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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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2022.09.21.
“그리하고 온 것이냐? 나에게 보란 듯이?”
자오이디의 흰 목과 어깨를 응시하던 쑹메이링이 혀를 끌끌 찼다.
“손이 많이 가는 아이로고…….”
쑹메이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자신의 곁을 지키고 선 시녀에게 손짓했다.
“내 청옥 목걸이와 팔찌를 저 아이에게 내주어라.”
“……부인!”
시녀들이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도, 쑹메이링은 지시를 거두지 않았다.
“보아라. 휑하니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쑹메이링은 아무 장신구도 하지 않은 자오이디의 목 언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영국 영사관 연회에 저런 차림으로 참석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장쉐량 장군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니 말이다.”
미국 여배우들이 ‘그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왜 착용하지 않으셨나요?’라고 묻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고……. 쑹메이링은 거만한 표정으로 뒤에 이어질 진심을 감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드디어 영국 영사관 연회에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됐다!’
자오이디는 마음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삼켰다. 이제야 겨우…… 장쉐량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다.
***
“어지간히 시끄럽군.”
동료 연구원이 신문을 뒤적이며 중얼거린다.
“온통 시바타인지 뭐인지 하는 인간의 기사뿐이야. 하긴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가 떡하니 나와버렸으니, 야당에서 공격하기는 좋을 테지.”
“으응…….”
이시이는 건성으로 대꾸하고 자신의 노트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몇 번이나 복기를 해봐도 실험 과정에 오류는 없었다. 100퍼센트 확실한 물건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좋아, 독일까지 유학을 다녀온 보람이 있어…….’
이시이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입가를 쓸었다. 연구실 반대편에 앉아 여전히 신문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동료 연구원이 혀를 끌끌 찼다.
“조선 총독의 비서과장씩이나 되는 인간이 이렇게 허술할 줄이야.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튼 것 같단 말이지. 이러다가는 한조 총독도 위태로워지겠어…….”
“그러게 말일세.”
이번에도 이시이는 영혼 없는 맞장구만 쳐주면서 다음 고민으로 넘어갔다.
‘병으로 가져갈까? 아니면 가루약으로?’
이시이는 대형 탁자 위에 놓인 물약 병과 가루약 봉지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두 가지 모두 자신의 역작이고 효과도 확실하지만, 각각의 장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주사는 아무래도 번거롭기는 해…….’
이시이는 고무로 봉해둔 물약 병을 흔들어보며 입가를 쓸었다. 꽤 많은 사람이 주사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여자는 더 그렇다.
‘하지만 이건 어쩐지 대단히 좋은 보약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쩔까.’
가루약 봉지 쪽으로 시선을 옮긴 이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약이 흔해진 터라, 이 정도 가루약은 별다른 감흥도, 경외심도 주지 못한다. 차라리 환약으로 빚은 것이면 조금 더 고가의 보약처럼 느껴졌을 것을…….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시이 대위?”
연구실 반대편의 동료가 신문을 내려놓고 다시 물어온다.
“이 뇌물 재판 말일세. 어떻게 결말이 날 것 같은가?”
“으음…….”
이시이의 입술 사이에서는 또 맥없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두 가지 형태의 신약에 집중하는 것만도 바빠서, 그는 지금 상대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아니, 듣고 싶지도 않다.
이렇게 중요한 실험에 성공해서 이제 그 힘을 확인하기 위해 나서려는 참인데, 남의 사정 따위 알게 무언가?
“뭐, 그렇지 않겠나…….”
이시이는 대강 아무 소리로나 장단을 맞추고, 꼼꼼하게 물품 기록 장부를 조작했다. 혹시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 책임은 이 연구실의 관리 책임자인 동료 연구원이 지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역시 한조 총독 사임으로까지는 번지지 않겠지? 시바타라는 사람이 할복 비슷하게 책임지는 흉내도 냈고 하니 말이야.”
동료 연구원이 또 뭔가 지껄인다. 이시이는 이번에도 가장 무난한 말로 반응했다.
“……그런가?”
“무슨 그런 맥없는 대답이 다 있나, 이시이 대위? 그런가…… 라니?”
그 대답이 불만스러웠는지 동료 연구원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조선 총독이 부임한 지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떨려날 상황인데?”
“뭘 어쩐다고?”
이시이는 떼꾼한 눈을 비비고 그제야 상대를 돌아보았다. 동료 연구원은 신문을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한조 총독과 관련한 비리 사건 말일세! 자네 의견은 어떠냐고 묻지 않았나?”
“……잘될 테지! 나는 선약이 있어서 나가봐야겠네!”
귀찮아진 이시이는, 약병과 가루약 봉지를 모두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여기에서 이 천한 놈과 시간을 허비하느니 그냥 두 가지 방식을 다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귀가할 때 문을 잘 잠그고 가게!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재료가 많으니까!”
동료 연구원을 밀어치고 복도로 나선 이시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멍청이 놈!’
특별관리품목을 몰래 쓰기 위해 몇 번 친한 척 말을 걸어줬더니, 정말로 친구나 되는 줄 아는 꼴이 우습기만 하다.
“네가 좋아서 어울리는 게 아니야! 네가 관리하는 품목들에 관심이 있는 거란 말이다!”
정문을 빠져나온 이시이는 멀리 보이는 연구소 창문을 향해 주먹 감자를 먹이고, 인력거에 몸을 실었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이기는 하지만, 신약 개발을 위해 며칠 동안 밤을 하얗게 밝힌 터라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확실히 나는 천재야…….’
이시이는 의사용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자신을 칭찬했다.
‘아무런 자료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추론만으로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내다니,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니 공연히 뿌듯해져서 이시이의 두툼한 입술 사이에서는 자꾸만 비죽비죽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이걸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될까? 벌써 가슴이 부푼다.
‘백만 엔? 아니면 천만 엔? 아니, 아니지…….’
이시이는 작게 도리질을 치며 또 히죽댔다.
‘너무 통이 작아! 그보다 열 배, 백 배는 더 벌겠지! 이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귀한 약품이니까. 그래, 곧바로 돈이 마구 굴러들어올 거다. 그러면…… 우선 그 패커드라는 자동차부터 하나 사야지.’
꿈꾸는 이시이의 망막에 떠오른 것은 지난달 경성에서 잠시 얻어타 본 패커드 자동차였다.
매끈한 라인, 윤기가 흐르는 페인트, 구름처럼 푹신하고 널찍한 가죽 좌석……. 세상에! 그렇게 좋은 것을 몇 대씩이나 가지고 있는 사이온지 유우야라는 인간은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걸까?
‘나도 곧 그렇게 될 거다.’
이시이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가방을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연구소 창고에 보관된 재료를 다 소진할 때쯤에는 만주로 이주할 자금이 충분히 확보될 테고, 그러면 그때부터가 진짜 큰 사업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테루부터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현실적인 욕망으로 고개를 돌린 이시이가 사악한 눈을 빛냈다. 자신이 몇 번이나 추파를 던져도 끝내 거절하던 건방진 게이샤를, 드디어 오늘 자신의 노예로 만들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 뜨거운 콧김이 확확 뿜어져 나온다.
“히히히히!”
테루가 자신에게 애걸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시이가 혼자서 낄낄댈 무렵, 인력거는 목적지인 요정에 도착했다.
“좋아, 승부다……!”
포렴 앞에서 가방을 열어 한 번 더 물건을 확인한 이시이 시로는, 기세 좋게 미닫이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종업원이 허리를 숙이며 맞이해도, 이시이의 시선은 복도 안쪽에 고정되어있다.
“음, 예약하고 온 이시이다. 테루는?”
자신의 소중한 사비로 마시는 술이니,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이샤가 아니면 곤란하다. 종업원은 능숙하게 그를 방으로 안내하며 다독였다.
“곱게 단장 중이오니 곧 인사를 드리러 올 겁니다, 이시이 님.”
“으음, 그래야지.”
이시이는 제법 근엄한 척 턱을 치켜들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긴장과 기대로 목이 바짝바짝 타서, 맥 놓고 가만히 앉아만 있기가 답답하다.
“하하핫! 그렇고말고!”
다른 방에서 취객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린다. 싸구려 요정인 탓에 방음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다.
“오셨습니까, 이시이 대위?”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그가 지명한 게이샤가 장지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시이는 당장이라도 와락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 참고, 고개만 끄덕였다.
“음……!”
“지금까지 업무를 보신 것인가요? 피곤하시겠어요.”
테루가 능숙하게 애교를 부리며 이시이의 잔을 채우자, 이시이는 말도 말라는 듯 눈가를 문질렀다.
“뭐, 그런 거지.”
“가엾기도 하시지…….”
틀에 박힌 위로가 돌아온다.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시이는 반사적으로 한 번 더 찔러봤다.
“이렇게 귀여운 테루와 함께 가까운 온천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내 피로는 싹 풀릴 것 같은데 말이야.”
이시이는 테루의 손을 탐욕스레 더듬으며 말했다.
“함께 온천욕을 마치고 차가운 비루를 마시다가 꼭 안고 잠이 들면 그게 바로 지극한 행복이 아니겠느냐. 응? 어떠냐?”
“아이, 대위께서는 짓궂기도 하시지…….”
테루는 이시이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가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는 이렇게 여기에서 뵙는 게 제일 좋은걸요.”
‘그야…….’
두꺼운 안경 너머에서 이시이의 눈이 분노로 꿈틀댔다.
‘내가 올 때마다 너는 돈을 받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 돈밖에 모르는 천한 계집! 싸구려 요정에서 뒹구는 더러운 게이샤 주제에 양갓집 규수 흉내나 내고!’
경성에서 데츠잔에게 받았던 심부름 값 10원까지 모두 탕진할 만큼 공을 들였는데, 이 게이샤는 손목도 잘 허락해주지 않는다. 하물며 입맞춤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그렇게 건방을 떠는 것도 오늘까지다…….’
이시이는 몰래 이를 바득 갈고 슬슬 작전 개시를 위한 포석을 깔았다.
“요새 계속 무리를 했더니 술도 잘 안 받는군.”
술잔을 내려놓은 이시이가 두통이 인다는 듯 이마를 짚자, 테루는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 그를 위로했다.
“일도 좀 쉬어가며 하셔야지요.”
“그게…… 그럴 수가 없단 말이지.”
이시이는 한숨을 내쉬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높으신 분들의 부인들께서 계속 불러대시니, 무리가 되더라도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어머나!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그 부인들께서 이시이 대위를 찾으신다고요?”
의외의 답을 들은 테루가 드물게 관심을 보인다. 고관의 부인이 외간 남자를 부른다는 게 워낙 이질적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이시이는 수염으로 뒤덮인 볼을 긁적였다.
“의사인 내게서 몰래 바이엘 주사를 맞고 싶어서 그런 게지, 뭐.”
“……바이엘 주사요?”
낯선 외국어에 테루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이시이는 덤덤한 척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래. 독일의 아주 유명한 제약 회사다. 거기에서 만든 주사약이 있는데, 그걸 맞으면 낯빛이 몰라보게 밝아지는 게야. 윤택도 자르르 흐르고.”
“그런 것이 다 있습니까?”
테루의 눈이 커졌다. 살결이 희고 고운 미인으로 만들어주는 주사라니……. 욕심이 나는 게 당연하다. 이시이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워낙 귀한 물건이어서 아무나 손에 넣을 수는 없지만, 요즘 고관대작들의 부인과 영애들 사이에서는 대유행이다. 백화점의 마네킨 걸들도 마찬가지이고. 주사 한 방에 외씨 같은 미인이 된다고 난리들이지. 독일의 기술은 참으로 대단해!”
“세상에…….”
부러워진 테루는 기도라도 하듯 두 손을 꼭 맞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약은…… 가격도 아주 비싸겠지요?”
어쩐지 먼 발치에서 바라본 마네킨 걸들은 한결같이 희고 예쁘더라…… 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이것 봐라?’
이시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회심의 미소를 삼켰다. 이만큼 적극적으로 욕심을 부린다면, 주사의 아픔 같은 건 상관도 없을 터. 어째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이 계집을 노예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으음, 비싸고말고. 한 번 구경이나 시켜주지.”
이시이는 자신의 가방을 열고 오늘 막 완성한 약병을 꺼내 보였다.
“이 조그만 병이 자동차 한 대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하면 믿겠느냐?”
그의 거짓말에 완전히 넘어간 테루가 홀린 듯 약병을 받아쥐었다.
“이걸 맞으면…… 제 피부도 백옥처럼 변할까요?”
“그렇게도 욕심이 나느냐, 테루?”
한동안 테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시이가 물었다. 그의 질문에서 일말의 여지를 느낀 테루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요! 어느 여자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네게 주마.”
“네?”
혹시 놀리는 것인가 싶어 테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입을 쩍 벌린 채 머뭇거리는 동안, 이시이는 가방 안에서 주사기와 고무줄을 꺼내 술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침 한 병의 여분이 생긴 참이다. 대신 이번 여름에는 꼭 나와 함께 온천으로…….”
“그럼요, 이시이 대위!”
테루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시이를 와락 껴안았다.
“꼭 온천 여행을 함께 가겠습니다! 약속드리지요! ……아아, 얼마나 좋을까?”
온천에서 다른 여자들이 자신의 피부를 부러워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서, 테루의 통통한 볼은 붉게 달아올랐다. 이시이는 기회를 놓칠세라 서둘러 그녀의 팔에 고무줄을 감았다.
“주사약은 금방 들어가니 몸에서 힘을 빼고 편히 누워 있으면 된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시이 대위! 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요!”
테루가 콧소리를 섞어 아양을 부린다.
‘그럴 테지……. 이제 잠시 후에는 더욱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게 될 게다. 그러면 내가 아주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마……!’
이시이는 흥분으로 가빠오는 호흡을 꾹 눌러 참고, 약을 채운 주사기의 바늘을 테루의 정맥에 꽂았다.
“흐으으응……!”
주사약이 들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테루의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채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그녀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하아아아……!”
멍해져서 긴 한숨을 내쉬던 테루가 돌연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후후후, 너무 좋……아요……. 너무……. 후후후후.”
“그렇지?”
주사기 바늘을 빼낸 이시이가 그녀의 팔을 묶었던 고무줄을 풀어내며 맞장구를 친다. 이 행복감을 맛보았으니, 이제 이 여자는 영원히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히익……! 히익……! 더 기분이 좋아지게 해 주마.”
이시이가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거칠게 기모노의 오비를 잡아 풀어도, 테루는 반항할 생각조차 없다. 그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며 나른하게 웃어댈 뿐이다.
“후후후후!”
‘완벽해!’
승리감에 들뜬 이시이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어댔다. 늘 도도하던 계집이 이리도 느슨하게 풀어진 꼴을 보니, 자신이 만들어낸 약의 성능이 더욱 만족스럽다.
“후하하하하! 하하하하!”
테루의 기분은 더욱 좋아져서, 이젠 이시이의 손이 닿을 때마다 만자이라도 구경 온 사람처럼 파안대소했다. 이시이도 덩달아 히죽대며 목청을 높였다.
“그래! 웃어라! 더 크게 웃어! 좋아!”
어차피 옆방들도 시끄러우니 아무리 큰 소리를 내도 상관없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시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이리 조용하지?”
이곳에 들어선 이후 한시도 끊이지 않았던 다른 방 취객들의 소란과 웃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마치 빈 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저벅-! 저벅-!
잠시 후 복도에서 울려오는 딱딱한 구둣발의 메아리가 그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발소리는, 훈련받은 집단 특유의 것이다.
“경찰들이 불시 단속이라도 하는 중인가?”
이시이의 얼굴이 땀으로 젖었다. 육군 대위인지라 딱히 경찰이 두렵지는 않지만, 오늘은 테루에게 주입한 약 때문에 사정이 좀 다르다.
“……이런 젠장!”
위험을 느낀 이시이는 주사기와 약병부터 챙겨 넣었다.
“후후후후!”
이시이가 허둥대며 난리를 쳐대도, 테루는 여전히 다른 세상에 가 있는 사람처럼 웃음만 흘려댄다. 이시이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테루의 손을 밀어쳤다.
“놓아라, 이 멍청한 계집! 얌전히 자빠져 있어!”
어차피 이 약은 현재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자신만 몸을 피하면 경찰이라도 해도 뒤를 캐진 못한다. 그가 벌떡 일어나 테루를 내버려 두고 달아나려 할 때……,
드르륵-! 쿵-!
부서질 듯 사납게 미닫이문이 열리고, 너무도 뜻밖의 인물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 사, 사카모토 중장!”
사카모토를 알아본 이시이는 어설프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육군 중장씩이나 되는 높은 신분이 이런 허름한 요정에는 어쩐 일로……? 라고 물어보고 싶은데, 혀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사카모토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그의 몸을 얼어붙도록 만든 까닭이다.
“이시이 대위.”
복도에 선 사카모토가 방안을 스윽 훑어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군그래.”
덕담처럼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사카모토의 표정에는 온화함이라곤 없다. 그의 주변에 둘러선 건장한 사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 차, 참으로 송구합니다.”
이시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제야 사카모토의 허리춤에 일본도가 끼워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시이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린다.
‘어째서 일본도를 차고 술집엘 온 거지? 그보다 이 분위기는 대체 뭐야? 설마 내가 특별관리품목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안 건가? 그게 아니면 연구비를 횡령한 게 들통이 난 걸까?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대응할 리는 없지 않나?’
“여기에서 자주 마신다고 들었다. 대위의 봉급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호사일 텐데…….”
사카모토가 또다시 무서운 소리를 내뱉었다.
“아라키가 용돈을 넉넉하게 쥐여준 모양이군.”
“……에에? 무슨 말씀을?”
뜬금없이 아라키가 거론되는 게 이상해서, 이시이는 입을 쩍 벌렸다. 물론 한때 아라키 사다오 중장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쪽과는 왕래를 끊은 지 오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시이 대위?”
이시이를 위아래로 훑으며 사카모토가 물었다.
“경성에서 아라키 사다오의 개들이 습격했을 때, 귀관이 탄 차량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게 말이다. 다른 장교들은 전부 아직도 병원에 누워있어야 할 만큼 크게 다쳤는데, 귀관은 혼자 이렇게 유흥을 즐기는군.”
“아니, 그것은…….”
상대가 뭘 오해했는지 깨달은 이시이가 격하게 도리질을 쳤다.
“……저, 저 역시 무슨 연유로 제가 탑승했던 자동차는 그냥 둔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무, 물론…… 선배와 동료들이 입원 중에 그 병상을 지키지 않고 이렇게 술을 마신 것은 잘못된 일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괴로워서……. 아, 그리고 그 경성에서의 사건을 말씀드리자면…….”
이시이는 숨을 헐떡이며 맥락과 두서없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부, 분명 저는 그 습격 직후에…… 하아……! 데츠잔 대좌를 도와 열심히 용의자를 쫓았습니다! 그 일을 증언해줄 사람은 많습니다! 저, 저는 아라키 사다오 중장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워낙 황당한 혐의를 뒤집어쓴 데다, 변명해야 할 다른 일도 많다 보니 이시이 자신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수준이 되어버렸다. 사카모토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주군과 동료들을 배신하는 대가로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후한 가격이었기를 바란다. 그게…….”
경멸이 가득한 어조로 읊조린 사카모토가 일본도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네 목숨값이니까.”
스릉-!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칼집을 벗어나는 소리가 사형선고처럼 섬뜩한 메아리를 만들어낸다. 새파랗게 질린 이시이는 방바닥을 기어 뒤로 물러나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오, 오해이십니다! 오해! 오해! ……사, 살려주십시오!”
그래봐야 사카모토의 귀신같은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칼을 뽑아 든 사카모토가 차갑게 내뱉었다.
“이시이 시로 대위. 이미 결착이 났으니 사무라이답게 최후를 맞이해라.”
사선으로 길게 칼을 드리운 채 방 안으로 들어서며, 사카모토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