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청천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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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청천벽력.
2022.05.28.

“알겠습니다, 데츠잔 대좌! 하온데…….”
이시이는 씹던 음식을 급히 삼키고, 노골적으로 지폐를 곁눈질했다.

“이 돈은…… 무엇인지요, 데츠잔 대좌?”
다른 장교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데츠잔과 이시이를 번갈아 살폈다. 육군 대좌가 하급자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대가를 지불한다니, 이건 아무래도 너무 낯설다. 게다가 한두 푼도 아니고 10원이나 되는 꽤 큰 돈을…….

‘좋아…….’
데츠잔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선명한 인상을 남겼으니, 나머지 두 놈도 훗날까지 이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리라.
당장 오늘 다른 장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퍼뜨려준다면 더욱 고마울 일이다. 이제 이시이 놈이 의심을 품고 몸을 사리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핑계만 대주면 된다.

“인력거 삯이다.”
데츠잔은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되물었다.

“뛰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낯선 곳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니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관용차의 운전사까지 함께 얽으려면 덤터기를 씌우는 것도 두 배로 까다로워진다. 그러니 오늘 밤 이 녀석의 동선은 아무도 증언해줄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 남겨야 할 필요가 있다.

“에엣? 관용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겁니까?”
이시이는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더 묻지 않고 10원 지폐를 받아 안주머니에 넣었다. 경무국까지 인력거 삯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십 전. 나머지를 고스란히 부수입으로 챙길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렇게 공작금까지 하사해주시니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츠잔 대좌! 감사합니다! 대위 이시이 시로!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탐욕스레 히죽거리는 이시이의 얼굴에서 의심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돈을 미끼로 내걸길 잘했구나 싶어, 데츠잔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번졌다.

“보고는 어떻게 드립니까?”
입술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를 대강 훔치고 모자를 챙겨 쓰던 이시이가 물었다. 데츠잔은 계획대로의 답을 들려주었다.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전화는 쓸 수 없다. 귀관이 돌아와서 구두로 전해주게. 아, 그리고…….”
데츠잔은 잊지 말라는 듯 손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모레쯤 시바타 비서과장을 이송할 거라는 정보도 도조 중좌에게 알리도록.”
이것으로 첫 번째 포석은 다 깔아두었으니, 이제 다음 행보를 고민할 차례. 이시이를 내보낸 데츠잔은 이마를 짚은 채 자신에게 남은 과제들을 하나씩 점검해 나갔다.

‘희생양은 이렇게 얽었고……. 습격은 얼마나 치열한 것으로 꾸며야 하는 거지?’
암약 중인 아라키 사다오파 놈들을 색출하기 위해 비밀 작전을 펼치는 거라고 조선주둔군 후배에게 둘러대면…… 습격 자작극은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연출할 수 있다. 비밀유지에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지만, 문제는……,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여야 한단 말이지.’
데츠잔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쪽에서 감추려고 애를 썼는데도 세간에 알려졌다는 인상을 주려면, 군인 몇이 뒷골목에서 투닥거리다가 경상을 입는 정도로는 안 된다.

‘순식간에 주변 사람들이 다 모여들 만큼 불도 크게 지르고, 피투성이 현장에서 죽는 놈도 한둘쯤 나와야 비로소 그럴듯할 것 같은데…….’
치열한 유혈의 현장에 압박감을 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사망자가 나와주는 편이 좋다.
그것도 흔한 불령선인이나 경찰 하급자 수준이 아니라, 제법 이름이 알려진 거물급의 유명인사가……. 그래야만 사건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도 그 숙연함에 눌려 조신해질 테니까.

‘……누굴 죽이지?’
건성으로 주변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데츠잔은 계속 그 부분을 고민했다. 이엽회의 장교가 희생당하는 건 하나로 족하기에, 이번에 얽어 죽일 놈은 외부에서 끌어와야만 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또 왜 극비인 작전을 외부에 발설했느냐는 질책이 돌아올 테지. 그러니 이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만 해. 제법 거물급이면서, 이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놈이라…….’
죽일 놈으로 낙점하는 조건이 점점 더 까다로워져서, 데츠잔의 가슴속에서는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다. 이 모든 걸 몰래 준비하려면, 다가올 며칠 동안도 다른 수사에는 아예 손도 댈 수 없게 생겼다.

‘한심하군. 이래서야 그 망할 궤짝을 언제 찾겠나?’
데츠잔은 자괴감과 후회를 떨쳐내려는 것처럼 빠르게 도리질을 쳤다. 궤짝을 찾아 내용물의 위험성을 확인한다는 게 원래의 목적이었건만, 지금 자신은 엉뚱한 미친 짓만 획책하는 중이다.
그것도 부하 장교들 몰래 쥐새끼처럼…….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이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오늘도 다들 수고가 많았다! 이시이 대위가 경무국에서 돌아오면…….”
마음을 조금 가다듬은 데츠잔은, 침울한 본심을 속이기 위해 손뼉까지 쫙 치며 밝은 목소리를 냈다.

“……다 함께 좋은 곳에서 한잔하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자! 사이온지 선생이 최고급 요정을 예약해두겠다고 했으니 기대해도 좋다! 내일 더 분발하라는 뜻으로 알고, 마음껏 즐기도록!”
쾌활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려도, 데츠잔의 가슴속 저 깊은 곳에 가라앉은 숙제는 여전히 그를 불안하게 휘저으며 괴롭혔다.
대체…… 누굴 죽이는 것이 제일 그럴듯할까?

***
껌뻑-! 껌뻑-!
줄곧 굳게 닫혀만 있던 시바타의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의 눈동자에 조금은 초점이 깃들었을 때, 선우진은 침묵을 깨고 인사를 건넸다.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구려…….”

“……사이온지 선생? 여긴 어떻게……? 아윽!”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선우진을 바라보던 시바타가, 돌연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배, 배가……! 배가……!”

“어디 배만 아프겠소이까? 그리 난리를 쳤다면서……. 그만하길 다행이지, 모르핀이 아니었다면 아마 통증으로 숨이 끊겼을게요.”
선우진은 가련하다는 듯 혀를 차며 그에게 물잔을 건넸다.

“천천히 드시오. 목이 탈 테니까.”

“내 손이……?”
왜 풀려있는 게요, 사이온지 선생? 분명 의사들이 다시 결박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자연스레 물잔을 받아 갈증을 채운 뒤에야, 시바타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선우진은 담배 케이스를 꺼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내가 책임질 테니 풀어달라고 했소. 시바타 비서과장이 또 난동을 부리면…… 이제는 나도 체포될 게요.”

“큭, 크큭! 하여간 농담은 여전하시군…….”
시바타는 잠시 자신의 처지도 잊고 킥킥댔다. 지금 조선에서 감히 사이온지 유우야를 잡아 가둘 엄두를 낼 인간은, 한조 총독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자신이 왜 사이온지 유우야 앞에서 난동을 피우겠는가? 이 준엄한 시기에 유일하게 진심으로 자신의 편에 서 준 고마운 은인을 상대로…….

“나도 한 대 주시오, 사이온지 선생.”
선우진에게 담배를 청해 피워문 시바타가, 퉁퉁 부은 볼을 문지르며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셨소이까?”
몇 번이나 간청해도 도무지 이뤄지지 않던 면회가, 뒤늦게나마 이렇게 성사되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꿈만 같다. 병실 내부가 캄캄한 걸 보면 깊은 밤인 듯한데, 대체 사이온지 유우야는 어떻게 이런 시간에 여기 혼자 와 있는 걸까?

“아는 군의가 있는데, 그가 연락을 해줬소. 시바타 비서과장이 매우 흥분해서 또다시 자해를 벌이려 한다고…….”
거짓말을 둘러댄 선우진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시바타를 바라보았다.

“더 그냥 두고만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기에, 은밀히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청했소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선생은…… 참으로 큰 사람이시군. 사방의 시선 때문에라도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는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일 텐데…….”
이렇게 몰락한 나를 찾아와 주시다니……. 울컥한 시바타가 입술을 꾹 깨물어 마음을 다잡았다. 수십 년을 최측근에서 모셨던 한조조차 자신을 외면하는 이 마당에, 변치 않고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것은 오직 사이온지 유우야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신 게요, 시바타 비서과장?”
선우진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시바타는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삼켜가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선생께서도 무기타로부터 그 구두 고객명부에 관해 들으셨겠지만…….”
이 사연의 서두를 여는 것만으로도 분해서 담배를 쥔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데츠잔 그놈이 범인이었소이다. 다시 말해 내가 이런 꼴로 여기 갇혀 있는 건, 다 그놈이 일본으로 레코드를 넘긴 탓이란 말이외다.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내 앞에 고개를 들이밀었으니 내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리고 놈이 왔다는 건 곧 스기우라 공작도 찾아올 거라는 의미…… 어억!”
스기우라에까지 생각이 미친 시바타가 호들갑을 떨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여기에 오래 계시면 안 됩니다, 사이온지 선생! 언제 스기우라 공작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공연히 나와 얽히지 마시고……!”

“내가 굳이 피할 이유도 없지만, 스기우라 공작은 이미 일본으로 돌아갔소.”
선우진이 차분하게 대답해주자, 시바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스, 스기우라가 말씀입니까? 어, 어째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조선에 머물러봐야 별 이득 될 게 없다는 계산이 들지 않았겠소이까?”

“그…… 그런가?”
시바타가 여전히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문가를 힐끔거린다. 놈이 뭘 우려하는지 알기에, 선우진은 안심하라는 의미를 담아 싱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데츠잔이라면, 요정에 부하들을 모두 이끌고 가서 마시는 중이라 하더이다.”
내가 예약해둔 요정에 말이오……. 선우진은 마음속으로만 뒷말을 보탠 뒤,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니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소, 시바타 비서과장.”

“그, 그렇습니까?”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시바타는 침대 아래로 던져버리려던 담배를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놈에게 잠시 숨돌릴 여유를 준 뒤 선우진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츠잔을 죽이겠다고 마구 몰아붙이셨다던데, 맞소이까?”

“그놈이 자꾸 성질을 긁어대니, 어디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시바타는 데츠잔의 멱살을 잡는 것처럼 허공을 움켜쥔 채, 당시의 상황을 떠들어댔다. 그의 울분 어린 술회를 다 들은 선우진이 냉정하게 물었다.

“화가 난 마음은 십분 이해되는 바이지만…… 진짜 복수를 할 수 있는데, 왜 그릇된 시점에 엉뚱한 상대에게 협박만 하다가 그 기회를 날려버리려는 게요?”
진짜 원수는 데츠잔 같은 장기말이 아니라, 이렇게 당신을 버린 한조와 스기우라가 아니겠소……? 선우진의 이야기 행간에 담긴 의미를, 시바타는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것이…… 사람인지라 나도 모르게 그만…….”
머쓱해진 시바타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몰아쉴 때, 선우진은 놈의 응석을 더 받아줄 마음이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했다.

“나는 수일 내로 또 만주를 둘러보러 나서야 하오, 시바타 비서과장.”
사실 그의 행선지는 난징이지만, 선우진은 언제나처럼 매력적인 거짓말들로 능숙하게 진심을 감췄다.

“시바타 비서과장을 위해 설립할 회사의 사옥 건설 상황도 살펴보고, 그쪽에서 각종 허가 서류도 발급받아야 하는 까닭이외다.”

“나, 나를 위해서 회사를 설립하신다고요?”
너무도 뜻밖인지 시바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선우진은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되물었다.

“재판이 끝나고 난 뒤, 조선이나 일본에서 머문다는 건 아무래도 조금 껄끄럽지 않겠소이까? 지사장 자리를 마련해둘 터이니, 만주에서 다른 사람 눈치일랑 일절 보지 말고 편히 지내시구려. 관동군의 후배 장교들과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용돈도 넉넉히 쥐여주시고…….”
선우진은 돈을 세는 시늉을 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제법 큰 무역 사업이니, 누가 보더라도 시바타 비서과장의 체면이 깎이는 일은 없을 거요.”

“사이온지 선생……!”
감격한 시바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똑같이 미래를 논하지만, 데츠잔의 제안과 사이온지 선생의 그것은 격이 다르다. 이 사람이 큰 사업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적어도 천만 단위는 굴리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아껴주시는 분이 있건만…… 나는 내 인생이 끝났다고만 생각했소이다! 그래서…… 나를 이 나락으로 떨어뜨린 데츠잔과 함께 죽기를 소원했던 것이오……!”
시바타는 회개하기 위해 종교인 앞에 선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데츠잔과 뒤엉켜 악다구니를 썼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귀인께서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최소한 놈의 장단에 맞춰주는 척이라도 하시오. 진짜 승부는…….”
선우진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재판정에서 갈릴 테니까.”
***
다음 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경무국 지하를 찾은 데츠잔의 마음은, 지극히 무거웠다.

‘이게 뭘 하는 짓이란 말인가……?’
데츠잔은 깊은 자괴감을 안고 경무국 계단을 내려갔다.
궤짝의 행방을 쫓는 수사에만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엉뚱한 짓에 온갖 신경을 쏟아붓다니. 그것도…… 육군이, 육군을 치는 형식의 가장 치졸하고 비열한 자작극을 남몰래 연출하기 위해서…….
젠장……!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데츠잔은 또 몰래 욕설을 삼켰다. 기밀이라 둘러대고 가짜 습격의 방식과 장소까지는 조선주둔군 후배들에게 전달해두었지만, 그러느라 오늘도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놈의 망할 구두가 남긴 악연을 지우는 게…… 너무 힘겹고도 구차하다.

‘그 구두도 빨리 소각해버려야겠군…….’
경무국에서 증거물로 보관 중일 구두를 없애버리고, 도쿄로 돌아가서는 당시의 구매인 명부를 몰래 훔치고……. 그림자처럼 등 뒤에 달라붙어 있는 혐의를 지우려면, 앞으로도 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온전히 순백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하다.

‘그냥 궤짝을 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미련이 자꾸 발목을 붙잡아서, 데츠잔은 몰래 혀를 찼다. 무기타라는 부관 놈과 문제의 궤짝만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시바타를 압박할 수 있을 텐데…….
드러내놓고 분통을 터뜨릴 수도 없기에, 데츠잔의 가슴속 울분은 점점 더 크게 쌓여만 갔다.

“아, 데츠잔 대좌! 오셨습니까?”
사무실에 앉아있던 도조 히데키가 벌떡 일어나 데츠잔을 맞는다. 데츠잔은 테이블 위에 놓인 피투성이 몽둥이들을 피해, 한 귀퉁이에 모자를 내려놓았다.

“수고가 많다, 도조 중좌. 무슨 소득은 좀 있었는가?”
물어보면서도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도조는 열심히 하는 놈이고, 인정사정없지만…… 결정적으로 머리가 그리 영특하지 못하다. 분명 아무 의미도 없는 폭력만 죽어라 휘둘러댔으리라는 걸, 데츠잔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데츠잔 대좌.”
도조는 황송하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지으며, 예상대로의 답을 들려주었다.

“경찰들을 계속 몰아붙이고는 있으나, 이놈들…… 입을 꾹 다물고 도무지 협조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취조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나을지, 고민하는 중입니다.”
녀석의 셔츠에 튀어있는 핏자국만 보아도, 얼마나 열심히 고문을 해댔는지 환히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도를 더욱 높이겠다니……. 데츠잔은 담배를 꺼내 물고 손사래를 쳤다.

“불령선인이나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니 적당히 조절해가며 취조하도록, 도조 중좌. 혹여 경찰 중에 못 견디고 절명하는 놈이 나오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비록 지금은 경무국장이 아무 반항도 못 하고 그저 방관 중이지만, 사망자가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은데, 분노한 경찰들과 신경전까지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저 역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기에 이렇게 몽둥이 정도밖에는 안 쓰고 있는데, 이놈들이 좀처럼 말을 듣질 않아서…….”

“경찰들은 그렇다 치고…… 은행에서 난동을 피웠던 놈들은 어떤가?”
데츠잔이 주제를 바꿨다. 그의 추리로는 필시 그놈들도 이 사건과 적지 않게 연관된 것이 분명하다. 하필 스기우라의 조선 방문에 맞춰 은행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것은, 그저 우연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그놈들의 입은 더 무겁습니다. 다들 어디에서 들었던 것이라 하고……. 멍청한 경찰 놈들이 대부분을 풀어준 바람에 조사할 놈들도 극히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작은 성과라고나 할까……. 우연히 자해 사건 당일 시바타와 무기타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하는 죄수의 자백을 확보했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도조가 모처럼 신선한 소식을 내놓았다. 하지만 신선하기는 해도 그리 마뜩지는 않았다. 데츠잔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쓰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놈들이 난동을 부려 체포된 것은 시바타와 무기타가 만난 다음이다. 그런데 아직 갇히지도 않았던 놈이 어떻게 여기에서 그 대화를 듣는단 말인가?”

“그놈은 그 사건과는 무관하게 그 전부터 여기에 갇혀 있던 놈입니다, 데츠잔 대좌! 저 역시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지나가는 저를 붙잡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며 간청을 했습니다.”

“더욱 미덥지 않아지는군. 사회 밑바닥의 쓰레기가 자발적으로 지껄이는 말을 어찌 믿는다는 말인가? 사기꾼이나, 폭력배 나부랭이의 거짓부렁을…….”
담배 연기를 내뿜은 데츠잔이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분명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간수나 모함해서 죽이려는 의도일 테지. 그런 놈들이 하는 생각이라야 빤해!”

“저 역시 그런 점을 우려하여 몇 번이나 확인했으나 딱히 간수에 대한 험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데츠잔 대좌. 물론 진술의 대가로 바라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고다마 정무총감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도조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데츠잔은 안경을 밀어 올리고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제깟 놈이 정무총감을 만나서 무얼 하겠다는 겐가?”

“과거에 인연이 꽤 있는 사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는 걸 알면 고다마 정무총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고다마 정무총감 본인이 아니라, 그 장인과 돈독하게 지냈다고 주장합니다.”

“고다마 정무총감의 장인이면…… 데라우치 전 총리대신이 아닌가? 작고하신 데라우치 백작과 연이 깊다고?”
데츠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쯤 되면 꽤 거물급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기에, 그 역시 조금은 흥미가 동한다. 물론 여전히 그 죄수의 진술이 사실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뭘 하는 자이기에 그따위 건방진 망발을 입에 담는 거냐?”

“조선 귀족이고, 은행장인데 억울한 누명을 써서 투옥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름은…… 하, 조선인의 이름은 한 번에 기억하기가 어려워서…….”
도조는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철들을 뒤적였다.

“놈의 이름과 진술은 여기 어디에 적어놓았습니다. ……에에, 이 서류는 또 어디에 있는 거지……?”

“그만, 그만!”
보고 있자니 답답해져서, 데츠잔은 화를 꾹 누르고 놈을 제지했다.

“그래서 그놈이 뭘 증언했나?”

“궤짝의 모양을 똑똑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시바타에게는 면회가 금지되었는데 어째서 저 부관이 짐까지 갖고 들어오는 것이지……? 하는 의문이 들어서 유심히 살피고 놈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고.”
서류에서 손을 뗀 도조가, 허공에 동선까지 그려 보였다.

“놈이 갇혀 있던 독방이, 시바타의 독방으로 가는 경로에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 누군가 도와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속닥댔다고 했습니다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동선이 아니었다. 데츠잔은 손을 들어 도조의 말을 끊고 요점을 확인했다.

“놈이 먼저 그 말을 했나? 시바타에게는 면회가 금지되었는데, 그 부관이 들어섰다고? 그러니까 도조 중좌 귀관이 두 놈의 관계를 설명해준 것이 아니고?”

“그렇……습니다. ……다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조는 ‘내가 그랬던가?’ 하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확신이 부족한 답을 내놨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모르는 눈치다.

“데리고 와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길게 설명하기도 귀찮아진 데츠잔은,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까딱여 지시했다.
시바타가 어떤 신분이었는지, 그 자리를 대체한 인물이 누구인지까지는…… 간수들에게서 귀동냥을 해서도 지껄일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무기타가 시바타의 부관이라는 정보는 아무나 알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이쪽에서 잠깐의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들어볼 신빙성은 충분히 확보했다. 궤짝의 모양만 정확히 교차 확인할 수 있어도 그게 어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무실에 홀로 남은 데츠잔은, 잠시 안경을 벗어 내려놓고 피곤해진 눈을 꾹꾹 눌렀다.
궤짝의 모양을 알아내고, 경찰들을 고문해서 무기타 부관의 행방을 쫓은 뒤에 궤짝을 찾고…… 그러면서도 자작극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스기우라의 분노를 다른 쪽으로 돌릴 준비를 해두고, 또 동시에 시바타 놈의 비위까지 잘 맞춰야 한다.
그 망할 놈의 구두 때문에 제대로 꼬여서 이게 다 무슨 번잡이란 말인가, 도대체!

‘모두 다 마무리 지을 수나 있는 걸까……?’
데츠잔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궤짝, 궤짝……! 그는 본 적도 없는 궤짝이, 무거운 쇳덩이처럼 계속 가슴을 짓누른다.
시바타를 협박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걸 찾으려니 그야말로 죽을 맛인데, 그가 의지할 수사 동료는 몽둥이 휘두르는 재주밖에 없는 도조뿐이다.

“들어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도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츠잔 대좌께 신중히 아뢰어야 할 것이다! 쓸데없는 헛소리는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직 진실만을 고해바치겠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문제의 조선인 죄수가 문가에 꿇어앉아 비굴하게 대꾸했다.

“대신 그저 한 가지만 간곡히 청하겠습니다! 시바타 비서과장 그자의 죄가 만천하에 밝혀진 이상, 그자 때문에 억울하게 갇힌 저의 혐의도 재고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들께 수고를 끼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고다마 정무총감을……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고다마 정무총감과 저는 연이 깊습니다! 작고하신 데라우치 전 총리대신께옵서 조선 총독으로 계시던 시절에…….”
빠르게 떠들어대는 어휘 구사는 제법 유창했으나, 어딘가 말투가 짜증스럽다. 그건 조선인 특유의 억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데츠잔은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고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어이, 조선인…….”

“……네? 네?”

“입을 다물어라. 여기는 네 마음대로 떠들어도 되는 곳이 아니야. 네놈의 청탁을 들어주기 위한 자리는 더더욱 아니지…….”
데츠잔은 냉정하고도 거만한 말들을 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내뱉었다.

“그러니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네놈의 사연 따위, 알고 싶지도 않다. 알겠나?”

“지당하신 말씀! 어찌 제 사소한 개인적인 문제로 대일본제국의 공사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오나 저는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였기에…….”
문제의 조선인은 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간곡하게 애원했다. 데츠잔은 그제야 안경을 쓰고 녀석을 돌아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걸 보면 조선인인 것이 분명하군. 역시 요보 자식에게는 매가 약인 건가?”

“그, 그렇지 않습니다! 데츠잔 대좌! 비록 천한 조선인으로 태어났으나, 저는 대일본제국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문명개화한 사람이올시다! 특히 은행업에 관심이 컸기에 조선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되기를 꿈꾸며 그야말로 전심전력으로 대일본제국을 위해 일해왔습니다! 그러니 부디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어억!”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던 조선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청천벽력이 다 있다니! 데츠잔도 너무 놀라 잠시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너, 너는……!”
귀신처럼 사납게 눈을 치켜뜬 데츠잔이 절규했다.

“……한, 상, 료오옹!”
비록 지난겨울보다 말랐고 얼굴에는 멍과 상처가 가득했지만, 이 굵은 목과 뻔뻔한 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데츠잔의 목소리를 들은 도조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데츠잔 대좌!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아시는 놈입니까?”
알다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의식과 무관하게 데츠잔의 어금니가 빠득 마주 갈렸다. 이 죽일 놈 때문에 그 추운 겨울, 다 떨어진 걸인의 넝마만 걸친 채 팔뚝만한 쥐새끼들이 들끓는 하수구를 기어 다녔어야만 했다.
조선인들의 대변이 떠다니던 그 역겨운 하수의 악취가 지금까지도 코끝에 선명하게 남아있건만…… 이놈을 여기에서 만나다니……!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한상룡은 무조건 두 손을 내저으며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해보려 발버둥을 쳤다.
그 비굴한 작태가 작년 겨울 남산자락에서 ‘살려만 주시면 평생의 은인으로 알고 매일 신사에서 복을 기원하겠다’던 모습과 겹쳐 보인다고 느낀 순간……,
퍼어어엉-!
시바타를 만난 이래 꾹꾹 눌려만 왔던 분노가 마침내 마음껏 폭발해버렸다. 데츠잔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몽둥이를 집어 들고 사정없이 내려쳤다.

“이 새끼이이!”
빠각-!
본능적으로 들어 올린 한상룡의 팔에서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울려도, 한상룡이 짐승처럼 울부짖어도, 데츠잔의 매질은 멈추질 않았다.
빠아악-! 빠각-! 빠악-!
모진 매질을 할 때마다 찢어진 살점이 피와 함께 사방으로 튄다. 안경 렌즈에 튄 핏방울조차 쾌락으로 느껴져서 데츠잔은 크게 웃으며 더 세차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크하하하하하!”
이제야…… 내일 죽일 놈을 찾았다. 아니, 이미 죽어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