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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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The Beast.
2022.11.05.
“그 사람에게서 배우겠다고 하셨소, 버네이스 씨?”
흠칫 놀란 휴즈가, 선우진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이거 어째…… 졸지에 제자를 두게 생겼다.
“뭘 배우겠다는 말입니까?”
“많은 것을요.”
버네이스는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 대답했다.
“그저 선거 운동을 지켜본 것만으로도 제게 영감을 줄 만큼 뛰어난 전문가이니,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훨씬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함께 어떤 기획을 진행하면 더욱 좋겠죠. 사실은…….”
버네이스는 처음으로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총괄했던 빛의 희년 기념식 역시, 어메이징 그레이스에서 깨달은 바로 그 종교적 감성을 응용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거라면 분명히 통할 거라 생각했죠.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찬사가 쏟아지더군요. 에디슨 본인조차 엄청나게 감격스러워했고요.”
자, 이만하면 이유는 충분히 설명된 것 같으니 이제 그 전문가를 소개해주시죠…… 버네이스는 두 손을 살짝 벌려 그의 의도를 다시 한번 전달했다.
“버네이스 씨, 그 어메이징 그레이스 말이오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선우진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어쩌면 모든 게 그저 우연일지도 모르는데, 너무 과잉 해석하는 거란 생각은 들지 않더이까?”
“우연이라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사이온지 씨? 그러니까…….”
버네이스가 선우진을 돌아보고 질문의 의미를 확인했다.
“루즈벨트 후보의 캠프에서 아무 의도나 계산 없이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라디오 연설의 서두에 붙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투표를 불과 닷새 앞둔 시점에, 가장 중요한 선거 운동을 그렇게 허술하게? ……아니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근거들을 나열한 버네이스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루즈벨트 후보의 겸허한 연설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도, 모두 치밀한 계산 하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건 전문가로서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죠. 게다가 절대 우연이라 볼 수 없는 다른 정황 증거들도 여럿 존재합니다.”
“다른 정황 증거들이라는 건 또 뭐요?”
휴즈가 재미있어하며 묻자, 버네이스는 바로 새로운 근거들을 내놓았다.
“몰래 찍힌 것처럼 꾸며 낸 어머니와의 사진. 카퍼레이드 유세, 그리고 바람둥이라고 하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문…….”
버네이스는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모든 요소가 전부 다 루즈벨트 당시 후보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완전히 지워버린, 기막힌 거짓말들이자 선거 전략들이었습니다. 이 정도 실력의 전문가가 있는데, 어째서 시장에서는 아직 몰랐던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죠.”
“프랭크의 치명적인 약점이라? 그게 뭔지 궁금하군. 내가 아는 프랭크는 별로 약점이라 할 만한 부분이 없는 친구이자, 정치인인데 말이오.”
휴즈가 뻔뻔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은 루즈벨트의 약점을 순순히 인정할 만큼 이 남자에 대한 신뢰가 공고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야…….”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본 버네이스가 휴즈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다리를 못 쓰지 않습니까.”
“하, 하하……! 무슨 소리요?”
휴즈는 손사래를 치며 헛웃음을 흘렸다.
“버네이스 씨께서는 프랭크가 자동차 유세를 하면서 우뚝 일어선 걸 못 보신 모양이로군. 그런 건 그냥 경쟁자였던 오틴저 후보 측에서 지어낸…….”
“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휴즈 씨.”
휴즈의 말을 끊은 버네이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루즈벨트 주지사가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건 정치권에서 대단한 비밀도 아닙니다. 무슨 속임수를 써서 일어선 척한 것인지 정확하게 모를 뿐이죠. 그리고…….”
버네이스는 낮은 어조로 설득을 이어갔다.
“저는 홍보 전문가로서 기업들의 구린내 나는 비밀을 수없이 보아 왔고 그걸 감추는 임무를 수행해 왔으니까 말입니다. CPI에서는 구역질 나는 꼴도 여러 번 경험했죠.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외부에 흘린 적은 없습니다. 그걸 이용해서 경쟁사의 홍보 전략을 수립하지도 않고요. 그게 제가 지키고 싶은 전문가의 양심이랄까요.”
“변호사의 윤리강령 비슷한 거로군.”
휴즈가 버네이스를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왜…… 의뢰인의 비밀에 관해 끝까지 함구하는, 그런 거 말이오. 그렇다는 건…….”
잠시 말꼬리를 늘이던 휴즈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물었다.
“만약 당신이 프랭크를 위해 일하게 되면, 나중에라도 그의 약점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오? 설령 그와의 계약이 끝나더라도?”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루즈벨트 주지사 쪽에서 저와 계약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버네이스가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은 이미 저보다 더 나은 홍보 전문가와 함께 일하고 있는데 왜 그러겠습니까.”
나에게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건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제 그 전문가를 소개해주시오…… 버네이스가 손짓과 눈빛을 곁들여 한 번 더 재촉했다. 이 상황을 즐기게 된 휴즈가, 장난기를 숨기고 거만하게 턱을 들었다.
“물론 소개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사람들은 워낙 바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휴즈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버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 명이 아니라 팀이군요.”
“팀? ……뭐, 비슷하오. 어쨌든 한 사람은 아니외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버네이스 씨보다 더 비싸다는 사실이오.”
“충분히 이해합니다.”
휴즈가 교만한 말로 장난을 걸어도, 버네이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제가 더 분개할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공짜로 뭔가를 얻으려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용납받을 수 없는 무례함이죠.”
버네이스는 미리 준비해 온 수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전문가 팀과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고 대화하는 대가만으로, 10만 달러는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표에 액수도 기입해 왔죠. 물론 수업료는 별도로 대화를 나눠 합의해야겠지만, 이만하면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휴즈 씨?”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던 버네이스가, 말을 멈추고 휴즈에게 항의했다.
“왜 시계를 보시는 겁니까? 제 이야기가 지루합니까?”
“아니, 전혀 지루하지 않소, 버네이스 씨. 오히려 막 흥미가 생기는 참이라오. 난 그저……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오. 지금이 저녁 식사 시간인지 아닌지.”
휴즈는 회중시계의 뚜껑을 덮어 조끼 주머니에 꽂으며 미소를 지었다. 버네이스는 막 웨이터가 가져온 스테이크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여섯 시에 만났으니, 그 정도는 시계를 확인할 필요도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럼 이걸 달리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좋은 지적이오, 버네이스 씨.”
휴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지로 수표를 가리켰다.
“당신도 동의했으니 수령인란에 내 이름을 쓰시오. 제안을 받아들이리다.”
“휴즈 씨,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눈이 휘둥그레진 버네이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 10만 달러는 그 전문가분들과 대화하는 것에 관한 사례로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분들을 소개해주는 대가가 아니라.”
“지금 그 전문가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 중이잖소, 버네이스 씨.”
휴즈는 자신의 가슴과 선우진의 어깨를 차례로 짚은 뒤, 뻔뻔하게 떠들어댔다.
“이 친구는 워낙 부자이니까 따로 사례할 필요 없소. 그리고 어차피 우리 두 사람은 공동 사업을 여럿 운영하고 있는지라, 당신의 10만 달러도 그쪽에 투자될 거요.”
“당신이…… 아니, 당신들이……?”
당신들이 바로 루즈벨트의 선거 전략을 이끈 전문가들이었단 말입니까……? 버네이스는 더욱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 이제 완전히 주도권을 거머쥔 휴즈가, 승자의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달리 또 어떤 천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버네이스 씨? 나, 그리고 여기 아이스맨이 두뇌를 합쳐 만들어낸 전략이었소.”
“후우……!”
버네이스는 충격을 다스리기 위해 몇 번이나 깊게 심호흡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휴즈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시추용 드릴 제조업자와 외국인이 어떻게 그리도 완벽한 선거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루즈벨트는 왜 하필 이들에게 그런 중책을 맡긴 걸까? 이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서?
“사이온지 씨께서는 일본에서 홍보 전문가로 일하고 계십니까?”
한참이나 고민에 잠겨있던 버네이스가 선우진을 돌아보고 물었다. 혹시 루즈벨트가 일본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전략가를 불러온 것일까 싶었지만, 휴즈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일본 최고의 부자 화족이 그런 일을 하겠소? 아니오, 버네이스 씨. 그는 사업과 자선 활동만으로도 24시간이 부족한 사람이외다.”
“그렇다면 어떤 인연으로……?”
“프랭크의 선거를 책임지게 되었는지 묻는 거요?”
버네이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의 말을 앞질러 대신한 휴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소. 우리는 프랭크와 오랜 친구 사이라고. 그가 선거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고민을 토로했고, 보다못해 우리가 나섰던 거요.”
“그런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혼란스럽군요.”
버네이스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선우진과 휴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분의 말씀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뭔가…….”
“이해하오, 버네이스 씨.”
이번에는 선우진이 버네이스의 마음을 읽고 반응했다.
“믿을 만한 근거가 필요하실 테지.”
“그렇습니다, 사이온지 씨.”
버네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엄청나게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잠깐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미 깨달았지만, 홍보 전략을 수립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이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선우진이 검지를 세워 보이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현재 프랭크의 상황을 개선할 홍보 전략을, 버네이스 씨가 먼저 제시해 보시오. 그걸 다 들은 뒤에, 나도 이 종이에 적어둔 것을 보여드리리다.”
슥삭, 슥삭……!
말을 마친 선우진은 버네이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만년필을 놀려 종이 냅킨 위에 글씨를 적어간다.
‘지나간 일을 왈가왈부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으니, 미래에 관해 논하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건가?’
버네이스는 반쯤 얼빠진 시선으로 선우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렇게 깔끔하고 도도한 해결 방식이라니, 확실히 저 사람의 태도는 비범하다. 어쩌면…… 여기까지 본 것만으로도 신뢰를 위한 근거는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버네이스 씨.”
꽃병을 옆으로 옮겨 선우진과 버네이스 사이를 가린 휴즈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혹시 전략을 수립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오? 지금 프랭크가 어떤 상황인지 간략하게라도 알려드리리까?”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루즈벨트 주지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제야 두 사람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한 버네이스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이건 단순히 저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버네이스 자신을 시험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과 함께 홍보에 관해 논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가늠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랄까.
“주가 하락으로 미국은 위기를 맞았지만,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쩌면 세계 대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영원히 멀어진 것처럼 보였던 대권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버네이스는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주식 매입을 독려하던 라스콥 씨를, 공화당보다 더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건 민주당이 극복해야 하는 난제죠. 그러니 루즈벨트 주지사는 우선 라스콥 씨나 알 스미스 대선 후보와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식으로 말씀이오?”
휴즈가 물었다. 버네이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라면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할 겁니다. 대중들이 신뢰할 만한 지위의, 유명 경제학자여야 할 테죠. 루즈벨트 주지사의 모교인 하버드나, 컬럼비아 대학교의 교수 정도면 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프랭크가 직접 라스콥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교수들이 비난하도록 하라는 말씀이오?”
“맞습니다. 먼저 루즈벨트 주지사가 현 상황에 대한 그의 시각을 성명으로 발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다음 경제학자들에게 그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라스콥을 비판하라고 하면, 유권자들은 루즈벨트 주지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겁니다. 우호적인 시선이죠.”
“나쁘지 않군요, 버네이스 씨. 영리한 방법이오.”
버네이스의 방식이 마음에 든 휴즈가 눈을 찡긋하며 검지로 그를 가리켰다. 루즈벨트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경제학자의 권위를 빌려, 라스콥과 분리한다는 계책은 확실히 교묘하고 영악하다.
라스콥의 약점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 정도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책일 터다.
“그런 뒤에 뉴욕주의 모든 가용 예산을 총동원해서 대대적인 토목건축 사업을 추진할 거라고 발표해야 합니다. 다리, 터널, 고속도로. 거대하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미국 전체가 불경기라고 해도 어쩐지 뉴욕만은 호황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하니까요.”
버네이스는 휴즈의 칭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설명만 계속 이어갔다. 휴즈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프랭크의 임기가 1년밖에 안 남았는데, 그런 장기 사업을 추진해도 괜찮겠소? 자칫 재선에 실패하면 설계와 기초 공사만 하다가, 건설 계획 자체가 취소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더 의미가 큰 겁니다, 휴즈 씨.”
버네이스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루즈벨트 주지사가 재선에 성공해야만 그 엄청난 규모의 토목건축 사업 계획이 무사히 추진되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긴다는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해야죠. 직업이 필요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서라도 그에게 표를 던질 겁니다.”
“어려운 형편을 이용해 유권자들을 인질로 잡으시겠다?”
휴즈가 비꼬는 것처럼 말꼬리를 잡아도, 버네이스는 흔들림이 없다.
“루즈벨트 주지사의 재선을 위한 방안을 내라고 하신 게 아닙니까? 도덕적인 방식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만.”
사실 그건 휴즈의 철학과도 일치하는 바였다. 휴즈는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도덕적일 필요 없소. 중요한 건 결과지. 계속하시오, 버네이스 씨.”
“그렇게 토대를 마련한 후에, 후버 대통령을 비판해서 다른 주의 유권자들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엄청난 경제 위기를 초래한 무능력한 대통령이라고, 언론을 통해 공격하는 게 효율적인 방식일 겁니다. 이때 중요한 건 용어인데…….”
버네이스는 잠시 말을 끊고 고민에 잠겼다.
“불황처럼 흔한 단어가 아니라, 미국인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강력한 어휘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위기의 해일……. 혹은 처참한 빈곤. 경기 침체가 피부로 느껴질 만큼 감각적인 표현이어야만 하죠.”
“……대공황.”
선우진이 만년필을 내려놓고 냅킨을 버네이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리는 그 어휘를 사용하기로 했소.”
“……좋군요. 아니, 탁월합니다!”
냅킨을 받아든 버네이스가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히 정관사를 사용해 마치 고유 명사인 것처럼 취급했다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엄청난 위기라는 인상을 줄 테니까.
“50층짜리 건물을 신축하실 계획이군요…….”
버네이스는 선우진의 메모를 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감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리도, 터널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구름을 뚫을 듯 우뚝 솟은 마천루다. 건물의 높이가 상승의 이미지를 연상시켜 주는 까닭이다.
“주에서 구호 식당을 운영한다는 것도 기발합니다.”
냅킨을 선우진에게 돌려주며 버네이스가 말했다.
대통령 때문에 좌절한 시민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주지사라니……. 이 계획대로라면 재선에는 아무 어려움도 없어 보인다. 공화당에서 어떤 후보가 나선대도 루즈벨트를 이기기는 어려우리라.
그의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루즈벨트의 선거 전략 기획자라는 사실은 확인되었고, 자신보다 몇 단계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란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대체 왜 자신을 만나고자 했던 것일까? 영화 홍보도 어련히 알아서 스스로 잘했을 텐데.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버네이스가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여 선우진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었다.
“뛰어난 능력의 인재를 만났으니 당연히 중용해야 할 테지요.”
선우진이 자애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앞으로 프랭크의 재선과 대선 도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계속 곁에서 길을 제시해 주시오.”
“한 가지만 일러주자면 다른 것들은 전부 거짓말이 맞지만, 프랭크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사실이오. 그것도 꽤 엄청난 바람둥이지.”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함께 휴즈도 한마디 거든다.
“그러니 선거 전략을 수립할 때도 그 부분을 신경 써야 할 거요, 버네이스 씨.”
“……엄청난 바람둥이라고요?”
버네이스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다리를 못 쓰는 바람둥이라니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지만, 농담 같지는 않다. 선우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도 가능한 한 자주 함께할 테지만 프랭크의 홍보 책임자는 당신이오, 버네이스 씨. 대가도 당신의 말대로 다른 홍보 업자에게 주는 것보다 0을 하나 더 붙여서 드리리다.”
“아니, 사이온지 씨.”
당황한 버네이스가 손을 내저었다. 자신의 몸값이 비싸다는 걸 강조했던 건, 어디까지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돈을 받을 수는 없다.
“저는 당신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를 염치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 대가는 지금이 아니라 프랭크의 재선 이후, 뉴욕주가 운영하는 단체의 홍보 의뢰비 명목으로 지급될 거요.”
“……그런 겁니까?”
이 접근 방식 역시 감탄스러워서, 버네이스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후불제 홍보 상담이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지만, 먼저 성과를 이룬 뒤에 넉넉하게 가져가라는 식의 자신만만한 발상이 마음에 든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다.
“이틀 뒤까지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한 홍보 전략의 제1단계를 구체적으로 수립해서 보고하겠습니다.”
버네이스가 눈빛으로 선우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그제야 포크와 나이프를 든 휴즈가, 스테이크를 아주 작게 조각내며 지나는 말처럼 물었다.
“그런데, 버네이스 씨. 내 영화 홍보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소?”
“식사 중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버네이스는 들뜬 얼굴로 서류 가방을 열었다. 동경해왔던 이들과 함께 이런 주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
“휴즈 씨의 영화 〈지옥의 천사들〉이 세계 대전을 다뤘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여러 장의 준비 자료를 늘어놓으며 버네이스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독일은 한때 미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였죠. 우리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영국보다, 독일을 훨씬 더 증오했습니다.”
“그건 당신들이 그렇게 만든 거잖소?”
휴즈가 스테이크를 씹으면서 대꾸했다. 버네이스는 이번에도 별 거부감 없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휴즈 씨. CPI는 세계 대전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독일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으려 노력했죠.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증오의 감정이 여전히 대다수 미국인들의 의식 저 아래쪽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버네이스는 월 스트리트 방향을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우울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증오를 표면적으로 드러낼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세계 대전 당시의 기억을 조금만 상기시켜줘도, 자연스레…….”
“독일군에 대한 증오가 생길 테고, 그놈들을 쏴 죽이는 영화를 보기 위해 요금을 지불할 거라는 말씀이군.”
빠르게 그의 의도를 이해한 휴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버네이스의 자료들을 뒤적였다.
10여 년 전에 CPI에서 반독일 정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선동 포스터와 문구들이, 오랜만에 그의 기억을 되살린다. 독일식이라는 이유로 ‘햄버거’를 ‘자유 샌드위치’라고 바꿔 불렀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그래, 이 포스터 기억이 나는군. 어린 마음에 꽤 무서웠지.”
휴즈는 우울한 색조의 징병 독려 포스터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걸 보여주면, 당연히 바다 건너 전장으로 달려가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었었으리라.
“확실히…… 당신은 좋은 사람은 아니로군그래, 버네이스 씨. 유능하기는 하지만. 아니, 잠깐만…….”
갑자기 진지하게 표정이 바뀐 휴즈가, 선우진이 보기 좋도록 문제의 포스터를 내밀며 물었다.
“이거 어떤가, 아이스맨? 이걸로 프랭크를 설득하세. 엠파이어 스테이트 건 말이네.”
“잘 모르겠군, 하워드.”
선우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 고릴라와 빌딩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