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시검지약(試劍之約)의 사정
먼 곳으로 사라져 가는 북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방소백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곧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바닥에 쓰러졌다.
악홍설이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백 누님……. 괘, 괜찮으신가요?"
방소백이 크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괜찮다. 방금 강제로 마취약 기운을 억눌렀더니 현기가 조금 요동치는 것뿐이다. 너, 방금 그 사람과 원래 아는 사이였니?"
그녀의 물음을 들은 악홍설이 저녁에 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이 내일과 모레의 식사를 제3 학원 죽원으로 배달해 달라고 했다고?"
방소백은 무언가 짐작이 되었다.
악홍설이 그녀를 부축해 걸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방금 그 형님은 예의도 바르고 아주 점잖은 분이셨어요. 저한테 동전 한 냥도 용돈으로 주셨는걸요?"
"제3 학원에는 별채가 여러 개 있다. 모두 지위가 있거나 대단한 인물들만 그곳에서 살 수 있지. 보아하니 4, 50세 정도의 인물일 듯한데…….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구나.
됐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 같은 방파 인물들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일 것이다."
방소백이 자조하듯 말했다.
"설아, 너는 내가 방금 그 사람에게 너무 차갑게 대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악홍설은 침묵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방소백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사람이 너무 물러서 탈이다. 아직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나는 방파에서 생활하며 네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위험한 일을 겪어왔다. 이 세계에서 같은 혈족끼리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이익을 위해 우정을 저버리는 등의 무정한 일들은 무수히도 많이 일어난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겉으로는 의롭게 보여도 잠시 눈을 돌리면 악독한 사람으로 변해있더구나. 배신을 당하고 시체가 되어 길거리에 내버려진 사람도 무수히 봐왔지. 다행히 방금 그 사람에게 악의가 없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네……. 하지만 소백 누님, 저는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은 어떨 때는……."
악홍설이 해명하듯 말했다.
"시끄럽다!"
방소백이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악홍설은 풀이 죽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소백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악홍설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백옥단속고(白玉斷續膏)다. 가져가거라. 이거라면 네 누나의 팔도 금세 회복할 수 있을 거다."
약을 받아든 악홍설이 자책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약만 아니었다면…… 소백 누님과 대장(大壯) 형님께서 천리행 상회 놈들에게 매복을 당해 다치실 일도 없었을 텐데……. 모든 게 저 때문에……."
"그런 말 하지 말거라."
방소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믿지 않는 것은 외인들과 모르는 사람들이다. 앞으로 너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는 우리 질풍 형제단의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질풍 형제단의 일원이지. 모두 가난하고 힘들게 자라온 아이들이다. 우리는 서로 더욱 도우며 살아야 한다. 우리끼리 서로 돕지 않는 다면 누가 우리를 돕겠느냐?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 물정 모르는 고관 나리들? 그들은 절대로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자, 어서 이 약을 가지고 돌아가거라. 나는 대장을 데리고 요상을 하러 가겠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방소백의 상태가 호전되자 서로 나뉘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수업이 시작되고 북진은 2학년 9반 교실에서 모두의 환영과 함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반장 윤역 등이 환호를 지르며 자신들의 영웅을 축하해 주었다.
북진은 제3 학원에서 수십 년 만에 탄생한 2학년 교양쟁패전 본선 진출자였다.
그렇기에 이제 학원에서 2학년뿐만 아니라 3학년까지 아우르는 우상이 되어있었다.
이번 해에 제3 학원 전체에서는 총 4명의 학생이 본선에 진출했다.
1학년의 천재 흑마(黑馬), 2학년의 북진, 악홍향, 3학년의 천재 한불부가 그 주인공이었다.
금년도 학생들의 성적은 가히 기록이라 할 만했다.
특히 북진이 선발전에서 2위를 기록한 것은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현기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북진은 실망과 함께 걱정이 몰려왔다.
왜냐하면 수업하는 교사가 정삼석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께 분명 무슨 일이 생겼구나. 도대체 어디에 가신 것이지?'
고민하던 북진은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에 빠졌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북진에게 할 말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북진은 학년 주임 초흔이 있는 교무실로 찾아갔다.
"응? 정삼석 교사? 폐관에 들어갔단다."
초흔이 말했다.
"폐관이요?"
북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갑자기 폐관을 하신 겁니까?"
초흔이 대답했다.
"과거의 상대 하나가 운몽성에 찾아와 정 교사와 결투를 할 예정이란다. 때문에 잠시 동안 폐관 수련에 들어갔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결투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결투? 그런 일이 있었다니!'
북진이 크게 놀랐다.
"무슨 결투인데요?"
북진이 물었다.
방소백 등과 다른 방파의 투쟁의 경우 북진은 아무런 부담감 없이 수수방관할 것이었다.
하지만 정삼석의 결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8일 후에 시검지약(試劍之約)이 있을 것이다."
초흔이 말했다.
'8일 후? 너무 빠른데?'
북진이 말했다.
"상대가 대체 누구입니까? 정 선생님의 승산은 큰가요?"
초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승산이라……. 말하기 어렵구나. 정 교사의 상대는 백운성에서 온 삼대 명검사 중 하나인 백해금이다. 저번 시검지약에서는 정 교사가 패배했지."
'백운성? 북해제국의 3대 검도성지 중 하나?'
초흔의 말을 들은 북진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쉽지 않은 상대인 듯했다.
"이것을 봐 보거라."
초흔이 선홍색 두루마리를 하나 건네주었다.
북진이 그것을 받아들고 펼쳐보니 하나의 초대장임을 알 수 있었다.
보름날 밤 성 관부에 와서 시검지약에 참석해 관전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에는 두 줄의 문장도 쓰여있었다.
십오지야(十五之夜), 월화만천(月華滿天).
관부지전(官府之巓), 일검통현(一劍通玄).
마치 검날로 종이 위에 휘갈겨 쓴 듯, 날카롭고 기개가 담긴 필체로 쓰인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읽던 북진은 순간 날카로운 검날이 자신의 미간을 겨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 초대장은 백해금의 수제자 조파천이 쓴 것이다. 그 안에는 그가 가진 검술의 이해가 담겨있지."
초흔이 말했다.
말을 마친 초흔이 몇 마디 더 설명해주었다.
"조파천은 예전에 정 교사의 제자였다. 그 출신 성분이 매우 미천해서 학원에 다닐 기회조차 없었던 아이였지. 정 교사는 그런 그를 발굴해 내 성심을 다해 가르쳤고, 그는 곧 운몽성의 천재가 되었지.
하지만 아쉽게도 저번 시검지약에서 자신의 사문을 배신하고 백운성 3대 명검사 중 하나인 백해금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번에 그도 함께 운몽성에 왔지."
'조파천?'
사문을 배신한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행위임이 틀림없었다.
조파천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정교사를 배신하고도 백운성의 삼대 명검사 중 한 명의 사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 재능이 있다는 소리였다.
"초 주임님, 저도 시검지약에 참가해 대결을 보고 싶습니다. 견식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한데, 저를 데리고 참석해 주시면 안 될까요?"
북진이 말했다.
어쩌면 시검지약의 날에 미약하게나마 정삼석에게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초흔이 고개를 저으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 힘들 것 같구나. 시검지약은 총 36장의 초대장을 보낼 뿐이다. 그중 12장은 성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귀족들에게 보내지고, 또 12장은 성 안에 있는 유명한 검도의 대사(大師)들에게 보내진단다. 그리고 나머지 12장은 성 안에서 가장 뛰어난 소년 검도천재들에게 보내지는데, 각 초대장은 모두 단 한 사람만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내가 올해 초대장을 받게 된 것도 나로서는 의외였다. 하지만 나도 너를 데리고 가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전후 사정을 듣게 된 북진은 방법이 없다는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정 선생님께서는 어디서 폐관을 하고 계신가요? 한번 찾아뵙고 싶습니다."
북진이 말했다.
그러자 초흔이 대답했다.
"정 교사가 들어간 곳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사관(死關)이다. 네가 가더라도 그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네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 정 교사의 주의를 흩뜨려 뜨려서는 안 된다."
그의 말을 들은 북진은 마음 한구석에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북진은 초흔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삼석에게는 빚진 것이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그나저나 한 달 뒤에 있을 교양쟁패전 본선을 준비하기 위해 교육위원회에서 우리 운몽성의 후보인 네 학생을 위해 특별훈련을 진행할 계획이란다. 특별훈련은 열흘 뒤에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특별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후보학생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무공과 자원뿐만이 아니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해 제출할 수 있다. 그러면 교육위원회에서 최대한 학생들의 바람대로 준비를 해 줄 것이다."
초흔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북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는 지금 정신력을 수련할 수 있는 무공이 필요합니다."
"정신력? 네가 지금 정신력을 수련하고 있다는 말이냐?"
초흔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초흔에게는 매우 좋은 소식이었다.
정신력을 수련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정신력을 수련한 무사의 전투는 그렇지 않은 무사와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북진이 말했다.
"훈련 영지에 있을 때 임진을 통해 정신력의 이해 기초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수련하며 작은 성과를 거두었지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정신력을 시전하고 이용하는 것은 아직 어려운 일이라 그와 관련된 무공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북진은 정신력을 수련한 것이 숨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북진의 말을 들은 초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북진과 운몽성 제일의 천재 임진 사이에 있었던 일은 초흔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간 상황이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초흔이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두 소년 소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정신력과 관련된 무공은 우리 학원의 숨겨진 도서관 안에 몇 가지 있을 것이다. 직접 가서 골라보도록 하거라."
말을 마친 초흔이 품 안에서 작은 은색 영패를 건네주었다.
"이것은 학원 도서관을 드나들 수 있는 통행 영패다. 아, 이렇게 하도록 하자. 이것을 가지고 8반의 악홍향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함께 스스로에게 적합한 무공을 고르도록 해라. 한 사람당 비서 3권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너무 욕심부리는 것은 좋지 않다."
"감사합니다. 주임 선생님!"
크게 기뻐한 북진이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