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미스터 버스터 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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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미스터 버스터 팩?
2022.11.16.
-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워드!
수화기 너머, 빈센트 애스터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 유우야가 뉴욕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정말 운명적인 기회라고 생각했죠.
은인을 만난 것처럼 반기는 그 음성을 듣고 있자니, 오히려 이쪽이 조금 미안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휴즈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장난스레 대꾸했다.
“내가 맞춰보리다, 빈센트. 혹시…… 그 기회라는 게 동쪽에 있소?”
- 후후후. 잘 아시는군요, 하워드. 맞습니다.”
환하게 웃은 빈센트가 빠르게 떠들어댔다.
- 만주의 금광 개발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값이 20퍼센트 넘게 뛰었습니다. 그 끔찍한 검은 화요일 이후에 말이죠.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오를 거란 전망이더군요. 이 정도면 주가 손해분을 메우고도 남을 수준입니다. 프랜시스도 이야기하더이다, 우리에게 더 없는 호기가 왔다고요.
‘우리’로 네 사람을 묶은 호칭에서, 뜨겁게 달궈진 욕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쯤 되면 굳이 뭔가 더 자극할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휴즈는 웃음을 참기 위해 배에 힘을 꽉 주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요, 빈센트. 그래서 슬슬 공사 개시 시점에 관해 논하려고 하는데…….”
- 프랜시스가 이미 도로와 선로 공사를 위한 팀을 꾸려뒀습니다, 하워드! 유우야와 당신이 공사를 허락만 해주면, 당장 중국으로 배를 출발시킬 겁니다.
빈센트가 휴즈의 말을 끊고, 열심히 설득을 이어간다.
- 미국에서 듀폰 사의 지휘 아래 고속도로와 선로 건설로 많은 경험을 쌓은 최고의 전문가들이죠. 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선로를 깔 수 있는 회사는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멋진 이야기요, 빈센트. 나 역시 마음에 드는구려.”
휴즈는 빈센트를 추어주고, 전화를 끊을 준비를 했다.
“그럼 그 건에 관해서는 내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더 논의해봅시다. 아, 물론 아이스맨도 함께할 거요.”
이쪽에서 은근히 권하고 싶던 부분들을 전부 알아서 나서주니, 이제는 굳이 말을 길게 섞을 필요가 없다.
-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워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휴즈가 작별 인사를 건네려 할 때, 빈센트가 지나는 말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 엠파이어 스테이트 건축을 위한 담보금이 50만 달러씩 추가될 전망입니다.
“한 사람당 50만 달러라는 말이오, 빈센트? 누가, 왜 그렇게 해야 한답디까?”
휴즈의 표정이 굳었다. 두 사람이면 100만 달러. 갑자기 가장 큰 대기업의 반년 치 광고비와 맞먹는 거금을 추가로 내놓아야 한다니, 당연히 부담스럽다. 기대하고 있던 영화 수익이 사라져서 안 그래도 현금이 부족한 그에게는 더더욱.
- 그게…… 설계를 변경해서 더 높이 올린다는군요, 하워드. 60층 이상의 건물이 될 예정입니다. 크라이슬러도 55층 높이로 새 건물을 짓는 중이어서, 그보다 높아야 한다나요?
빈센트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휴즈에게는 새로운 난관이 닥쳐왔다. 전화를 끊고 빈센트의 말을 전한 휴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젠장……. 50만 달러를 또 어디에서 구하지?”
용기를 낼 만하면 다시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겨우 추스르려 하면 또 돈이 발목을 잡는다.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던 선우진이 입가를 쓸었다.
“나 역시 현금으로 가져온 것은 50만 달러뿐이네.”
물론 조선으로 돌아가 금을 팔기 시작하면, 100만 달러를 만드는 건 별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당장 내일 저녁 빈센트 일행을 만나 수표를 건넬 때, 그렇게 긴 지급 여유를 달라고 부탁하는 건 이쪽의 평판을 해치는 일이 될 터였다.
스윽-!
잠시 고민하던 선우진과 휴즈의 고개가 동시에 안경 남자 쪽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들이 아는, 현금이 가장 풍부한 자산가에게로.
“역시…….”
휴즈가 멋쩍어하며 입을 열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자네에게서 백만 달러쯤 빌려야만 하겠네, 황태자님.”
“그러게.”
만년필로 뭔가를 적어가며 열심히 주가를 분석 중이던 안경 남자가, 너무도 황태자님다운 태도로 가볍게 대답했다.
“당장 내일 아침에 함께 모건 은행으로 가서 출금하세나.”
***
23 월 스트리트에 위치한 모건 은행에서 버스터는 그야말로 귀빈이었다.
“오셨군요, 미스터 버스터 팩.”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미스터 버스터 팩.”
로비를 지나 몇 개의 문을 통과하며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따라 귀빈 전용 사무실로 이르는 동안, 마주치는 모든 직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온다. 그럴 때마다 버스터는 모자를 까딱이는 것으로 과묵한 답례를 표할 뿐이다.
인사를 건네는 은행 직원들에게도 까딱, 엘리베이터 운전사에게도 까딱. 미국 생활도 어언 1년이 지나갔건만, 영어로 말하기를 쑥스러워하는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하고도 용케 주식 거래를 했군, 버스터. 말을 한마디도 안 섞었나?”
휴즈가 재미있어하며 놀리듯 물었다. 버스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엄지로 안경 남자를 가리켰다.
“이바구래 어련히 달하는 동무가 따로 있디 안냔?”
“황태자님께서 대신해 주시니 자네는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단 말인가?”
용케 버스터가 하려는 말을 파악한 휴즈는 웃음을 삼켰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건 안경 남자의 위상이다.
“이곳에서는 자네를 어떤 존재로 알고 있나, 피에르?”
선우진이 물었다. 안경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도 안 물어보더군. 아마 막연히 버스터의 비서나 뭐 그런 신분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조선의 황태자님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한다고?”
“여기 간부들은 하워드나 프랭크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네, 안드레이. 대부분 공화당 지지자들이지. 그러니 나라는 사람을 알 턱이 있나?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거금을 지니고 자신의 사무실을 찾는 고객들뿐일세. 아, 그리고…….”
덤덤하게 대꾸한 안경 남자가, 버스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버스터도 영어를 하기는 하네. 딱 세 단어뿐이지만, 어지간한 소통은 그걸로 다 되지.”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몇 발짝 앞에서 귀빈실까지 안내해 준 은행 직원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시죠, 미스터 버스터 팩.”
“땡큐.”
버스터는 제법 유창한 발음으로 감사를 표하고, 귀빈 상담을 위한 간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혹시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미스터 버스터 팩?”
“노.”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은행 간부에게 버스터가 그의 두 번째 영어 단어로 답했다.
“이분들은……?”
버스터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선우진과 휴즈를 곁눈질로 살피며, 모건 은행 간부가 안경 남자에게 묻는다. 안경 남자는 선우진이 일러준 대로 적당히 에둘러 대꾸했다.
“아, 우연히 이 앞에서 친구들과 만났소. 그건 그렇고, 오늘은 US 스틸 주식 중 일부를 팔아 현금을 좀 가져가려 합니다.”
의자에 앉은 안경 남자가 능숙한 솜씨로 매매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휴즈는 뒷짐을 진 채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며 딴청을 부렸다.
“역시 모건 은행이 제일 고급스럽구만. 나도 이쪽에 자산 관리를 맡길까…….”
하지만 모건 은행의 간부는 휴즈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버스터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사각, 사각.
안경 남자의 만년필 촉이 서류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동안, 벽난로 내부의 장작이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소리가 호사스러운 화음을 만들어낸다.
“오해가 없도록, 한 번 더 계좌주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미스터 버스터 팩?”
안경 남자의 출금 서류를 받아든 모건 은행 간부가 버스터의 의향을 확인했다. 버스터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100만 달러를 주식 계좌에서 예금 계좌로 이체하신다고요?”
“예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몇 가지 절차가 있어서…….”
간부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 버스터와 안경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선우진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감추고 있군.’
구체적으로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내의 행동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돈 때문에 이상한 짓을 꾸밀 규모는 아닌데…….’
선우진은 간부의 전용 사무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견고한 석조 건물 내부는 이곳의 찬란하고 견고한 역사를 증명하듯. 호화로운 내부 장식과 가구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리 100만 달러 단위의 거금이 유혹적으로 느껴진다고 해도 모건 은행의 간부씩이나 되는 신분으로 고객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터다. 그건 이 사업체의 평판과 직결되는 문제이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이게…… 큰 금액이다 보니 절차가 좀 복잡합니다. 여기와 여기에 서명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미스터 버스터 팩?”
별로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 수많은 서류를 내밀며, 모건 은행 간부가 양해를 구했다. 물론 안경 남자는 서류의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버스터의 서명을 허락할 만큼 허술한 성격이 못 된다.
“내가 먼저 검토해보겠소.”
안경 남자가 서류 뭉치를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모건 은행 간부는 몇 번이나 창밖을 돌아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뭘 기다리나?”
선우진이 돌연 툭 던진 질문에, 모건 은행 간부는 흠칫 놀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필사적으로 부인한 모건 은행 간부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냥 통상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어쨌든 귀빈의 일행분께서 불쾌하게 느끼셨다니, 참으로 유감이군요. 서류를 읽으시는 동안, 금고실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현금을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다이얼을 돌리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사방에 경찰이 깔린 대낮의 월스트리트. 그것도 미국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은행 내부였지만, 이 정도면 위험 경고의 한계치를 넘어섰다.
턱-!
선우진은 수화기 걸이를 꾹 눌러 전화를 끊어버리고, 안경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나가세.”
“응? 아직…… 서류 검토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안경 남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선우진은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힘을 주었다.
“돈은 나중에 고용인을 시켜 찾아오라고 하세. 일어나게나.”
“날래 가잔!”
버스터도 벌떡 일어나 안경 남자를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저 영민한 친구가 괜한 소동을 벌일 리 없다.
“뭐야? 왜 그러나, 아이스맨?”
선우진과 버스터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난 휴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금 100만 달러를 수령하러 온 들뜬 나들이가 갑자기 끝나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더 놀란 것은 모건 은행 간부였다.
“고객님! 미스터 버스터 팩……! 왜 이러십니까? 기다려주십시오!”
얼굴이 새파래진 모건 은행 간부가 황급하게 따라오며 손을 뻗었다. 그가 버스터의 코트 자락을 움켜쥐려 할 때, 휴즈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손대지 마시오! 내 일행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닿으면 곧바로 당신을 폭행으로 고소할 거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몰라도, 이깟 인간이 아이스맨을 방해하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다. 그 기세에 눌린 모건 은행 간부가 한발 물러나며 울상을 지었다.
“아, 아니……. 저는 그저 귀빈의 오해를 풀어드리고자…….”
“오해? 이건 전부 다 당신 잘못이오! 모건 은행은 대단한 귀빈을 잃었다는 것만 아시오! 내일 전부 출금할 거요! 1페니도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무례한 인간 같으니라고!”
휴즈는 삿대질까지 곁들여서 책임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우고, 선우진 일행과 함께 귀빈실을 나섰다.
“무슨 일인지 안 알려줄 건가, 아이스맨?”
선우진과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휴즈가 그제야 이유를 물었다. 선우진은 시선을 앞에 두고 짧게 대꾸했다.
“저 사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네. 우리에게 반가운 사람은 아닐 걸세.”
“진짜?”
휴즈와 안경 남자가 동시에 새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는 안 된다.
“대체 누가 우릴 노린다는 말인가, 안드레이? 우린 그저 법을 준수하며 주식 거래를 했던 것뿐인데.”
안경 남자의 얼굴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선우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나도 모른다네, 피에르. 하지만 이건 확실히 알고 있지.”
선우진은 세상 물정 모르는 황태자님을 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상대는 이 거대한 모건 은행의 간부가,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저지르도록 만들 만큼 강한 권력을 가진 인물일세. 그것도 9백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귀빈을 상대로.”
“……젠장. 마피아인가?”
그제야 위기감을 피부로 느낀 휴즈는 이를 꽉 깨물었다. 놈들이 총으로 가족을 협박해서 돈 많은 사람의 정보를 넘기라고 했다면, 그건 좀 말이 되는 느낌이다.
혹시라도 안경 남자가 당황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선우진은 차분히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절대로 뛰어서는 안 되네, 피에르. 그저 조금 바쁜 사람처럼 걷게나.”
이쪽이 허둥대는 도망자처럼 굴면, 경비원들에게 저지할 명분을 주는 셈이 된다. 어차피 은행만 벗어나면 사라질 위험이니, 말썽의 여지를 둘 필요가 없다.
“괜찮아, 황태자님. 로비까지만 나가세. 거기엔 경찰이 경비 중이니까.”
휴즈도 안경 남자의 등을 두드리며 모두의 용기를 북돋웠다. 아무리 마피아라고 해도 경찰이 있는 곳에서 감히 유괴를 시도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이쪽의 뒤에는 주지사라는 든든한 후원자도 존재한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멍청이들! 나가자마자 프랭크에게 범죄 조직을 전부 소탕하라고…… 윽!”
분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모퉁이를 돌던 휴즈가, 신음을 흘렸다. 거기엔 양복이 터질 듯 건장한 백인 남자가 네 명이나 버티고 서 있었다.
“……미스터 버스터 팩?”
가장 우측의 백인 남자가, 버스터의 신분을 확인했다. 버스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예스.”
“저희 주인님께서 미스터 버스터 팩과 만나길 원하십니다. 잠시 저희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우측 백인 남자가 제법 정중하게 물었다. 이번에도 버스터는 곧바로 답했다.
“노.”
버스터는 물러서라는 손짓을 곁들여, 분명한 외마디 대답을 던졌다. 그는 지금 혼자가 아니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와 함께하는 까닭이다. 그래도 상대에겐 전혀 길을 비켜 줄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턱-!
버스터의 어깨를 움켜쥔 우측 백인 남자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부탁이 아닙니다.”
우측 백인 남자는 두툼한 손끝에 힘을 꽉 주면서, 자신의 무력을 과시했다.
“그러니 얌전히 따라오시죠. 다칠 수 있습니다.”
“어이, 당신들도 같이 갑시다.”
좌측 남자가 안경 남자를 향해 위압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건 버스터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턱-!
우측 백인 남자의 손을 쳐낸 버스터가, 한 발짝을 내디디며 좌측 남자를 향해 벼락처럼 주먹을 날렸다.
덜컥-!
안경 남자를 잡으려던 좌측 남자의 턱이 홱 돌아가는가 싶더니, 기둥처럼 굵은 두 다리가 힘없이 무너졌다.
털썩-!
눈이 풀린 좌측 남자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세 남자를 향해, 버스터는 다시 한 번 분명히, 그리고 으르렁대듯 나직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노.”
그런 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무례하게 손을 까딱여 비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물론 그 정도쯤으로 끝날 수 있는 시비가 아니다.
“이 자식이!”
세 남자는 일제히 욕설을 내뱉으며 버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좌우에서 펀치를 뻗어왔고, 가장 우측의 남자는 곤봉을 꺼내 쥐었다.
휘잉-! 후웅-!
커다란 주먹들이 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사이에도, 버스터는 그저 콧방귀를 뀔 뿐이다.
“아, 고저 민퉁이 같은 아새끼들……. 너쓸하게도 군단.”
가볍게 고개만 틀어 상대의 공격을 피한 버스터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빠악-! 쩍-!
채찍처럼 빠르게 날아간 버스터의 주먹이 두 사내의 배와 턱을 차례로 강타했다. 의식을 잃은 두 사내가 허물어지기도 전에, 버스터는 벌써 방향을 돌려 우측 남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뻐어억-!
복도 벽에 메아리가 울릴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곤봉을 휘두르려던 우측 남자는 몇 미터나 날아가 반대편 벽에 튕긴 후, 카펫 위로 떨어졌다.
쿠, 쿠웅-!
세 명의 거한이 거의 동시에 바닥에 나뒹군다. 버스터는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거씨 나가잔.”
은행 내부까지 저런 놈들이 들어왔으니, 이제는 정말 서둘러야만 한다. 그래도 휴즈는 아직 거한들에게 해줄 말이 남았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했잖아, 덩치 씨! 이쪽은 세계 챔피언 뎀프시를 이긴 진짜 100만 달러의 사나이라고!”
쓰러져 있는 거한들에게 빠르게 잘난 척을 해댄 휴즈가, 걷는 속도를 높여 선우진 일행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위기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젠장……. 이놈들, 엘리베이터를 꺼뒀어.”
엘리베이터를 부르려던 휴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스위치를 누르고 또 눌러도,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알리는 바늘은 1층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모른다.
“이러면 여길 방문하는 다른 고객들도 전부 발이 묶인다는 이야기인데……. 모건 은행 전체가 다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휴즈는 선우진을 돌아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선우진 역시 이 상황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거기에서 투덜대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단으로 가세.”
2층의 간부들은 전부 한 패거리라고 보는 편이 옳다. 복도에서 이 난리가 났는데 그 누구도 문을 열고 나와 보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이게 뭐야?”
로비와 이어진 반 나선형의 계단까지 도달했을 때, 휴즈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그렇게도 북적이던 고객들이 전부 깨끗이 사라졌고, 당연히 자리를 지켜야만 할 경찰들의 모습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가장 놀라운 광경은 긴 창문마다 드리워진 커튼이었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큰 증권 은행이 영업시간에 노골적으로 문을 닫았는데, 왜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걸까? 어쨌든 이쯤 되면 이건…… 일개 폭력 조직에서 꾸밀 수 있는 흉계의 범위를 넘어섰다.
“내 직원들과 이야기가 잘 안 된 것 같군요.”
1층의 한구석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백발의 신사가, 선우진 일행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손짓했다.
“어쨌든 내려오시죠.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J. P. 모건 2세.”
휴즈가 가장 먼저 상대를 알아보고 앓는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미국 금융의 왕이,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그것도 자신 소유의 건물 내부에서! 이유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런 위압적인 상황에서는 대화건 뭐건 일절 하고 싶지 않다.
“모건 씨!”
휴즈는 2층 복도의 난간을 움켜쥐고 로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점잖은 분이 고객을 상대로 왜 이런 소동을 벌이는 거요? 없었던 일로 해드릴 테니, 당장 문을 여시오! 나는 나가야겠소!”
“나 역시 그다지 내켜서 하는 일은 아니오.”
모건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한 뒤, 휴즈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그리고 휴즈 씨, 어차피 당신에게는 관심도 없으니 조용히 물러나 계시구려. 내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상대는 저 신사분이니까.”
시선으로 버스터를 지목한 모건이, 긴 안락의자의 곁에 섰다. 노골적으로 무시당한 휴즈의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내 친구에게 용건이 있다면 그건 나의 일과 다르지 않소, 모건 씨! 우리는 팀이니까! 그리고…….”
보란 듯이 버스터의 어깨를 얼싸안은 휴즈가,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또 다른 내 친구 프랭크와 점심 식사 약속이 있소!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뉴욕주지사와 말이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여기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프랭크도 알게 된다는 뜻이지! 뉴욕의 주지사를 적으로 돌려도 좋소이까? 아니, 그렇지 않을 거외다!”
“우습군.”
로비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도 우습게만 보였는데, 고작 주지사 루즈벨트 따위가 두려울까?”
목소리의 주인이 천천히 샹들리에 불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머리도, 수염도 없는 노인의 바짝 마른 얼굴을 본 순간, 어지간한 휴즈도 얼음처럼 경직되었다.
“존 D. 록펠러?”
“그렇소. 그게 내 이름이지.”
건성으로 대꾸한 록펠러가 긴 안락의자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가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건장한 사내들 십여 명이 그림자처럼 우르르 그 뒤를 따른다. 너무도 압도적인 상대의 등장에, 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젠장……. 우리가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거지, 아이스맨?”
겨우 충격을 떨친 휴즈가 눈을 껌뻑이며 선우진을 돌아보았다. 신문에서나 보았던 경제계의 거물이 둘이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아무리 배짱이 좋은 휴즈라고 해도, 이 상황이 떨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니, 사실…… 록펠러에 비하자면 모건은 거물도, 부자도 아니다. 록펠러는 1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역사상 최고의 부자이자, 미국 사법부조차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권력을 가진 괴물이니까.
어쨌든 분명한 건, 저 노인에게는 루즈벨트라는 보험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내려올 마음이 들지 않나, 미스터 버스터 팩?”
안락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린 록펠러가, 버스터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죄를 지었으니 불안해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올려다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네.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릴 거라면, 억지로 끌어내리는 수밖에.”
우르르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사내들 십여 명이 계단 쪽으로 다가선다. 버스터는 선우진을 돌아보고 물었다.
“어드렇게 할 거냔, 동무?”
수십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상대로 한바탕 대활극을 불사할 기세였지만, 선우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게, 버스터.”
만일 버스터 혼자서 문까지 돌파하면 되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승산이 있겠으나, 지금 그에게는 지켜야 하는 친구가 셋이나 된다.
그리고 여기는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벌인 일들을 감안하건대, 상대는 총을 빼 드는 걸 주저할 사람들이 아니다.
“내려가세.”
코트 깃을 당겨 옷매무시를 바로 한 선우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대화를 원한다니 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