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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공에게 덕질당하는 중입니다-35화 (35/159)

<35화>

웃지 않고 싸늘한 시선으로 사용인들을 쏘아보는 것만으로도 가볍고 귀여웠던 분위기가 싹 사라졌다.

어쩐지 함부로 입을 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다들 가만히 서서 아이만 바라보고 있을 때.

“모 하냐고 물어써.”

아이가 재차 말했다.

그제야 입이 녹은 것처럼, 사람들이 동시에 말을 뱉어 냈다.

“그으, 별것 아닙니다.”

“그냥 내일 할 일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어요!”

“네! 곧 저택에 손님들이 많아질 테니까!”

하지만 그 아우성치는 듯한 목소리도,

“내가 바분 줄 아라?”

아이가 딱 한마디를 하자 좌초된 배처럼 가라앉아 버렸다.

아이는 사용인들을 노려보더니 홱 뒤를 돌았다.

그대로 떠나는 건가 싶었던 아이는 클로드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더니, 턱 손을 잡았다.

클로드는 말리지도 못하고 아이가 이끄는 대로 끌려 나와 복도 중앙에 섰다.

“저, 전하?”

“어떻게 거기에…….”

그제야 클로드를 발견한 사람들이 헉, 소리를 냈다. 일의 전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이는 주변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았다.

클로드를 복도 중앙에 세워 둔 아이가, 클로드 옆에 나란히 서서 팔짱을 꼈다.

“저나한테 사과해.”

이유가 어떻든 자신의 행실을 뒤집고, 잘못을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지금은 아랫사람이, 공작가 손님의 뒷말을 하다 걸린 상황.

섣부른 인정으로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머뭇거리면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시로? 구럼 아빠한테 가까?”

확 일러 버리겠단 말이었다.

그제야 사용인들이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짧은 식견으로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하지만 사과를 하는 것은 입뿐이었다. 게다가 사과도 대상인 클로드가 아니라 아이를 보고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억지 사과였다. 대번에 아이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지금 구거또 사과라고 하는 고,”

“나는 괜찮다.”

클로드는 나서려는 아이의 어깨를 슬며시 잡았다.

황성에서 몇 번이고 저런 인간 군상을 봐 왔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억지 사과나, 입바른 말은 할 수 있어도 절대 진심으로 미안해하진 않을 사람들.

그들이 억지 사과를 한 건, 아이가 롤케이드 공작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이가 ‘제대로 사과해라’고 주문을 넣으면, 그들은 따를 거다.

‘하지만 속으론 반발하겠지. 서운해할 거고.’

자신들의 반감이나 본성을 아이에게 내비칠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인간의 밑바닥을 알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나 어린아이가?

클로드는 속으로 질문했고,

‘아니.’

답을 내린 지금.

“모두 물러가도록.”

이 상황을 종결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사용인들은 아이의 눈치를 보다가, 클로드가 재촉하자 허둥지둥 복도를 떠났다.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에서, 클로드의 신분이 괜찮은 명분이 될 수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엘리샤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사용인들이 떠나는 걸 노려보았다.

그렇게 마지막 발소리가 멎은 뒤.

“진짜 갠차나오?”

엘리샤가 물었다.

“안 괜찮을 리가.”

클로드는 흐릿하게 웃었다.

“애초에 틀린 말도 아니잖아.”

“저나.”

“나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옆 사람을 다치게 하는 민폐 덩어리에.”

그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분노를 담았던 감정은, 빈 허공도, 등 뒤의 벽도 아닌 자신의 허벅지 위에 톡 떨어졌다.

“나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나약해 빠진 놈이니까.”

사실은 그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강하지 않다면, 잘될 거라는 희망이라도 품고 싶었다.

그런 믿음이라도 있어야, 바닥에 발을 딛고 견딜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믿음이 현실을 덮어 주진 못했다.

자신은 여전히 검 그림자만 봐도 덜덜 떠는 애송이이며, 뒷배 하나 없는 무력한 황자였다.

지금은 살아 있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일을 맞이한다 해도, 그보다 먼 미래는 또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클로드는 자신이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똑바로 가고는 있는 건지, 아니 애초에 출구는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미로를.

클로드는 조금 지쳤다.

그는 복도에 되는 대로 주저앉았다. 긴 한숨을 나오는 대로 뱉은 그가 희멀거니 죽은 눈으로 아이를 응시했다.

생기 있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생을 살아온 아이를 보자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너는 몰라.”

어느 정도는 심술이었다.

정치. 미래. 가능성. 이해득실.

세상을 흐르게 하는 법칙을 잘 모를 네가, 나를 속속들이 알고 난 뒤에도 내 곁에 있어 줄까, 하는.

클로드는 자신이 태어난 뒤부터 겪었던 일을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짧지 않은 이야기를, 아이는 가만히 서서 들어 주었다.

“……여기까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려 아이를 보았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혹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거기에 혼란스러워질 때.

“구런대도.”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저나는 살아남앗내오.”

복도 저 끝에서 이 앞까지.

클로드의 생을 훑듯 천천히 걸어오던 아이가, 클로드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저나가 잘못 안 개 이써오.”

“…….”

“살아남운 사람들은, 강해서 살아남운 게 아니애오.”

작게 웃는 소리가 가슴을 톡톡 두드려 왔다.

“살아남앗기애 강해진 거죠.”

그리고 쌓이는 건 밀어내려 했던 희망이었다.

“물론 저나는 저나가 바라는 만쿰 강하진 안케찌만.”

가슴이 술렁였다.

이 아이의 말을 믿고 싶어서.

“저나를 개롭히는 사람들을 이기면소 살아남앗어오. 구만쿰 강해진 거라구오.”

달콤한 유혹에 눈을 감으면 분명 편해질 것이다.

신기루를 쫓으며,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면 퍽 아름다워 보이겠지.

하지만.

“하지만 계속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잖아.

클로드는 말하다가 흠칫했다.

만날 땅이나 파는 자신이 지겨워지진 않았나 싶어서.

“마자오. 몰라오.”

그때 아이가 클로드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리더니, 그대로 손깍지를 껴 왔다.

“구러니까-.”

작은 압력만큼 전해진 체온이 기어이 마음을 흔들어 대고,

“딱, 오늘 하루를 이길 만쿰만 강해져소,”

크게 홉뜬 눈에 한가득 아이가 들어왔다.

“내일 하루만 더 살아오.”

먼 미래는 누구도 속단할 수 없다.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을지, 살아남기는 할지.

검을 들게 될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네가 있는 하루를 더 사는 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래.”

대답하고야 알았다.

애초에 반짝였던 건.

‘머리핀 같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너였다는 걸.

* * *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용인들이 클로드를 물어뜯고 있는 게.

심지어 그 장소는 사용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복도였다.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그래도 클로드는 황족이었다.

반면 사용인들은 대체로 평민. 상하를 엄격히 나누는 신분 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하극상이었다.

‘아무리 조심성이 없어도 그렇지.’

나는 공작가에 들어온 사용인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분명 뭔가 있어.’

이럴 때 만만한 건 메리였다.

메리는 복도를 자루걸레로 닦고 있었다.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게 꽤 바빠 보였는데, 그래도 내가 묻는 말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 사람들이라면, 최근에 새로 뽑힌 사람들일 거예요.”

“그치만 이미 일하는 언니들 만차나?”

“……그러게 말이에요.”

메리는 투덜거렸다.

‘하긴 메리도 달갑지 않겠지?’

승급 시험은 같은 직급끼리 이뤄진다. 즉 수습 사용인들이 늘어나는 건 메리 입장에선 경쟁자만 생기는 셈이다.

물론 다른 사용인들이라면 조금이라도 공작가에 오래 일한 자신이 유리하다 생각하겠지만…….

메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손놀림이 어설펐다. 본인도 알고 있기에 신입들을 경계하는 것일 터다.

‘그럼 메리를 위해 조금 힘을 써 봐?’

메리는 다른 쪽으로 유용한 사람이었으니까.

다행히 내가 따로 나설 필요는 없었다.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다음 날.

갑자기 집사가 불러서 간 응접실엔, 공작가 일원들에 클로드는 물론 사용인들도 여럿 모여 있었다.

양손을 모으고 선 사용인들은 퍽 공손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들을 알아보았다. 어제 클로드 뒷말을 신나게 하셨던 그 면상들이 그대로 있었다.

“이 사람들운…….”

“아빠가 우리 딸 화나게 한 사람을 가만히 둘 리가 없잖니.”

앗. 이상한 선물을 안겨 줬던 얼굴이 오늘따라 듬직해 보였다.

“특별히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니?”

물론 있었다.

“저 사람둘.”

나는 손날로 사용인들 위를 쓱 그었다.

“다 짤라 주새오.”

“아, 아가씨!”

“잘못했습니다!”

“저, 저희는 아가씨를 위해서 그런 거였어요!”

그 와중에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클로드 때문에 다칠 뻔했으니까.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나를 위해소 한 일이묜 머든 다 해도 대?”

의도가 좋았다고 다 좋은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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