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한 수를 못 받아내는구나
"그럼 도대체 누가 네 남자친구란 말이냐?"
임오가 물었다.
그때,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란의가 답을 내주었다.
"임북진."
"임북진? 그게 어느 집안의 천재죠?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임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임북진'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아는 천재 중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임오가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크게 당황하며 말했다.
"설마……. 전천후 가문의 그 임북진은 아니지요?"
진란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진아가 왜 여기에 갇히게 되었는지 너도 알겠구나."
임오가 임진을 바라보았다.
임진은 매우 당당하다는 태도였다.
"맞아요. 바로 그가 제 남자친구예요. 오라버니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임오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임진을 향해 엄지를 척 세웠다.
"진아야 남자친구를 고르는 네 안목은……. 이 오라버니도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너도 네가 요물이란 것을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까 봐 망나니 녀석을 고른 것이냐?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아! 알겠다! 천진난만한 많은 소녀들을 위해 네가 대신 벼락을 맞아주기로 한 것이구나!"
그의 말을 들은 임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라버니, 제가 마음에 품은 남자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마세요."
"……."
임오는 문득 무언가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잃게 된 것만 같은 상실감이 들었다.
심지어 여동생의 마음을 빼앗아 간 그 망나니 녀석을 베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들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 그 망나……. 아니 임북진이란 녀석을 멀리서 본 적은 있다. 사실 그 녀석의 얼굴은 오절공자와 비교해도 오히려 더 뛰어날 정도로 매우 잘생겼지. 하지만 녀석에겐 오절공자와 같은 뛰어난 기질은 없는데…….
진아야. 너는 도대체 그 녀석의 어디에 반한 것이냐?"
임오의 말을 들은 임진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흥! 그래서 오라버니가 여자 친구가 없는 거예요.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나요?"
임진의 말을 들은 임오는 순간 날카로운 비수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라버니,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저를 이곳에서 내보내 주세요!"
임진이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은 삼 년에 한 번만 열리는 시검지약의 밤이에요. 지금 관내 뒤뜰에서 행사가 열리고 있다고요. 저도 가서 시검지약을 보고 싶어요! 임북진도 그곳에 있다고요!
그리고 운몽성에서 제일 유명한 소녀 검객인 제가 빠져있는데, 그게 정말 천재들이 운집한다는 시검지약이라 할 수 있겠어요?"
임오가 임진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
임오가 고개를 돌려 진란의에게 말했다.
"이모님, 이 일은 저에게 맡겨주시죠. 그만 진아를 풀어주세요. 진아는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 만약 진아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제가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진란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동의했다.
임오가 임진과 대화할 때 약간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여동생 앞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임오는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가족 앞에서만 그런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의 앞이었다면?
그들이 마주하게 될 임오는 탁월한 실력과 냉정함을 겸비한 철혈의 군인이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봉인이 풀리자 임진이 밖으로 달려 나와 임오를 끌어안았다.
"자! 가요, 오라버니. 가서 상황이 어떤지 봐요."
그런 임진을 바라보던 임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옷을 좀 갈아입고 변장을 좀 하거라. 그렇지 않고 뒤뜰에 갔다가 어머니, 아버지께 발각되면 다시 너를 가둘지도 모르잖니. 그렇게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임진이 귀여운 표정으로 혀를 내밀며 말했다.
"그렇긴 하네요."
잠시 후.
임진은 남자 옷을 입고 영준한 소년의 모습으로 변장을 했다.
임오 또한 자신의 신분이 주목을 받지 않게 간단하게 변장을 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뒤뜰로 향했다.
두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람이 정말 많이 왔구나."
임오가 현장을 살펴보다 조파천, 동방전, 혈염 등을 알아보았다.
북해제국의 북방의 전선을 책임지는 제일의 정예부대 용양(龍驤) 부대.
그곳의 천재 대장인 임오였다.
그는 풍어행도에서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천재들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정보력은 극광제국의 간첩 조직인 '흑룡대(黑龍臺)'의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임북진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임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있어요."
임진이 가장 먼저 북진을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임오가 고개를 돌리고 임진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을 때…….
북진은 탁자 위에 엎드려서 곯아떨어진 주정뱅이의 모습이었다.
임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임진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임오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농담한 것이 아니라 정말 저 녀석에게 빠져있는 것인가?'
바로 그때.
"시간 종료!"
해 노인이 소리쳤다.
앞서 피워놓았던 향이 완전히 타서 불이 꺼진 상태였다.
소년, 소녀들은 각자 들고 있던 '제수검법'의 교본을 덮고 다시 탁자 위로 가져다 놓았다.
교본을 다시 돌려다 놓은 백금운은 재빨리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고 그때까지 잠에 빠져있던 북진의 머리 위로 술을 뿌렸다.
북진은 그제서야 잠이 덜 깬 듯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비가 오나?"
"비는 무슨 비에요!"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을 짓던 백금운이 말했다.
"시간이 다 됐어요! 선배님이 물구나무를 설 차례라고요!"
북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바탕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벌써 시간이 다 된 거야? 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시간이 종료되고 소년 소녀들이 중앙으로 향했다.
그런 북진을 바라보던 임오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응? 임북진 저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위기가 달라졌잖아?'
1년 전.
임오가 처음 북진을 보았을 때.
그때의 북진은 그야말로 오만방자하게 날뛰는 망나니 같은 녀석이었다.
몸에서 무공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정신도 멀쩡하지 않아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북진은 정신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기혈 또한 왕성했으며, 어딘가 날카로우면서도 비범한 기세가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천재 소년이나 보일 법한 분위기였다.
중요한 것은 북진의 외모가 정말로 수려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도도한 진아가 마음이 흔들릴 만하구나. 근데, 고작 1년 만에 한 사람의 기세가 저리도 달라질 수 있나? 설마 진정한 고난을 겪으며 성장한 것일까?'
임오는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천재성이 드러난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전천후의 가문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뒤 북진이 정신을 차렸나 했다.
현재의 북진을 바라보는 임오가 느끼는 것은 북진의 변화가 의외라는 것이었다.
임오는 북진에게 흥미를 느껴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기로 했다.
"자! 모두 앞으로 나와 제비를 뽑아 대련의 순서를 정하거라."
해 노인이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20개의 번호가 적힌 제비가 들어있었다.
소년, 소녀들이 앞으로 나가 제비를 뽑았다.
북진이 뽑은 것은 4번이었다.
인원이 총 20명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대련하고 승자는 위로 올라가고 패자는 탈락하는 방식이었다.
대련은 시검지약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순서였다.
제비의 순서대로라면 가장 먼저 대련에 임하는 것은 파대취라 불리는 뚱뚱한 소년과 택성(澤城) 출신의 천재 류연위였다.
"류 학우, 잘 부탁하오."
파대취가 입안에 육포를 머금은 채로 자신의 '식검(食劍)'이라 불리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의 이름도 주인을 따라가는 듯했다.
파대취가 추구하는 의지는 단 한 글자로 설명이 가능했다.
식(食).
식검의 모양은 매우 독특했다.
검신은 손가락 굵기 정도로 얇았지만, 길이는 족히 다섯 척은 될 듯했다.
그의 검은 연검이었다.
검날이 매우 부드러워 마치 채찍을 연상하게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검날 위에는 역린과 같은 작은 가시들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담황색 구렁이의 형상을 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구렁이는 식탐이 강했다.
자신보다 체구가 몇 배는 큰 생물들을 사냥해 통째로 집어삼키는 습성이 있었다.
때문에, 그의 검에 '식검'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잘 부탁합니다."
류연위의 손에 들린 검은 흑색의 검신에 금빛 검 날을 가진 얇은 검이었다.
마치 검은 밤하늘에 금빛별이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검의 이름은 월성(月星)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사를 한 뒤 동시에 출수했다.
시전하는 검술은 두 사람 모두 '제수검법'이었다.
동일한 검법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손에서 각자의 깨달음대로 펼쳐지고, 각기 다른 느낌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각자의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천재 소년 검객이었다.
성격이 다르기는 했지만, 향 하나가 타는 동안 21개의 동작으로 이루어진 '제수검법'에 대한 깨달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승부는 빠르게 결정되었다.
파대취의 식검이 '수엄팔황(水淹八荒)'의 초식을 펼치자 곧 류연위의 목을 감싸버렸다.
그렇게 파대취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헤헤, 류 학우 양보해주어 고맙소."
파대취가 검을 거두자마자 또다시 말린 과일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끊임없이 간식을 먹는 파대취에 모습에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다.
'……단 한 순간도 먹는 것을 쉬는 법이 없는 녀석이로군.'
다음 순서는 노풍과 경림(琼林)의 대련이었다.
일남일녀의 천재 두 사람이 대련을 펼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대련은 소녀 검객인 경림의 승리로 대결이 막을 내렸다.
그 뒤에도 두 번의 대련이 더 펼쳐졌다.
승리를 거둔 것은 송결일과 명낙천이었다.
다섯 번째 대전 순서가 찾아왔다.
드디어 백금운이 출전했다.
공교롭게도 백금운의 상대는 조파천이었다.
그리고 대전의 결과는 이변 없이 조파천의 승리였다.
조파천은 단 하나의 초식 '천산우수(天山雨水)'만을 펼쳐 백금운을 멀리 날려 보냈다.
날아간 백금운은 선혈을 토해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멀리 날려가 북진의 옆에 있는 돌기둥에 박혔다.
"단 한 수를 못 받아내는구나."
조파천이 담담히 미소를 지은 뒤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대전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놀라서 감탄을 내뱉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격차는 매우 컸다.
다른 소년, 소녀들은 조파천을 바라보며 허탈하고 두려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리에 있던 선배 검객들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