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두근거리는 열망이 가슴 끝에서 피어올랐을 때.
끼익-. 덜컹.
마차가 크게 움직였다.
“억?”
로웨나가 흠칫하자, 니나가 그녀를 살짝 잡아 주며 말했다.
“자, 도착했답니다.”
어느새 자신의 타운하우스 앞이었다.
그제야 로웨나는 자신이 타고 온 마차가 누구의 것인지 자각했다.
“가,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니나는 로웨나를 저택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어쨌든, 그런 놈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
“그, 글쎄요…….”
제가 그를 잊을 수 있을까요.
로웨나가 말을 흐리자, 니나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중을 파악하고 싶은 것처럼.
“사, 사실 자작님이 부러워요. 자작님이시라면, 그런 놈 가볍게 잊고 지나가실 것 같아서……. 어, 어머니께서도 늘 그러셨거든요. 자작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서신 분이라고. 그래서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분이시라고.”
“저런. 부인께서 절 너무 높이 띄워 주셨네요.”
“……네?”
“저는 자유로운 게 아니에요. 내려놓은 거죠.”
니나가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백작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내가 노력한다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해 주는 건 아니에요.”
“…….”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싫어하고, 괴롭히려는 사람은 언제든 존재한단 뜻이죠.”
후작 영식처럼요.
니나가 작게 덧붙였다.
“그런 놈을 만날 때는, 우리 공녀님께서 전해 주신 명언을 되새기곤 한답니다.”
“그게…… 뭔가요?”
니나가 주먹을 번쩍 쥐고서 외쳤다.
“나쁜 짓 한 놈이 무조건 나쁜 놈이다!”
“?!”
“거기에 휘말린 나는 무죄!”
니나가 말을 마치더니 아하하 웃었다. 허파에서 바로 꺼낸 것처럼 시원하게 들리는 소리에,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정말…… 이 사람은 바람 같아.’
그걸 보고 있으니, 자신의 고민도 바람처럼 쉽고 가벼운 것처럼 느껴졌다.
니나는 긴장이 풀려서,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았다.
“그러니까 안 좋은 일을 당했어도 자책하지 말아요. 그놈은 원래 그런 놈이고, 백작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다른 숙녀분께 그런 짓을 했을 테니까요.”
“그, 그런…… 못된…….”
“네. 천하에 그런 개xx가 또 없죠.”
뜻밖의 욕설에 로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니나가 손사래를 쳤다.
“어머, 죄송해요. 하녀 시절 말버릇이 남아 있어서……. 제 말이 좀 거칠었죠?”
“아, 아니에요. 오히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남자는 정말 개, 개…….”
로웨나는 몇 번 개로 시작하는 욕을 따라 하려다가,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잘 안 되네요.”
“처음엔 원래 다 그래요. 게다가 그렇게 좋은 말도 아닌걸요? 굳이 배우실 필요 없어요.”
“그, 그래도…… 한번 뱉어 보면 후련할 것 같아서요.”
“……흐음.”
“그, 사, 사실은 때려 주고 싶은데…… 거기까진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욕이라도 질펀하게 뱉어서, 그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신이 부러워서.’
니나의 과거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 젊은 귀족들은 생각이 달랐다.
자신의 약점을, 자신만의 색깔로 치환한 그녀를 동경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녀는 알까.
로웨나의 말에서 진지함을 느낀 듯, 니나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그럼, 그 남자를 생각해 봐요.”
“그 사람이 나쁜 남자인 건 알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그럼 당신이 죽어서, 당신 무덤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봐요. 그리고 거기에 그 남자가 찾아왔다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음…….”
로웨나가 눈을 굴리고 있자, 니나가 목소리를 익살스럽고 가벼운 어투로 바꾸었다. 그게 람퍼슨 영식을 흉내 낸 거란 건 조금 뒤에 알았다.
“내가 죽으라고 했어? 왜 멋대로 죽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난리야. 하여간 심약하기는. 쯧. 다른 남자들 다 이러고 사는데 왜 당신만 못 참아서 이 난리인지-,”
“이 쓰레기보다 못한 개xxxx가.”
니나가 입을 다물었고, 로웨나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저 지금 욕했나요?”
“네. 저보다 잘하시던데요?”
니나가 킥킥 웃었다.
“더 해 보세요.”
“개xx!”
“더!”
“똥개보다 못한 xxx! 개xxxx!”
그렇게 한참, 질펀하게 욕을 쏟아 내던 로웨나가 또 니나를 보며 말했다.
“욕했다! 저 또 욕했어요! 그쵸?”
“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우스꽝스럽다는 걸 깨달은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고,
“와, 저 진짜 바보 같네요.”
“걱정 마세요. 오늘 일은 제가 무덤까지 가져갈 테니까.”
니나 역시 웃었다.
비 온 뒤에 굳어진 땅을 확인하듯, 유쾌한 웃음이 한참 길게 이어졌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 * *
‘거슬려.’
다음 날. 다시 찾아온 무도회의 밤.
2황자 제이드는 무도회 중앙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는 건 춤을 추고 있는 한 쌍의 어린 남녀였다.
엘리샤와 클로드.
그 주변으론 롤케이드 부자가 서서 자신들의 손수건을 물어뜯고 있었다.
“회색 머리 짐승을 두고 방심하는 게 아니었는데……!”
“더러운 기회주의자 같으니!”
얼핏 들으니, 자신들이 투덕거리는 사이 클로드가 날치기로 기회를 잡았다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제이드는 팔불출 부자를 비웃었을 터였다. 뭐 저런 하찮은 것을 가지고 아쉬워하나, 속으로 조롱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내면의 요동치는 파도를 비교하면 그들 못지않을지 몰랐다.
‘불쾌해. 왜지?’
이유는 모르겠다. 춤을 추고 있는 엘리샤를 볼수록, 클로드와 맞잡고 있는 손과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볼수록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었다.
불 앞에 가까이 가져다 댄 손을 움츠리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당연히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기는 듯한, 그런 기분.
‘내가 왜 공녀 따위에게……!’
2황자는 그런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겨우 공녀 한 명이 아닌가.
물론 롤케이드 공녀는 눈에 띄는 사람이 맞긴 했지만,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왜지? 내 장난을 단숨에 파악한 사람이라서인가? 아니면 1황자의 것이라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면 알아 가면 되고, 갖고 싶으면 가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무엇이든 취하고, 또 무엇이든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황족이란 신분과 어머니라는 우군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해서,
“나와도 한 곡 추지.”
그는 클로드와 엘리샤의 춤이 끝날 때를 노려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답은 거절이었다.
“죄송하지만, 다음 선약이 있어서요.”
엘리샤가 가리킨 건 공작이었다.
북부의 공작님께서 가족 놀이를 하시겠다는데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 점잖게 웃으며, 황족으로서 배려하며 물러나는 게 맞았다. 맞는데……
“겨우 춤 한 번인데 너무 까다롭게 구는 것 아닌가?”
왜 마음은 다르게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내심 섭섭하기도 했다.
‘내가 결혼해 달라고 했나. 하루 종일 놀자고 했나. 한 시간도 안 될 짧은 시간, 대화할 짬을 내 달라는 게 다였는데.’
“공녀는 내가 황족이란 자각이 없나? 아니면 황실을 가벼이 여겨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북부인은 모두 항명이 기본인가? 도대체가…….”
그러다 자신이 쓸데없이 긴 말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한 건,
“지금 북부를 모욕하셨나요?”
엘리샤가 톡 쏘아붙였을 때였다.
“또 제가 황실을 가벼이 여겨서 그렇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롤케이드가에 존재하는 특권과 그 가치를 알고 있을 뿐이니까요.”
반역이 아니면, 죄를 묻지 않는 북부의 방패 가문.
지리 시간, 스치듯 지나갔던 정보를 복기한 제이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북부인에게 신의는 목숨과도 같아요. 저희가 북부의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제국을 향해 총칼을 겨누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고요. 우리에게 신의는 목숨과 같기 때문이지요.”
“아니…… 춤 순서 좀 바꾸는 데 신의까지 따져야 하나?”
“전하께서 북부가 제국의 방패를 자처하는 게 미련하다 말씀하셨기에, 첨언하였을 뿐입니다.”
엘리샤의 목소리는 서릿발과 같았다. 작은 체구에,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넓게 퍼져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러 사람들이 돌아봤고, 그중엔 북부인도 섞여 있었다.
외조부는 그랬다. 북부인의 자존심은 제국 제일이라고.
그가 며칠 전에 했던 말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절대 북부인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젠장…….’
“해명할 기회를…… 줘.”
여기서 더 말해 봤자, 이목만 모일 것 같았다.
“자리를 옮기지.”
“……좋아요.”
엘리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떻게든 자신에게 사과를 받아 내고 싶어서인지, 모인 이목이 부담스러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이드는 이곳에서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공작은 여기 있지, 공자도.”
물론 그 전에, 구경꾼은 최대한 떼어 놓고 가야 했다.
“그건 별로 좋지 않으신 선택 같은-”
“틀렸습니다, 아버지. 이 세상은 회색 배신자와 흰색 배신자만 가득합니다. 이 세상은 썩었다고요!”
“그냥 이야기만 하는 거다!”
그 와중에 알 수 없는 소리를 쑥덕거리는 이안이 짜증 나서,
“너! 네가 우리를 따라와라.”
제이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시녀를 지목했다.
시녀는 깜짝 놀랐는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어쨌든 완전히 둘만 두는 게 아니란 사실에, 두 부자도 얼추 납득한 듯했다.
제이드는 가장 가까운 휴게실 문고리를 잡았지만,
“거긴 안 돼요.”
바로 엘리샤의 제지가 있었다.
“아까 어떤 숙녀분이 울면서 급히 들어가셨거든요.”
“……안쪽으로 가지.”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한참 기다렸, 헉! 저, 전하?!”
벗은 아랫도리를 내놓은 채 앉아서 문을 바라보던 남자가 그를 보고 기겁했다. 파랗게 질린 얼굴이 낯익다 했더니.
“람퍼슨 영식?”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옷가지로 아래를 덮었다. 하지만 그 대응은 늦은 감이 있어서,
“꺄아아악!”
뒤따라오던 시녀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잠잠하던 휴게실에 이목이 집중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헉?”
“영식?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세상에, 혼자서…… 미친 거 아니야?”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영식을 노려보았다. 제게 향한 것이 아닌데도 등에 식은땀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 이게 무슨…….’
그때, 옆에서 이 상황을 더 환장으로 몰아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하……?”
엘리샤였다.
“제 거절이 달갑지 않으셨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람퍼슨 영식과 또 이런 장난을…….”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그가 외쳤다.
“아니다!”
절박한 목소리가 좁은 휴게실 복도에 길게 메아리쳤다.
“난 모르는 일이란 말이다!!”
* * *
내 계획은 단순했다.
건국제에서 람퍼슨 후작 영식을 망신 주는 것.
휴게실로 람퍼슨 영식과 불륜녀를 유인한 뒤, 현장을 덮치는 것이 본래 목표였다.
‘건국제는 고리타분한 행사니까.’
황제에 황족들 모두가 참석하는 행사였다. 그런 만큼, 다른 무도회에선 용인되는 낯 뜨거운 행위도 여기서는 지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작전 개시를 앞둔 오늘 아침. 니나에게 편지가 왔다.
-그 일 말인데요, 대충 비슷하게 망신만 주면 되는 거죠?
-뭐, 그렇지?
나는 대충 답신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니나가 무슨 일을 벌일지는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니나. 도대체 뭘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