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돌아가야지.2021.03.20.
“……어떻게?”
잠시 호흡하는 것도 잊고 있던 루즈벨트가 가까스로 물었다.
“어떻게……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결을 시켜줄 수 있다는 말인가, 유우야?”
“그야 그들이 내 친구이니까요, 프랭크.”
선우진은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루즈벨트의 눈은 더욱 커졌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친분이 있다고?”
루즈벨트는 질문하는 것과 동시에 휴즈를 돌아보았다. 마치 ‘하워드 자네도 알고 있었나?’라고 확인하는 것처럼…….
“난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요, 프랭크. 피에르가 로스차일드보다 부자라고 할 수는 없을 테죠. 하지만…….”
난감한 듯 얼굴을 쓸어내린 휴즈는 이내 검지를 치켜들었다.
“피에르의 재산만으로도 충분하오, 프랭크. 향후 당신이 정치를 계속하며 얼마를 필요로 하든, 그는 넉넉히 후원을 해줄 능력이 있소.”
“그럼 저 말이 사실이기는 한 건가, 하워드?”
루즈벨트가 구체적으로 다시 물었을 때 휴즈는 짜증이 폭발한 연기를 했다.
“그렇소! 젠장! 그렇다고요, 프랭크! 당신이 알고 싶은 게 오직 아이스 맨과 로스차일드 가문의 관계라면……! 내 답은 ‘그렇다’요!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않소? 아무리 돈이 좋아도 어떻게 그쪽과 손을 잡는다는 말이오?”
“……자존심?”
갑자기 뜬금없는 단어가 나오자 루즈벨트는 눈을 껌뻑이며 지금까지의 대화를 되짚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에 손상을 입을 만한 일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내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원을 받는 게 어째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란 말인가?”
“그가 오틴저를 후원했으니까!”
휴즈가 극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순간, 선우진도 그러지 말라고 나무라는 것처럼 목소리를 마주 높였다.
“하워드!”
“왜 그러나, 아이스 맨? 프랭크도 진실이 뭔지는 알아야지!”
어깨를 으쓱해보인 휴즈가 다시 루즈벨트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매력이 가득한 정치인이 왜 오틴저 정도를 상대로 그렇게 고전했던 건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소, 프랭크? 심지어 내가 만든 자동차에, 아이스 맨과 피에르가 쏟아부은 선거자금에, 모든 지원이 완벽했는데도 말이오!”
“세상에……! 오틴저의 배후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던 거로군! 그들이 오틴저를 비밀리에 후원했던 거야!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의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었을 테지! 유대인 주지사를 만들려고! 이런……!”
루즈벨트는 휴즈보다 앞서 중얼거리며 입을 쩍 벌렸다. 자신처럼 훌륭한 정치인이 왜 오틴저와 같은 신인을 상대로 애를 먹었는지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린 표정이었다. 웃음이 터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진지한 눈빛을 유지한 휴즈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알겠소, 프랭크? 우리는 그 로스차일드 가문과 싸웠던 거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신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적과 손을 잡겠다고? 왜 그래야 합니까? 승자는 오틴저가 아니라 우리인데?”
“이보게, 하워드. 이왕 비밀을 밝히려거든 다 밝히게.”
선우진이 끼어들어 일침을 가하자, 루즈벨트의 고개는 또 그를 향해 돌아갔다.
“비밀이 더 있나, 유우야? 내 선거였는데, 정작 나는 몰랐던 일들이 너무 많군.”
“로스차일드 가문이 오틴저 후보를 지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당신을 후원한다는 걸 알고 난 뒤에는 손을 뗐소. 그것이 또 다른 비밀입니다, 프랭크.”
선우진의 점잖은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휴즈가 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선거 이틀 전이잖나, 아이스 맨! 이미 우리가 이기고 있을 때라고! 이미 승부가 결정 난 뒤에 그렇게 한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글쎄? 과연 그럴까? 오틴저 후보가 재검표 요구도 하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선우진이 곧바로 되받아쳤다. 또 하나의 커다란 의문이 해소된 루즈벨트가 자신의 무릎을 쳤다.
“그렇군! 그래서 오틴저 후보가 재검표 요구를 하지 않았던 거야!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알겠군!”
이 세상 어떤 정치인도 0.62퍼센트 차밖에 나지 않는 패배를 바로 인정하는 법은 없다. 그 정도라면 무효표만 다시 살펴봐도 극복할 수 있는 수치이므로. 극단적으로 말해서 백 표 중 한 표만 잘못 카운트되어도, 바로 승패가 뒤바뀌게 되는 게 0.62퍼센트라는 격차다.
“그럼…… 로스차일드 가문은 오직 자네를 위해 그렇게 물러났다는 건가, 유우야?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을 텐데?”
루즈벨트의 말에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나의 우호적인 관계는 고작 몇백만 달러에 흔들릴 수준이 아니외다, 프랭크.”
“허……!”
루즈벨트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사이온지 유우야가 부자 화족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로스차일드 가문과 이렇게 밀접한 사이였다니……! 이건 좀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엄청나군그래, 놀라워.”
루즈벨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타샤부터 조선의 황태자, 로스차일드, 오틴저의 배후까지…… 너무 놀라운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바람에, 잠시 충격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놀랍고도 매력적인 부분은 단연 로스차일드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아는 부자가 둘 있다. 카네기와 록펠러……. 둘 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천문학적인 부를 이룬 미국의 자산가들이고 이제는 엄청난 가문을 이루었지만, 조금만 금융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보다 훨씬 더 큰 자본가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 이름은 당연하게도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카네기와 록펠러보다도 훨씬 부유한 대자본가의 후원을 받게 해주겠다니……! 루즈벨트는 가벼운 현기증까지 느꼈다.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분 좋은 꿈에 취한 것처럼 몽롱해진다. 하지만 이 제안에는 한 가지 분명한 현실적인 난관이 존재했다.
“유우야……. 자네의 후의는 정말로 고맙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를 후원한다는 게 가능한 이야기이겠나?”
멍한 상태로 몇 번이나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루즈벨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민주당 소속이니 말일세.”
카네기도, 록펠러도, JP모건도, GM도, 심지어 지금은 민주당 소속인 헨리 포드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큰 부를 이룬 기업들은, 예외랄 게 없을 정도로 공화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업을 확장해왔다. 공화당에 돈을 대지 않고서는 이익을 거둘 수 없는 지금의 미국에서, 그 어떤 자본가가 민주당 소속의 정치인에게 거액을 투자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는 민주당 전국 지부를 장악하지도 못한 상태인데…….
“그는 나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오틴저 후보를 버린 사람이오, 프랭크.”
선우진은 루즈벨트가 신뢰할 수밖에 없는 답을 들려줬다. 루즈벨트는 한 번 더 감탄하며 경외의 눈빛을 담아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선거자금을 댔던 공화당 후보에게 재검표 요구조차 할 수 없도록 압박을 가했던 것에 비하면, 그를 후원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제야 모든 걸 다 납득한 루즈벨트가 곤란한 표정으로 휴즈에게 말했다.
“이보게, 하워드…….”
“말도 안 돼!”
휴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다 아는 것처럼,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서 진저리를 쳤다.
“설마 지금 내게 피에르를 버리라고 설득하려는 거요, 프랭크?”
“버리라는 게 아닐세, 하워드……. 하지만 이쪽의 제안은 로스차일드가 아닌가? 객관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그렇군요! 당신에게는 돈이 제일 중요했던 거요, 프랭크! 세상에!”
휴즈는 과장된 손짓을 곁들여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댔다.
“아무도 돕지 않았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라는 정치인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내게 당신을 후원하자고 제안했던 피에르의 진심은, 이제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군요! 피에르의 안목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끌렸고, 그래서 나 때문에 아이스 맨까지도 합류했는데! 게다가! 피에르의 연인인 나타샤의 그 아름다운 노래 덕에 당선되어놓고……! 로스차일드가 도와준다고 하니 피에르를 버리자고요? 그렇게 말하려는 겁니까, 프랭크?”
분노의 열변을 토하던 휴즈는 루즈벨트에게 바짝 다가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뇨, 프랭크…….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은 더 돈이 많은 후원자를 위해 지금까지 당신을 도왔던 고마운 친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난 그렇게 못하겠소. 아무리 돈과 권력이 좋아도 나에게는 자존심과 영혼이라는 게 존재하니까요.”
“버리라는 게 아닐세, 하워드. 내 말은…….”
“됐소!”
휴즈는 두 손을 들어 더 듣고 싶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내가 물러나리다. 아이스 맨과 함께 앞으로 잘해 보시오. 당신에게 투자한 2백만 달러가 허공에 날아갔다고 생각하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속이 쓰리지만, 뭐 어쩌겠소……. 조금 비싼 교훈을 배운 셈 치는 수밖에……. 속물은 배신한다는 교훈 말이오.”
“아니, 배신이라니!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네, 하워드!”
루즈벨트는 억울한 표정으로 다급히 휴즈를 만류했다. 사실 지금 제일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아무런 언질도 없이 조선의 황태자를 데리고 와서 유우야의 기분을 상하게 한 휴즈인 것 같은데…… 왜 자신이 이렇게 사과와 해명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휴즈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놓으시오, 프랭크! 어디 다음 선거에서 당신이 로스차일드의 돈으로 얼마나 선전하는지 지켜보리다! 하긴…… 세계 최고의 부자 가문이 아낌없이 후원을 해줄 텐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내 자동차나, 나타샤의 노래 지원이 없어도 이기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지!”
휴즈는 루즈벨트의 손을 뿌리치며 작별인사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들을 지껄였다. 난감해진 루즈벨트가 어쩔 줄을 몰라한다.
“왜 이러나, 하워드! 제발 좀 진정하게! 오늘 이 자리는 내 당선 축하 파티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 내게 이런 식으로 화를 내야 하겠나? 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내게 말일세!”
루즈벨트는 휴즈를 붙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약자의 연기를 펼쳤다. 로스차일드와 인연을 맺고 싶은 욕심은 간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보다도 추진력이 강한 이 젊은 백만장자의 원한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하워드 휴즈라는 인간은 수가 틀리면 가장 치사한 방식의 복수까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취임식 퍼레이드를 할 수 없도록 무개차를 수거해가는 건 물론이고, 어쩌면 자신이 아직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기사가 신문마다 실리도록 할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될 만큼 비열한 발상이지만, 그간 보여줬던 휴즈의 집요함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루즈벨트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작별이 더욱 두려웠다. 그런데……,
“문은 저쪽일세, 하워드.”
선우진은 가뜩이나 흥분한 휴즈를 향해 더욱 도발적인 말들을 던졌다. 이대로 휴즈가 나가버리면 모든 게 다 끝이다. 공포에 질린 루즈벨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다음 선거에서도 이기려면 그는 이 두 사람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지 말게, 유우야!”
급히 선우진을 만류한 루즈벨트는 필사적으로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문을 막아섰다. 그런 뒤에야 선우진과 휴즈를 천천히 돌아보며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왜 이러나? 두 사람은…… 친구 아닌가? 자네들처럼 좋은 친구들끼리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대립하려고 하는 거냐는 말일세. 우리는…… 지성인들일세. 충분히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나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잃고 싶지 않네. 둘 다 내 소중한 친구니까!”
드디어…… 루즈벨트가 스스로 현 상황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욕심쟁이답게 두 사람을 다 붙잡으려 들었다. 이러면 문제는 8할 이상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선우진은 시치미를 뚝 떼고 계속 노한 연기를 이어갔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프랭크! 당신이라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필리핀의 왕자와 친분을 쌓을 수 있겠소? 모든 미국인들이 당신을 반역자라고 손가락질할 거요!”
“그렇지 않네, 유우야! 자네에게 피에르…… 황태자와 우정을 쌓으라는 말이 아닐세! 누구도 그런 걸 강요할 수는 없지!”
루즈벨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피에르의 이름 뒤에 황태자라는 칭호를 붙였다. 휴즈의 강력한 압박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저…… 이 일을 모르는 척해줄 수 없겠는지 묻는 걸세. 휴즈의 말이 옳아. 피에르 황태자 개인이 아무리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고 외쳐도, 그게 정말 현실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네. 자네와, 자네의 가문, 또 자네의 친구인 조선 총독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소문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시오, 프랭크?”
선우진이 물었다.
“이 파티에 기자와 편집장이 몇이나 참석했는지 벌써 잊으신 게요? 그들이 내일 타자기 앞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겠소이까? ……무슨 기사를 쓰지? 아하, 맞아! 어제 롱 아일랜드의 루즈벨트 당선 축하 파티를 주최한 게 조선인 황태자였지! 그 이야기를 써 볼까? 가만……! 그런데…… 루즈벨트의 후원자 중에는 일본인 귀족도 있다고 했는데? 이거, 정말 흥미로운 기사가 되겠는걸……?”
선우진은 타자 치는 시늉까지 곁들여가며 기자들의 흉내를 냈다. 루즈벨트는 어림도 없다는 듯 두 손을 흔들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네, 유우야!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대부분의 뉴욕 사람들은 일본과 조선이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샌프란시스코가 아닐세!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네! 너무 멀고도 머니까!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미안한지 루즈벨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기자들은 자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네, 유우야. 물론 자네가 내게 준 도움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이 크지만, 대외적인 활동을 주로 한 건 하워드이잖나? 그러니까 자네가 입을 다물면, 이 파티에 자네가 참석했었다는 걸 알 사람은 별로 없네. 잘생긴 일본인 부자가 있었다는 건 기억할 테지만, 그게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걸 모른다는 말일세.”
“뉴욕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선이나 일본에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당신과 내가 같이 있는 사진이 실리면 곧바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거요, 프랭크.”
선우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작게 도리질을 했다. 이번에는 휴즈가 루즈벨트를 거들고 나섰다.
“자네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겠네, 아이스 맨. 나 역시 자네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가만……!”
휴즈의 말을 끊은 선우진은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 당신들 지금…… 나에게 뒤로 빠지라고 권유하는 거요? 마치 죄지은 사람이 신분을 숨기듯이?”
“무슨 그런 말을 다 하나, 유우야! 그런 의미가 아니지!”
루즈벨트는 경직된 볼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선우진을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그저…… 우리가 조금씩만 양보하면…… 모두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걸세. 들어보게.”
루즈벨트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사실 피에르 황태자와 친분을 쌓는다는 건 내게도 적지 않은 부담을 주는 일일세. 잘 알다시피 미국과 일본은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이지 않은가. 그 식민지의 황태자를 보호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정치적인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그를 보호해줄 준비가 되어있네. 내 소중한 친구 하워드를 위해서 말이지. 그리고 유우야 자네는…….”
루즈벨트는 손을 모아 선우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주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뉴욕에서 많은 사업을 펼치고 거기에서 이익을 도모할 수가 있을 걸세. 내가…… 행정적인 편의를 최대한 봐주겠네. 어떤가? 그게…… 공식적인 내 후원자로서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사업가인 자네에게는 더 좋은 일이 아닌가?”
“당신은 서로 조금씩 양보한다고 했지만, 하워드는 뭘 양보하는 겁니까?”
진지하게 듣고 있던 선우진이 휴즈를 가리켰다. 루즈벨트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았다.
“조선의 황태자와 얼마나 친한지를 밝혔으니 그는 이제 일본에서 사업을 할 수 없네! 일본인들은 그의 영화를 사 가지도 않을 것이고, 시추용 드릴도 구매하지 않겠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고!”
“나는 상관없소.”
사실 일본에 팔아먹을 수 있는 드릴은 이미 다 팔았지만, 휴즈는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대범하게 손을 들었다.
“그렇게 발생하는 손실이 100만 달러든 200만 달러든, 전혀 두렵지도 아깝지도 않소. 내게 피에르는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친구이니까.”
“그래! 친구라는 건 그런 거지! 나에게도 자네가 그런 친구라네, 하워드!”
휴즈의 손을 꼭잡은 루즈벨트가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이제 자네만 양보해주면 되네, 유우야! 많이도 아니고, 나를 위해 그저 반 발짝만 뒤로 물러나는 거야! 그럼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최고의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함께 장밋빛 미래를 개척해나가세! 이런 사소한 문제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지 않나? 지난 한 달간 우리가 나눈 우정의 가치를 생각해주게! 그럴 거지?”
루즈벨트는 사이비 종교를 권유하는 사람처럼 감성적인 미사여구를 잔뜩 주워섬겼다. 특유의 어조와 말솜씨가 조합을 이루자,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넘어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젠장…… 당신들 정말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군…….”
선우진은 이마를 손으로 꾹 누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긴 고민을 하는 연기를 펼치던 선우진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도 양보하리다. 나 역시 좋은 친구를 잃기 싫으니 말이오.”
“유우야! 내 친구! 고맙네!”
루즈벨트는 감격한 목소리로 선우진의 이름을 불렀다. 선우진은 그의 어깨를 도닥이면서도 분명하게 단서를 달았다.
“단……! 내가 당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하오. 로스차일드 가문도 마찬가지요. 우리의 이름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회자되는 순간, 당신은 우리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프랭크…….”
“그럼! 당연하지! 걱정하지 말게!”
선우진이 동화 속 맹세처럼 섬뜩한 조건들을 나열해도 루즈벨트는 그저 기뻐 어쩔 줄 모를 뿐이다. 왜 아니겠는가? 원래부터 자신을 도와주던 든든한 두 친구에, 엄청난 부자라는 조선의 황태자와 로스차일드까지 더해졌는데!
“이제 우리 셋이서 화해의 포옹을 하세! 자, 하워드! 자네도 오게!”
흥분한 루즈벨트는 선우진의 허리에 한 손을 두른 채 휴즈를 향해 팔을 쫙 벌렸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싫소, 절대로……!”
휴즈는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진땀으로 흠뻑 젖은 중년 남자와 끌어안다니! 결벽증이 있는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보라니까! 하하하하!”
루즈벨트가 호탕하게 웃어댈 때, 서재의 문이 열리며 로젠맨과 팰리가 얼굴을 슬쩍 들이밀었다.
“다…… 잘 이야기가 된 겁니까?”
로젠맨은 아직도 걱정이 남은 얼굴로 물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지만, 휴즈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당신들! 다 엿듣고 있었던 거요?”
“엿듣지 않을 재주가 있소, 하워드? 세 명이 흥분해서 언쟁을 벌이는 게 옆방에까지 다 들릴 정도였는데…….”
로젠맨은 어깨를 으쓱했다. 팰리도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정말 문을 나서면 우리라도 막아서려고 했습니다, 하워드.”
“들었다니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에 관해서는…….”
선우진이 말을 꺼내려 하자, 로젠맨과 팰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유우야. 그리고…… 당신의 용단에 정말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얼마나 고심이 컸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요.”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샴페인이나 가져오게, 사무엘! 난 진짜…… 목이 타서 죽는 줄 알았네! 이제 진짜 축배를 들어야지!”
드림 팀의 결별을 막아냈다는 성취감에 한껏 들뜬 루즈벨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 따앙, 따라라랑, 따라앙, 따앙……♪ 열린 서재 문틈으로 흥겨운 피아노 연주가 들려온다. 그렇게 조선의 황태자는 뉴욕 안착에 성공했다. *** 서재에서의 협상으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선우진과 휴즈는 밤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진짜 왕자가 맞는지 확인해볼 생각도 않더군.”
샴페인을 홀짝이던 휴즈가 엷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우진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런 의심을 할 여유조차 없었을 테지.”
“하긴…… 일본 화족 앞에서 조선의 황태자를 소개했으니까. 크크크!”
다시 생각해봐도 재미있는지 휴즈는 계속 웃음을 흘렸다. 원하는 바를 다 성취했는데, 상대는 오히려 빚진 심정이 되어 기뻐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승리라고 부를 만하다.
“이제부터 뭘 할 생각인가, 아이스 맨?”
휴즈는 샴페인 병을 들어 선우진의 잔을 채웠다. 선우진은 휴즈와 잔을 맞부딪친 뒤 턱으로 해변을 가리켰다.
“이 집부터 구입하세.”
안경남자가 뉴욕에서 처음으로 밤을 보낸 집이고, 한 달 동안 꽤 익숙해진 곳이기도 하니 그 편안함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루즈벨트가 안경남자와 친분을 쌓는 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역시 이 저택에서 좋았던 기억이 많으니까.
“호탕해서 좋군.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사자고 하는 건가?”
“그 정도야 빈센트에게서 또 뜯어내면 그만일세.”
선우진이 농담조로 받자, 휴즈는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남겼다. 이 남자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아 너무 유쾌하다. 한참 웃어대던 휴즈가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으로 물었다.
“프랭크 취임식까지는 뉴욕에서 머무는 게 어떤가, 아이스 맨?”
지금까지 정말 재미있게, 짜릿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와 함께 어울리는 동안,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모험이 많았고, 휴즈는 그 즐거움을 좀 더 연장하고 싶었다.
“나는 그림자가 되기로 하지 않았나. 취임식과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이라니, 가당치도 않네.”
한 번 더 농담을 건넨 선우진이 까만 밤바다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프랭크에게 찰스를 소개해준 뒤에는 돌아가야지.”
여길 찾았던 목적을 다 이루었으니,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벌여 두었던 일들을 마저 마무리 지어야 한다. 우선 한조를 총독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