어져야 하니 잊지 마시오, 사무엘. 술병 정도는 치워두시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축하 파티를 주도한 휴즈는 문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루즈벨트를 지목하며 미소 지었다.
“축하합니다, 프랭크! 당신은 이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소!”
“내일보세, 하워드! 그리고 유우야! 고맙네!”
취기로 얼굴이 상기된 루즈벨트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마주 손을 흔든다. 두 사람이 거리로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캐딜락의 문을 열어주었다. 캐딜락 뒷자리에 몸을 기댄 휴즈가 남쪽을 가리켰다.
“타임스퀘어 쪽으로 돌아가 주겠나? 이런 기분에서는 뉴욕의 밤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만끽하고 싶네.”
“네, 휴즈 씨.”
경호원은 기분 좋게 답하고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창문을 내려 심호흡한 휴즈가, 맘껏 들이켠 밤공기를 긴 탄성으로 내뱉었다.
“아……! 이런 승리도 정말 짜릿하군. 아주 기가 막힌 영화 한 편을 찍어낸 느낌이야. 자네도 그런가, 아이스 맨?”
“음. 나 역시 아주 기쁘다네.”
선우진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휴즈는 또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자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냥…… 그저 그런 것처럼 보이는걸? 그 비싼 샴페인을 그렇게 마셨으면 감정 표현이라는 것도 좀 해보게, 이 차가운 친구 같으니……!”
장난스레 그의 팔을 툭 친 휴즈가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그거 아나, 아이스 맨?”
휴즈는 선우진을 향해 가볍게 주정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힘든 싸움일 줄 미리 알았다면, 예비 후보 시절의 프랭크를 후원하지 않았을 거야. 자네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로 힘들었다네. 물론 이겼으니 다행이긴 한데, 돌이켜보면 아찔했던 순간이 너무 많았어. 사실…….”
휴즈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버스터가 뎀프시를 때려눕히지 않았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네. 뎀프시는 정말로 인기가 좋으니 말일세. 그런 녀석이 오틴저의 지원 연설을 했더라면, 글쎄…… 한 5퍼센트 정도는 저쪽이 더 가져가지 않았을까? 나타샤 양의 노래도 마찬가지고…….”
휴즈는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버스터의 KO펀치와 나타샤 양의 노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을 해보면 등에 땀이 솟을 지경이야. 지금쯤 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중이겠지. 여기에서 본 손해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궁리하면서…… 한쪽에서는 로젠맨과 프랭크가 서로 선거패배의 책임을 두고 언쟁을 하고 있었을 테고……. 큭큭! 사라가 화를 내며 달려왔을지도 몰라…….”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보던 휴즈는 손뼉까지 쳐가며 재미있어 했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동안, 그들을 태운 캐딜락은 타임스퀘어 북쪽에 다다랐다. 지나는 자동차도 행인도 드문 시간이었지만, 번화가의 화려한 조명만은 그대로 남아서 들뜬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저 끝에서…… 매년 마지막 날에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새해를 맞이한다네, 아이스 맨. 저기 저 좁은 건물 옥상에 깃대봉 보이나? 저기에 둥근 공을 올려두고 있다가 자정이 될 때 확 떨어뜨리며 안에 들어있던 테이프며 색종이를 날리는 거야. 올해 말부터는 그 프랭크가 주지사 자격으로 그 행사에 초대받겠지. 그리고 내년부터는 공항확장 공사가 시작될 테고 말이야. ……아름다워!”
두 갈래로 도로가 나뉘는 길목의 좁은 건물을 가리키며 휴즈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뉴욕주지사와 함께 만들어갈 자신의 미래가 그의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나 보다.
“……음?”
캐딜락이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춰 섰을 때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선우진이 문득 눈을 깜빡였다. 캐피톨 극장의 입구에서는 예전 영화의 제목을 떼어내고, 새 영화의 제목을 부착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휴즈는 관광 안내라도 하는 사람처럼 극장에 대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그래, 아이스 맨. 여기가 뉴욕에서 가장 화려한 극장일세.〈지옥의 천사들〉도 이곳에서 개봉할 예정이라네.”
“버스터 키튼 영화가 걸렸었군.”
떼어지는 영화의 제목을 읽은 선우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중간의 철자가 몇 개나 빠졌지만, ‘버스터 키튼의 〈카메라맨〉’이었다는 건 짐작이 가능했다. 휴즈도 선우진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극장 방향을 내다보았다.
“〈카메라맨〉일세. 9월부터 상영했으니 슬슬 내려갈 때도 됐지.”
“그런가? 선거에만 집중하느라 그런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네그려. 조선으로 돌아갈 때 필름을 사가야겠어.”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휴즈는 의외라는 눈으로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자네…… 버스터 키튼 영화를 좋아했나? 뭐랄까…… 전혀 안 어울리는데?”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이 얼음 같은 남자가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건,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유키 양이 좋아한다네.”
“유키 양? 호오, 그래? ……그 아가씨도 뜻밖인걸? 무서운 영화를 싫어한다는 정도야 자네에게 들어 알고 있었네만, 훨씬 더 고상한 타입인 줄 알았는데……. 왜 버스터 키튼이 좋은지 이유도 말해주던가?”
“워낙 밝은 영화를 즐기기도 하지만, 나를 닮았다고 하더군. 저 표정이…….”
선우진은 쇼윈도우에서 막 꺼내진 〈카메라맨〉의 스틸컷을 가리켰다. 그제야 휴즈는 배를 잡고 파안대소했다.
“아하! 알겠네! 알겠어! 맞아, 닮았어! 하하하하! 버스터 키튼의 별명이 돌얼굴이거든! 조각상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지! 하하하하! 그 아가씨, 진짜! 제대로 짚었는데……!”
“저 배우를 실제로 만나볼 수 있겠나?”
다시 자동차가 출발했을 때 선우진이 묻자, 휴즈는 잘난 척하며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척을 했다.
“내 직업이 영화제작자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던가? 당연히 만날 수 있지! 지금은 버스터 키튼이 MGM 전속계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를 데리고 상업영화를 촬영하거나 하는 건 곤란하겠지만, 만나는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네! 하워드 휴즈가 만나자고 하면 곧바로 응할 걸세. ……음?”
말을 하다말고 휴즈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눈을 찡그렸다.
“근데 말이지, 아이스 맨……. 어째 우리 미행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후방 창 너머에서는 여러 대의 자동차가 뿜어내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탄 캐딜락과의 거리는 반 블록 정도, 딱히 빠르게 달려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멀찍이 떨어질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민주당 사무실에서부터 계속 쫓아왔습니다, 휴즈 씨.”
경호원이 더 소름끼치는 정보를 전해준다. 휴즈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런 정보를 지금 말해주면 어쩌자는 건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저는 당연히…… 기자들일 줄 알았는데요.”
경호원은 나름 그럴 듯한 추론을 내놓았지만, 휴즈는 고개를 저었다.
“기자들이 왜 나를 쫓아오겠나? 주지사로 당선된 건 내가 아니라 프랭크인데! 여기는 할리우드가 아니고, 나는 지금 막 여배우의 집에서 나온 게 아닐세! ……젠장, 뭐지? 이런 시간에 미행이라니,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 설마 텍스 리커드가 뎀프시 일을 보복하기 위해 갱들이라도 보낸 건가……?”
휴즈는 무슨 차가 몇 대나 쫓아오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가는 자동차가 거의 없는 이런 새벽 시간에 갱들과 마주치는 건 정말로 사양하고 싶다. 그런데……,
“적어도 갱은 아니군. 텍스 리커드도 아니고 말일세.”
뒤쪽을 유심히 관찰하던 휴즈는 이내 안도하며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경호원이 룸미러를 흘끔거려 휴즈의 표정을 살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휴즈 씨?”
“이 세상 어떤 갱이 롤스로이스 두 대와 히스파노 스위자 한 대로 미행을 하겠나? 그런 회사들은 갱들이나 텍스 리커드 같은 벼락부자에게는 자동차를 팔아주지도 않네. ……응? 그런데…… 파란색 히스파노 스위자는, 피에르의 자동차 아닌가?”
상황설명을 해주던 휴즈가 고개를 갸웃댄다. 경호원은 자동차의 속도를 높이며 휴즈의 의사를 확인했다.
“떼어내 버릴까요, 휴즈 씨?”
“아니.”
휴즈보다 먼저 입을 연 선우진이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만 세워주게. 아무래도 내게 용건이 있는 사람 같으이.”
“진심인가, 아이스 맨?”
휴즈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떤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간에 대화를 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아!”
“오틴저 후보가 재검표를 요청하지 않은 일과 관련이 있는 걸세.”
선우진은 안심해도 좋다는 듯 휴즈의 손등을 도닥여준 뒤, 자동차를 세우라는 손짓을 했다. 끼긱-! 턱-! 보도에 바짝 붙여 캐딜락을 정차시킨 경호원이 얼른 선우진을 위해 문을 열어준다.
“……잠깐만, 아이스 맨!”
휴즈는 큰 결심이라도 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같이 가세! 웬만해서는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자네는 웬만한 친구가 아니니까.”
“혼자 만나야 하는 사람일세, 하워드. 위험한 일은 전혀 없으니 편안히 기다리시게.”
휴즈를 만류한 선우진이 천천히 하차했을 때, 뒤쪽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자동차에서도 날씬한 그림자가 내려섰다. 그를 따라 하차한 거한도 몇이나 됐지만, 날씬한 그림자 역시 혼자서 선우진을 향해 걸어왔다. 저벅! 저벅!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다가온 그림자는 호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사이온지 씨, 오랜만입니다.”
“아아, 찰스 로스차일드 씨. 보내주신 다이아몬드는 감사히 잘 받았소.”
선우진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와 악수를 나눈 찰스가 고해성사라도 하는 사람처럼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다.
“맹세컨대 이 선거에 사이온지 씨께서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찰스는 차분한 손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말을 이었다.
“알았다면 처음부터 오틴저 후보 쪽에 자금을 대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진심입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우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나 역시 당신이 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소, 로스차일드 씨.”
공개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던 것은 바로 선우진 자신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조차 몰랐다는 것은 오히려 희소식에 더 가까웠다. 오해가 없었다는 걸 확인받자 찰스는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입니다. 무례하고 비겁한 도전처럼 비칠 수도 있는 행동이었는데, 사이온지 씨께서 그렇게 양해해주시니…….”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로스차일드 씨.”
선우진은 분명한 신뢰를 표했다. 이 남자는 절대로 자신에게 몰래 도전할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그 점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군…….’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던 모든 의문이 선우진의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풀려나갔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선거자금을 쏟아부었음에도 상대의 자본이 더 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인지……. 공화당은 왜 유대인을 주지사 후보로 내세웠던 것인지……. 그리고 오틴저 후보는 무슨 연유로 재검표 요구를 제기하지 않은 건지……. 완성되지 않았던 퍼즐이 이제야 다 끼워 맞춰졌다. 이 남자는 뉴욕의 주지사로 자신과 같은 유대인을 앉히고 싶었던 것이다. 선우진 자신과 휴즈가 루즈벨트를 후원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어쩌면 훨씬 더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던 사업일는지도 모르겠다.
“오틴저 후보 측에 재검표 요구를 하지 않도록 종용했습니까?”
선우진이 물었다. 찰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이온지 씨. 패배가 확정된 이후에 그런 말씀을 드린다는 것도 변명처럼 비쳐질까 싶어 부끄럽지만, 그건 제 진심을 증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었습니다.”
“진심은 충분히 전해졌소이다, 로스차일드 씨. 언제 처음 아셨소?”
“며칠 전 앤서니가 전화를 걸어와 사이온지 씨께서 뉴욕에 체류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더군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더니 프랜시스 듀퐁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사이온지 씨께서 하워드 휴즈라는 사업가와 함께 루즈벨트 후보의 선거를 지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찰스는 생각만 해도 아찔한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길로 모든 용무를 뒤로 하고, 급히 뉴욕으로 오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선거자금은 이미 지원된 이후여서 회수하지도 못하는데,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으니까요.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당신을 만나러 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져주겠다거나 하는 말을 감히 꺼내는 건 당신을 모욕하는 행동이니까요……. 찰스의 눈동자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민망한 이야기들을 마저 전한다.
“어쨌든 이렇게 되었군요.”
선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어 다 이해한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0.26퍼센트 차이!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이런 멋진 싸움의 결과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도박사의 긍지조차 없는 인간이다.
“또 졌습니다, 사이온지 씨.”
찰스가 선선히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선우진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도 지지 않았소, 로스차일드 씨.”
천천히 고개를 저은 선우진이 찰스를 위한 대안을 내놓았다.
“아직도 뉴욕주지사와 연을 맺고자 한다면 기꺼이 다리를 놓아드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