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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SHOW! (341/459)

341. SHOW!2021.03.17.

……♬ 따라라라랑, 따라앙, 따앙……♪ 경쾌하게 흐르던 거슈윈의 피아노 반주가 느린 박자로 변하는가 싶더니,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웅장한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뿜빰, 빠바바바밤! 빰……♬ 빠바바바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커튼 쪽을 향하는 조명은 더욱 환하게 밝혀졌다. 커튼을 관통한 빛 때문에 그 너머에 숨은 가늘고 긴 실루엣이 언뜻 언뜻 비친다.

1655076465187.jpg“오오……!”

지켜보고 있던 모든 참석자들이 탄성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이제 곧 등장할 이 파티의 주최자이자, ‘너무도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를 가진 아름다운 나라의 황태자’를 환영하는 갈채였다. 그런데……, 꽤나 긴 박수 세례가 쏟아진 다음까지도 그 가늘고 긴 실루엣은 여전히 커튼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다.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며 좌우를 두리번거릴 뿐이다. 슥-! 폴 화이트먼은 자신의 오케스트라와 거슈윈에게 당황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낸 후, 음악의 톤을 한 단계 낮춰 계속 이어갔다. 이 무대의 주인공이 언제든 뛰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도록……. 하지만 그래봐야 커튼 뒤의 실루엣은 계속 그 자리에 우물쭈물 서 있다.

16550764651876.jpg“……황태자님?”

앤디가 어떻게 된 거냐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속삭이는 시늉을 한다.

16550764651876.jpg“실례지만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요?”

1655076465187.jpg“하하하하!”

모두가 웃어댈 때, 재빨리 계단을 뛰어내려온 휴즈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마이크를 잡았다.

1655076465189.jpg“후후후! 이해해주십시오, 신사 숙녀 여러분! 제 친구가…… 엄청나게 수줍음이 많은지라 좀 망설이는 모양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주목받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후원을 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서 말이지요! 언제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저와는 정반대라고 할까요? 그래서 더 마음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습니다.”

너스레를 떨어 분위기를 바꾼 휴즈가 검지를 들어 보였다.

1655076465189.jpg“하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인사를 드리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죠. 제가 직접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한 번만 더 따뜻한 박수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1655076465187.jpg“와아아아아! 나와요, 왕자님! 휘이익……!”

여전히 기분 좋은 참석자들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휴즈가 시키는 대로 손뼉을 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휴즈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이고 나서 커튼 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16550764651904.png‘꽤 잘하는군.’

휴즈의 연기를 보며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언뜻 돌발 상황처럼 여겨지는 이 모든 일들이, 실은 다 미리 짜둔 각본대로의 전개다.

1655076465189.jpg-피에르에게만 마이크를 맡길 수는 없네.

선우진과 함께 안경남자의 등장 방식을 의논할 때, 휴즈는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1655076465189.jpg-저 친구는 언제 말하고,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잖나. 물론 장점도 많지만 어쨌든 그것만은 분명하다고. 그런 친구에게 마이크를 맡겨두고 마음껏 떠들게 해주면 우리 편을 만들긴커녕, 적대적인 관계만 쌓게 될 걸세. 내가 곁에 있지 않으면 안 돼. 언제든 마이크를 빼앗을 수 있도록…….

  그게 휴즈의 주장이었고, 선우진은 받아들였다. 게다가 루즈벨트와 단둘이 민감한 밀담을 나누기 위해서라도, 그편이 더 나았다. ……♪뿜빰, 빠바바바밤! 빰……♬ 빠바바바바……♪ 몸에 잘 맞는 연미복 차림의 안경남자가 휴즈와 함께 천천히 커튼 밖으로 걸어 나오자, 오케스트라는 다시 한 번 〈위풍당당 행진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연주했다.

16550764651876.jpg“……동양인이네?”

누군가 깜짝 놀라 외쳤다. 이미 나타샤를 보았지만 ‘왕자’라는 단어 때문에 막연히 금발의 동화적 이미지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곧바로 다른 사람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16550764651876.jpg“무슨 상관이야?”

그런 뒤 참석자들은 ‘동양인’ 안경남자를 위해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이만큼이나 화려한 파티를 베풀어주고, 또 루즈벨트를 위해 자금을 후원했다는데 지금 피부색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1655076465189.jpg“다시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인격자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휴즈는 흐트러진 머리를 빗어 넘기고 공손히 손을 모아 안경남자를 소개했다.

1655076465189.jpg“조선에서 오신 피에르 황태자이십니다.”

1655076465187.jpg“와아아아아!”

사람들은 들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또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사실 그들 중 대부분은 ‘조선’이라는 국가명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루즈벨트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50764675211.jpg“윽……!”

해군차관보로 재직했던 그는 당연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병탄의 역사가, 자신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시어도어가 포츠머스 강화 회담에서 일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일본이 지금처럼 수월하게 조선을 식민지로 삼지는 못했을 터다. 홱-! 루즈벨트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반사적으로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16550764675211.jpg‘갑자기 조선의 황태자라니? 내 가장 소중한 후원자가 일본인 화족인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게다가 두 사람은 친구 사이 아니었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커다래진 눈만 보아도 환히 다 읽힌다. 선우진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불편한 앓는 소리만 흘렸다.

16550764651904.png“으음……!”

16550764675225.png“……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선우진과 루즈벨트 사이의 공기가 냉랭하게 식어가는 사이, 마이크 앞에 선 안경남자는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16550764675225.png“파티는 즐거우신지요?”

1655076465187.jpg“네에! 황태자님! 호호호호……!”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린다. 왕자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다는 게 그녀들에게는 꽤나 색다른 기쁨을 주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게다가 그 왕자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백만장자 하워드 휴즈가 인정한 친구가 아닌가.

16550764675225.png“다행입니다. 정성껏 준비했지만,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다면 언제든 알려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즐거움이 바로 제 기쁨입니다.”

안경 남자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에 본격적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16550764675225.png“저는 조선에서 온 피에르라고 합니다. 조선 이름은 ‘현’이지만, 그 이름은 영어로 발음하기 조금 어렵지요. 그냥 피에르라고 불러주십시오.”

1655076465189.jpg“물론 뒤에 황태자라는 호칭을 꼭 덧붙여야 합니다! 이분의 나라에서는 현재 가장 서열이 높은 왕족이니까요.”

재빨리 끼어든 휴즈가 눈을 찡긋하며 한마디를 보탰다. 그런 뒤 얼른 다시 안경남자에게 마이크를 양보했다. 안경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히 인사를 계속했다.

16550764675225.png“하워드가 장황하게 제 소개를 했지만, 사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태어나 보니 황태자였던 것뿐이에요. 그리고 물려받은 유산이 좀 많았죠.”

안경남자가 미리 연습했던 농담을 던지자, 잠시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 웃음의 파문이 끝날 때쯤 안경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16550764675225.png“하지만 제가 물려받았어야 할 가장 큰 유산인 왕위는 지금 잠정적으로 폐쇄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조선의 황제 대신 일본의 총독이 그 아름다운 나라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저기 찰스 코렐 씨께서 말씀하셨던 슬픈 역사의 상처입니다.”

안경남자는 앤디 역할을 수행했던 코미디언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찍이 떨어진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루즈벨트가 선우진에게 물었다.

16550764675211.jpg“……몰랐나, 유우야?”

선우진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16550764651904.png“뭘 말입니까, 프랭크?”

16550764675211.jpg“조선의 황태자가 휴즈를 통해 내 후원금을 댔다는 사실 말일세!”

16550764651904.png“알았겠소?”

선우진은 그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16550764651904.png“내가 왜 조선 황태자와 어울린단 말입니까? 그것도 저렇게 슬픈 역사를 운운하는 이와……?”

그 대답에 루즈벨트가 받은 충격은 더욱 커졌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루즈벨트는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16550764675211.jpg“너무 흥분하지 말게, 유우야! 하워드가 자네에게 해될 만한 일을 벌였을 리가 없지 않나?”

둘 중 누구도 잃고 싶지 않은 그로서는 당연히 그런 중재안을 내놓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6550764675211.jpg“저기…… 조금만 더 들어보게. 내 생각에는, 저 황태자라는 사람이…… 사실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조선을 위해서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일이었다고 옹호하는 발언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네. 지금 미국의 지배를 받는 필리핀처럼 말이지! 그럼 자네에게도 별 타격이 없을 걸세.”

루즈벨트가 안간힘을 쓰며 휴즈를 옹호해보려 할 때, 안경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왔다.

16550764675225.png“언젠가 내 나라가 미국처럼 독립에 성공하는 날, 여기 계신 모든 훌륭한 손님들을 초대하여 그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1655076465189.jpg“물론 그때는 황제 폐하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잊지 마세요!”

이번에도 휴즈가 얼른 고개를 내밀어 익살맞게 단서를 붙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가볍게 웃어댔지만, 루즈벨트만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16550764675211.jpg“이런, 젠장……!”

안경남자가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고 말했으니, 이제 그는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일본 정부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의 바로 곁에 서 있는 사이온지 유우야가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할까 봐, 그것이 너무나 두렵다. 찰칵! 선우진이 무대를 노려보는 연기를 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자, 프랭크는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

16550764675211.jpg“나도 한 대 주게, 유우야.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인 루즈벨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16550764675211.jpg“하워드와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해보세, 유우야.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너무 그렇게 화를 내지 말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그가 선우진의 양복 자락을 쥘 때까지도, 안경남자의 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16550764675225.png“……공화당 대통령들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화하는 걸 묵인하거나, 동조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으니까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그들은 지금 조선인들이 겪고 있는 비극을 방조하거나 동조한 공범들입니다!”

짝짝짝짝짝-! 공화당을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손뼉을 쳐주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열기는 이제 꽤 많이 식었다. 재미있는 인사나 듣고 싶었는데, 갑자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수십 년 전 역사 강의를 하고 있으니 즐거울 턱이 없다.

1655076465189.jpg“저기…… 피에르 황태자님…….”

안경남자가 너무 폭주한다고 생각한 휴즈는 조심스레 그의 이야기를 끊었다. 미리 연습했던 인사말은 이미 예전에 다 끝났건만, 이 친구는 도무지 말을 멈출 기미가 없다.

16550764675225.png“공화당에게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닙니다. 민주당 소속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어떨까요? 10년 전 그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을 때, 전 세계의 힘없는 많은 식민지인들은 엄청난 희망을 품었습니다……!”

흥분한 안경남자는 휴즈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도 않는지, 오히려 마이크를 더 꽉 쥐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루즈벨트와 당적이 같은 우드로 윌슨까지 공격하고 나섰다. 이건 빨간불이다! 한계라고 느낀 휴즈는 결국 마이크를 덥석 움켜쥐고 말았다. 여기에서 더 이 야생마를 방치했다가는 화려한 사교계 데뷔의 꿈이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1655076465189.jpg“저기…… 저기…… 황태자님! 황태자님?”

안경남자와 마이크를 두고 잠시 실랑이를 벌이면서 휴즈는 눈으로 소리쳤다.

1655076465189.jpg‘피에르! 피에르! 좀 진정하게! 오늘이 아니어도 떠들 수 있는 날은 잔뜩 남았네! 이제 겨우 첫날이라고! 인사만 하기로 하지 않았나! 호감 어린 인상을 남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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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764675225.png“후우……!”

안경남자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마이크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진땀을 쪽 뺀 휴즈는 또다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1655076465189.jpg“하하……! 수줍음이 많은 친구여서 평소엔 이렇지 않은데, 오늘은…… 아마 여러분들과 만나서 너무 들뜬 것 같군요. 피에르 황태자님이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한 문장입니다.”

휴즈는 호를 그리듯이 오른팔을 쭉 뻗으며 매력적으로 말했다.

1655076465189.jpg“여러분, 마음껏 즐기세요!”

짝짝짝짝! 참석자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열기는 처음 안경남자가 소개되었을 때보다 훨씬 가라앉은 것이었다. 당연하다. 기쁜 파티 도중에 재미라고는 없는 긴 연설을 들었으니까. 그때, 커튼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타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1655076465189.jpg“녹여주시오, 폴!”

마이크를 그녀에게 넘기기 전에 휴즈는 폴 화이트먼을 지목하며 연주해달라는 주문을 했다. 화이트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 뒤, 미리 연습했던 대로 〈I wanna be loved by you〉의 반주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빰바바바밤! 빠람빠람……♪ 너무나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연주에 이어 나타샤의 달콤한 노랫소리가 이어진다.

16550764746212.png“♪……I wanna be loved by you, just you. And nobody else but you……♬”

1655076465187.jpg“……오오!”

잠시 심드렁해졌던 사람들조차도 탄성을 흘리며 꿈결 같은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이미 수없이 들어왔던 노래이건만, 이런 식의 느릿한 편곡은 처음 들어본다. 게다가 이 아름다운 음색!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을 때와는 전혀 다른 로맨틱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메인 분수대 주변을 가득 채웠다.

16550764746212.png“♪……Aa-ah-um! Boop-boop-a-doop! Daddle-at-dat-dat-dumb, I couldn't aspire to anything higher than filled with desire……♬”

거슈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나타샤가 가볍게 어깨를 흔들 때마다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도 작은 파문이 일었다. 물론 지금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도, 그 어떤 우아한 몸짓도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태인 단 한 사람, 루즈벨트를 제외하고…….

16550764675211.jpg“내가…… 사무엘을 보내서 지금 따로 좀 보자고, 하워드에게 말하겠네! 하워드와 함께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보세, 유우야! 분명히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라 믿네!”

다시 흥을 되찾은 사람들이 일어나 스텝을 밟을 때, 루즈벨트는 선우진에게 간곡하게 제안했다.

16550764675211.jpg“이런 사소한 문제로 우리의 완벽한 팀이 깨질 수는 없지 않나?”

그러나 그건 기실……, 선우진이 듣고 싶었던 말이다. *** 롱 아일랜드 저택 서재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아직도 메인 분수대 쪽에서는 흥겨운 댄스음악과 더불어 사람들의 환성이 들려왔지만, 서재에 모인 세 사람의 얼굴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16550764675211.jpg“해명을 좀 해보게, 하워드.”

루즈벨트가 먼저 침묵을 깼다.

16550764675211.jpg“내 당선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해놓고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1655076465189.jpg“무슨 짓이라는 게 어떤 의미요, 프랭크? 이 파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라면 심히 유감인데요. 장담컨대 할리우드 최고의 파티도 이보다 호화롭지는 않을 겁니다.”

휴즈는 시치미를 뚝 떼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루즈벨트는 담뱃재를 신경질적으로 털며 고개를 저었다.

16550764675211.jpg“파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 왜 그러나? 그래, 파티는 훌륭해! 나타샤 양도 정말 멋지고! 내가 살면서 경험해 본 최고의 파티일세!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파티도 이만큼 호화롭지는 않았어. 하지만…….”

선우진의 눈치를 힐끔 살피던 루즈벨트가 말을 이었다.

16550764675211.jpg“피에르라는 자네의 친구 말일세! 그 사람은…….”

1655076465189.jpg“황태자라는 호칭을 붙이시오, 프랭크. 나 정도 되는 친밀한 사이가 아닌 이상,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갖추시는 게 도리 아니겠소?”

휴즈는 루즈벨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예절 문제를 지적했다. 팔짱을 끼고 서서 매섭게 휴즈를 응시하던 선우진이 폭발하듯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16550764651904.png“자네야말로 친구에 대한 예의를 좀 갖추게! 내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하워드? 조선의 황태자라니! 내가 조선의 총독과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 알면서 그런 짓을 저질러? 우리 가문이 일본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 빤히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겐가?”

1655076465189.jpg“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나, 아이스 맨!”

휴즈도 지지 않고 맞서 소리쳤다.

1655076465189.jpg“나는 자네를 알기 훨씬 이전부터 피에르와 친구였네! 최고의 친구였다고! 그럼 자네를 위해서 옛 친구를 배신했어야 하나?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어서 화가 난다고 불평을 하는 건가? 그리고! 솔직히 피에르가 여기에서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정말로 조선이 독립국이 되는 것도 아니잖나?”

휴즈는 선우진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눈을 부릅떴다.

1655076465189.jpg“자네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다네!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입을 막으려 들어서는 안 돼! 그것이 자유고,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걸세!”

16550764651904.png“……최소한!”

선우진은 당장이라도 한 방 먹이려는 사람처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16550764651904.png“나에게 먼저 통보는 했어야지, 하워드! 자네가 쓰는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정도는 알려줬어야 했네!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난처하게 만들 수가 있나? 그 정도 생각은 있는 친구라고 믿었는데! ……독립을 바라는 조선의 황태자?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금이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거절했을 걸세! 그 정도 돈은 내게도 있으니까!”

1655076465189.jpg“아니, 그렇지 않아. 아이스 맨, 자네가 부자라는 건 알지만…… 피에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네. 그는 정말로 대단한 자산가란 말일세.“

휴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1655076465189.jpg“금괴, 보석, 해외에 투자한 자산까지…….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엄청난데, 내가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네. 그게 바로 귀족과 왕족의 격차이지. 그는 우리에게 자본을 대주는 든든한 친구가 될 걸세! 프랭크가 대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그 선거자금을 어려움 없이 지원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친구라고!”

16550764675211.jpg“……그 정도인가?”

루즈벨트는 대번에 설레는 얼굴이 되어 휴즈를 돌아보았다. 뉴욕 주지사 선거자금 만으로도 수백만 달러가 들어갔는데, 대선이라면 단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큰 규모의 후원자를 만난다는 건 실로 대단한 행운이 아닌가?

1655076465189.jpg“그렇소, 프랭크! 게다가 피에르는 친구에게 아끼는 것이 없는 성격이오! 만일 당신이 그에게 조선의 독립을 응원한다는 믿음을 준다면, 그는 훨씬 더 크게 보답할 거요. 물론 현금으로! 호의와 현금을 맞교환할 수 있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왜 마다해야 한단 말이오?”

휴즈는 달콤한 미끼를 연이어 던졌다. 루즈벨트가 그 미끼의 향기에서 온전히 헤어나기도 전에 선우진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

16550764651904.png“결국 돈이군! 돈이 그렇게 간절하면 내가 더 든든한 자본가를 후원자로 붙여주겠소, 프랭크! 그러니 이쯤에서 하워드와는 관계를 정리하시오!”

16550764675211.jpg“더 든든한 자본가라는 게 누굴 말하는 건가, 유우야? 나는 솔직히 지금으로서도 만족…….”

루즈벨트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후원은 좋지만, 자신의 약점이자 비밀을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개하는 건 아무래도 불안하다. 어지간한 부자 수준이라면 그냥 조선의 황태자가 더 낫지 않겠냐는 질문이 그의 입 밖으로 나오려 할 때,

16550764651904.png“로스차일드!”

선우진은 나직하고도 분명하게 다섯 글자의 단어를 발음했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표정이 극적으로 바뀌는 걸 바라보며 물었다.

16550764651904.png“그러면 만족하겠소, 프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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