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부족해.2021.05.08.
“……대답 여하에 따라 내 목숨이 걸렸다고?”
데츠잔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선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하…… 하하! 무, 무, 무슨 그런 말을 다 하는 게요, 사이온지 선생……. 목숨이 걸렸다니, 농담이 너무 짓궂지 않소?”
장난처럼 슬쩍 눙치려 들지만, 놈 역시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경련하듯 부들거리는 놈의 눈꼬리가 그 증거였다.
“그게 자네의 대답인가?”
선우진은 표정 변화조차 없이 냉담하게 되물었다. 데츠잔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면서도 뻔뻔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크큭……. 그만두시오. 다른 사람이라면 깜빡 넘어갔겠지만, 나는 속지 않소이다!”
“나는 그래도 한 번은 살아날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선우진은 데츠잔을 굽어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기회를 그렇게 날릴 셈이로군. 뭐, 그 역시 자네의 선택일 테니.”
“하하하……! 사이온지 선생! 그러지 마시고……!”
데츠잔이 피투성이 손을 뻗어 다시 한 번 선우진의 바짓단을 잡아보려 한다. 그러나 선우진은 그 손길이 닿기도 전에 성큼 걸음을 옮겼다.
“가자, 바바.”
바바와 도지마는 데츠잔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선우진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몸짓만으로도, 선우진이 하고 싶었던 말은 데츠잔에게 분명히 전달되었다.
‘너를 살려줘야 하는 이유를 대지 못하면, 내 건물로 피신할 수 없다.’
꿀꺽-! 사색이 된 데츠잔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점점 더 인파가 늘어나는 경성 혼마치에 이렇게 버려지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다. 순찰을 도는 경찰의 눈에 띄더라도, 혹은 멀찍이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조선인 불량배들에게 다시 덜미를 잡히더라도…… 죽음을 면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는 이제 총알마저 다 떨어졌다.
“뭐야, 왜 혼마치에 저런 비렁뱅이가 돌아다니는 거야…….”
도로 건너편의 행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마저도 데츠잔의 심장을 아프게 후벼 팠다. 동냥을 구걸하는 거지처럼 보이는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이지만, 그보다는 주변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한시라도 빨리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 그에게는 갈 곳이 없다.
“사이온지 선생!”
본능적으로 위험을 깨달은 데츠잔은, 바닥에 엎어진 채 간곡하게 선우진을 불렀다.
“선생마저 이렇게 냉대하면 나는 정말로 죽는 거요! 당신이 후원했던 대일본제국의 육군대좌가…… 경찰 나부랭이나 조선인 불량배 따위에게 숨이 끊겨야 속이 시원하시겠소?”
“죽긴 왜 죽나? 데츠잔, 자네에게는 육군이라는 든든한 배후가 있거늘.”
선우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다임러를 가리켰다.
“도지마가 용산육군기지까지 태워줄 걸세. 그게 내 마지막 온정일세.”
“용산으로는……! 갈 수 없소이다!”
데츠잔은 고민조차 해보지 않고 일단 도리질부터 했다. 용산기지로 피신할 것 같았으면, 걸인과 옷까지 바꿔 입어가며 필사적으로 도망 다녔을 이유가 없다. 그냥 남산의 남쪽 기슭으로 내려가 조금만 걸어가면 용산에 닿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소문이 군 내부에 퍼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까닭이다.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엘리트 장교로서의 경력은 확실히 끊길 터. 평생 육군 대장을 꿈꾸며 빠르게 승진을 거듭해온 그에게, 그건 사회적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네만,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억지로 강권하지는 않겠네.”
선우진이 차갑게 말했다. 물론 그 역시 데츠잔이 용산육군기지로 피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안다. 놈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은 선우진뿐이고, 그는 그걸 결코 헐하게 내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당신……!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셨소?”
선우진이 계속 냉대를 이어가자, 데츠잔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매정하다고?”
회전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선 선우진은 추상이 서린 듯한 엄한 기세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자네의 앞에 선 사람이 내가 아니라, 스기우라 공작이라고 해도 감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문이 막혀버린 데츠잔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사이온지 유우야의 지적이 옳다. 만약 그가 당부를 어긴 상대가 스기우라였다면…… 그는 이렇게 다시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낼 수 없었으리라. 스기우라 공작은 기대를 저버리는 부하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는 냉혈한적 존재이니까.
‘하긴…… 이 세상에 어떤 후견인이 이런 일탈을 용서해줄까…….’
데츠잔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지금은 사이온지 유우야의 화를 푸는 것에만 집중하기에도 버겁다.
“……당신은 스기우라 공작과는 다른 사람이지 않소?”
논리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데츠잔이 감상적인 도피를 시도해본다. 그래봐야 선우진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다르지 않네, 데츠잔 대좌.”
선우진은 데츠잔을 거만하게 깔아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스기우라 공작과는 나이도, 사상도 다르지만…… 나 역시 화족일세. 게다가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의 일족이지. 일본 열도를 쥐락펴락해 온 그 대단한 막후, 사이온지 긴모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이네. 그게, 어떤 뜻인지 알겠나?”
“끄으응……!”
데츠잔은 대답 대신 앓는 소리만 흘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입을 열어봐야 외려 손해만 보게 생겼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선우진이 대신 답을 들려주었다.
“베푸는 것을 즐기되, 기어오르는 인간들에게는 가차가 없다는 의미일세. 한때 친구라 믿었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선우진의 눈빛은 추호의 타협 의지도 없다는 냉기를 뿜어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에 데츠잔의 등골에는 소름이 쫙 돋았다.
‘최후의 수단을 쓰자! 그걸 써야 해!’
데츠잔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고함이 울려댄다. 그와 동시에 만류하는 또 다른 목소리도 메아리쳤다.
‘안 돼! 그 비장의 수를 지금 써버려서 어쩔 셈이냐! 그건 네가 일본육군대장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거늘! 그 사업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닥쳐라! 지금 이 고비를 못 넘기면 육군대장이고 뭐고 못 된단 말이다!’
살고 싶다는 욕망과 만류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데츠잔은 발작이 온 사람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여기에서 그걸 써버리자니 아깝고, 안 쓰자니 살아날 방법이 없고……! 삐이익-! 삐이익-! 어딘가 멀리에서 경찰의 호각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경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데츠잔의 결단을 앞당기기에는 충분했다.
“……돈!”
데츠잔은 마치 목숨의 일부를 뚝 떼어내어 내미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입을 열었다.
“돈을 벌게 해드리리다! 그것도 아주 큰돈을 말이외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살려주시오! 사이온지 선생, 당신은 사업가이니까 그런 이유라면 받아들이실 수 있을 테지!”
“큭! 돈이라…….”
데츠잔의 비루한 몰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우진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차림의 사내에게서 그런 제안을 들으니 더욱 신빙성이 높아지는군.”
“비웃지 마시오! 농담이 아니올시다! 정말로 큰돈을 벌 비책이 있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몇십, 몇백 년이고 쉼 없이 이어질 안정적인 돈벌이란 말이오!”
필사적으로 항변하는 동안에도 데츠잔의 겁먹은 두 눈동자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바쁘다. 혹시 경찰이 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날까 봐 두렵고 또 두려웠다.
“그렇게 안정적이고 큰 이윤이 남을 돈벌이인데 왜 지금까지 자네가 직접 하지 않았나?”
선우진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네놈의 제안 따위 조금도 믿지 않지만, 어디까지 헛소리를 이어가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겠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데츠잔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는 아직 그만한 재력이 없소, 사이온지 선생. 이건…… 우선 큰 자본을 투자해 두어야 이윤을 거둘 수 있는 사업이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이 남는 장사라는 것만은 분명하외다! 열 배! 열 배 이상의 이문을 남길 수 있소!”
“1분만 더 주겠네.”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본 선우진이 무감정하게 설명을 재촉했다. 1분이 지나고 나면, 정말 그를 길 위에 내버려 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릴 기세였다. 데츠잔의 말은 더욱 빨라졌다.
“아무것이든 좋으니 생필품을 만들기만 하시오! 너무 비싸지는 않은 것으로! 특이한 물건이면 더욱 좋겠지만, 양말이나 비누처럼 흔한 물품이라 해도 좋소! 아니, 기성 제품을 대량으로 사셔서 포장만 바꿔도 그만이오! 그것을…… 대일본제국 육군에서 10배의 가격으로 사겠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선우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흔해 빠진 비누를 열 배의 가격으로 매입하겠다니, 육군 대장들이 그런 거래를 용납할 리가 없거늘. 한 달도 못 가 감사에 걸릴 테고,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질 범죄를 잘도 떠들어대는군. 이런 실망을 준 것으로도 모자라서 자네, 나를 어떤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것인가?”
“늙은이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소, 사이온지 선생! 그들은 절대 모를 테니까!”
데츠잔은 보도에 무릎을 꿇은 채 필사적으로 두 손을 저었다.
“그 어떤 물건이든 ‘야전용’이라는 세 글자만 앞에 붙이면 값을 올릴 수 있소! 예를 들어 흔해 빠진 비누도, 세균박멸을 위한 야전용 비누이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고서에 적기만 하면 그대로 무사통과요!”
턱-! 선우진이 회중시계의 뚜껑을 덮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누가 자네를 위해 그런 수고를 대신한다는 말인가, 데츠잔?”
“육군성 동원과에서 모든 과정을 담당할게요, 사이온지 선생! 원래부터 그런 일을 하는 곳이니 말이오! 신청부터 원가 계산까지 귀찮은 서류 업무도, 심사 결과 조작도, 모두 다 도조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사이온지 선생께서는 물건만 대주시면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소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이윤을 챙기기만 하면 그만이오!”
‘이놈……. 이런 꿈을 꾸고 있었던 겐가?’
선우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칠 대로 지친 놈이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체계적이고 또 논리적이다. 그 부분만 보아도 데츠잔이 이 계획을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여 수립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20전짜리 비누라고 하니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일본 육군의 규모를 간과하면 곤란하오!”
선우진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데츠잔은 구체적인 숫자를 사례로 들기 시작했다.
“100만 명에게 하나씩만 보급해도 20만 엔이고, 그 공급가를 열 배로 부풀리면 곧바로 200만 엔이 되는 거외다! 200만 엔! 그만한 돈이 매달 들어오는 게요! 이렇게 편하고 또 돈이 되는 사업이 또 어디에 있겠소이까?”
“그렇게 돈이 되는 사업을, 지금껏 다른 재벌들이 내버려 뒀을 턱이 없지.”
선우진이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 말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데츠잔은 사색이 된 얼굴을 열심히 끄덕였다.
“물론 그들도 육군 대장들과 결탁해서 다 그렇게 챙기고는 있소! 군화부터 총검까지 일본 육군의 장비를 공급하는 회사들은 다들 아주 큰 이득을 챙기는 중이외다! 하지만 시대가 빠르게 바뀌고 있지 않소이까, 사이온지 선생! 몇 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신문물들이 갑자기 휙휙 생겨나는 판이니, 우리가 파고들 여지는 여전히 충분하오! 맹세할 수 있소!”
비누 한 물품만으로 200만 엔. 매달 매입하겠다는 이놈의 말은 허풍이 섞인 것이지만, 일 년에 네 번만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결코 나쁘지 않은 사업이다. 아니, 사실 꿈같은 제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러나 선우진은 이것이 데츠잔의 바닥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놈에게는 아직…… 더 긁어낼 만한 구석이 남았다.
“부족해.”
선우진은 냉담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고작 그 정도로 내 실망감과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데츠잔, 자네가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은 한없이 작군그래.”
“매월 200만 엔인데,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선우진의 반응에 데츠잔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차, 착각하신 모양인데 단발 거래로 끝나는 것이 아니외다, 사이온지 선생! 그런 식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이어가는 게요!”
“적발되지 않으면 그럴 테지. 하지만…….”
선우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검지를 까딱거렸다.
“인간이 하는 일에는 실수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결국 꼬리를 밟히는 것이 정해진 수순. 비위로 옷을 벗은 수많은 장군들이 그 증거일세. 당장 지멘스 사건만 해도 마츠모토 해군 중장이 징역형에 처해 지지 않았나? 그가 받았던 뇌물이라고 해봐야 고작 40만 엔의 푼돈이었네.”
“지멘스 사건과는 엄연히 성격이 다른 사업이오, 사이온지 선생……!”
“뭐가 얼마나 다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사람을 거쳐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세. 그러면 말이 새기가 더 쉬울 테지. 나는 군인들의 푼돈을 욕심내다가 패가망신하고 싶지 않네. 그런 짓에까지 손을 댈 만큼 궁하지 않다는 걸 몰랐는가? 한 번에 몇천만 엔씩 들어오는 정도의 사업도 아니고 말일세.”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것처럼 표현은 했으나, 선우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결국…… 200만 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데츠잔도 그 진의를 똑똑히 알아들었다.
“일단 그 정도로 시작하지만 더 좋은 일이 잔뜩 남아있소이다, 사이온지 선생!”
오물이 잔뜩 묻은 손으로 입가를 훑어 내린 데츠잔이 2차 설득안을 내놓았다.
“관동군! 관동군을 잊지 마시오! 만주에 주둔 중인 관동군은 본토의 통제에서 상당히 자유롭소이다! 그들을 위한 군용 보급품을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도록 해드리리다! 식량부터, 의복, 우마차! 모든 걸 당신에게서 사겠소!”
역시 긁어놓으니 또 새로운 줄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아직 더 나올 것들이 남았다.
“몇만 되지도 않는 관동군으로 나를 유혹하려는 것인가?”
선우진이 어림도 없다는 듯 냉소하자, 데츠잔은 눈을 크게 뜨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2년 내에 관동군은 10만까지 증원될 거요, 사이온지 선생! 머지않아 완성될 길회선을 방어하기 위해서 병력 증강은 필수적인 조건이니 말이외다”
“자네가 관동군의 보급품 관련 계약을 어떻게 주관하겠다는 겐가, 데츠잔. 이제는 아무 말이나 뱉고 보는군. 마음이 조급하다는 건 알겠네만, 더 이상은 들어주기가 힘드네그려.”
“이시와라 간지 중좌가 이미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파견되어 있소! 그가 곧 관동군을 장악할 것이고, 내 편지 한 통이면 군보급품을 당신에게 바칠 거요!”
“계속 거기에서 거기로군.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는 없는가, 데츠잔 대좌?”
선우진은 데츠잔을 향해 살짝 상체를 기울이며, 비웃음인지 흥미인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 변화를 보였다.
“내가 정말로 매료될 만큼의 커다란 사업 말일세.”
“이시와라 간지가 만주 파병을 자원한 것은 만주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올시다, 사이온지 선생! 말하자면 지금의 만주 주둔은 그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한 사전답사요!”
드디어 데츠잔의 흉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있던 진짜 원대한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츠잔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설명을 이어갔다.
“만주국 정부를 수립하기만 하면…… 그곳은 우리의 자치 영토나 다름없는 나라가 될 거요! 당신이 모든 보급품 공급을 독점하실 수 있소! 그때부터는 100만 이상으로 관동군의 규모를 늘릴 테니, 어마어마한 사업이 될 거란 뜻이오! 관동군이 입고 먹을 것은 물론이고, 사용할 소총, 기관총, 실탄, 장갑차까지 전부 다! 당신이 독점 공급하시오! 우리가 엄청난 고가로 매입하겠소! 그럼 당신은 10년 내에 미츠비시와 미츠이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부자가 될 거요!”
데츠잔은 피를 토하는 얼굴로 선우진에게 끌어다 바칠 수 있는 선물을 길게 나열했다. 돈 될 구석은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많았지만, 선우진의 가슴을 단번에 파고드는 것은 군수품에 대한 제안이었다.
‘어째…… 잘하면 일본 육군의 돈으로 만주에 군수 무기 공장을 설립할 수도 있겠는걸…….’
선우진은 빠르게 계산을 펼쳐보았다. 장쉐량으로부터 사들인 헤이룽장성 독점개발권을 사용하면, 공장부지는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일본육군에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생필품을 팔아 남긴 돈으로, 도로를 닦고 전기를 끌어오면…… 독자적인 군수 공장 가동도 꿈만은 아닐 터. 물론 이놈 일행에게도 얼마쯤 떼어주어야 불만이 생기지 않겠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줄 용의가 있다.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만주에서 독자적인 무기 생산 시설을 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놈을 조금 나중에 죽이는 대가가 그 정도라면…… 정말 크게 남는 장사가 아닌가.
‘일본군의 군자금으로, 일본군과 싸워 이길 무기를 만들게 되는 거로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였으나, 선우진의 포커페이스는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겁먹은 눈으로 그의 반응을 살피던 데츠잔은, 지레 절망감에 휩싸여 머리를 짓찧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내가 바칠 수 있는 모든 선물을 다 꺼내놓았는데도……! 나를 살려줄 마음이 들지 않는단 말이오? 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하겠소, 사이온지 선생! 으으으……!”
다시 애원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놈이 가진 밑천이 다 바닥나 버렸다는 의미였다. 선우진은 비로소 자세를 낮추고 데츠잔의 어깨를 짚었다.
“이제야 진심으로 뉘우치는군…….”
선우진은 놈의 어깨를 꽉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다 얻어냈으니, 다시 자애로운 구원자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걸 기다렸네, 데츠잔 대좌.”
“……에?”
데츠잔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진 그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선우진은 놈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나를 기만하지 말게, 데츠잔 대좌. 혹여라도 내게 거짓말을 하고 싶거든, 조금 전의 그 기분을 기억하게나.”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를 살려주겠다는 거요? 휘둥그레진 놈의 눈동자가 묻는다. 선우진은 팔에 힘을 주어 놈을 일으켜 세웠다.
“가세. 목욕부터 좀 하시게나.”
“……사이온지 선생!”
긴장이 확 풀린 데츠잔의 눈가에 감동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선우진은 악취가 풍겨 나오는 놈의 벙거지를 아무렇게나 쓸어주며 웃었다.
“그나저나 이런 모자는 어디에서 구한 겐가? 냄새 한번 기가 막히군!”
“그게…… 그 사연을 다 이야기하려면 이틀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거요, 사이온지 선생!”
겨우 여유를 조금 되찾은 데츠잔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선우진은 놈을 회전문으로 이끌며 한없이 마음 좋은 한량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거 술잔을 기울이며 들어보세. 자네가 워낙 큰 사고를 쳐놓은 탓에 어차피 며칠 동안은 꼼짝도 못 하고 숨어 지내야 할 테니. 자네, 밥은 먹었나……? 아참, 무릎은 좀 어떤가? 의사도 불러야겠는걸…….”
*** 같은 시각, 도로 건너편 건물 뒤에서는 양복쟁이 일행이 조선종합투자회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우진이 데츠잔을 부축해 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리자 몽둥이 불량배는 양복쟁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 생원 나으리.”
“젠장…….”
양복쟁이는 잔뜩 난감해져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혹시라도 저 빡빡이 일본놈이 홀로 버려지면 바로 쫓아가서 개처럼 끌고 오려 했는데, 이제는 다 텄다.
“어쩔 수 없지. 한 대감께 사실대로 고하는 수밖에…….”
한숨과 담배 연기를 한 데 섞어 내뿜은 양복쟁이가 도끼눈을 떴다.
“사이온지 유우야라고 했겠다…….”
선우진에게서 들었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곱씹으며, 양복쟁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네놈이 얼마나 잘난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네놈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상대를 건드렸어. 우리 한 대감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오줌을 지릴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