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일주일 전. 성물을 팔자는 메리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저 성물을 팔면 100% 들키고 추적당할 테니까.]
성물이 왜 성물로 불리는가. 그건 이제는 사라지다시피한 고대의 힘, 성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력은, 성물을 만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옮겨붙었다.
그렇기에 성물은 분실되더라도 추적이 가능하며, 누구의 손을 거쳐 팔려 나갔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제 궁에 도둑이 들었음에도 황비의 대응이 소극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다 알아낼 방법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황비는 진상 규명엔 관심이 없었다. 언제가 되었든 성물은 제게 돌아왔을 테니까.
그런데도 어린 영애들을 황비 궁에 묶어 둔 건, 그들의 불만을 쌓아 상황을 키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상황이 아주 심각해지면 진범과 나 둘 모두에게 접근해 이렇게 말했을 거다. 황족의 특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입을 닫아 주겠노라고.
‘그 대가로 뭔가를 받아 챙길 생각이었겠지.’
그리고 나는, 황비가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도 못 내줘.’
다 내 거다.
해서 나는 메리가 기절시켜 놓은 시녀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해 주었다.
[저는 제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
성물의 비밀을.
[하지만 당신은 아니죠. 성물에 손을 댔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히 드러날 테니까요.]
동시에 말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그녀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당신이 실패했다는 게 알려지면, 티오펠 영애는 당신을 버릴 거예요. 당연하겠지만. 그럼 모든 책임은 당신 혼자 뒤집어쓰게 될걸요?]
황궁에서 귀물을 빼돌리다 들키면 손목이 잘린다던가?
나는 무심한 투로 툭 사실을 말했고, 시녀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내가 자신을 기사에게 넘기지 않은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워, 원하시는 게 뭐죠?]
[뻔하잖아요.]
나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공범의 자백.]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시녀가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 했다. 일단 상황을 벗어나면 될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
바로 메리에게 붙잡혔다. 메리는 훌륭한 자객, 아니 하녀였으니까.
[고, 공녀께서 말하시는 바는 알겠어요.]
다시 나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 그녀가 어색하게 눈을 뒤루룩 굴렸다.
그러다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지만 공녀님을 선택한다 한들 제가 죽는 건 마찬가지예요! 배신자가 되는 거니까! 티오펠 영애야 별거 아니죠! 문제는 그 뒤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배신자를 가만히 둘 리 없어요!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황비 전하보단 약할 것 같은데. 아닌가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살길을 만들어 드리겠단 소리예요.]
[……?]
[자백도 하고, 제 편도 되면서, 황비 전하께서 당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 제가 만들 수 있거든요.]
나는 생각해 둔 작전을 말해 주었다.
내 편이 되어야 쓸 수 있는 말들이었으므로, 먼저 알려 주는 것에 부담감은 없었다.
[머리가 혼잡하신 듯한데, 잠시 시간을 드리죠. 하지만 곧 선택하셔야 할 거예요.]
성물 도둑으로 몰려 혼자 다 뒤집어쓸 것인가.
아니면 티오펠 영애를 고발하고 혼자 살아남을 것인가.
[다들 오래는 기다려 주지 않을 것 같지만요.]
모든 말을 마친 뒤엔 시녀를 놓아주었다.
어차피 그녀는 도망갈 수 없기에.
황궁 시녀들은 모두 신원이 확실한 자들이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도망가 봤자 추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뿐인 셈이다.
그리고 오늘.
그녀가 선택한 결과가, 현실에 나타났다.
“제가 이리 나선 이유는 하나입니다. 황비 전하께서 주최하고 결과를 보신 일에, 모략을 끼얹어 본질을 흩트리려 한 티오펠 영애를 고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
“물론 저는 영애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선 것은 제가 거절한다 한들, 영애께선 또 다른 시녀를 포섭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 짧은 소견이지만, 저는 전하께서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영애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경합이란 방식을 쓴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해서 전하께서 고심하신 판이 정략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
“…….”
“하여 모략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영애와 협력한 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하를 기망하게 되었으니, 이와 관련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황비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콩고물이 떨어지는 판이, 시녀 한 명 때문에 엎어졌으니까.
그래도 시녀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고 있어서, 어떻게든 참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저 대사들은 모두 내가 짜 주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준 뒤엔,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알려 주었다.
[참, 티오펠 영애를 고발할 생각이면 성물이나 신력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해요.]
[그것 때문에 찔려서 나선 것처럼 보일 테니까.]
때로는 적당히 모른 척하는 것이, 더 있어 보이는 법이었다.
해서 그녀의 고변은 저기서 끝이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렇다네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
진실의 무게추가 기울어졌음이 확실시된 상황이었음에도, 동부 귀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생으로 내기의 대가를 뜯기게 된 것이 퍽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 그럼 아까 그 증언은 뭡니까?”
“분명 이쪽 영애께서 그러셨잖습니까? 뭔가를 품에 숨기고 오셨다고.”
“역시 수상하잖습니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 뭔가,”
“아, 그거라면.”
나는 품에서 팔랑거리는 종이를 꺼내 들었다.
“제가 상단주님과 작성한 계약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의를 제기했던 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약서?”
반면 나머지 귀족들은 그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내 말을 들었다.
“아시겠지만, 제겐 동부 광산의 마석을 우선 거래할 권한이 있어요. 그걸 가지고 상단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결과 새 사업을 함께 하기로 결론을 내렸답니다.”
“새 사업?”
“마석을 가공한 사업입니까?”
“네. 예전이었다면 스스로 돈을 버는 행위는 천시되었다지만 이제는 달라요. 권력과 인맥만큼 금권도 중요해진 시대가 온 거죠.”
해서 많은 귀족들이 사업에 손을 대려 하고 있었고, 여기 모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데 상단주께서 그러시길, 대부분의 사업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이유가 무엇이냐 여쭈었더니, 돈은 보수적이라 그렇다고 해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상품이 발명되어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엔 돈을 쓰기 싫어한다고 말이죠. 애초에 여러분의 사업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를 알리는 것 자체도 무척 어렵지만요.”
“…….”
“그래서 제가 생각했어요. 많은 분들의 고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요.”
나는 계약서 맨 뒤 종이를 뒤집었다. 거기에 대략적인 구상과 스케치가 남아 있었다. 현대의 전광판과 비슷하게 생긴 그림이 보였다.
“영상석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마도구인데…….”
나는 대충 설명했다. 어차피 마석이나 마도구 작동법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설치하고, 많은 분들에게 여러분의 사업을 알릴 수만 있다면.”
“!”
“엄청난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여기 모인 영애들은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영애를 둔 부모들 역시 귀족 사회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즉 기본적으로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이건…… 무조건 성공한다.’
‘이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해!’
광고의 효용성과 가치 판단을 끝낸 그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언제…… 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그 광고라는 건.”
“전광판이 완성되는 대로요? 상단주께서 기술자를 모아 제작에 착수 중이라고 하시는데, 영상석과 만드는 원리가 비슷해 내달 안으로 제작이 가능하실 거라고 하더군요.”
“그, 좀 더 자세한 설명을-”
그중 한 귀족이 달라붙기 전.
“아, 티모시 백작님.”
나는 몸을 홱 돌려 한 귀족을 바라보았다.
“아까 다른 영애들을 제지해 주셔서 감사했답니다. 망망대해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라 곤란했었거든요.”
“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증좌도 없이 한 사람이 몰아세워지고 있는데! 저는 제 양심과 기사도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티모시 백작이 말을 더듬으면서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자신의 선행이 퍽 뿌듯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레오폴드 자작님. 테런 부인. 곤란하실 때 한마디씩 거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다들 티오펠 영애 편이라, 말씀하기 곤란하셨을 텐데.”
“제 딸과 연배가 비슷한 분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음해에 시달리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공녀께선 그런 흉악한 일을 벌인 분처럼 안 보이셨거든요. 그래서 나서기 용이했죠.”
지목당한 귀족들이 아부 반 진담 반을 섞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나는 그들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전광판이 새로 만들어지면 시범적으로 몇 개의 광고를 무료로 상영할 생각인데, 여러분의 사업을 홍보해도 될까요?”
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저, 저희야 좋지요!”
“오히려 영광입니다, 공녀님.”
“예! 공녀님께서 새로 시작하시는 사업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야!”
그러자 선택받지 못한 이들이 아우성을 쳤다.
대체로 아까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침묵을 지킨 자들이었다.
“저, 저희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억울합니다. 저희는 그저 상황을 관망하고 싶었을 뿐인데……!”
“공녀님을 의심해서 말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나는 일단 빙긋 웃었다. 그들 역시 잠재적인 고객이었으니까.
“여러분들께 악의가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사실 좀 피곤해서요. 여러 일을 겪은 여파가 내려앉지도 않았고……. 사실 지금도 심장이 좀 두근두근해요. 시녀분의 용감한 증언이 없었다면, 저는 계속 억울한 상태로 남아 있었을 테니까요.”
결국 후작 때문에 못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틀어 후작 일당을 바라보았다. 대포의 포신이 돌아가는 것처럼, 목표물을 향해 정조준을 하더니 정밀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자마자 친딸도 아닌 티오펠 영애 편을 들더니.”
“후작께선 처음부터 사건의 전말을 알고 계셨던 것 같죠?”
“뻔뻔하기 그지없네요. 어린 영애를 몰아세워 북부령을 탐하려 하다니.”
“어린 공녀께서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무자비한 공격에 후작 일당은 넋이 나간 모양새였다.
그들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지기 전.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다들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후작께선 염치가 없으신 분이 아니실 테니까요. 분명 적당한 때에 제게 보상을 해 주시겠죠.”
그들에게 받아 낼 것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후작님, 땅문서는 언제 받아 가면 될까요?”
후작은 대꾸가 없었다.
“후작님……?”
나는 후작을 재차 찔렀고,
“그르르륵-.”
그는 흰자위를 내보이더니 뒤로 쿵 쓰러져 버렸다.
나는 하관을 손바닥으로 덮으면서 혀를 찼다.
“어머, 기절했네.”
안타까움은 한 방울도 녹아 있지 않은, 짧은 평가.
하지만 후작을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