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 얼마를 뜯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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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 얼마를 뜯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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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 얼마를 뜯어낼 것인가?
2022.11.23.
“록펠러 씨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군.”
선우진은 웃음을 꾹 참고 비장한 시선으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말일세.”
“아니, 아니! 잠깐만, 아이스맨!”
사색이 된 휴즈가 손을 내저으며 끼어들었다.
“그렇게 쉽사리 승낙하면 안 되는 상황이네! 자그마치 9백만 달러가 걸려있어! 장난이 아니라고!”
9백만 달러면〈지옥의 천사들〉을 세 번 제작할 수 있는 거금. 그렇게 큰돈을 두 눈 멀쩡하게 뜨고 그냥 날린다는 건, 휴즈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야만 하기에 휴즈는 필사적이었다.
“일단 승산이 전혀 없는 게임이야, 아이스맨! 생각해 보게! 가위바위보를 세 번 연속해서 이겨야만 1승으로 쳐주겠다는 게 규칙이란 말일세. 그런데 그런 행운이 몇 번이나 이어지겠나? 열 번, 스무 번을 잇달아 맞힌대도 단 한 번만 틀리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이잖은가? 아니 비겨도 지는 것이니까, 이쪽의 승률은 애초에 33퍼센트에서 시작해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는 걸세. ……황태자님!”
펄펄 뛰며 열을 내던 휴즈가, 안경 남자를 향해 도움을 청했다.
“자네가 좀 말해보게!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이 게임에 우리가 이길 확률이 존재하기는 하나?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자네 입으로 직접……!”
“내 생각에도 록펠러 씨의 주장이 옳네.”
안경 남자가 긴 고민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무수한 변수를 염두에 두고 수백 개 종목의 실시간 가격 변화를 전부 살펴야만 하는 주식 거래에 비하면, 답이 세 가지뿐인 예측이 훨씬 쉽지. 승률도 이쪽이 압도적으로 높을 걸세.”
“……그래?”
갑자기 열이 확 식어버린 휴즈가, 맥빠진 목소리를 냈다.
도저히 무리인 것처럼 보였는데, 안경 남자는 이리도 가볍게 ‘쉽다’는 평가를 내리다니……. 갑자기 자신의 천재성이 훼손된 것 같아 약도 오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는 말인가, 황태자님?”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휴즈가 다시 물었다. 안경 남자가 주식시장에서만큼만 승승장구해준다면, 이건 외려 엄청난 호기가 아닌가? 그런데……,
“하지만 조건에 문제가 좀 있네.”
안경 남자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게임의 규칙 자체를 부정했다.
“고작 다섯 번의 조합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그렇게 부실한 참고 자료로는 예측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무리해서 예측치를 낸다고 해도 적중할 확률이 매우 낮아지네. 내가 예측을 시작하기 전에, 록펠러 씨가 더 많은 사전 조합을 보여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을까 싶네만.”
“좋아! 이길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요구해야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몇 번이나 더?”
답답해진 휴즈가 손짓을 곁들여 재촉하자, 안경 남자는 너무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만 옳은 대답을 내놓았다.
“못해도 200번은 보았으면 좋겠군. 250번이면 더욱 오차가 줄어들 것이고.”
“……하아!”
휴즈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졌다. 돈에 눈이 멀어 잠시 잊고 있었다. 그의 앞에 앉은 이 남자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황태자님.”
휴즈는 록펠러를 눈짓하며 안경 남자에게 속삭였다.
“저 완고한 자본가가 자네를 위해서 카드를 200번이나 섞어서 내놓겠나?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해. 저렇게 주름지고 앙상한 손가락으로 느릿느릿 그 짓을 하려면 사흘, 나흘이 지나도 모자랄 걸세.”
“하지만 200번이라고 해도 1년 치 주가 변동 기록에도 못 미치는 수준일세. 그 정도의 참고 자료도 없는데 어떻게 투자를 감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안경 남자가 순진한 얼굴로 항의했고, 그럴수록 휴즈는 속이 터진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내가 불만을 품고 있는 부분일세, 황태자님! 이건 우리가 이길 수 있기를 바라며 제안한 게임이 아니라니까! 그냥 대놓고 우리의 돈을 강탈하겠다는 게야!”
휴즈와 안경 남자가 전혀 건설적이지 않은 논쟁을 벌이는 동안, 록펠러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놈들,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로군…… 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런 록펠러를 바라보며 선우진은 다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까지 뜯어낼 수 있는 걸까……?’
선우진은 위스키 잔을 쥔 채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면서도, 또 지극히 위험한 저울질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카드를 알아맞히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으나, 거기에 걸린 돈이 커질수록 이쪽의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만약 전 재산을 다 빼앗길 위기에 처하면, 록펠러는 위신이고 체면이고 따지지 않고 이쪽을 죽이는 방법을 택하리라.
아무리 모건과 함께 있는 자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미 학살의 역사를 지나온 록펠러에게, 고작 네 명을 더 죽이는 일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금기일 리가 없다.
그러니 선우진은 록펠러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지불할 금액의 상한선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그 한 장의 청구서는, 록펠러가 뜨끔 놀라 이쪽을 인정하고 물러설 만큼 매서운 것이어야만 했다.
‘당신의 명예에는 얼마짜리 가격표가 붙어있소, 록펠러 씨?’
선우진은 록펠러의 주름진 얼굴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2천만……? 아니, 극한까지 치닫는다고 하면 3천만 정도인가?’
수없이 가상의 상황을 상정하고, 또 상정해 본 끝에 선우진은 3천만 달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섯 번의 게임을 연속으로 패했을 때, 저쪽은 더 견디지 못하고 폭력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대안을 택할 거라는 의미였다.
‘좋아.’
마음을 정한 선우진은, 승리를 위한 준비에 나섰다.
“진정하게, 피에르.”
선우진은 그때까지도 휴즈와 격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안경 남자에게 조선말로 일렀다.
“일전에 자네에게 보여주었듯, 나에겐 이런 종류의 승부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네.”
“……그랬지, 기억하고 있다네!”
안경 남자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말의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젓가락의 무늬를 맞히는 게 아니었나? 자네의 그 유달리 좋은 운이 트럼프의 숫자 조합을 적중시키는 것에도 적용되는 능력인가?”
사실 그게 내 전문 분야일세……. 선우진은 조용히 웃음을 삼키고, 안경 남자를 안심시켰다.
“할 수 있을 듯하니 너무 심려치 말게나.”
“그렇다면 이렇게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겠나, 안드레이. 당장 시작하자고 하세!”
부담을 확 덜어낸 안경 남자가 들뜬 목소리를 낸다. 선우진은 진정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한 가지 조건을 더 들려주었다.
“다만 매번 답을 내놓기 전에 우리끼리 회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네. 그러니 내가 조선말로 잡담을 걸거든,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는 말게나. 혹시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도, 조선말로 물어주게나.”
“그건 또 왜 그런지 모르겠군.”
안경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가 패배에 납득하도록 만드는 게,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네, 피에르.”
선우진은 안경 남자에게 이런 도박의 가장 핵심을 일러주고, 버스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만일에 대비해 록펠러에게 달려들 기회만 엿보고 있던 버스터는, 무조건 승낙의 의사를 밝혔다.
“뭐이 어드러케 돌아가는 거인지 모르갔지만, 내래 영민한 동무한테 걸겠단.”
“대체 일본어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가, 아이스맨? 나도 좀 끼워주게.”
답답해진 휴즈가 선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우진은 그의 손을 다독이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논의를 해 본 결과,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네, 하워드. 그러니 자네도 행운을 빌어주게.”
“젠장…….”
선우진의 미묘한 신호를 알아들은 휴즈가 입가를 쓸었다.
아이스맨의 이 표정은…… 빈센트의 저택에서 라스콥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뜯어냈을 때의, 바로 그 얼굴이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떨리는 건, 이번 싸움이 훨씬 더 어려운 승부인 까닭이다.
“우왕좌왕하더니, 이제야 용기를 내기로 했나……?”
록펠러가 승리를 확신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가 앙상한 손가락을 뻗어 카드를 셔플하려 할 때, 선우진이 살짝 손을 들어 그의 동작을 멈췄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록펠러 씨.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모건 씨를 증인으로 삼아 몇 가지 조건을 추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정한 게임이 될 테니까요. 우선…….”
선우진은 카드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섯 번의 자료용 카드 조합을 포함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 반드시 당신의 눈으로 보고 조합을 만들어야 합니다. 카드를 덮은 채 무작위로 배치하거나, 타인에게 고르도록 하면 그 조합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록펠러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가 제법 무게를 잡았지만, 그가 보기에 이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조건이다. 모건도 바로 턱을 까딱였다.
“록펠러 씨께서 동의하셨다는 걸 확인했소.”
“좋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선우진은 천천히 만년필을 꺼내 록펠러가 건넸던 서류철 위에 턱 올려놓았다.
“우리가 이 서류 위에 수식을 적어가며 계산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오. 암산만으로 그 복잡한 변수를 다 가늠하기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물론 일본어로 짧은 논의도 나눌 겁니다.”
“계산 정도야 문제가 안 될 테지만, 그 논의라는 걸 왜 영어로는 하지 못하는 건가?”
록펠러가 사소한 시비를 걸었다. 외국인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리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안을 위해서도 별로 긍정적인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선우진은 상대가 거부할 수 없는 이유를 댔다.
“우리가 영어로 논의하면, 애써 개발한 우리만의 독자적인 예측 방법을 당신들과 공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이까? 그건 곤란하지요. 우리 사업의 정수는 절대로 외부에 유출할 수 없습니다.”
“큽, 우습군…….”
록펠러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아주 미세한 코웃음을 쳤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업의 정수 따위를 입에 담다니 말일세. 자네들은 아직도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모양이야.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받아들여 줘야 할 테지. 단…….”
록펠러는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 게임당 논의하는 시간은 5분으로 제한하겠네.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10분.”
선우진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매일 주식 거래소가 문을 닫은 뒤부터 밤이 하얗게 밝을 때까지 회의를 해왔던 것에 비하면, 그것도 턱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그건 록펠러 씨나 모건 씨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믿소.”
“타당하군. 받아들이겠네. 자네들의 조건은 그게 전부인가?”
록펠러는 이번에도 별 망설임 없이 선우진의 제안을 수용했다. 사실…… 그는 몇 분을 더 줄 용의까지도 있었다.
그렇게 해봐도 어차피 한 시간 내에는 모든 게 다 끝날 수밖에 없는 게임이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젊은이들이, 이렇게 순순히 내기에 응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소이다. 그리고 사실 이건 우리의 조건은 아니었습니다만…….”
선우진이 록펠러를 응시하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록펠러 씨께서 말을 꺼내셨으니, 우리도 시간제한을 걸겠습니다.”
“내 시간을 제한하겠다고……?”
너무도 방자하고 예상을 벗어난 제안에, 록펠러의 미간 주름이 아주 살짝 더 깊어졌다. 그래봐야 선우진은 긴장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소이다, 록펠러 씨. 당신도 매번 5분 이내에 다음 카드의 조합을 완성하셔야만 합니다. 당신은 추론 과정이 필요치 않으니 그 정도면 충분할 테지요. 그래야만 서로 공평하니까요. 동의하십니까?”
“뭔가 했더니 같잖은 소리로군.”
록펠러는 귀찮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기껏해야 세 개의 숫자를 조합하는 것뿐이라 5분이나 필요할 리가 없긴 하지만, 상대의 조건을 왠지 그대로 수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나도 자네들과 똑같이 10분으로 하지.”
록펠러가 슬쩍 고집을 부릴 때에도, 선우진은 별다른 거부 없이 다음 조건들을 꺼냈다.
“오늘 게임에 걸린 돈의 지급 기한은 내일 오전까지로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안경 남자와 버스터의 동의를 구하는 척, 좌우를 둘러본 선우진이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를 읊었다.
“우리가 다섯 게임을 연속해서 적중시키면, 그때 게임을 지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새로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공정성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주름진 눈을 깜빡이며 록펠러가 물었다. 다섯 판을 연속하여 적중시킨다는 건,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열다섯 개의 조합을 알아맞히겠다는 의미다.
감히 그런 행운을 기대하는 것도 방자하기 그지없건만, 그다음을 염두에 두고 추가 조건을 내걸다니……. 게다가 그 조건이라는 것도, 록펠러 자신에게 유리한 조항이다.
대체 이 젊은이의 머리는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기에, 이런 위압감 속에서도 자유롭게 그런 망상에 젖는 것일까? 그리고……, 공정성? 왜 하필이면 수많은 핑계 중에 그런 터무니없는 어휘를 고른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록펠러 씨.”
선우진은 위스키로 입을 축인 뒤, 평온하게 설명했다.
“그때부터는 누적된 자료가 너무 많아,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게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먼저 제시할 다섯 번의 조합에 다섯 번의 게임까지 더하면, 모두 열 번이나 되니까요. 그렇게 풍부한 자료가 확보되고 나면 예측이 빗나갈 리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기를 이어간다면 우리야 좋겠지만, 록펠러 씨는 납득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어이없는 시선으로 선우진을 노려보며 천식을 앓는 것처럼 숨을 쌕쌕거리던 록펠러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들었나, 잭?”
잠시 파안대소하던 록펠러는 웃음기를 거두고 모건을 돌아보았다.
“이 젊은이는 타고난 사기꾼이야. 간이 엄청나게 크고, 언변이 뛰어나서 제법 그럴듯한 말들을 떠들어댈 줄 알아. 9백만 달러를 날리기 직전인 데다, 어쩌면 목숨까지도 위험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1파인트만큼도 움츠러들지를 않았어. 아직도 뭔가 살아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겠지. 놀랍지 않나?”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록펠러 씨.”
모건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젊은이들이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불리한 게임이 될 터여서,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니…….
저 록펠러가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이후에 이렇게 방자한 태도를 견지한 인간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록펠러를 증오했던 ‘귀족’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조차도, 그를 앞에 두고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지는 못했다.
“나는 솔직히 이 친구가 마음에 들었네.”
록펠러는 진심인지, 아니면 비꼬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배신자의 꼭두각시만 아니라면, 뭔가 적당한 내 사업을 골라 맡겨보고 싶을 지경일세. 이 정도의 배짱을 가진 인간은 좀처럼 만나보기 어렵지. 그러나…….”
잠시 말을 끊은 록펠러의 눈동자에서, 다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은 신뢰를 저버린 배신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일이 더 우선이겠지. 추가할 조건이 없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볼까?”
“카드를 보면서 고르시오, 록펠러 씨.”
훔쳐보는 걸 방지하기 위해 몇 발짝 떨어진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선우진은 다시 한번 조건을 상기시켰다. 록펠러는 아무 대꾸도 없이 비서가 미리 빼내 둔 2와 5, 10 카드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세 장을 골랐다.
“와서 보게나. 내 첫 번째 조합은 이걸세.”
“같은 숫자가 있잖습니까, 록펠러 씨?”
5와 5, 그리고 10 카드를 보자마자 휴즈가 소리를 빽 질렀다.
“2와 5, 10으로만 구성된 조합이 아니었습니까? 같은 숫자를 반복해서 쓸 수 있다는 조건은 들은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니, 하워드. 나는 처음부터 이런 규칙이라고 이해했네.”
록펠러가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안경 남자가 정색하고 상대의 편을 든다. 하워드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황태자님?”
“록펠러 씨는 각 숫자를 한 장씩만 쓰겠다고 한 적이 없다네. 그저 2와 5, 그리고 10이 각각 하락, 보합, 상승을 상징한다고만 했지. 모든 주식 종목과 마찬가지로 그 세 가지는 단독적인 사건이어야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네.”
안경 남자가 그야말로 냉철한 분석을 들려주었지만, 휴즈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별로 듣고 싶은 마음도 없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이렇게 되면 이기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런 조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건가, 황태자님? 내가 듣고 싶은 답은 그것뿐일세.”
휴즈가 광인에게 물었고, 광인 대신 선우진이 답했다.
“그렇다네, 친구.”
휴즈를 안심시킨 선우진은 곧바로 교란 작전을 시작했다.
“흐음, 역시 이런 조합으로 시작하는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보합, 보합, 상승이라…….”
선우진은 서류철 뒷면에 숫자를 적어넣으며 알쏭달쏭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록펠러는 그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다음 세 장을 골랐다.
“상승, 보합, 상승입니까? 이건 좀 의외로군요.”
이번에도 선우진은 숫자를 기록하며,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헛소리들이었지만, 록펠러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긁으면 효과는 충분하다.
실제 돈이 오갈 때에는 그 작은 생채기들이 아주 커다란 아픔과 부담을 주게 될 것이므로.
비슷한 과정이 그렇게 세 번 더 반복되었다. 록펠러는 세 숫자를 적당히 섞어서 카드 조합을 내보였고, 그럴 때마다 선우진은 신중하게 만년필로 기록하며 뭔가 알 듯 모를듯한 소리를 웅얼거렸다.
물론 틈이 날 때마다 안경 남자, 버스터와 머리를 맞대고 조선말로 회의하는 척 의견을 나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이제 돈이 걸린 게임일세. 첫판이니 백만 달러지.”
지금까지보다 조금은 더 신중하게 세 장의 골라 테이블에 늘어놓은 록펠러가, 회중시계로 시선을 던졌다.
‘2, 2, 2 인가…….’
멀찍이 떨어져 앉은 선우진은 덮여있는 카드를 보며 생각했다. 답은 이미 환히 알지만, 이제부터 그럴듯해 보이는 헛짓으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
“앞서 다섯 번의 조합이 이런 것이었으니까…….”
선우진은 아주 신중한 태도로 혼잣말을 흘리며 빠르게 만년필을 움직였다.
사각-! 사각-!
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내달리며 무의미한 수식과 일본어 기록을 만들어나간다.
5와 10의 출현 빈도를 ‘욕망’으로 나누고, 2의 배치 순서에 ‘특수 기댓값’을 곱해 루트를 씌웠으며, 매 조합의 합을 따로 떼어내 제곱한 다음 그 숫자들을 기이한 포물선 위에 배치해서 기울기를 산출했다.
“이 포물선이 의미하는 바는 뭔가, 안드레이?”
역할의 본분을 잊고 어느새 선우진의 수식에 깊이 빠져버린 안경 남자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조선말로 물었다. 선우진은 ‘바로 그렇지!’라는 손짓을 곁들여 조선말로 답했다.
“아무 의미도 없다네, 피에르. 그저 시간을 허비하는 중일세. 뭐라도 좋으니, 더 말을 걸어주게. 우리가 회의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니 말일세.”
“정말로 이런 과정이 필요한가?”
안경 남자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안경을 밀어 올리고서 의견을 덧붙였다.
“빨리 답을 맞히면, 그게 더 록펠러 씨를 놀라게 하지 않을까 싶네만.”
“놀라게 하는 건 중요하지 않네, 피에르.”
안경 남자를 향해 대답하면서도 선우진은 만년필을 멈추지 않았다.
“요는 상대가 과정에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지. 아무리 답을 정확히 맞힌대도 그 과정이 생략되면, 이건 그저 마술이나 속임수처럼 보이고 말 걸세. 그래서는 곤란하이. 영원히 시비가 끝나지 않을 테니까. ……버스터.”
자신의 금장 회중시계를 힐끔거려가며, 사각형과 육각형을 큼직하게 그린 선우진이 버스터에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 그림이 더 마음에 드나? 하나 골라보게.”
“뭐 하자는 거인디는 모르갔디만…….”
한심한 짓에 동참하게 된 버스터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마지 못해 사각형을 짚었다.
“내래 이거이 더 낫단. 너부데데하니 다마고야키 같아서리…….”
“아주 좋은 의견일세, 버스터.”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각형에 몇 개의 수치를 더 적고, 여러 개의 수식을 아래쪽에 써넣었다.
텍사스 홀덤 포커에서 투 페어가 나올 확률에 이런저런 연산을 추가할 무렵,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휴즈가 문득 한숨을 섞어 속삭였다.
“후우……! 항공기 공학자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넘어, 갑자기 내 지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데…… 지금 자네가 적고 있는 숫자들을 이해 못 하는 게 정상인 건가, 아이스맨?”
“일본어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워드.”
선우진은 숫자들 사이에 빼곡하게 적힌 일본어와 한자를 짚으며,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게다가 이 수식은 피에르가 주식 투자를 위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어서, 기존의 그 어떤 공식과도 다르다네.”
이 적극적인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의 비밀을 온전히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보여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계산을 끝냈습니다, 록펠러 씨.”
9분 30초가 지났을 때, 선우진은 98퍼센트라는 숫자에 두 줄을 쫙쫙 그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첫 번째 게임이어서 아직은 오답을 낼 확률도 2퍼센트 정도 존재합니다. 그래 봐야 겨우 백만 달러를 날리는 것이니까, 별 타격은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번 조합까지 자료로 삼을 수 있다면, 다음부터는 더 정확한 계산이 가능해지겠지요.”
“공연히 시간 끌지 말고 숫자만 대게.”
록펠러가 차갑게 대꾸했다. 모건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딱히 귀담아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좋습니다.”
여러 수식과 메모가 적힌 서류를 보란 듯이 내려놓은 선우진이, 만년필로 숫자 세 개를 적었다.
“우리의 결론은 록펠러 씨, 당신이 98퍼센트의 확률로 하락, 하락, 하락을 골랐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시범으로 보여주었던 조합과 무관한 숫자여야 한다는 논리적 계산과, 우리의 몰락을 원하는 당신의 욕망이 반영된 조합이지요.”
선우진은 2, 2, 2라고 쓴 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장황하게 이유를 끌어다 붙였다. 그 순간, 록펠러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