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한참의 침묵 후.
공작이 복잡미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 보았다.
그래도 그는 잡은 손을 떼 주었다.
혼자 걷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첫걸음마를 허락하는 부모처럼, 마지못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그는 나를 다시 붙잡거나, 안전한 곳으로 걷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그래.”
그저,
“다녀오렴, 엘리샤.”
말해 주고,
“아빠는 이 자리에서 기다릴 테니까.”
믿어 주었다.
많은 부모들이 결국 아이의 손을 놓았듯이,
그렇게.
* * *
메리는 내가 자신을 위해 무릎을 굽혀 상황을 해결할 모양이라 생각했지만, 천만에.
나는 로이에게 사과를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 척을 할 생각이라면 또 모를까.’
속여야 할 사람은 람튼 한 명.
주연 배우는 나와 로이였다.
람튼이 밖에 나와 있는 사이, 나는 로이를 잘 설득(?)해 입을 맞출 생각이었다.
내가 로이에게 용서를 받아, 사건을 종결한 것으로 말이다.
단,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대화가 이뤄지는 동안 람튼을 밖에 잡아 둘 사람이 필요했다.
“부탁해도 될까, 메리?”
나는 이 역할을 메리에게 맡겼다.
물론 메리 혼자로는 무리가 있어서, 도우미를 불렀다.
“정말…… 건국제 때 저를 데려가 주시는 건가요?”
하녀 세라였다.
세라는 야무진 솜씨의 소유자였지만, 주방의 배속된 몸이었기에 주인 일가를 따라가는 서포터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아서일까? 세라의 황성에 대한 선망은 메리 못지않았다.
“당연하지. 혹시 내가 못 미더워? 문서로 남겨 줘?”
“아, 아니에요, 아가씨! 할게요.”
세라는 연기력도 좋았다.
“저어, 람튼 경. 죄송한데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 혼자 옮기려니 짐이 좀 많아서…….”
세라는 식상하지만 잘 먹히는 클리셰 중 하나인 ‘짐 같이 옮겨 주기’로 람튼의 시간을 앗았다.
“저런. 어쩌다 이 야심한 시각에……. 아, 집사님께서 시키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내 도와 드리리다.”
기사도로 다져진 람튼은 약자의 부탁을 무시하지 못했다.
나는 두 사람이 창고로 향하는 걸 보면서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로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속눈썹을 자르르 떨더니 눈물을 만들었다.
배우를 했으면 대성할 재능으로 로이가 한 일은,
“제 말이 주제넘게 들리셨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전 그저 두 분이 부러워서 그랬을 뿐이에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신분으로 찍어눌리는 기분이 어떤 건지 잘 아니까!”
다짜고짜 나를 모함하는 것이었다.
바로 피해자 연기에 돌입한 걸로 보아, 로이는 람튼이 곧바로 돌아와 이 상황을 목격할 거라 생각한 듯했다.
누가 봐도 내가 가해자로 보이는 상황.
하지만 나는 로이가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었다. 그 격차가, 내게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의원님께서 그러셨어요. 저는 원래 위장이 약하다고요. 설사약이 조금만 더 들어 있었다면 큰일 났을지도 모른대요.”
“…….”
“그런데 어떻게, 제게 이런 일을 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으실 수가 있나요! 대체 저는 왜 찾아오신 건가요? 혹 저를 비웃으시러 오신 거라면-,”
“맞아.”
설마 긍정할 줄은 몰랐던 듯, 로이가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그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모습이 같잖아서 비웃으러 온 거야.”
“!”
“너 같은 건 평생 산골 마을에 처박혀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거든.”
“……어, 어떻게.”
로이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양 손바닥으로 제 하관을 덮었다.
더 정확히는, ‘너 잘 걸렸다’는 생각으로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매를.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나요!”
“솔직히, 수작질 부린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하지만 람튼은 오지 않는다.
알기에, 나는 대놓고 짝다리를 짚으며 조소를 흘렸다.
“아니면, 내가 네 속셈도 간파하지 못할 줄 알았어?”
공작의 방에서 이곳까지. 적지 않은 거리를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로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저도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았으면, 매 해마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서 살았을 것 아니에요. 큰 저택에서, 도련님 소리 들으면서.]
바라보자,
[그러고 보니 제 아버지께선 원래 백작이셨다면서요?]
보였다.
“네가 바라는 건 람튼 아저씨의 작위 복원이지?”
그리고 처음으로.
로이가 동요했다.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대놓고 시비를 걸고, 속을 보이더라니.’
그 모든 것이 작전이었던 모양이었다.
로이는 내가 화를 내거나 억울해하는 반응을 보일수록 신이 났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공작가가 자신에게 사과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로이의 계획이었을 테니까.
언론 플레이용 슬로건도 생각해 뒀을 거다.
대충, ‘람튼 부자 덕분에 목숨을 건진 롤케이드 공녀가, 은혜도 모르고 람튼 영식을 시기하고 괴롭혔다더라’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분위기가 조성되면, 공작은 사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람튼에게 머리를 숙일 터.
그때 로이 람튼이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공작은 거부할 수 없다. 람튼의 뒤에는 압도적인 민심이 있고, 로이의 청을 거절할 시 그 민심이 나를 공격할 테니까.
또 람튼에게 백작령을 쥐여 주는 게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람튼 부자를 백작령으로 내려보내면, 나와 로이 사이에 일었던 분란도 종식될 터이니.
이후 로이는 백작이 된 아버지 아래에서 순조롭게 영식으로 살다가, 백작위를 물려받는다.
람튼 본인이 계속 방랑 기사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괜찮은 계책이었다.
일이 그렇게 흘러가면, 공작은 강제로라도 람튼을 백작령으로 내려보낼 거고. 람튼 역시 거절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게 뭐 어때서요?”
잠깐 사이.
로이는 평정을 되찾은 듯했다. 그가 나처럼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백작령은 어차피 아버지의 것이었어요. 아버지의 것을 다시 되찾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물론 나쁜 건 아니지.”
나도 람튼이 다시 백작이 되는 건 찬성이었다.
람튼 백작령은 북부의 요충지 중 한 곳이었으니까.
그런 곳을, 람튼이 지켜 준다면 공작 입장에서도 매우 든든할 것이다.
“단, 그걸 네가 물려받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지만.”
“저는 정당한 상속법에 따라, 권리가-.”
“없잖아?”
나는 로이의 말꼬리를 잔인하게 잘랐다.
“너는 가짜니까.”
“!”
“식사 시간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네 얼굴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얼굴이 아니었거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당했다는 듯, 로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왜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했을까. 아들과 아버지의 식성이 다를 수도 있는데 말이야.”
심지어 로이는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유년기를 보냈다. 먹고 자란 음식이 다를 것이므로 식성 역시 판이해야 할 터인데.
로이는 아버지와 같은 식성을 가진 척 연기했다.
[그래서 한눈에 알아봤지. 쟤는 내 아들일 수밖에 없겠다고 말이야.]
람튼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다.
그래서 알았다.
“너는 진짜를 만난 적이 있었던 거야.”
“!”
“네가 흉내 낸 식성은, 진짜의 식성이었던 거지.”
로이, 아니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소년이 나를 바라보았다.
가장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들킨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아이로 변모했다.
거칠게 메마른 입술을 떨고, 손톱 끝을 물어뜯으면서도 소년은 상황을 무마하려 애썼다.
“거, 거짓,”
“증언을 받았어.”
하지만 겨우 짜낸 용기는 내 말 앞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람튼의 설명을 토대로, 로이의 계획을 추정하자 한 가지 보이는 게 있었다.
이 일의 공모자가 많다는 것.
람튼에게 직접 거짓말을 한 노부부는 물론, 마을 사람 모두가 공범이었다.
그런데 이런 집단형 범죄엔 중요한 특성이 있었다.
집단성으로 일을 저지른 만큼 죄책감도 책임감도 없어서, 죄의 무게를 안기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백과 내부 고발이 일어나곤 했다.
다시 말해,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기에 최적인 곳이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은 네가 귀족이 되는 게 싫었나 봐.”
로이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반박하지 않는 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너를 이해해. 귀족이 되고 싶었겠지.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살고 싶었겠지. 아래에서 보는 위는 너무나 눈부시고, 밝은 곳이니까. 그 빛을 쬐고 싶었을 거야.”
선망은 나쁘지 않다.
갈망 역시 나쁘지 않다.
인간은 욕망으로 세상이란 바다를 노질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니까.
하지만.
“네 욕망이 범죄를 정당화해 주는 건 아니야.”
“…….”
“너는 귀족이 될 수 없어.”
소년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뿐.
반박할 기운도 없는지, 바닥만 내려 보았다.
“내가 아저씨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야.”
“…….”
“첫째. 아저씨께서 받을 충격이 어마어마하실 테니까. 너도 알겠지만, 아저씨께선 네가 친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잖아?”
소년이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아서 나는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째. 네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야.”
물론 나도 안다. 이 몸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다는 거 정도는.
“귀족 사칭은 사형까지 갈 수 있는 중죄야.”
하지만 어린 나이에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소년을 바로 처형대에 세워야 할까?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기회를 줄게.”
나는 그에게 마지막 관용을 베풀어 주고 싶었다.
“앞으로 일주일.”
물론 저 시간이 기회가 될지, 카운트다운이 될지는 본인이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